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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롬멜/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박원명 역/ 생각의 나무/ 2003
2. 롬멜 전사록/ 리델하트 엮음, 황규만 역/ 일각사/ 2003 개정판
3. 라이프 2차 대전사 中 “사막의 격전”/ 리차드 콜리어/ 타임-라이프/ 1992
4. 라이프 2차 대전사 中 “독일 전격전”/로버트 워니크/ 타임- 라이프/ 1992
5. 롬멜 보병전술/ 롬멜 지음, 황규만 역/ 일조각/ 2001
6. 히틀러 평전 2/ 요아힘 C. 페스트 지음, 안인희 역/ 푸른숲/ 1998
7. 도해 세계전사/ 노병천 지음/ 연경문화사/ 1996
8.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 베빈 알렉산더 지음, 김형배 역/ 홍익출판사/ 2003
그렇다. 이번 회에선 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여우’라 불리게 되는 단초가 되어준 서부전선에서의 롬멜의 활약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1)우리가 알고 있는 롬멜의 신화
본격적인 롬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뇌리 속에 박혀 있는 롬멜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봐야 겠다. 대서양이 바로 코앞인 독일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태평양과 접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롬멜'이란 이름은 말 그대로 '신화'로 회자 되고 있다. 전혀 우리나라와 상관이 없을 듯 싶은 지구 반 바퀴 건너편의, 그것도 50여년 전의 독일 장군이 ‘신화’로 회자 되는 것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물밀 듯이 밀려들어온 미군들의 ‘롬멜’에 대한 판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영향이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본다면 롬멜이란 인물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고, 전술전략상의 맹점도 많이 발견되는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적을 칭찬하는 것만큼 확실한 자기 칭찬은 없다는 것이다.
‘사막의 여우’라는 희대의 명장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자신들의 역량에 대한 자화자찬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롬멜이 아프리카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은 일정부분 인정 받아 마땅하다 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독일 제3제국의 선전상인 괴벨스의 노련한 ‘포장’과 러시아 전선에서의 1941년의 실패를 가려야 하는 다급함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보고 있다.(1941년의 실패도 이후 42년의 스탈린 그라드나, 43년의 쿠르스크와 비교하자면 전초전이지만 말이다)
롬멜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이런 ‘포장’을 즐겼으며, 포장을 위해 나름대로의 배려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은 많은 사료에서 확인되는 부분이다. 자, 그렇다면 롬멜은 ‘과대포장’되고 조작된 신화였다는 것일까? 그 부분에 있어선 계속 연재를 하며 차차 밝혀 나가겠지만, 이번 회 연재부터 들어가는 내용에 있어서 독자 여러분들이 인지해야 할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해 먼저 언급하여야겠다. 롬멜 사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롬멜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전사戰史 연구자들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첫째는 롬멜이 히틀러에게 가지고 있던 ‘애증’에 관한 부분이다.
롬멜이 히틀러 암살모의에 관련 되었긴 하나 2차 대전 직전부터 시작해 2차 대전 초반까지 히틀러에 가지고 있는 애정 어린 시선과 맹목적인 충성에 관한 부분인데, 실제로 롬멜은 히틀러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던 대목이 역사상에서 많이 드러났다. 한때 독일에서 출간된 롬멜에 관한 평가서엔 롬멜이 준(准)나치였으며, 아프리카에서의 철퇴 이후(명목상의 이유는 건강상의 이유로 전출이었지만 말이다) 히틀러에게 있어서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로 비춰지면서 롬멜 스스로도 위축되어졌고, 이것이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가담하게 된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단순한 하나의 ‘설(說)’일수도 있지만, 간과하기엔 뭔가 께름직한 여운이 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롬멜이 히틀러에 대해 기대를 가졌었고, 인정을 받고, 자신의 전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든 [제7전차사단 전투기록 모음집]을 붉은 가죽으로 씌워 1940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히틀러에게 보냈다는 일화에서 보여주듯 롬멜은 히틀러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했고, 자신이 과소평가 받고 있다는 아쉬움과 그에 따른 ‘자기홍보’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 롬멜’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이 부분에 대해선 후에 다시 소개하겠다)
어쨌든 롬멜이 히틀러에게 호의적이었고, 그의 최 측근에서 경호임무를 맡았다는 점에서 히틀러에게 일정부분 ‘경도’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롬멜이 나치라는 점에 대해선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그러니까 베르사이유 조약체제하에서의 독일 제국군이 가지고 있던 패배주의와 의기소침을 일소해 버리고, 독일군부에 희망을 안겨 주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에게 일말의 의혹을 던져 주었던 SA에 대한 숙청 작업등을 통해 독일군부가 히틀러에게 ‘동조’할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롬멜 역시 당시 군부인사들이 히틀러에게 가지고 있던 보편 타당한 호의를 보였다 볼 수 있겠다. ‘총통은 예스, 정당은(나치) 노!!’ 라는 당시 독일군부의 가치판단 기준을 롬멜도 따랐을 것이다.
둘째, 롬멜이 보여주었던 그 ‘신화’와 같은 전공들에 대한 비판이다.
롬멜이란 존재가 보여주었던 전투에서의 승리 뒤에는 수많은 댓가가 뒤따랐는데, 일각에선 롬멜이란 존재가 전술적으로 1개 기갑사단 잘하면 증간된 기갑사단의 운용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전투에 있어선 천재이지만, 보다 거시적이고 대국적인 관점에서의 전략운용에 있어선 많은 허점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그가 군 상층부와 보여준 반목과 명령위반에 관한 문제점을 부각하는 시점에 관한 것인데, 이 부분 역시 우리가 간과하기엔 뭔가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점에 관해서도 연재를 이어가며 이야기를 진행할 부분이겠다. 롬멜이란 존재가 분명 과대 포장된 부분이 있고, 그 이면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의 비밀과 미쳐 조명 받지 못한 또 다른 역사적 시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2)1939년의 기억들
히틀러가 승승장구 하는 동안 롬멜 역시 히틀러의 옆에서, 혹은 히틀러를 바라보며 같이 기뻐하며 같이 나아가게 된다.
1935년 1월 포츠담의 군사학교 교사자리를 약속 받았던 롬멜은 그 해 10월 15일 ‘전술교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예의 그 ‘마타주르 산’에서의 자신의 활약을 주제로 한 강의를 이어나갔다. 그의 강의는 언제나 그러했다. 그런 그가 독일국민들에게 최초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가 생기게 된다. 바로 롬멜의 저서인 [보병 공격술]이란 책이 출간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군부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인기를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해부터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롬멜의 행보는 의외로 정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가 의도적으로 정치적 행보를 밟았다기보다는 그의 위치가 그를 정치적으로 보이게 하였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는 1938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의 주데텐 행진(sudeten) -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협박해 얻은 주데텐 지역의 순방길 - 의 총통 지휘본부를 지휘하게 된다. 이 인연으로 롬멜은 1939년 8월 23일, 그러니까 2차 대전 발발 일주일전에 히틀러 총통 본영 경호대대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롬멜은 제7전차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히틀러의 언저리에서 히틀러를 경호하게 된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해 폴란드 전역에서 총통 지휘부의 이동 시에 롬멜은 열심히 히틀러를 호위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자랑스러워 했었고, 히틀러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에 무한한 경의를 표했다. 그는 틈틈이 그의 아내인 ‘루’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히틀러에게 신임을 받고 있음을 자랑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히틀러 식 용인술이 꽤 쓸모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용인술이 몇 십 년이 흐른 뒤 대한민국의 박정희와 북한의 김정일에게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박정희는 자신의 측근을 외직으로 내치거나 좌천했을 경우에도 잊지 않고 가끔 전화를 해
- 임자, 누가 임자를 무시하거나 하지 않아? 그런 놈 있으면 말해 내가 즉각 조치하겠어.
이런 식의 멘트를 날리며 아무리 한직에 밀려나 있는 부하라도 자신이 절대 권력자의 관심과 애정 속에 있다는 것을 각인 시켜 주었던 것이다. 덤으로 박정희는 소위 말하는 그 ‘용돈’이란 것도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다. 히틀러의 용인술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고래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용인술이라 해야 할까?
히틀러는 총통 지휘부에서의 중요 의사결정 사안에 대해서 가끔씩 롬멜의 의견을 묻기도 하고, 같이 회의 석상에 앉히기도 하면서 롬멜이 충분히 ‘신임’을 받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롬멜은 여기에 고무되어 스스로가 ‘인정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안타깝게도 7기갑사단을 이끌고 분전했던 1940년 5월의 봄(필자가 나름대로 생각해 낸 표현)에서 롬멜이 보여준 활약상에 대해서도 히틀러와 군 상층부는 그닥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엄청난 진격 속도와 군의 선봉에 선 활약을 보여주었고, 프랑스군과 연합군으로부터 ‘유령사단’이란 별명을 얻었지만, 히틀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엔 뭔가 2% 부족한 감이 있었다. 다만, 이때 얻은 롬멜의 명성 덕분에 히틀러에겐
- 병력을 많이 보내지 않아도 아프리카 전선에서 생색낼 수 있는 카드
로 간택되어지게 된다. 롬멜이란 이름값이 상종가를 치는 상황에서 실제적으로 많은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이탈리아 군에게 나름대로 체면치레를 할 수 있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히틀러 옆에서 경호를 했던 롬멜의 경력이 그에게 마이너스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히틀러 옆에서 히틀러의 색깔에 물들어 제7사단의 열병식 앞에서 ‘하이 히틀러’를 외치며 나치 식 경례를 하긴 했지만, 그가 총통지휘부에서 근무한 1년은 향후의 그의 군 경력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게 된다. 그가 총통지휘부에서 얻게 된 것은 무엇일까?
첫째, 히틀러의 기본적인 전략을 확실하게 파악하게 된다. 기갑사단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었던 롬멜에게 있어서 최고 전쟁지도부에서의 회의 참석은 대국적인 관점에서의 전략을 이해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로선 획기적인 [전격전]의 큰 틀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정치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인과 정치력의 학습이다. 앞전에서 수차에 걸쳐 언급한 마타주르 산에서의 전공 강탈 사건 이후 롬멜은 ‘우는 아이가 젖 한번 더 먹는다’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총통지휘부에서 제대로 ‘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그의 전공을 과대포장을 해선 안되지만 ‘확실히 보고해야 한다’는 것과 선전사진이나 선전영화의 위력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가 아프리카 전선에서 보여준 수많은 역동적인 사진들(그가 사진 찍는걸 취미로 삼고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을 보면, 그는 언제나 ‘멋진 포즈’를 만들어 주는 인간이란 걸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선전부대의 요구에 멋진 포즈로 화답하였다. 괴벨스는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롬멜의 활약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일기장에 롬멜의 이름을 적어 넣었고, 이 제3제국 최고의 선전선동가에 의해 롬멜은 신화로 재탄생 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롬멜은 더 이상 자신의 전과를 남에게 빼앗길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1940년 5월의 롬멜은 자신의 전과를 확실히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전투에 대한 결과보고를 쉬지 않고 계속 무전으로 상부로 보고했었고, 무전으로 전달되지 않자 직접 장교를 뽑아 전령으로 사령부로 보낼 정도로 자신의 전과와 존재가치에 대한 환기를 시도하였다. 그는 울지 않는 아이에겐 젖을 주지 않는 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셋째, 총통부에 확실한 파이프(인맥)를 박아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공군부관으로 있었던 니콜라우스 폰 벨로우(Nicolaus von Below)와 히틀러의 수석부관으로 있던 루돌프 슈문트(Rudolf Schmundt)가 바로 그들이었다. 독일 제3제국 원수중 최연소를 자랑하는 롬멜에 대한 시기와 질투등에 있어서 이들은 기꺼이 롬멜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고, 롬멜의 편에서 총통지휘부에 의견을 개진하게 된다.
총통부에서의 6개월여의 시간은 롬멜에게 확실히 남는 장사였었다.
그리고 롬멜은 그의 영광의 시간을 찾아 히틀러의 품에서 벗어나 제7기갑사단으로 떠나게 된다.
(3) 개전
폴란드 군복을 입은 정체 모를 병사들이 독일시설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정체모를 병사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다들 알 것이다.
(작전명 ‘통조림’의 이 작전은 SS친위대와 친위대 보안부대인 SD의 완벽한 호흡으로 이루어진 ‘성공적인 기만극’이었다. 친위대는 13명의 독일인 죄수들을 극비리에 착출하여 폴란드군 군복을 입힌 뒤 이들을 폴란드 국경 근처의 호흘렌테 숲 속으로 끌고 가서 쏴 죽인다. 그리곤 이 가짜 폴란드군 사체 주변에 위조신분증과 폴란드 애인들에게서 온 사진과 편지 등을 흩뿌려 놓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친위대가 가짜 폴란드 군을 죽이던 그때 친위대 보안부대의 알프레드 나우요크 소령과 5명의 결사대들은 폴란드-독일 국경의 독일마을 글라비츠의 작은 라디오 방송국으로 뛰어들어간다. 아나운서와 방송국 관계자들을 쏴 죽인 이들은 마이크을 붙잡고는 유창한 폴란드어로 폴란드인의 궐기와 폴란드인들의 전시동원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려진 히틀러의 작전명령 1호 ‘백색작전’ 영국과 프랑스등이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별 무소용인 전쟁이었다.
170만 대군을 자랑하던 폴란드...170만 정규군을 제외하고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예비역이 100만에 이르는 폴란드는 무기력하게 쓰러져 갔다. 폴란드 군이 어떤 군대이던가? 짜르의 나라 러시아와 호각으로 붙었던 나라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쪽수로 채워진 군대였다는 걸 연합국들에게 확인시켜준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세계 제일의 창 기병대로 그 위명을 떨치던 포모르스케 창기병 여단이 독일전차들에게 돌격해 창으로 독일전차를 찌르는 웃지 못할 코미디를 연출해 내면서 폴란드 군은 패퇴하게 이르렀다.
폴란드 공군은 이륙하기도 전에 슈투카의 밥이 되었고, 보병들은 탱크들의 돌격 앞에 맥을 놓고 당해야 했다. 폴란드군 지휘부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 양상과 180도 달라진 독일군의 전격전 앞에서 폴란드군 지휘부는 제2방어선을 어디에 쳐야 할지 미쳐 고민할 틈도 없이 전쟁지휘부가 붕괴되고 전선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의 참전으로 폴란드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9월 27일 바르샤바 수비대는 항복을 하였다. 그로부터 체 10일이 되지 않은 10월 5일 폴란드에서의 모든 전투는 종결되게 된다.
슈투카와 함께하는 전격전 |
워낙 유명한 제2차 대전의 개전이야기이므로 대충 개괄적인 이야기를 써봤다. 필자에게 있어선 폴란드 전쟁에 대해 독자들에게 해 줄 말이 이 정도 밖에 없을 듯 싶다. 일찌감치 끝난 전쟁이라서 대충 이야기를 했다 할 수도, 롬멜이 이때 단순히 히틀러 경호 임무에 투입되어서 롬멜에 대해서는 더 할 이야기가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대신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있었던 뒷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TIP 1 왜 하필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가 하는 점이다. 원래 독일군부는 빨라야 5년 안에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끝난다며 히틀러를 달랬지만, 히틀러는 막무가내였다. 독일해군의 중흥을 위한 Z계획의 완료시점이 1945년이었던 걸 보더라도 독일군이 완벽하게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1939년이 히틀러의 50주년 생일을 맞이하는 해였다는 것이다. 이 희대의 독재자는 자신의 나이가 더 늙기 전에, 자신이 기력이 남아있는 시간 안에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폴란드 정보국은 독일군의 기동훈련에 등장한 전차모형들...전차의 부족과 베르사이유 조약의 눈길을 피해서 자동차에 캔버스 천을 두르거나 자전거를 엮어서 그 위에 나무판자나 캔바스 천으로 전차모형을 만들어 훈련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독일전차는 캔버스로 만들어 졌다는 정보보고를 본국에 보내게 되고, 이걸 그대로 믿은 폴란드 창 기병은 이 무모한 돌격을 하게 된 것이다. 잘못된 정보로 군대가 몰살된 대표적인 케이스라 해야 할까??
문제는 이게 다 ‘구라’였다는 점이다. 뭐 다는 아니고, 한 12%는 진실인데, 나머지는 조작된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폴란드 전역에 투입된 44개 사단 중 제대로 기계화가 이루어진 사단은 불과 6개 뿐이었던 것이다. 그 나머지 병력들은 1차 세계대전의 그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1차 세계대전과 똑같은 볼트 액션식 소총을 들고, 말이 끄는 수레에 보급품을 실어 날랐고, 웬만한 야포도 군마(軍馬)로 끌고 움직였다. 병력들의 이동 역시 장갑차에 탑승한 기계화 보병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말 그대로 걸어서 움직이는 보병이었던 것이다. |
(4) 가짜 전쟁(Phony War)
폴란드 전역에서 승리 후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롬멜은 제7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된 것을 확인하게 된다. 1940년 2월 3일 히틀러는 총통지휘부를 떠나는 롬멜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넨다...바로 자신의 저서인 [나의 투쟁]이었다. 친필 사인과 함께,
- 우정 어린 추억을 위해 롬멜 장군에게....
라는 문구도 함께 말이다. 그리고 2월 15일 롬멜은 훗날 유령사단이라 불리는 제7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사열하는 롬멜 |
자, 여기서 우리는 복잡미묘한 1939년 9월에서부터 1940년 5월까지의 기간을 정리해 봐야 하는데, 앞전에서 가짜 전쟁(Phony War)이라 언급된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한다. 당시 폴란드가 독소의 협공에 완전히 짓눌려진 상황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1939년 9월 3일 명목상의 선전포고를 하고 잔뜩 으름장을 놓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물론 영국 측에선 대륙원정군을 신속하게 정비하였지만, 당장 서부 프랑스로 날려보낼 병력은 2개 사단 정도가 다였다. (나머지 2개 사단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황이었다) 프랑스 역시 독일과 한판 자웅을 겨루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일단은 지난 1차 대전 때의 참혹한 기억도 기억이지만, 프랑스가 아직 전쟁준비가 덜 되었다는 상황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두 나라는 착실히 준비를 한 편이었다. 프랑스는 당장에 전시동원령을 발동해 병력을 500만으로 확충했고, 영국도 육군의 경우엔 당장 준비가 안되었다 하더라도 공군력은 제법 충실히 지원을 해서 허리케인 전투기 4개 비행대를 포함해 약 4백여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 부대를 프랑스에 보냈다. 대충 영불 연합군의 항공전력만 2천대를 상회하게 되었고,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한번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붙었다면 역사는 어찌되었을까 장담을 못했을 상황이었다. 왜 이때 붙지 않았을까??
당시 서부전선을 바라보던 독일군의 마음은 말 그대로 ‘바짝 쫄아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양면전은 말 그대로 필패의 지름길임에도 서부전선의 강대한 적을 놔두고 폴란드로 밀고 들어간 히틀러....당시 독일군은 프랑스가 건설해 놓은 마지노선을 방비하겠다며 지그프리드 라인을 건설해 놓고,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 모아 서부전선을 방비하고 있었다.
이때 당시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Blitzkrieg(전격전)과 정반대의 전쟁이라며 Sitzkrieg(앉아서 하는 전쟁)이라며 비아냥거렸는데, 말 그래도 앉은뱅이 전쟁이며, 기묘한 전쟁이었다. 프랑스군은 독불 국경을 가르는 라인강의 교량을 폭파한다는 통고를 아주 정중하게 독일군측에 전한 다음에 다리를 폭파했고, 독일군은 훈련 중 실수로 프랑스 영토로 날아간 포탄 한발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했었다. 한술 더 떠 독일 군악대가 프랑스 가곡을 연주하며 프랑스군 비위를 맞춰주는 묘한 상황이 연출되어지는 그때...그렇게 가짜 전쟁은 이어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싸우기 싫었고, 영국도 지난 1차 세계대전 때 죽은 용감한 젊은 사회 지도층들의 공백 때문에 전쟁을 장담할 수 없었다. 정 싸워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마지노선에서 싸우는 걸로 대충 싸움을 정리하고픈 욕망들...그들은 정말 싸우기 싫었던 것이다.
(5) 마치며...
오랜만에 다시 연재를 하려니 손이 덜 풀렸는지 옛날 감각이 잘 돌아오지 않는다.
이번 회를 쓰며 고민했던 것이 2차 세계 대전을 써야 할지, 아니면 롬멜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살짝 했었다. 만약 롬멜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면 1940년 2월 15일부터 시작해 1940년 6월까지의 이야기를 쓰면 될 것인데, 그 이야기를 하자니 잠시 잠깐 그 배경 이야기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찌 글을 써야 할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이번 회부터 본격적으로 롬멜에 관한 평가가 시작되는 그의 무훈(武勳)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롬멜에 대한 기존의 평가 이외에 다른 평가들에 대한 소개와 전제를 조금이라도 해 두는 것이 연재를 이어나가며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롬멜에 대한 좀 색다른 이야기를 끄집어 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은 이번 회까지는 롬멜이 제7기갑사단 사단장이 되는 데까지 이야기를 썼으니, 다음 회에선 1940년 5월10일...가짜 전쟁이 막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유럽을 불바다로 만든 이야기로 들어갈 것 같다. 노르웨이 전역 이야기도 하고 싶고, 다른 에피소드들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꾹 참고 롬멜 이야기에 집중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시금 하게 되는 지금이다.
그럼 다음 회에 다시 뵙는 것을 기약 드리며 이만 졸필을 접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