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시에 "망미루 앞 집결". 이런 문자를 받고 가까이 있는 정현이네에 연락하여 함께 갔다.
08:35분 도착. 몇 사람이 벌써 와있다.
시간에 맞춰 하나 둘 탐방팀이 모였다. 부산 서부교육지원청에서 놀토프로그램으로 마련한 월 1회 역사체험반 운영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학생들과 어머니들이다. 나는 3월, 6월, 10월만 가이드격으로 참가한다. 3월에 동아대박물관과 임시수도기념관을 다녀왔다. 6월은 동래도호아문(망미루)와 금강공원내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내주축성비, 임진의총, 해양자연사박물관이 그 대상이다.
자율반이 유독 많다. 20명.
늘상 하는 말이지만, 함께하는 사람에게 과잉보호나 과잉친절을 기대하지 말고 공부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에 대한 진실을 표현할 것을 주문했다. 이를테면 약속시간 정한 대로 지킬 것, 뭐 사주세요 등의 주문금지, 짜증내지 않기 등이다.
1. 동래도호아문(망미루)
조선시대 동래부 동헌에 들어서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관청 대문격이다. 이곳에 별다른 현판이 하나 더 붙었는데 그것이 망미루(望美樓)이다.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2층 누각에 북이 있어 4대문의 개폐를 아침, 저녁으로 알리고, 정오임을 알리는 북을 쳤다고 한다. 또 역사적으로는 이곳에 옮기기 전 1919년 3.1 만세운동이 동래지방에서 일어났을 때 처음으로 만세를 부른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때 동래시장 내의 동래부 동헌 앞에 있던 것을 큰 연유없이 단지 길터기를 한다고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쪽을 '망미루' 현판이 보이도록 해놓았다. '동래도호아문'과 방향이 바뀌어져 있다. 이렇게 된 것은 혹여 사람들이 동헌안내판을 보고 그곳이 관청인 줄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망미루에서 '미인'은 왕을 의미한다. 외관직으로 나와있던 벼슬아치들은 최대의 소망이 내관직이었을 것이다. 또 지방관으로서 세금 수취에 못지 않게 보름에 한 번 정도 임금에게 배례하는 '공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왕 중심의 통치기반이 성행하던 조선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하된 입장에서 임금을 향하는 충성을 '망미루'라는 현판을 붙임으로써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겹처마에 닭뼈처럼 생긴 계자(鷄子)난간의 건축물이다. '루(樓)'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사람 키 높이 이상의 다락방형식이기 때문이다.
망미루를 볼때마다 옮겨진 사유를 알고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망미루란 당호를 보면서 변방 근무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 어떤 벼슬아치의 회한을 생각한다. 지금도, 부산은 서울중심으로 보면 '변방'이다.
2. 금강공원에 들어서다
금강(金剛)공원은 1965년 부산 최초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됐다. 즉 집에서 접근하기 가까운 공원이 되었다. 보다 일찍부터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여 공원처럼 꾸며보려 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지근거리의 공간을 그냥 즐겼던 데서, 일본인들을 보면서 울타리를 치고 소유권의 개념을 덧씌우면서 공,사적 공간을 구분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올라가자 마자 이주홍의 시비를 앞에두고, 시간내어 천천히 시를 음미해보면서 감상할 것을 주문했다. 다음 기회에, 가령 청년시절에 이성친구랑 이런 곳에 와서 시를 읊고 음미하는 멋스런 시간을 가져보라 했다. 그런데 너무 먼 과제인 것 같다.
3. 동래독진대아문
1592년 임진왜란(조일전쟁)을 겪고 난 뒤, 동래부의 군사적 외교적 중요성을 인식한 조선정부는 1655년 동래부를 경주진영의 경상좌병영에서 독립된 기구로 승격시킨다. 그리하여 양산과 기장의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는 독립된 진(독진:獨鎭)이 되게했다. 이를 기념하여 '동래독진대아문'이란 현판을 걸었다. 이때는 임진왜란 후 60여년이 지난 효종 6년(1655)이다. 이것 역시 동래부 동헌 앞에 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때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중앙은 솟을 지붕를 설치했고 가운데 홍살이 있어 군영의 위엄을 더하고 있다.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란 현판은 1765년 당시 24세로 추정되던 변박(卞璞)이 썼다. 변박은 <동래부순절도>,<부산진순절도>,<초량왜관도> 등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앞의 두 그림의 진품은 현재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1763~1764년 정사 조엄을 따라 조선통신사로 대마도와 일본을 함께 다녀오면서 공식화원으로 따라갔던 김유성보다 변박이 더욱 활동을 많이 했다. 조엄의 신뢰를 얻은 것이다.
독진대아문에는 두 개의 주랑이 걸려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왼쪽에는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 오른쪽에는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이 걸려있다. '교린연향선위사'란 일본과의 외교, 사신접대를 담당했음을, '진변병마절제영'은 변방을 지키는 병마절제사가 있는 군영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독진대아문은 동래부가 변방수호(군사적 기능), 일본과의 외교(외교기능) 및 지방행정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4. 이섭교 비
온천천은 현재 낙민동과 연산동을 가른다. 조선시대때에도 그랬다. 이곳을 잇기 위해 다리는 놓기는 했는데, 홍수 등으로자주 무너졌다. 그래서 계를 조직하여 다리는 놓았다. 1694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치형의 돌다리다. 이로써 홍수가 나도 끄덕없었다. 돌의 영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 사건이다. 십시일반, 마음모으기를 통해 완성된 다리인지라 감흥이 컸다. 지금도 커다란 교량사업은 국책사업이거나 지방자치단체가 한다. 그런데 자발적 성금으로 이룬 사업성과이니 만큼, 게다가 오가는 이마다 기분 좋아함을 보고, 각별히 힘쓴 이들의 마음을 더욱 흐뭇했을 터. 이렇게 기념비를 만들어 그 공로를 치하했다. 의미있는 일이다.
이섭교 비(利涉橋 碑). 곧, 다리를 건너는 이로움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지금으로부터 318년전 조상들의 주름깊은 속에 배어나오는 웃음을 상상해 보았다. 어젯밤에 비가 내려 민달팽이들과 거미들이 기념비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러니까 돌의 유용함을 이런 미물도 알고 있는 것이다.
5. 내주축성비
조일전쟁(임진왜란)을 겪은 후 동래읍성이 많이 파손되었다. 동래부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를 보완할 필요를 제기하였던 정언섭 동래부사. 영조임금은 정부사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731년 정월에 측량, 4월에는 성벽, 5월에 성문을, 7월에 문루까지 모두 완성했다. 부역에 동원인 인원은 52,003명이고 연인원은 모두 417,050명이다. 일한 사람들은 경상도 각 군현에서 동원되었다. 비에는 부사가 날마다 성쌓는 일을 독려하고 게으른 이들을 벌준 것이 있다고 한다. 한자를 풀이하지 못해 풀어낸 책에서 읽은 것을 옮기면, "부사가 날마다 공사장을 돌아보고 일잘하는 이들과 못하는 이들을 상벌로서 다스리니 귀신이 도와서 설치된 듯하다", "지혜를 꾀로써 시작하고, 용기는 기략을 결단하고, 인애는 민중을 얻게 된다."는 말이 있단다(비의 앞면).
큰 업적이기 때문에 부사는 성의 완공 후에 군사와 장교들에게 후한 급료를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주었다. 당연하다. 일한 보람은 이런 뒷풀이로 더욱 의미를 더한다. 그리고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를 세웠다. 기단 꼭대기에 두 마리의 여의주를 문 용이 구름 위를 날고 있다. 뒷면에는 축성에 공로를 세운 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보수하는 일은 필요하다. 개인이든 국가든 파손을 메꾸는 일은, 그 일을 통해서 불완전했던 부분을 채워넣고 보완하며 경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수하는 일은 그 일을 통해 참가한 모든 이들의 역량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자긍심을 배양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건축물은 그 자체만 아니라 그것을 조성한 당시 사람들의 기술과 의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피라밋이나 만리장성과 같은 거대건축물이 아니라고 내주축성비를 통해 동래부와 경상도 사람들의 집결된 힘을 음미하는 시간이 되었다.
6. 부산해양자연사 박물관
모든 생명체의 호흡에는 산소가 필요하다. 지구가 필요로 하는 산소의 80% 이상이 생산되는 곳, 바로 '바다'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바다'라고 했던가! 엊그제 신문에 중국인 과학자가 인류의 조상은 원시상어에서 출발했을 거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이런 말들이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체의 구성성분과 바다의 구성성분이 거의 같다. 이로써 바다는 인류의 모태였을 거란 말은 단지 가설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바다가 파랗게 보이는 것은 적외선 파장인 붉은 색이 물에 반사되어 산란되어 버리므로 흡수된 푸른계열의 자외선 쪽이 남아 있어 우리 눈에 파랗게 보인다.
해수면으로부터 200미터 이내 정도만 햇빛이 도달한다. 그 아래부터 2000미터까지 '심해'라고 하고, 더 아래 부분,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필리핀 동쪽의 마리아나 해구가 11,034M까지는 '초심해'라고 한다. 이런 곳에도 생명체가 있을까? 아마도 있을 것만 같다. 워낙 바다에 대해 인간이 알고 있는 바가 적기 때문이다. 심해어라 불리는 물고기들은 대개 자체 발광기능을 가지고 있다. 신기하다. 사람이 모르는 곳에 생명체들이 열심히 제 나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엄청난 압력을 견디는 그들의 피부와 뼈조직은 어떻게 되었길래 가능할까?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약 2500여점의 전시품이 있다. 백상아리(백상어)는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의 마스코트다. 학생들은 학예사의 재미난 특강을 듣고 나서 전시관으로 개별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생각한 바다의 보물을 찾아나섰다. 설명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 그동안 나는 해설사들이 다른 팀을 맞아 설명하는 것을 곁에서 들어가며 놀라운 정보들을 접했다. 가령 내 팔길이 만한 다랑어 한 마리가 1천만원에 호가한다는 사실, 다랑어나 새치종류 중에 주둥이가 유난히 뾰족하고 길게 난 것이 있는데 작은 물고기를 사냥할 때 휘젓고 다니면서 무리지은 것을 흐뜨리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란다. 또, 철갑상어는 사실 상어가 아니란 사실, 또 민물에서 기를 수 있도록 개량종이 개발되어 국내에도 기르고 있다는 것. 참고로 상어는 연골어종이다. 철갑상어는 생김새때문에 상어가 된 것이지, 사실은 경골어종이다. 캐비어때문에 전멸 위기에 처해진 물고기다. 카스피해(내해)에서 주로 잡힌다. 유럽 사람들은 캐비어 하면 사족을 못쓸 정도로 인기 음식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또 한번 증명된다.
보물찾기를 하고 나서, 발표회를 했다. 우물쭈물하길래 우리반 학생 중 유일하게 참석한 보석군이 강제로 무대를 올라갔다. 발표해서 1등을 했다. 상품을 받았는데, 나에게 준다. 나는 되돌려주었다. 크레파스 한 다스!
학예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박물관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관심을 가지고, 또 질문을 만들면서 전시품을 바라보면 엄청난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촉촉한 공기가 감싼 토요일 아침, 20명 학생들과 뭔가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부산향토사에 대한 관심도 깊게 깊게 해볼 필요가 있다.
첫댓글 오늘에야 들어와 확인합니다. 일이 바쁜 탓이라 하지만 ...
아이들에게 부산에 대한 자부심도 같이 일깨워 주셨겠지요.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