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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원문보기 글쓴이: 東彦(23世)
진성이씨 퇴계종택
1. 둘러보기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의 생가가 있는 온혜와 가까운 토계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이황의 후손 동암공이 한서암 남쪽에 지은 집으로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일제시대인 1907년 일본군의 방화로 두 곳의 종택이 모두 불타버렸다. 지금의 집은 1926년∼1929년 사이에 13대손 이충호가 옮겨지었으며 추월한수정은 옛 건물처럼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2. 건물 이야기
명 칭 : 진성이씨 퇴계종택(眞城李氏 退溪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
건 축 주 : 이황(李滉, 1501~1570)
중건시기 : 1929년
소 유 자 : 이근필(관리자 : 이근필)
문 화 재 :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1982년 12월 1일 지정, 총 34칸 2,119㎡
건축 이야기
1550년 토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지었다.
1929년 화재로 인해 새로 지었다.
1551년 한서암을 북쪽의 계상서당 쪽으로 옮기고, 다시 동쪽으로 옮겼다가 마침내 오늘의 자리로 옮겨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서암을 북쪽으로 옮기는 것은 1551년의 일이다.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퇴계종택은 화재를 입은 다음 1929년에 새로 지어졌다.
건축 배경
퇴계가 벼슬살이를 끝내고 은거하면서 머물러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집이다. 온계의 번잡스러움과 양진암의 시야가 넓게 열림을 피하여 한적하면서도 좁직한 공간을 택해 여기 들어와 집을 지은 것이다.
건축 특징
집은 동향을 하고 있다. 문 앞에 서면 정문이 덧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문 위에 횡으로 “열녀 통덕랑 행 사온서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권씨지려(烈女通德郞 行司?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문을 그대로 이용하여 대문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건물 구성
정려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바깥 마당이다. 눈 앞에는 사랑채가 막고 나선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 정도의 규모이다. 남쪽의 1칸은 앞에 쪽마루를 둔 방이다. 쪽마루에는 난간까지 가설되어 있다. 그 북쪽 편으로는 반 칸 정도 넓이의 마루가 앞에 마련되어 있는 방이다. 방안은 횡으로 둘로 나뉘어 안채 쪽은 골방, 바깥마당 쪽은 방으로 쓰인다.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口자 형상의 안채가 붙어 있다.
본채 영역은 담장으로 다른 곳과 차단되어 있다. 본채의 동쪽에 있는 것은 추월한수정이다. 추월한수정과 본채 사이로는 뒤로 물러앉은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울타리 밖 바깥마당의 남쪽은 퇴계공원이다. 퇴계 탄신 오백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이다. 시비가 여러 개 그 속에 들어서 있다.
현판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안마당의 동쪽 편으로 쪽문이 열려 있는데, 쪽문 안으로 들어서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현판이 정면 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추월한수정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퇴계의 도학(道學)을 추모하여 창건한 정자로 추월한수란 말은 주자의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에서 온 말이다. 즉 천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와 같다는 의미로 옛 성인들의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고 이동흠의 글씨이다.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
추월한수정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바깥쪽 처마 밑에는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해서체로 향산 이만도의 손자이며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李棟欽)의 글씨이다.
완패당(玩?堂)
예쁘면서도 단아하며 안정되고 편안한 해서체이다.
삼척(三陟) 사람으로 해강 김규진의 제자로 알려진 홍낙섭의 글씨이다.
이운재(李韻齋)
안정되고 단아하며 모나지 않은 행서로써 예쁘장하다. 홍낙섭의 글씨이다.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강약의 조화로움이 탁월하고 잘 어우러져 아름답고 시원스런 행서로 현 종손의 삼촌인 이원태씨의 글씨이다.
산남궐리(山南?里)
일필휘지의 달필로 시원스러우면서도 멋스러운 행서체이다. 해동고정과 병렬로 게첨된 현판으로 대필서(大筆書)에 뛰어났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작품이다. 궐리는 산동성 곡부현에 있는 공자의 출생지로 산남궐리는 이곳이 공자의 유지인 궐리와 같다라는 의미이다.
해동고정(海東考亭)
필력의 힘이 저절로 나타나는 아름답고 자연스런 해서로 해강의 작품이다. 고정이란 중국 복건성(福建省) 복건현의 서남(西南)에 있는 지명으로 송(宋)의 주자가 여기에 있으므로 후세에 이르러 주자의 호(號)가 되었다.
3. 문중이야기
- 계상서당(溪上書堂)
도산의 남쪽에는 도산서원, 북쪽에는 퇴계종택이 있다. 퇴계종택에 우리의 시선이 미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잡아끄는 것이 또 있다. 계상서당과 한서암 옛 터이다. 온혜 쪽에서 종택 방향으로 나아갈 때, 종택이 바라다 보이는 지점에서 길의 오른쪽에 바위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데, 그곳이 한서암 옛 터이다. 그것과 짝을 이루듯 토계의 실개천 너머 왼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계상서당이다.
- 한서암(寒栖庵)
한서암은 퇴계 이황이 49세에 지은 집이다. 15년 관직 생활을 내던지고 향리로 돌아온다. 풍기군수로 1년 남짓 재직한 다음이었다. 그가 돌아온 집은 양진암인데 급조하였던 양진암은 퇴락하여 거처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낙강 물과도 가까웠다. 낙강은 관금이 미치는 곳이다. 관에서 어량을 놓아 고기를 잡는 곳이니,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매지 않는다는 군자의 처신의 방도를 염두에 둔다면 멀리 둘수록 좋은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아예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풍기군수를 내던진 참이니 거처할 만한 땅을 골라 오래 머물 집을 지어야 한다. 퇴계의 시선은 주변 이곳저곳에 머문다. 결국 그의 시선이 안착한 곳이 상계, 바로 한서암 옛 터였다. 1550년 2월 토계의 서쪽에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한서암은 서쪽에 산을 등졌고, 동쪽에는 시내 건너 고등암이 있다. 고등암 바로 뒤로는 초당골이다. 남쪽 남산 아래에 몽천이 있어 지금도 그 물을 식수로 쓴다. 북쪽에는 장명뢰 여울이 있고, 그 뒤에 높이 솟은 건지산 중봉이 우뚝하다.
방 둘, 부엌 한 칸의 집을 지어서 한서암이라 이름하고 방은 정습당이라 하였다. 길을 내어 연못을 파고 광영당이라 했으며, 연못가에 있는 자연석은 탄금석이라 명명하고 거문고를 얹어 두는 바위를 횡금석이라 불렀다. 정원을 만들고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 등을 심었고, 길 가에는 버들을 심었다 …… 50세의 5월 18일 이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바위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 바위는 탄금석일까? 아니면 횡금석일까?
한서암은 급하게 지은 집인 모양인지 1년이 지나면서 또 집을 옮기게 되었다. 이번에는 시내를 건너 북쪽으로 옮겨지었다. 계상서당이 바로 그것이다.
“집 서쪽은 퇴계에 임했는데 정사를 지어 이름을 한서라 했으며, 샘물을 이끌어 못을 만들고는 광영이라 하였다. 매화와 버들을 심고 세 갈래의 길을 열었다. 앞에는 탄금석이 있고, 동쪽에는 고등암이 있었는데, 산과 물이 맑고 깨끗하여 완연히 하나의 별세계를 이루었다. 1556년(병진년)에 성일이 처음으로 이곳에 가서 전배하였는데 방 안에 도서가 가득하였다.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있는데 그 유연한 모습이 마치 그렇게 하여 여생을 마칠 것만 같았다.” 김성일이 보고하고 있는 계상서당의 모습이다. 한서암과 계상서당이 비슷한 구조를 갖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퇴계종택은 한서암 아래쪽에 위치한다. 여러 번 옮긴 끝에 오늘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 한적한 자연을 사랑하다
퇴계가 토계동에 자리를 잡은 것은 온혜의 종가 주변을 떠나지 않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고, 온혜에서 낙강에 이르는 사이의 조용하고 한적한 자연을 사랑하였던 탓이었다. 31세에는 온혜의 양곡에 지산와사를 짓고 살았다.
45세, 을사사화 후 휴가를 얻어 귀향하였을 때에는 토계의 아래쪽, 낙강과의 합류점 근처 산기슭에 양진암을 짓고 들어갔다. 토계를 퇴계라고 바꾸어 자신의 호를 삼고, 「동암언지(東巖言志)」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읊었다. 풍기군수에서 물러나 아주 은거할 것을 결심한 뒤에는 퇴계의 서쪽에 집을 지어 한서암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1550년의 일이다.
1551년에는 계상서당 터로 집을 옮겼다. 계상서당이 퇴락하자 오래 머물며 가르칠 수 있는 서당 터를 구하여 도산에 자리 잡고, 서당을 열었다. 1560년의 일이다. 이렇게 이황의 삶은 온혜에서 낙강 사이, 토계를 멀리 떠나지 않는 지역 안에서 펼쳐졌다. 그의 자손들이 퇴계와 낙강 사이를 주요한 삶터로 삼아 멀리 떠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의식, 조상의 그늘 아래 살며, 조상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밑바닥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탓이다.
온혜의 물은 강을 찾아 흘러내린다. 그것은 마치 온혜종택의 이계양의 가계가 퇴계종택으로 이어 내리는 것과 같다. 물길을 따라가는 길은 세월의 변천을 그대로 증언하여 준다. 시대가 달라지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이 길의 폭이다. 온혜에서 상계에 이르는 길은 이제 자동차의 교행이 가능한 폭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퇴계종택에 미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빈번하여졌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길은 폭이 넓어진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계를 거쳐 원촌으로 뻗고, 온혜를 거쳐 청량으로 뻗고, 도산을 거쳐 안동으로 뻗는다. 퇴계종택 주변의 환경은 그만큼 많이 변해 버린 것이다.
온혜에서 토계천을 따라 낙강 쪽으로 접어들면, 이곳은 도산과 퇴계의 세상이다. 퇴계는 그 아름다움에 반해서 떠나 있으면서도 늘 그리워하였던 물과 산의 세상이 거기에 있다. 아마도 그 아름다움 속에는 정서적인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산천에 대한 향수만큼 사람을 진하게 잡아끄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곳은 퇴계의 어린 시절 삶이 녹아 있는 곳, 그 향수의 원적지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려 애를 쓰고, 그 아름다움을 추상하며 종내 떠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관련문집
-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
이수연(李守淵, 1693∼1748)이 편찬한 이황(李滉)의 언행에 관한 기록이다. 이수연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희안(希顔), 호는 청벽(靑璧)이다
관련유물
- 퇴계선생문집신판(退溪先生文集新版)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집으로, 원집 49권, 별집, 외집, 연보 4권, 합 30책의 목판본이다.
- 퇴계연보(退溪年譜)
이황(李滉, 1501∼1570)의 연보로 3권 1책의 목판본이다. 판본의 완결(?缺)에 따라 여러 번 개간 및 중간되었다.
- 퇴계선생유묵(退溪先生遺墨)
퇴계 이황의 글씨로 ‘성재(惺齋)’라고 쓰여 있다. 성(惺)은 고요하다, 슬기롭다는 뜻으로 퇴계가 자신의 제자인 금난수(琴蘭秀, 1530~1604)에게 준 것이다
4. 인물 이야기
관련인물
- 이이(李珥, 1536~1584)
계상서당은 퇴계의 10년 교육장이다. 50세에서 60세 사이, 이황은 이곳에서 학생들을 받아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한다. 그것을 이어받아 60세에서 70세 사이, 도산서당 시대가 계속되는 것이다. 퇴계의 초년 제자들은 거의 모두 여기서 길러졌다. 율곡이 와서 가르침을 청했던 곳도 계상서당이었다.
- 이안도(李安道, 1541~1584)
이안도(李安道)는 이황의 손자이다. 아들이 없었다. 그가 타계하고 나서 권씨부인은 시동생 이영도(李詠道, 1559~1637)의 아들을 양자로 맞았다. 어린 양자가 조금 나이가 들어 혼례를 치룰 때까지 권씨부인은 지성으로 보살폈다. 그리고 양자 이억(李?)의 혼례를 치루고 나서는 자진하여 이승을 떠났다. 할 일을 다 한 다음에 남편을 따라 죽는 부덕을 실천한 것이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이 일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 시대가 다르면 행동의 문법도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 퇴계가의 사람들
퇴계는 온계의 노송정에서 1501년에 출생하여 토계 가의 집에서 1570년에 타계하였다. 길재 이후 조광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온 사림파의 정신을 계승하여 조선 성리학을 완성시켜낸 사람이다. 당시에는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 사림을 반분하여 이끌었으며, 후에 그의 후인들은 율곡 이이의 서인 학맥과 더불어 남인 학맥의 중심을 형성함으로써 조선 후기 사상계를 반분하여 이끌었다.
태계의 큰아들 이준(李寯)은 자가 정수(廷秀)이고, 1523년에 태어나서 1583년에 죽었다. 군기시 첨정(僉正) 벼슬을 하였으며, 숙인(淑人) 봉화금씨와의 사이에서 이안도(李安道), 이순도(李純道), 이영도(李詠道) 등 세 아들을 낳았다. 이준의 묘는 죽동에 있고, 배위인 봉화금씨의 묘는 이황의 묘 바로 아래에 있다. 이황의 둘째아들 이채는 1527년에 태어나 1548년에 죽었다. 묘는 의령 소야동(所也洞)에 있으며, 자손은 없다. 이황의 셋째 아들 이적은 자가 정지(靜之)이고 1531년에 태어나 1608년에 죽었다. 묘는 죽동에 있다. 나주박씨와의 사이에서 이경도(李敬道)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이준의 큰아들 안도는 자가 봉원(逢原)이고, 호가 몽재(蒙齋)이며, 1541년에 태어나서 1584년에 죽었다. 생원이며 직장(直長)이었다. 조부인 퇴계의 문하에서 촉망받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묘는 계상의 묘지동(妙枝洞)에 있다. 배위는 안동권씨인데, 정려문을 받았다. 자식이 없어서 영도의 둘째 아들 이억(李?)이 양자로 들어와 후사를 이었다.
이억은 자가 사립(士立)이고 1596년에 태어나 1636년에 죽었고, 참봉이었다. 묘는 죽동에 있다. 창령성씨와의 사이에 이명철(李命哲), 이성철(李誠哲), 이신철(李信哲), 이윤철(李允哲) 등을 낳았다. 명철은 자손이 없었으므로 이성철의 장자 이고(李?)가 양자로 들어와 후사를 이었다. 이 상계 종파는 이고에서 이수겸(李守謙) - 이세덕(李世德) - 이귀응(李龜應) - 이지순(李志淳) - 이휘령(李彙寧) - 이만희(李晩憙) - 이중경(李中慶) - 이충호(李忠鎬) - 이원각(李源慤)등으로 이어진다.
5. 토계마을 이야기
안동 > 도산권 > 토계마을
- 냇물 이름을 마을 이름으로 삼은 지역
토계리는 구한말에 예안군 의동면의 지역으로, 1914년 양평(良坪·陽坪), 상계(上溪), 하계(下溪), 계남(溪南), 원촌(遠村) 일부와 의서면의 온혜동 일부를 병합하고, 토계동·토계리로 하여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1976년 안동댐으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태백산(太白山)의 지맥인 용두산(龍頭山)과 도산면 태자리에서 근원하여 온혜(溫惠)를 거쳐 흐르는 냇물이 상계마을의 퇴계종택 앞을 지나 낙동강(洛東江)에 흘러드는데, 종택 앞으로 흘러가는 냇물을 퇴계(退溪)라 한다.
원래 냇물의 이름은 토계(兎溪)였으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냇가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냇물의 이름을 퇴계로 고친 후 아호(雅號)로 삼았다. 후에 마을 이름을 ‘토(兎)’ 자와 소리가 같은 ‘토(土)’ 자로 고쳐 토계(土溪)로 불렀다고 한다.
토계마을은 원래 퇴계천의 상류에 위치한 상계와 그 하류인 하계, 퇴계천 건너 남쪽에 자리 잡은 계남, 하계를 지나 고개 너머에 있는 원촌 등 4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안동댐 수몰로 마을이 재편되어 지금은 양평, 상계, 하계가 토계리에 속해 있으며, 계남마을은 완전히 수몰되었으며, 원촌마을은 도산면 원천리(遠川里)에 편입되었다.
양평·양이두들은 상계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항상 양지바른 언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지형이 ‘산양출망형(山羊出網形)’ 곧, 산양이 그물을 나온 들이라고 하여 양평(羊坪)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상계는 양평에서 퇴계천을 따라 들어가 퇴계종택이 있는 마을이다. 상계마을은 퇴계천(退溪川)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상계, 혹은 웃토계라 한다. 퇴계종택은 1907년(순조 1)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全燒)되었는데, 사림(士林)의 지원으로 1929년 퇴계 선생의 13대손인 하정공(霞汀公)이 같은 규모로 지금의 자리에 새로 지었다.
하계·아랫토계는 건지산(蹇芝山)이 좌선하여 자락을 내어 자하봉(紫霞峰)으로 낙동강에 닿는 우측 계곡, 즉 용두산의 계곡인 퇴계천이 낙동강에 합수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한가운데 산기슭에 퇴계 묘소가 있는데, 하계는 퇴계 선생의 손(孫) 이영도(李英道)의 후손들이 사는 집성촌이다. 퇴계 선생 후손으로서의 자부심과 퇴계학을 궁행실천한 수많은 선비들과 현달한 학자들이 배출된 마을이었으나 수몰지역이 되어 지금은 하고(霞皐)쪽을 중심으로 몇 집만 살고 있다.
6. 원문자료
퇴계 선생이 병상에서 쓴 시의 운을 빌리다
[敬次退溪先生病?韻]
내가 병들어 문을 닫고 들어앉은 지 13년, 내 나이 벌써 55세이다. 야윌 대로 야위어 책을 보는 일은 손을 뗀 지 이미 오래인데, 마침 퇴계 선생이 병상에서 쓴 다음과 같은 시를 생각하게 되었다. “창 가까이 눈이 쌓여 밝기가 그만이요, 숲속의 바람소리 귓전에 오래 울리네. 근래에 책은 죄다 끊었나니, 허허 참 병든 게으름뱅이 됐네 그려.” 을묘년에 지은 시로, 그 때 선생 역시 55세였다. 읊조리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감회가 일어 이 시의 운을 따서 지어 보았다.
눈 어둡고 귀 먹고 가슴까지 두근두근
병자의 맥박은 물고기가 뻐끔대듯 하네.
위대한 현인도 이렇게 탄식을 했는데
하물며 원래 게으른 못난이야 어떠하리.
- 안정복(安鼎福), 『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자료출처: 한국국학진흥원<안동의 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