|
50강 - 고구려 멸망이 리더에게 주는 교훈
동북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만행에 이은 난정과 그의 죽음으로부터 야기된 골육상쟁으로 인해 멸망하는 과정에서 리더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 줄거리에서 연개소문이 죽고 세 아들과 그의 동생의 4자간 권력투쟁은 더욱이 남북분단의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2011년 김정일의 죽음과 3대 세습의 김정은 정권의 출현은 마치 고구려 멸망과정을 연상케 하는 드라마틱한 사유세계에 빠지게 함은 나만의 망상일까?. 여하간 나는 3대 세습을 21세기의 특종 웃음거리로 보지 않을수 없다. 김정은의 이복 형 김정남이 말한 것처럼.
나는 지금의 정세가 통일에의 가능성에 접근해가는 흐름으로 보고싶다. 그 성패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부정부패 등이 자칫 우리에게 족쇄로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 각계 각층 모든 리더들이여. 다음으로 전개되는 고구려의 멸망과정을 잘 살펴 나름대로의 진리의 길을 탐색해 보기로 하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한 다음 고구려 최후의 왕이 된 보장왕은 본바탕이 너그럽고 학식이 풍부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결단력이 없고 모든 것을 연개소문이 전횡하므로 왕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사실상 모든 국정은 연개소문이 홀로 맡다시피하고 있었으니 나라의 도덕과 기강이 바로 서지 않았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또한 고구려 백성들은 영류왕이 살해당한 다음부터는 사실상 정부의 하는 일에 대해 냉담한 눈초리로 보는 한편 아예 관심조차 갖지않아 국민의 마음은 이미 집권층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한편 당에서는 연개소문이 왕을 죽였다는 소식에 접하자 당태종은 고구려 공략을 계획하여 몇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고구려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아야 했다.
당시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 후 그 사실을 시인한 기록은 읽어볼만 하다.
"짐이 천하의 대병력을 가지고도 조그마한 고구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당태종이 그의 심복 이정에게 물었다. 이정은 그 말을 듣고 서글퍼 하며 정중히 답한다.
"이는 도종(道宗)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당태종은 그 말을 듣고
"당시에는 짐이 너무 바뻐 미처 생각치 못하였다" 고 긴 한숨을 쉬면서 후회하였다. 도종이 해야 할 일이란 다음과 같은 내막이 있다.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은 까딱하지 않고 강력히 저항해 옴으로 승리할 자신을 잃어버린 당태종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장군 도정이 이러한 처참한 광경을 보다 못해 한 방책을 세워 태종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고구려가 국력을 기울여 항거하고 있으니 이곳에서의 승부는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신에게 정병 5천을 주시와 그 근거지를 부수게 하면 평양성 안에 있는 10만 군중이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고 평양으로의 우회공격을 건의 하자 당태종은 너무나 엄청난 모험으로 생각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당태종은 패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태종은 바로 전략과 전술면에서 연개소문을 당하지 못한 것을 시인 한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당과의 싸움에 승리하자 더욱 기고만장하여 교만하고 방자해지므로 날로 백성들은 고통 속에 빠져가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무렵 고구려에서도 민심이 소란해지면서 백제에서와 같이 괴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한다.
즉 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은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고 노루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는가 하면 늑대떼가 서쪽을 향하여 가되 3일 동안이나 끊어지지 않았다 한다.
또한 갑자기 기후의 변화가 심해지면서 지진도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한편, 당태종은 고구려 정복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수양제와는 달리 오만하거나 무계획적이 아닌 치밀한 계획하에 싸움터에서 부하와 더불어 고생을 함께하면서 민심을 얻는 비범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은 당태종의 행동은 부하들을 감격케 하고 용감히 싸우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러한 강군을 물리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연개소문의 강인한 지휘력이 중요한 역할이 되어왔던 것은 분명하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구려 모든 국민의 단결력과 당에 대한 저항심이 강인한데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상무정신이 뚜렷하고 국가 보위에 대한 의욕이 하늘 찌를 기세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하여 이때처럼 국민개병(國民皆兵)이 철두철미하게 실천되었던 적은 드믈었다. 현대의 개념으로 볼 때에는 철저한 예비군 조직과 민방위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인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국민은 한결같이 누구나가 다 뛰어난 군사라 하였다. 더욱이 남녀노소가 다 같이 대항하므로 도저히 고구려를 이길 수 없었음을 자인하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는 부락마다 대오를 짜고 있었으며 특히 정예군의 전기가 뛰어나 도저히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고구려에 패한 당으로서는 대국으로 자처하는 그들의 자존심에 상당히 충격을 주었을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당태종은 고구려에 대한 원한이 가득한 가운데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죽었다.
죽기 전에 당태종은 고구려 공략을 몹시 후회하였다 한다.
당태종의 뒤를 이은 당 고종도 고구려를 침략하려 하였으나 고구려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행사하면서 눈부신 국력을 한껏 자랑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처럼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던 대고구려가 갑자기 쇠퇴의 길로 내닫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
영토도 삼국중 가장 넓으며 군사력도 동아시아 최강을 자랑하고 백성도 철저히 단결되어 있었는데 왜 멸망의 길로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까?.
쇠퇴와 멸망의 시작은 연개소문의 영류왕 살해로 보며 그 이후 연개소문의 난정에 따라 백성의 마음이 집권층을 떠나고 있었고 단결력의 와해로부터 연유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살아 있을 때는 그의 강력한 독재체제로 국권을 유지할수 있었지만 서기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 멸망의 기운은 전 국토에 확산 되어갔다.
연개소문이 죽자 막리지의 대권을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차지하게 되었다.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은 막리지로 불리웠던 직위명칭은 한층 높여 막리지 앞에 대자를 붙여 大幕離支로 부르게 하고 삼군대장군을 겸임하는 한편 자기 아버지 이상으로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보장왕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연남생은 국정을 맡아 그 위세를 자랑할 양으로 나라안의 여러 성을 순시하게 되었다. 연남생은 두 아우 남건과 남산을 남기어 놓고 뒷일을 그들 형제에게 맡겼다.
이때 누군가가 두 아우에게 접근해서 이르기를 "남생이 그대들의 직위가 자기와 가까운 것을 미워하여 머지않아 제거하려 생각하고 있으니 먼저 대비책을 세워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처음 두 아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지방에 내려가 순시중에 있는 대막리지 연남생에게 말하기를 "두 아우가 형이 돌아와서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염려하여 형을 가로막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라고 고변하였다.
연남생은 궁금하여 몰래 심복 부하를 평양에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어물어물 하는 사이에 눈치채어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두 아우가 그를 잡아놓고 심문을 하니 연남생이 보냈음을 자백하였다. 따라서 두 아우는 연남생의 음모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두 아우는 왕의 명령이라 하여 연남생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연남생이 소환에 응하지 않으니 그의 아들 현충을 죽였다.
이렇게 하여 둘째 연남건이 막리지의 직위에 올랐다. 연남생은 동생에게 잡힐까 두려워 달아나 만주의 국내성을 점령하고 글안 말갈의 군사와 함께 당에 투항, 귀순하였다.
수,당 모두 고구려에 대한 통쾌한 승리를 한번도 거두지 못했던 그들이었으니 고구려의 내분은 당에게 하늘이 내려준 좋은 기회라고 좋아했다. 그리하여 귀순자 모두에게 후한 대접으로 맞이하는 한편 각 직분에 버금가는 벼슬까지 내렸다.
어디 그뿐이랴. 권력권에서 밀려나자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12성,763호,3,543명을 포함한 고구려의 영토 일부분을 떼어 신라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처럼 거듭되는 집권층 반역자의 발생은 고구려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쇠잔케 하였다. 이렇게 하고도 고구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고구려는 스스로 멸망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나 세 아들 남생,남건,남산 이야기는 마치 옛 소설과 같은 내용이다. 대고구려에서 일어났던 집권층의 실재 이야기 같지 않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우리나라 고대 정사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9와 제10 [보장왕 상.하]기록에서 확인한 내용이며 중국측 기록도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한편,중국측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에 띈다. 신라와 당 연합군이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당태종의 시어사(侍御使)인 가언충(賈言忠)이 명을 받고 요동 일대의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를 돌아보고 돌아왔다. 당고종이 궁금하여 시어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고구려의 형편을 어떠하며 앞으로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시어사는 답하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옛날 선제(先帝-당태종을 이름)께서 고구려를 뜻대로 못하신 것은 적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이 죽었고 그의 아들 삼형제가 자기들 끼리 틈이나서 장남 연남생은 우리에게 항복하여 우리의 앞잡이가 되어 적의 사정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의 장수는 충성스럽고 군사는 힘을 다하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당에서 보는 고구려의 취약점은 분명한 고구려의 허점이었다. 집권세력이 분열되어 반란을 일으켰다면 곧 백성도 전의가 흩어질 것이므로 전체 방위체계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구심점이 없어진 집단은 무력한 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내란 속에 빠져버린 고구려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당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요동 일대의 많은 고구려의 성이 함락되자 패잔 고구려군은 평양으로 쫓기고 있었다.
또한 신라군은 남쪽에서 북진하여 무풍지대를 달리듯 평양에 육박하고 있었다. 드디어 고구려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이 되어버렸다. 수도 평양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포위당하여 한달 남짓 최후의 안간 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국난을 극복 못하고 서기 66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건국 이래 28대 왕,705년 간 계속 되었고 연개소문이 죽은 뒤 불과 3년 만에 그의 아들 삼형제와 아우의 정권 다툼이 단초가 되어 동아시아 최강국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첫댓글 2011년 김정일의 죽음과 3대 세습의 김정은 정권의 출현은 마치 고구려 멸망과정을 연상케 하는 드라마틱한 21세기의 특종 웃음거리로 보지 않을수 없다.는 말씀 동감하고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죽은 뒤 불과 3년 만에 그의 아들 삼형제와 아우의 정권 다툼이 단초가 되어 동아시아의 최강국인 고구려가 망하듯 이북도 똑같은 길을 가고있을것이란 추축이 갑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야지요 고맙습니다.
통일의 실마리가 풀릴지 여부는 오직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봅니다.
북한의 붕괴 징후는 이미 3대 세습으로 가시화권에 들어섰습니다.
정쟁,대립,부패 등이 걸림돌입니다.
다만 군부의 안정과 대비태세에 마음이 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