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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교회/낮-20220313
사나 죽으나 그곳에 있겠나이다
삼하15:19-23
한창 즐거워야 하는데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우리 사람이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첫째는 눈이 즐거워야 합니다. 두 번째는 입이 즐거워야 합니다. 세 번째는 귀가 즐거워야 합니다. 넷째는 몸이 즐거워야 합니다.
다섯째는 마음이 즐거워야 합니다. 마음이. 그래서 잠언4장23절에 보게 되면 ‘무릇 지킬만한 것 가운데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 그랬습니다. 마음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살고 죽는 것도 우리 마음에 달려 있고, 슬프고 즐거운 것도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은혜 받고 안 받는 것도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잠언17장22절에 보게 되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즐거움은 보약입니다. 보약. 그러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그리고 말씀 듣는 이 시간에 근심 걱정 염려는 다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날개 잃은 독수리처럼 추락하는 망명자 다윗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왕으로써 도망을 가야 된다는 게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픕니까?
망명을 가는데, 불레셋 출신 잇대라고 하는 사람. 그의 가족과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하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잇대가 끝까지 다윗을 잘 섬기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인데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약해지고, 교회를 떠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정말 잇대처럼 하나님을 한결같이 잘 섬기는 우리 귀한 성도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다윗과 잇대.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두 사람의 이름. 다윗과 잇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람 이름을 별로 기억하지 않고, 읽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사울, 다윗,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 이런 사람들의 이름은 우리가 잘 기억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잇대라는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기억하지 못했던 이름. 잇대. 잇대라는 사람을 기억하면서 은혜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잇대는 상황을 초월하여 따랐습니다
본문 19-20절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다윗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 압살롬이 아주 못된 인간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아버지를 물리치고, 이제는 아버지를 죽이려고. 그러면서 스스로 왕이 된 압살롬이 다윗을 추격하니까.
다윗이 그의 가족들과 다윗을 따르는 신하들과 가드 사람 600명과 도망을 가는. 난리를 피해서 피난을 가는. 이런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피난 가는 상황인데. 그 중에 보니까. 잇대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잇대는 불레셋에서 얼마 전에 정치적인 망명을 한 사람입니다. 잇대와 그의 가족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불레셋에서 쫓겨나서 예루살렘에 와서 좀 살만하니까. 다윗이 그의 아들로 인해서 피난을 가게 되었어요.
근데 다윗을 따라서 잇대와 그의 가족들과 그를 따르는 측근들이 다윗을 따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잇대에게 얘기하는 겁니다. ‘너는 불레셋에서 한 번 쫓겨나서 고생을 하는데. 또 압살롬 때문에 나를 따라가면 또 고생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
그런 의미로 지금 읽은 말씀에 보면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아주 시적인 말이잖아요? ‘어제’라는 말은 오늘 내일. 지나간 어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온지 얼마 안 됐다는 얘깁니다.
‘너 불레셋에서 정치적인 망명으로 여기 온지 얼마 안 됐고, 나는 이제 정처 없이 떠나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죽을지도 모르고, 영영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왜 고생하면서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
다윗이 솔직한 마음으로, 잇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기 압살롬 밑에서 그냥 편안하게 살아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하면서 축복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들에 대해서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가면 갈수록 풍요롭고 따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차가운 사람이 있습니다. ‘참 차갑다. 인정 사정 없다.’ 그런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살면 살수록 기쁨을 주며 격려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살아갈수록 불평하고 원망하고 투덜대고. 아주 힘을 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살아갈수록 깊이가 느껴지고 성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살아갈수록 천박해지고 완고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은혜가 느껴지고, 경건해지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도 이렇게 은혜롭게, 경건하게. 이런 코로나시대에도 교회에 충성하면서 은혜스럽게,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경겅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좀 어려우니까 직분이고, 신앙이고, 인격이고 뭐 다 흐트러지고 깨지는. 그런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그 이유는 ‘헌신에 있다’ 그랬습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 회장을 역임한 제리 화이트라고 하는 사람은 ‘왜. 사람들이 두 가지로 점점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점점 나빠지는 사람이 있느냐? 그 차이는 뭐냐?’ 그 차이는 바로 ‘헌신에 있다’ 그랬습니다.
가정에, 교회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점점 좋아지고, 은혜스러워 지는 반면에 헌신이라고 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자기 이익만 챙기고, 자기만 아는. 이런 사람들은 점점 날이 갈수록 매력이 떨어지고 황폐해지고 불평 원망 싸움만 많아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볼 수 있다. 그런 얘깁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헌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불레셋에서 온 잇대도 다윗을 바라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 정도의 사람이라면 내가 끝까지 따를 수 있겠다.’
그래서 잇대는 불리한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모든 상황이 다윗이 아니고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에게로 모든 정권이 넘어가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런 상황을 초월해서 압살롬을 따르지 아니하고, 끝까지 다윗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윗이 피난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왕을 할 때에 다윗 밑에 세 장군이 있었습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
세 명의 군 사령관이 있는데 요압, 아비새, 잇대. 요압과 아비새는 형제입니다. 다윗의 조카. 형제이고. 잇대라고 하는 사람은 불레셋 사람. 외국에서 와서 사령관이 될 정도로. 다윗에게 큰 영향력을 줬던 사람입니다.
오늘 코로나를 비롯한 이런 저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 때 그 때 달라지고. 그러다 보면 우리가 신앙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상황을 초월해서.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잇대가 상황을 초월해서 다윗에게 끝까지 충성했던 것처럼 오늘의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변함없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잇대와 같은 훌륭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고난을 초월하여 따랐습니다
본문 21절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다윗이 잇대에게 ‘너. 나 따라오지마. 압살롬 따라가. 그러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어.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잖아. 압살롬 따라가.’ 그렇게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얘기를 들은 잇대가 얘기합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맹세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왕 앞에서 맹세하는. 맹세 중에서도 최고의 맹세입니다. 이건 함부로 할 수 없잖아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왕 앞에서 맹세하는 거. 이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나는데. ‘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왕 앞에서 맹세를 합니다. 왕이 어디에 계시든지 나도 그곳에 있고, 사나 죽으나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치 룻기1장 17절, 18절에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을 보고 ‘너 모압으로 가라. 나는 베들레헴으로 간다. 따라오지 마라. 따라와봐야 너 고생한다.’ 했을 때. 룻이 지금같이 얘기하잖아요.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멈추는 곳에 나도 멈추고,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나도 죽겠습니다.’ 또 에스더 4장16절에 보게 되면 에스더가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했던 것처럼 잇대의 고백이 심상치가 않아요.
‘왕이 있는 곳에 나도 있고, 왕이 죽는 곳에 나도 죽겠습니다. 왕이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도 함께 고난을 당하겠습니다. 왕을 위해서 고난 당할 준비가 되었고, 왕 때문에 고난 당한 것은 나의 영광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고, 맹세를 하는 겁니다.
로마서8장 18절에 보게 되면 ‘우리가 당한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은 우리가 받은 고난에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합니다.
고난에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잇대라고 하는 사람도 왕을 위해서 고난 당하는 거. 나의 영광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하면서 왕을 따르겠습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서커스 곡예사들의 공연을 보셨습니까? 곡예사가 공중그네를 타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째릿하지 않던가요? 가슴 졸이며 곡예사가 공중그네를 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가 다른 줄을 바꿔 탈때에 잡고 있던 줄을 놓고 재빨리 다른 그네를 잡아야 합니다. 근데 아무리 베테랑 곡예사라고 해도 잡고 있던 줄을 놓고 앞에 줄을 잡는다는 것이 어렵다 그래요.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다 그럽니다.
잡고 있던 것을 놓는다는 거.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내 손에 인간적인 거. 세상적인 거. 놓은 때. 그 놓은 손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은혜와 복을 우리가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50대 엄마가 자기 자녀를 살해했어요.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일이 간간이 뉴스를 통해 전해 듣고는 하지만 너무 힘든 뉴스잖아요?
자기 자녀를 50대 엄마가 살해를 했어요. 왜 이 엄마가 자기 자녀를 살해했을까? 자세히 봤더니. 이 엄마가 이혼을 한 사람이예요. 이혼한 상태에서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이 참 힘들잖아요?
또 보니까 암 말기예요. 이 어머니가 암 말기. 얼마 살지를 못해요. 그리고 또 보니까. 자기 자녀가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사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 해당되도 참 살기 힘들잖아요.
이혼만 해도 너무 힘들고. 암 말기만 해도 너무 힘들고. 자녀가 중증 장애를 가졌을 때 그걸 보는 것만해도 너무 힘든데. 이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가졌으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양육비도 안 주는 상태에서 얼마나 살기 힘들었겠어요.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내가 죽으면 내 자녀는 어떻게 될까?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그래서 자녀를 살해했구나. 이해가 되기는 한데.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되고, 우리는 그래도. 그래도.
이혼은 했지만 그래도. 암 말기지만 그래도. 자녀가 큰 장애를 가졌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 세 가지 어려움을 다 가졌지만 그래도 자녀만큼은 죽이지 말았어야지.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그래서 나 이제 막 살거야. 나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이런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도. 이 여인을 가지고 얘기했지만. 이 여인처럼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 할 수 없는 이런 저런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안 믿겠다가 아니고, 그래도. 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나를 지키고, 그래도 가족을 지키고, 그래도 신앙 지키고, 그래도 예배 잘 드리고. 그래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잘 감당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없지만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모든 것들이 다 잃어버리고 끝나버린 것 같지만, 시편119편71절에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라. 고난 속에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
‘고난을 기뻐하라. 고난 속에서 인내와 연단과 그리고 소망이 있느니라.’ 그리고 욥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욥기서42장5절에 보게 되면 ‘내가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내가 눈으로 봅니다.’
욥기42장10절에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해 주셨다고 얘기합니다.
고난이 많지만, 잇대가 고난을 초월해서 다윗을 잘 섬겼던 것처럼 고난 속에서 그래도. 그래도 신앙으로 하나님을 잘 섬겨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열매. 결말을 보는 우리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죽음을 초월하여 따랐습니다
본문 22-23절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지금 읽은 말씀을 보게 되면 다윗이 ‘너 나를 따르지 말아라. 압살롬을 따르면 편안하게 살게 될거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잇대가 하나님과 왕의 이름 앞에서 맹세를 하고, 그런 모습을 볼 때 다윗 왕도 ‘잇대는 갈 사람이 아니다’
압살롬이 쫓아오는 이 숨 가쁜 순간에 더 이상 얘기할 수 있는. 논쟁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잇대의 결심은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다윗이 피난을 가게 되는 겁니다.
다윗이 피난을 가면서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을 기드론 시내. 우리가 지금 피난을 가게 되면 저 금호강을 건너야 하는 것처럼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야 쫓아오는 압살롬으로부터 안전해 지는 겁니다.
기드론 시냇까지가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기드론 시내를 다윗의 부하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을 건너게 하고, 그 다음에 잇대와 잇대의 가족들과 잇대를 따르는 사람들을 건너게 하고.
맨 마지막에 ‘다윗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나가니.’ 다 건너가게 하고, 맨 마지막에 왕이 건너갔습니다. 보통 왕이나.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가 제일 먼저 건너가지요.
‘내가 먼저 건너가고. 너희는 뒤에 천천히 와라.’ 그럴텐데. 이 위기 속에서 다윗은 달랐어요. 다윗의 신앙과 인격. 용맹성. 백성들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습. 자기 사람들을 다 먼저 보내고, 맨 마지막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갈 때에 ‘그 곳에 사는 백성들이 큰 소리로 울며.’ 그랬어요.
다윗이 정치를 잘못했더라면 사람들이 ‘얼른 가라. 얼른 가라.’ 그랬을 것이지만, 다윗이 정치를 잘 했기 때문에. 아들은 좀 잘못 뒀어도 정치를 잘 했기 때문에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그랬어요.
백성들이 큰 소리로 우는 가운데 왕이 마지막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서 광야로 피난을 가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초월해서 잇대는 이제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을 수도 있는.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을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적인 신앙이 잇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다윗과 함께 할 것이다. 다윗 없이 사는 것보다는 다윗과 함께 죽을 것이다. 다윗 없이 압살롬 밑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는 다윗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다윗과 함께 죽는 길이 더 편하다.’
어쩌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사자 굴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일곱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우상을 섬기면서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 섬기면서 사자 굴 속에 들어가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것이 나는 더 편하다. 행복하다 하는 신앙과 같이 잇대도 다윗 없이 사는 것보다 다윗과 함께 죽는 것이 내 소원이고 행복이다. 이러한 잇대를 어떻게 다윗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 그는 마게도니아 대왕인데 어느날 페르시아와 싸우게 되었어요. 근데 페르시아 군사를 보니까 자기들 군사보다 훨씬 많고. 얼마나 강한지 몰라요.
마게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를 가지고 페르시아 군대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거였어요. 군인들이 겁에 질려가지고 사기가 바닥에 뚝 떨어졌어요.
그래서 군인들을 다 모아놓고, 알렉산더 대왕이 얘기합니다. ‘내가 오늘 신의 계시를 받았다. 신의 계시를 받았는데. 이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우리 마게도니아가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페르시아가 이긴다. 이게 바로 신의 계시다.’
그러면서 모든 군사들이 다 보는 가운데서 이 동전을 높이 던져서 땅에 딱 떨어졌어요. 어느쪽이 나왔겠어요? 앞면이 나왔어요. 앞면이 나오니까 모든 군사들과 왕과 신하들과 모든 사람들이 다 감동했어요.
하나님이. 신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저 페르시아 군을 넉넉히 이긴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의 죽음을 초월해서, 죽음을 무릎쓰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자. 그래서 나아가서 자기들보다 숫자가 더 많고 병력도 강한 저 페르시아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서 왕과 장군들과 신하들이 가까이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할 때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얘기합니다. ‘왕이여. 어떻게 그렇게 담대하십니까? 동전을 던졌다가 뒷면이 나오면 다 끝나는 것인데. 확률이 반반인데. 어떻게 병사들 앞에 그것을 던질 수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알렉산더 대왕이 웃으면서 동전을 보여줍니다. ‘이 동전은 앞면만 있는 동전이라네. 앞에도 앞면이고. 뒤에도 앞면이고, 둘 다 앞면만 있기 때문에 어떻게 던져도 앞면만 나올 수밖에 없었다네.’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신의 계시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에 자기보다 강한 군대와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처럼 이 험한 세상, 힘든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반드시 승리를 주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 반드시 승리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생명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한 번은 안 죽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죽는. 이것이 바로 가장 영광스러운 삶이고,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때가 참 어렵습니다. 이 어려운 때에 우리는 잇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잇대처럼 살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함부로 막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어려운 때에 잇대처럼 상황을 초월해서 그리고 고난을 초월해서 다윗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초월해서 잇대가 다윗을 위해서 충성했을 때 다시 돌아와 다윗 밑에서 군 사령관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처럼, 어려운 시대에 우리 모두 잇대처럼 이 어려운 상황을 초월하고, 고난을 초월하고, 죽음을 초월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구원과 치유의 능력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시고,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시며,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삶의 현장에서 그 능력을 등불같이 밝게 비추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깨달아 솔선수범하게 하시고, 가야 할 곳을 깨달아 주님의 이름을 들고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정의가 무너지고 불의가 가득한 곳에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게 하여 주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상황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고난을 초월하여 주님을 섬기게 하시며, 죽음을 초월하여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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