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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일련의 사회현상을 심층 분석
출전: 에리히 프롬 지음(원창화 옮김, 흥신문화사, 초판1쇄 1988년/ 3판2쇄 2006년)
저자의 서문
사회 과정의 기본적 실체는 개인이며, 또한 그의 욕구와 공포, 열정과 이성, 선과 악을 보는 성벽性癖 따위이다. 사회 과정의 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형성하는 문화의 맥락에서 개인을 보아야 하듯이, 개인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심리학적인 과정의 역학을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의 주제는, 근대인은 개인에게 안정감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또한 그를 제약하는 전개인적前個人的 사회의 구속들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개인적 자아의 실현 즉 개인의 지적ㆍ정서적 및 감각적인 능력의 표현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아직 획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부여해주었지만, 또한 근대인을 고립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를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고립은 참을 수 없는 것이므로, 근대인은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의존과 복종을 찾느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성에 기인된 적극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하여 전진해 가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이 책은 하나의 예측이라기보다 오히려 진단-해결보다는 오히려 분석-이지만, 그 결과는 우리 행위의 진로에 대하여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왜냐하면, 어찌하여 자유를 내버리고 전체주의 쪽으로 도피하려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것을 타도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5~6)
1장 자유 – 심리학적인 문제인가
그 후 몇 년이 지나면서 (…) 마침내 우리는, 독일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 선조들이 자유를 위하여 싸운 것과 같은 열성으로 자유를 포기했으며, 자유를 찾는 대신 그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찾았고, 그밖에 수백만의 무관심한 사람들은 자유를 지키는 것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믿지 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9~10)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외국에 전체주의 국가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태도와 제도 내부에 외국 여러 나라들에서 외적 권위와 규율, 획일성, 지도자에 대한 의존 등 파시즘이 승리를 얻게 한 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이 위협이 된다. 따라서 싸움터는 바로 여기 –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제도 안에 있다.” (존 듀이) (10)
파시즘이 세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했다. 준비를 갖추기는커녕 인간이 그와 같이 악에 대한 성향을 지니고, 권력에의 갈망, 약자의 권리에 대한 무시, 그리고 강자에 대한 복종의 열망을 가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오직 소수의 인간들만이 이윽고 폭발할 화산의 울림을 인지하고 있었다. 니체는 19세기의 자기 만족적인 낙관주의를 경고했다. 마르크스 또한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대하여 경고했다. 그리고 이보다 약간 뒤늦게 또 다른 경고가 프로이트로부터 나왔다. (…) 프로이트는 개인의 감정적ㆍ정신적 불안 현상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를 화산 꼭대기로 끌고 올라가 끓고 있는 분화구를 들여다보게 했다. (13)
근대 심리학에서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단순한 근대 합리주의에 의해 그 존재가 무시되어 온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측면을 드러내놓았다. 그뿐 아니라 이들 비합리적인 현상일지라도 일정한 법칙을 따르며, 따라서 이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3)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 시대의 문화 정신에 지나칠 만큼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한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바로 이와 같은 한계는 그가 병적인 개인을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되었으며, 정상적인 개인이나 사회적인 삶에서 작용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현상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13~14)
프로이트는 언제나 개인이란 존재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이러한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에 속한 개인을 특징 짓는 타인과의 경제적 관계와 아주 비슷하다. (15)
프로이트가 의미하는 인간관계의 영역은 시장과 유사하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일어나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거래소로, 거기에서 타인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결코 그 목적 자체는 아니다. (15~16)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성향은 가장 추한 성향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생물학적 인간 본성의 일부가 아니라 바로 인간을 만드는 사회적 과정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는 억압적인 기능만이 아니라 또한 창조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성질과 정열, 불안 등은 하나의 문화적 산물이다. 사실상 인간 그 자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간의 노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창조물이며, 또한 그 완성체이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노력의 기록을 역사라고 명명한다. (16)
인간 본성은 바로 인간 진보의 산물이다. 그러나 또한 고유한 메커니즘과 법칙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에는 고정되어 변화하지 않는 요소들이 있다. 생리적으로 제약된 충동을 만족시켜야 하는 필연성, 고립과 정신적 고독을 피하고자 하는 필연성이 그것이다. (24)
인간은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성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면 될수록, 또한 더욱 ‘개인적으로’ 되면 될수록 사랑이나 생산적인 작업의 자발성 안에서 외부 세계와의 유대에 의해 일종의 안전함을 구할 수 있을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24)
2장 개성의 출현과 자유의 다의성
자유는 인간 존재 그 자체를 특징짓는 개념, 그리고 더 나아가 자유의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의식하는 정도에 따라서 달라진 개념 그것이다. (26)
인간의 사회적 역사는 인간이 자연계와 일체를 이룬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26)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적절한 행동을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 (…) 그 결과 인간은 본능적인 준비가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위험과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의 무력함이야말로 인간의 발달이 시작되는 기반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약점이야말로 바로 인간 문화의 조건’이다. (33)
그런데 인간은 신의 명령을 어기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연을 초월하지 않고 자신이 그 일부인 자연과의 조화 상태를 깨뜨린다. 권위를 대변하는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본질적으로 죄악이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이것은 인간적인 자유의 시초이다. 신의 명령에 거역하여 행동하는 것은 강제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 전前인간적인 삶의 무의식적인 존재로부터 인간의 수준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권위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 즉 죄를 범하는 일은 적극적인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최초의 자유 행동, 최초의 ‘인간적’ 행동이다. (…) 자유의 행동으로서의 불복종의 행위는 곧 이성의 시작이다. (34~35)
중세 말기 이후의 유럽 및 미국의 역사는 개인 출현의 완전한 역사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과정이다. 중세기적 세계를 타파하여 가장 노골적인 속박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는 400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개인은 많은 점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발달했으며, 전에 없이 문화적 성취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으로부터의 자유’와 ‘……에 대한 자유’ 사이의 지연 또한 증가되었다. 어떤 관계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자유의 개체성을 적극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의 불균형은 마침내 유럽에서는 자유를 내버리고 새로운 관계로, 또는 완전한 무관심으로의 놀라운 도피로 나타났다. (37)
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제1절 중세적 배경과 르네상스
근대사회에 대비한 중세사회의 특징은 개인적 자유의 결여이다. (41)
근대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없었지만 중세 인간은 고독하거나 고립된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41)
중세사회는 개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개인’이란 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차적 관계에 의해 외부 세계와 맺어져 있었으며, 아직 자기 자신을 하나의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단지 사회적 역할(당시는 자연적인 역할)이라는 매개를 통해 비로소 자기의 존재를 의식할 뿐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개인’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다. (42)
르네상스는 부와 권력을 가진 상층계급의 문화였으며, 새로운 경제력이라는 폭풍우로 말미암은 거센 물결 위에 있었다. 부도 권력도 갖지 못한 일반 대중은 지난날에 가졌던 안전한 삶의 상태를 상실함으로써 때로는 아첨하고 때로는 위협도 당하는, 세력 있는 자들에 의해 교묘하게 조종되는 무조직적인 군중으로 변하고 말았다. 여기에 새로운 전제정치가 새로운 개인주의와 함께 나타났다. 자유와 폭정, 개성과 무질서는 풀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었다. 르네상스는 소규모의 상점 주인이나 소시민들의 문화가 아닌 부유한 귀족과 부르주아 문화로, 그들의 경제적인 활동과 부는 그들에게 자유의 감정과 개인이라는 자각을 갖게 해주었다. (45)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자본주의이 힘찬 주인공들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했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새로운 자유는 그들에게 두 가지 사실, 즉 힘에 대한 증대된 감정과 그와 함께 고립과 의혹과 회의주의의 증대, 그리고-그 결과로서- 불안감의 증대를 가져다준 것 같이 보인다. (46)
르네상스 (시대는) (…) 부유한 소수의 세력가들이 지배한 사회였으며, 또한 그들은 이 시대 문화의 정신을 표현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낳게 한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반면에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도시의 중ㆍ하층계급과 농민들을 대상으로 했다. (…) 서유럽에서 근대자본주의의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도시 중산계급이었다. (47)
이러한 두 운동의 사회적 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르네상스의 정신과 종교개혁의 정신을 각각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47)
길드는 구성원들 사이의 심한 경쟁을 일절 금하고 원자재의 구입이라든가 제품 가격에 대해 서로 협조할 것을 강요했다. (…) 비록 이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할지라도 길드가 상호 간의 협동에 기인하여 구성원들의 삶을 비교적 안전하게 했다는 데는 많은 학자들이 한결같이 동의하고 있다. (48)
제2절 종교개혁의 시대
사상이란 어느 사회 집단의 강력한 심리적 요구들에 호응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역사상 강한 힘이 될 수 있다. (58)
중세교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의지의 자유, 그리고 인간 노력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또한 신과 인간의 유사성과 신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강조했다. 인간은 모두 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평등하며 형제와 같다고 생각되었다. 이와 함께 의지와 인간의 노력에 대하여 강조하는 경향도 더욱 증대되어 갔다. 르네상스의 철학과 중세 말기의 가톨릭 교의는 경제적 지위로써 권력과 독립의 감정을 가지게 된 사회 집단에 유포되었던 정신을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루터의 신학은 중산계급의 감정을 표현했는데, 교회의 권위에 대해 투쟁하며 새로운 유산자 계급에 대해서는 분노를, 신흥 자본주의에는 위협을 느꼈던 중산계급은 무력감과 개인적인 허무감에 압도되고 있었다. (65)
루터의 사상체계는 (…) 종교적인 문제에서 인간에게 독립성을 부여했다. 즉, 루터가 교회로부터 그 권위를 빼앗아 이를 개인에게 부여했고, 그의 신앙과 구원의 개념은 주관적 및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으며, 개인이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것을 타율적으로 부여하는 권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65)
근대적 자유의 또 다른 측면은 개인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온 고독과 무력함인데, 이 역시 독립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에 기원을 두고 있다. (66)
회의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는데, 회의를 침묵시키고자 하는 요구는 근대철학과 과학을 발달시키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다. 많은 합리적인 회의는 합리적인 해답을 통해서 비로소 해결되어 왔지만, 비합리적인 회의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인간이 소극적인 자유로부터 적극적인 자유로 발전하지 않는 한 결코 소멸될 수 없다. (…) 회의 그 자체는 인간이 고독을 극복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인간적인 요구라는 점에서 이미 있는 것이 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69~70)
루터의 신에 대한 관계는 완전한 복종이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신앙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만일 그대가 완전히 신에게 복종하여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하면, 전능하신 신께서는 기꺼이 그대를 사랑하여 구원할 것이고, 만일 결함과 의심뿐인 자아를 철저하게 제거해 버린다면, 그대는 비로소 그대 자신의 허무감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신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교회의 권위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구원을 받는 본질적인 조건으로써 인간에게 전적인 복종과 자아의 절멸을 요구한 전제군주적인 신의 권위에 복종시켰다. 루터의 ‘신앙’은 자기를 깨끗이 버림으로써 비로소 사랑을 받게 된다는 확신을 의미했는데, 이는 국가라든가 ‘지도자’에 대한 개인의 전적인 복종의 원리와 많은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는 해결방법이었다. (71~72)
물론 그는 교회의 권위와 대항하여 싸웠고, 새로운 유산계급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한편 농민의 혁명적인 경향을 지지하기도 했지만, 정작 황제라는 세속적인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가장 열렬히 요구했다. (72)
경제문제에 관한 루터의 견해는 전형적으로 중세적이었는데, (…) 그의 경제문제에 관한 생각이 전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무가치함을 강조한 것과는 대조적이어서, 인간은 단지 세속적인 권위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성과라는 목적을 위해서도 그의 삶을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권위에 대한 복종의 발전에의 길을 열어놓았다. 오늘날 이러한 경향은 파시스트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인생의 목적은 ‘보다 높은’ 권력 소지자와 지도자 및 민족공동체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73~74)
칼뱅과 루터의 교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많지만, (…) 그 하나는 칼뱅의 예정설이다. (…) 칼뱅의 예정설은 (…) 신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총을 예정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천벌을 결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정설에 새로운 면을 부여했다.
구원이냐 영원한 결별이냐 하는 것은 (…)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76)
칼뱅의 (…) 이 예정설은 나치스의 이데올로기에 가장 생생한 형태로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불평등이 있다는 원리이다. 칼뱅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두 종류, 구원되는 인간과 영원한 천벌을 받도록 정해진 인간이 있다. 이러한 운명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어, 이 세상에서의 어떠한 행위로도 이를 변경시킬 수 없고, 또한 인간들 사이에 어떠한 연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 칼뱅파의 사람들은 참으로 천진난만하게도 자기들이야말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에 의해 천벌을 받도록 정해진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앙이 심리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심한 멸시와 증오로 나타나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77~78)
칼뱅의 교의가 루터의 교의와 다른 또 하나의 대단히 중요한 점은 도덕적인 노력과 고결한 삶의 중요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도 ‘운명을 변경’시킬 수 없으나, 능히 노력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구원을 받은 사람에 속하는 증거이며, 인간으로서 반드시 획득해야 할 미덕은 겸손과 중용中庸, 모든 사람이 자기의 정당한 몫을 가지는 의미에서의 정의, 그리고 인간을 신과 연결시키는 경건함이라고 한다. 칼뱅주의가 더 발전하면 고결한 삶과 끊임없는 노력의 의의를 강조하는 일도 중요성을 갖게 되며, 특히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세속적인 삶에서의 성공도 구원의 표시라는 생각이 중요성을 갖게 된다. (78)
칼뱅주의는 끊임없는 인간적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이러한 교의는 얼핏 생각하면 인간의 노력은 그의 구원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교의와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 그러나 심리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 참을 수 없는 불안과 자기 자신의 하찮음에 대한 위축된 감정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칼뱅주의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그것은 열광적인 활동과 ‘무엇’을 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활동은 강제적인 성격을 띤다. (…) 이와 같은 노력과 활동은 내면적인 힘과 자기 확신의 결과로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절망적인 도피의 성격을 띤다. (78~79)
칼뱅주의에서의 노력에는 또 다른 심리적인 의미가 있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노력에도 지치지 않으며, 또한 세속적인 일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행위에서도 성공하는 등은 그가 택함을 받은 인간의 하나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79)
칼뱅주의에서는 이러한 노력의 의미는 종교적 교의의 일부분이었다. 본래 그것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노력에 관계되었지만, 그 후로는 직업상의 노력이나, 그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업상의 성패에 중점이 두어지게 되었다. 성공은 신의 은총을 받은 징조이며, 실패는 천벌을 받은 징조로 나타났다. (80)
전통적인 삶에서는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 이상 일하려는 충동은 없었다. 중세사회의 어떤 집단 사람들은 작업을 생산 능력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즐겁게 여겼으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일을 ‘해야 되었기’ 때문에 일을 했고, 이러한 필연성은 외적인 압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점은 사람들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보다는 내적인 충동에 의해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사회에서는 대단히 엄격한 주인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81)
‘양심’이란 스스로 자기 마음속에 끌어들인 하나의 노예감독이다.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소원과 목적에 따라 행위하도록 하지만, 그 소원과 목적이란 따지고 보면 외부 세계의 사회적 요구가 내재화된 것이다. 양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정하고도 잔인하게 쾌락과 행복을 금하여, 전 생애에 걸쳐 신비적인 죄과에 대한 속죄를 하게 한다. (84)
봉건사회라는 중세적 체제의 붕괴는 사회의 모든 계급에 걸쳐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개인은 홀로 떨어져 고립되었다. 곧, 개인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자유는 이중적이었다. 인간은 그때까지 누렸던 안정성과 더불어 의심할 바 없는 소속감을 상실했으며, 경제적 및 정신적으로 개인의 안전함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주던 세계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결과 개인은 고독과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또한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생각하는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으며,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85)
그러나 서로 다른 사회 계층의 구성원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삶의 상황에 따라 이 이중적인 자유는 불평등한 무게로 작용했다. 가장 성공한 사회 계층만이 상승일로인 자본주의로부터 이익을 얻어 실제로 부와 권력을 누렸다. (…) 이 새로운 유산귀족은 (…) 그러나 (…) 대중을 지배하는 외에,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 역시 근본적으로 불안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자유의 적극적인 의미는 새로운 자본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귀족의 기반 위에서 성장한 문화, 곧 르네상스의 문화에 표현되었다. (85~86)
자본주의의 대두는 물론 독립과 창의를 증대시켰지만, 중산계급에게는 일대 위협이 되었다. (86)
새로운 종교적 원리는 중산계급의 구성원이 느끼고 있던 것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합리화시켜 체계화함으로써 확대시키고 강화했다. 새로운 종교는 그 이상의 일, 즉 개인에게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철저하게 시인함으로써 전 생애를 속죄하는 과정으로 삼아, 극도의 자기비하와 끊임없는 노력으로써 비로소 회의와 불안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위협당하고 추방되어 고립된 인간이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의 방향을 정함으로써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 한 인간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87)
4장 근대인을 위한 자유의 양면성
근대적 산업체계는 개인을 발전시켰지만- 결국 개인을 더욱 무력하게 했고, 그것은 자유를 증대시켰다- 그러는 한편 새로운 종류의 의존상태를 만들어내었다. (90)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는 단지 인간을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자유를 증대시켜 능동적이며 비판적인, 그리고 책임질 수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발전해가는 자유의 과정에 미친 영향이었다면, 그와 동시에 그것은 개인을 더 한층 고립시킴으로써 개인들에게 하찮음과 무력감을 갖게 했다. (94)
모든 인간이 정연하고 뚜렷한 사회조직 속에서 고정된 위치를 감수해야 했던 중세의 봉건제도와는 달리, 자본주의 경제에서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웠다. (…) 그러나 ‘……으로부터의 자유’가 진전함으로써, 이 원칙은 개인 상호 간의 유대를 끊음으로써 개인은 동료로부터 분리되어 고립되었다. 이 발전은 종교개혁의 교리에 의해 준비되어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개인의 신에 대한 관계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 그런데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에게 오직 혼자 신 앞에 서게 했다. (94)
루터에게 신앙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이었으며, 칼뱅에게서 구원에 대한 확신도 이와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이 홀로 신의 권위 앞에 서게 되면 심한 압박감으로 하여 인간은 완전한 복종을 함으로써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94~95)
자본주의는 개인에 대한 긍정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직접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 연결되어 있는 자기부정과 금욕주의도 초래했다. (95)
중세적 조직에서 자본은 인간의 하인이었지만, 근대적 조직에서 자본은 인간의 주인이 되었다. 중세사회에서 경제활동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었고, 그 목적은 인생 자체였다. (95)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활동과 성공, 그리고 물질적 획득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 이렇게 인간외적人間外的인 목적에 쉽사리 자기를 복종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경향은 실제로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96)
증오는 파괴를 구하는 강렬한 욕망이며, 사랑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려는 정열적인 욕구이다. 즉, 사랑은 ‘정서’가 아니다. 대상의 행복ㆍ성장ㆍ자유를 지향하는 적극적인 추구이며 내적인 관련성이다. (99)
“애정이란 사랑받는 사람의 만족이 사랑하는 사람의 만족과 똑같이 뜻있고 바람직한 상태이다.” (설리번) (99, 주1)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부여한 새로운 자유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자유가 이미 그에게 미치고 있던 영향을 더욱 발전시켰다. 개인은 점점 고독해지고, 고립되어 자기 밖에 있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에 조종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는 ‘개인’이 되었으나 당황스럽고 불안한 개인이었을 뿐이다. 이 잠재되어 있는 불안이 노출되는 것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 있었다. 먼저 그의 자아는 재산의 소유에 의해 지탱되었다. (104)
자아를 지탱하는 다른 요소들은 명성과 권력이었다. 그것들의 일부는 재산의 소유에서 생겨나고, 때로는 경쟁을 이겨냄으로써 직접 생겨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이나 그들을 지배하는 힘은 재산에 의한 도움에 더하여 불안정한 개인적 자아를 지탱했다. (104)
재산이나 사회적 명성을 거의 갖지 못한 인간에게는 가족이 개인적인 특권의 원천이었다. (…) 가족 외에 국가적인 명예도 개인에게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개인적으로는 보잘것없는 인간일지라도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 다른 어떤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을 자랑으로 삼을 수 있었다. (105)
자아를 지탱하는 요소들은 단순히 불안과 불안정감에 대한 보상을 도왔을 뿐이다. 그 요소들은 불안과 불안정감을 근절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은폐함으로써 개인이 의식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의식적인 안정감은 표면적인 것으로, 지탱해주는 요소들이 있을 때만 그 효과가 있었다. (105)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더욱 발전한 자본주의의 독점적 상태와 함께 (…) 개인적 자아를 악화시키는 성향의 요소들은 그 비중이 커지고, 개인을 강하게 하는 요소들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개인의 무력감과 고립감이 증대되고, 모든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강화되는 한편, 개인의 경제적 성취에 대한 가능성은 축소되었다. (106)
경제적 영역에서 진실인 것은 또한 정치적 영역에서도 진실이다. (111)
오늘날 개인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19세기의 선견지명이 있는 사상가들에 의해 예견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회의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독과 하찮음의 감정에 압도된 무력한 개인을 그리고 있다. 니체는 뒷날 나치즘에서 노출된 것과 같은 허무주의를 예견하고, 그가 현실에서 본 무의미하고, 목표도 지니지 않은 개인의 부정으로서 ‘초인超人’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하찮음이라는 주제는 카프카의 작품에서 가장 정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114)
그러나 이들 작가들이 그린 것과 같은, 또는 소위 수많은 신경증 환자가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개인의 고립감과 무력감을 보통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 그것은 매일같이 판에 박은 듯한 활동, 개인적 또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발견하는 확신과 칭찬, 사업에서의 성공, 모든 종류의 기분전환, ‘즐기고’ ‘사귀고’ ‘놀러 다니는’ 등에 의해 은폐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립감과 두려움, 당황스러움은 여전히 남는다.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을 오래도록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부터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지고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갈 수 없는 한,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도피의 중요한 사회적 통로는 파시스트 국가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지도자에의 예속이며, 민주주의 국가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강제적인 순응이다. (114~115)
5장 도피의 메커니즘
제1절 권위주의
마조히즘적 노력과 사디즘적 노력은 둘 다 견딜 수 없는 고립감과 무력감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경향이 있다. (129)
개인적인 자아를 소멸시킴으로써 참을 수 없는 고립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마조히즘적인 노력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면은 자기 외부에 있는 보다 크고, 보다 강력하고 전체적인 권력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 몰입함으로써 유대감을 가지려는 시도이다. 외부의 그 강력한 권력은 개인으로도, 제도로도, 신으로도, 국가로도, 양심으로도, 또는 육체적 강제로도 대체될 수 있다. 강력하고, 영원하고, 매혹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외부의 강력한 권력과 일체가 됨으로써 개인은 그 강력함과 영광에 참가하려고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그와 연관된 모든 힘과 자부심을 포기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완전성을 잃고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대신, 그 자신이 몰입한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안전과 자부심을 획득한다. 또 그는 회의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저항할 수 있는 안전성도 획득한다. (132~133)
이렇게 하여 마조히즘적인 인간은 외부적 권위, 내면화된 양심, 심리적 강제 등 가운데 그 어느 것을 주인으로 정하고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결정을 내리는 일로부터 해방된다. 곧, 자기 운명의 최후적인 책임을 지는 일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어떤 결정을 해야 할 것인가 망설일 필요 없이 그 회의에서 해방되며, 또한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회의에서도 해방된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는 그가 굴복함으로써 연대를 이룬 강력한 권력과의 관계에 의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의 삶의 의미와 자아의 완전성은 스스로 굴복한 보다 큰 권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133)
마조히즘적인 속박은 도피이다. 개인적 자아는 해방되었으나 그의 자유는 실현될 수 없다. 그의 자아는 불안, 회의, 무력감에 의해 압도되어 ‘이차적인’ 속박에서 안정감을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상태를 마조히즘적인 속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133)
사디즘은(…) 타인을 완전하게 지배하고자 하여, 그를 자신의 의지에 대해 무력한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에게 군림하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그의 신이 되어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다. 그의 자아를 소멸케 하며, 그를 노예로 삼은 것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 가운데 근본적인 목적은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지배하는 힘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어,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자에게 고통을 참고 견디게 하는 일보다 더 커다란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타인- 또는 다른 생물-을 완전히 지배하는 쾌락, 이것이 사디즘적인 충동의 본질이다. (134)
심리학적으로 이 두 성향은 하나의 근본적인 욕망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곧, 참을 수 없는 고독에 대한 개인의 절망적인 대처이며, 자기 자신의 약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 바로 그것이다. (135)
사디즘적 인간은 마조히즘적 인간에게 그 대상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불안을 해결하가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이 필요하다. 마조히즘의 경우와는 달리 타인에게 말살당함으로써 안정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말살함으로써 안정감을 얻는다. 어느 경우에나 개인적 자아의 전체성은 상실된다. (…) 마조히즘적 성향과 사디즘적 성향은 서로 혼합되어 있다. 이들 양자는 표면적으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욕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인 어느 한 성향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135)
사디즘의 경우 대체로 적의가 보다 의식적이고 직접 행위에 표현되지만, 마조히즘에서는 적의가 대부분 무의식적이고 간접적 표현 형태를 취한다. (135~136)
새도마조히즘은 (…) 사랑과 혼동되는 수가 있다. 특히 마조히즘적 현상은 사랑의 표현으로 보이기 쉽다. 타인을 위해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는 태도나, 타인에게 개인의 권리나 주장을 양보하는 일 등은 ‘위대한 사랑’의 본보기로서 칭송되고 있다. (…) 사실상 그런 경우 ‘사랑’이란 본질적으로는 마조히즘적인 갈망이고, 그 인간의 공서적共棲的 요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사랑은 평등과 자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그것이 한쪽의 복종과 완전성의 상실에 입각해 있다면, 그 관계는 아무리 합리화해도 마조히즘적인 의존에 불과하다. 사디즘 또한 종종 사랑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만일 당사자를 위해 지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사람을 지배하는 일도 사랑의 표현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본질적인 요소는 지배의 향락에 불과하다. (137)
사디즘은 (…) 권력에 대한 욕구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구는 사디즘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기도 하다. (137)
마치 성적 사디즘이 성적 사랑의 도착倒錯이듯이, 지배라는 의미에서 권력은 능력의 도착이다. (138)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인 특성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전인격이 그런 특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특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 경우 전자만을 새도마조히즘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138~139)
권위란 어떤 자가 ‘가지고 있는’ 자질이 아니라, 어떤 자가 다른 자를 그보다 우월한 자로 우러러보는 인간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권위라고 할 수 있는 우열관계와 억제적인 권위라고 할 수 있는 우열관계와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140)
공공연한 권위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가 우리를 지배한다. 그것은 상식, 과학, 정신적 건강, 정상성 또는 여론으로 가장되어 있다.
그것은 강제성을 띠지 않고 조용히 설득하는 것처럼 보이며, 자명한 일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을 뒤덮고 있는 것은 미묘한 암시의 분위기이다. 익명의 권위는 공공연한 권위보다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곳에 자기가 복종할 질서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익명의 권위에는 명령도, 명령하는 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게 포격을 받는 일과 흡사해, 맞서야 할 사람도, 싸워야 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42~143)
권위주의적인 성격의 문제(에서) (…) 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은 권력에 대한 태도이다. (…) 권력은 그것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힘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열광시킨다. (143)
권위주의적 성격에는 (…)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곧, 권위에 도전하고, ‘위로부터’의 어떠한 영향에도 반감을 갖는 성향이다. (…) 이런 유형의 인간은 언제나 어떤 권위에도, 심지어는 자신의 이익을 확대하고, 억압의 요소를 갖지 않은 요소에도 반역한다. 때로는 권위에 대한 태도가 분열되기도 한다. 곧 어떤 권위- 특히 그 무력함에 실망한 권위-에는 저항하지만, 이윽고 보다 큰 힘과 약속에 의해 마조히즘적인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권위에는 복종한다. (143)
권위주의적 성격의 권위에 대한 싸움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도전에 지나지 않으며, 권위와 싸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도피행위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복종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다. (144)
권위주의적 성격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조건들을 좋아하고, 그리고 기꺼이 운명에 복종한다. (144)
운명은 철학적으로는 ‘자연법’ 또는 ‘인간의 운명’으로, 종교적으로는 ‘신의 의지’로, 윤리적으로는 ‘의무’로써 합리화된다. 명확하게도 그것은 권위주의적 성격에서는 언제라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외부의 보다 우월한 힘이다. 또한 권위주의적 성격은 과거를 숭배한다. (145)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적 체험을 절대적 의존의 경험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마조히즘적 경험에 대한 정의이다. 이 의존하고자 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죄가 특별한 역할을 떠맡는다. 원죄原罪라는 생각은 미래의 모든 세대를 괴롭히겠지만, 그것은 권위주의적 경험의 특징이다. (145)
모든 권위주의적 사고에 공통된 특징은 인간의 삶이 자아와 관심, 그리고 소망을 초월한 어떤 힘에 의해 결절된다고 믿는 확신이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이러한 힘에 복종하는 길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의 무력감이 마조히즘 철학의 중심사상이다. (145)
권위주의적 성격에는 결코 행동, 용기, 신념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 권위주의적 성격에서의 행동은 근본적 무력감에 뿌리박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행동은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어떤 자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 권위주의적 성격은 켤코 공격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는 우월한 권력에 의지하여 그의 행동력을 획득한다. 그에게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죄 또는 열등감에 대한 분명한 징표가 된다. 그리고 만일 믿고 있는 권위가 쇠약해지면 그의 사랑과 존경은 즉시 경멸과 증오로 변한다. 그렇지만 그는 보다 더 강한 다른 힘의 도움을 받는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현존하는 권력을 공격할 수 있는 ‘공격 정신’은 결핍되어 있다. (146)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 성격이 가지는 용기란, 본질적으로는 운명이나 그들의 ‘지도자’가 결정한 사항을 참아내는 용기이다. 불평하지 않고 견디어내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다. 그것은 고통을 그치게 한다든가 감소시키고자 하는 용기는 아니다. 운명을 바꾸지 않고 그것에 복종하는 의지가 권위주의적인 성격의 영웅주의이다. (146)
권위가 강하고 명령적인 한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을 믿는다. (…) 권위주의적 철학은 (…) 본질적으로 상대주의이고 허무적이다. 그것은 극단적인 절망과 완전한 신앙의 상실에 뿌리를 두고 있어, 허무주의와 생명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146~147)
권위주의적인 철학에서 평등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 그가 보기에 이 세계는 힘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 다시 말해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로 이루어져 있다. 새도마조히즘적 추구에 입각하여 그는 다만 지배와 복종만을 경험할 뿐 결코 연대책임은 경험하지 못한다. 성의 차별이나 인종 차별 역시 그에게는 우월 또는 열등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 차별을 그는 생각할 수 없다. (147)
새도마조히즘적 추구와 권위주의적 성격은 무력감이 보다 극단적인 형태를 취하는 경우이며, 또한 숭배하거나 지배하는 대상과 공서적共棲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무력감에서 벗어나려 하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147)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심리학의 중심적인 현상으로 생각한 것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다. 그러나 그는 그 현상에 대한 적절한 해석에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물론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성적 애착이란 현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또 그로 인한 모순이 때로는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하더라도, 성적 애착이나 모순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집착할 때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일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결코 아이들 자신의 자발성에 대한 필연적인 속박을 뜻하지는 않는다. (…) (아이들이) 권위의 상징과 연대하고자 하는 욕구는 부모 중 어느 한쪽에 대해 최초의 성적 애착을 지속하려는 의지가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발전성과 자발성에 장애가 발생함으로써 빚어지는 불안으로 야기된다. (151)
제2절 파괴성
파괴성이 새도마조히즘적인 노력과 다른 점은,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대상과 함께 하는 공서共棲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제거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파괴성 역시 (…) 참을 수 업는 개인의 무력감과 고립감에 기인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무력감은 그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다. (…) 외부 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외부 세계의 압박에서 자기를 구제하는 거의 자포자기적인 최후의 시도이다. 사디즘은 대상과 연대하려고 하지만, 파괴성은 대상을 제거하려고 한다. 사디즘은 타인을 지배하여 약체화된 자기를 강화하려고 하지만, 파괴성은 외부 세계로부터의 위협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고 한다. (152)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는 인간관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파괴성이 도처에 대단히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부분은 파괴성으로 의식되지 않으며,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 사랑, 의무, 양심, 애국심 등이 지금까지 타인이나 자기를 파괴하기 위한 가면으로서 이용되어 왔으며, 현재도 이용되고 있다. (152)
삶을 구하는 충동과 파괴를 구하는 충동은 독립된 요인이 아니라 서로 얽힌 상태로 의존해 있다. 삶을 구하는 충동이 방해받을 때 파괴를 추구하는 충동은 강해지고, 삶이 실현될수록 파괴적 충동은 약해진다. ‘파괴성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삶의 폭발이다.’ (155)
하류 중산계급의 파괴성이 나치즘을 발흥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나치즘은 이러한 파괴적인 추구에 호소함으로써 그 힘을 적에 대한 싸움에 이용했다. (156)
제3절 자동 순응성
이 특수한 메커니즘은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정상적인 개인들이 취하고 있는 해결방법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고 변화하는 것이다. 즉,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로 변화된다. 그와 함께 ‘나’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157)
합리화는 의혹을 설명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혹은 맨 처음에 있고, 합리화를 위한 생각은 단지 그 의혹의 감정을 그럴듯하게 하기 위해 나중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즉, 합리화를 위한 설명은 참된 설명이 아니라 행위의 뒤에다 덧붙인 것이다. (160)
어떤 사람이 언급한 내용의 논리성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합리화의 여부를 알 수 없다. (…) 중요한 점은 무엇이 생각되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되고 있는가이다. 능동적인 사고에서 비롯되는 사상이 언제나 새로우며 독창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전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바깥 세계이건 안의 세계이건 간에 거기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 수단으로 사고를 이용했다는 의미에서이다. 합리화에는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인식과 폭로의 성질이 결여되어 있다. 합리화는 오로지 자기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적 편견을 굳혀줄 뿐이며, 그것은 현실을 통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구를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사후적事後的인 시도이다. (164~165)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암시되는 어떤 것이다.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인간의 결정 행위는 인간이 두려운 고립감이나 생명, 자유, 안락함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내몰렸을 때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168)
본래의 자아란 정신적인 여러 활동의 창조적인 자아이며, 이에 비해 거짓 자아는 타인으로부터 기대되는 역할을 자기 이름 아래 행하는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분명 많은 역할을 하고, 주관적으로는 그 역할에서 자기는 ‘자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행위는 이 모든 역할에서 타인으로부터 기대되고 있다고 그가 생각하는 그 자체이며, 많은 사람들에게서-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더라도- 본래의 자아는 거짓 자아에 의해 완전히 억압되어 있다. (172)
자아의 상실과 함께 나타나는 거짓 자아의 대치는 개인을 심한 불안상태로 내몬다. 본질적으로는 타인의 기대에 대한 반영이며, 어느 정도 자신의 완전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회의가 따라다닌다. 이와 같은 완전성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순응을 강요당하고, 타인에 의해 줄곧 인정받고 승인됨으로써 자기의 완전성을 구하고자 한다. (173)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자동기계화는 인간의 무력함과 불안감을 확대시켰다. 그 때문에 인간은 안정을 부여해 주거나 회의에서 그를 구해 준다고 믿는 새로운 권위에 쉽사리 복종하게 된다. (173)
6장 나치즘의 심리
나치즘은 심리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심리적 요인 그 자체는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것임이 이해되어야 하고, 경제적ㆍ정치적인 문제인 나치즘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게 된 배경은 심리적 기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76)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히틀러 정부는 ‘독일’과 같은 것이 되었다. (177)
노동자계급이나 자유주의적 및 가톨릭적인 부르주아지의 소극적인 체념의 태도와 대조적으로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작은 상점 주인, 직공, 화이트칼라 등으로 이루어진 하류 중산계급에 의해 열렬히 환영되었다. (178)
그 기록은 명백하게 남아 있으나, 그 약속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치즘은 진정으로 정치적 및 경제적인 원리라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치즘의 원리는 바로 극단적인 기회주의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84~185)
문제는 일반적인 발전과정에서는 돈이나 힘을 획득할 기회가 거의 없는 몇 십만의 소시민들이 나치 관료기구의 구성원으로서 상류계급으로부터 강제로 그 상당한 부富와 위신을 나누어 받았다는 데 있었다. 나치 기구 구성원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정적으로부터 빼앗은 일자리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록 보다 많은 빵을 획득하지는 못했으나 여러 가지 구경거리를 얻었다. 이러한 사디즘적인 광경과 다른 인류에 대한 우월감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감정적 만족은 적어도 한참 동안은 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빈곤하다는 사실을 보상할 수 있었다. (185)
나치즘은 하류 중산계금의 낡은 사회경제적 지위의 파괴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을 심리적으로 소생시켰다. (185)
권위주의적 성격의 본질은 사디즘적 및 마조히즘적 충동의 동시적 존재로 설명되어 왔다. 사디즘이 타인에 대해 파괴성이 혼합된 절대적인 지배력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마조히즘은 자기를 강력한 힘에 종속시킴으로써 그 힘의 강인성과 영광에 참여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디즘적 경향과 마조히즘적 경향 모두 고립된 개인이 자신의 무력함과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공서적 관계를 바라는 욕구에 의한다. (185~186)
새도마조히즘적 성격에서 나타나는 매우 전형적인 현상인 강자에 대한 사랑과 무력한 자에 대한 증오는 히틀러나 그 추종자들의 숱한 정치적 행동을 설명해준다. (…) 히틀러는 기존의 강한 권력과는 절대로 싸우지 않고, 그가 본질적으로 무력하다고 생각한 집단과는 항상 싸웠다. 히틀러의 ‘혁명’은 현존하는 권력의 비호 아래서 일어났으며, 그들의 마음에 드는 대상은 자기 자신을 방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 ‘융화’는 히틀러와 같은 성격에서는 굳이 우정이랄 수는 없고, 오직 혐오를 일으키는 정책일 뿐이다. (193~194)
하류 중산계급을 만족스럽게 한 것은 나치의 이데올로기만은 아니었다. 정치적 실천이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것을 실현해 나갔다. 하나의 계층 제도가 창설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위에 복종해야 할 지도자를 모시고 자기 밑에는 지배력을 느끼게 하는 추종자를 가지게 되었다. (197)
공서적 삶으로의 도피는 잠시 동안 개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으나, 고통을 완전하게 제거하지는 못한다. 인류의 역사는 증대하는 개성화의 역사이며, 자유의 역사이다. 자유의 추구는 형이상학적인 힘이 아니므로, 자연의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개성화의 과정과 문화 성장의 필연적 결과이다. 권의주의적 조직은 자유의 추구를 촉진하는 근본적 조건을 제거할 수는 없으며, 또한 이러한 조건에서 비롯되는 자유의 추구를 근절시킬 수도 없다. (198)
7장 자유와 민주주의
제1절 개체성의 환상
그렇더라도 국내외적인 파시즘의 위협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우리가 우리 사회 안 어디에서나 개인의 하찮음과 무력함이라는, 파시즘이 대두할 수 있는 온상이 될 만한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과오는 없을 것이다. (200)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또한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내부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가 자기의 개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200~201)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떤 생각이 이전에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생각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활동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그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201)
기독교는 죽음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하여 사후死後의 삶을 약속함으로써 불행한 개인을 달래려고 했다. (204)
보다 많은 사실을 알면 알수록 실제의 지식에 보다 확실하게 도달한다는 슬픈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산발적이며 서로 상관없는 사실들이 머릿속에 주입된다. 그들이 시간과 에너지는 사실을 보다 많이 주입받기 위해 소비되어 거의 생각할 틈조차 없다. 분명히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허구적이다. 그러나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 만큼이나 사고에 장애가 된다. (206)
개인의 가장 큰 힘은 그의 성격 통합의 최고점에 기인하지만,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투명성의 최고점에도 기인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인간의 강한 힘과 행복을 지향하는 근본적인 명령의 하나이다. (207)
우리의 욕구-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도-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주어진 것인가를 아는 데 특별한 어려움은 권위와 자유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근대사가 전개되는 동안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로, 국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로 교체되고, 오늘날에는 양심의 권위는 순응의 도구로서의 상식이나 여론이라는 익명匿名의 권위로 바뀌었다. 우리는 공공연한 낡은 형태의 권위에서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새로운 권위의 희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 사는 자동인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환상에 의해 개인은 스스로의 불안을 의식하지 못한다. 환상이 도움이 된다면 이것이 전부이다.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아는 약체화되고, 그 때문에 그는 무력감과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다. 그는 순수한 관계를 상실한, 사람이건 물건이건 모두 도구화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만든 기계의 한 부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순수한 안정이 기초가 되어야 할 자아를 상실해 버린다. (211)
한 인간이 심리적으로 자동인형인 것은 설사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더라도 감정적ㆍ정신적으로는 죽어 있음을 의미한다. (…) 만족과 낙천주의를 가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 배후에서 심각한 불행에 빠진 채 근대인은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는 개체성이라는 개념에 절망적으로 매달린다. 즉, 그는 타인과 ‘달라지기’를 원하고, 또한 ‘다르다’는 것만큼 그가 찬양할 말은 없다. (…) 근대인은 삶에 굶주려 있으나, 자동인형이 되었으므로 자발적인 활동이란 면에서 삶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 대용품으로서 어떤 종류의 흥분이나 전율- 음주, 스포츠, 또는 영화에 나오는 가공인물을 대신하여 경험하는 흥분이나 전율 –이라도 취하게 된다. (212)
인간의 자동인형화가 가져오는 절망은 파시즘의 정치적 목적을 육성하는 풍요한 토양이다. (213)
제2절 자유와 자발성
모든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성격의 자발적인 행위 속에 존재한다. (215)
자발적인 행위는 개인의 고립감이나 무력감에 의해 강요당하는 강박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외부에서 시사되는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하는 자동인형의 행위도 아니다. 자발적인 활동은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이며, (…) ‘자신의 자유의지’를 의미한다. (…) 이러한 자발성의 전제는, 성격 전체를 받아들여 ‘이성’과 ‘자연’과의 분열을 제거하는 일이다. (215)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의 동일성을 희생하지 않고 고립감의 공포를 극복하는 길이다. (…) 사랑은 이와 같은 자발성을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요소이다. 사랑은 자아를 상대 속에 용해시키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소유하는 것도 아니며, 상대를 자발적으로 긍정하며, 개인적 자아의 보존을 바탕으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역학적인 성질은 바로 이러한 양극성 속에 있다. 곧,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려는 욕구에서 생겨나며, 일체로 이끌지만, 개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217)
모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하여 개인은 세계를 품에 안는다. 그의 개인적 자아는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강해지고 확고해진다. 왜냐하면, 자아는 적극적일수록 강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재산의 소유도, 감정 또는 사상과 같은 정신적인 능력의 소유도, 소유 그 자체에는 진정한 힘이 없다. 또한 사물의 사용이나 조작 속에도 역시 힘은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의 것이란 사람이건 무생물이건 창조적인 활동에 의해 우리와 순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의 자발적인 활동에 의해 생기는 이러한 성질만이 자아에 힘을 주고, 나아가서는 자아 완전성의 기초가 된다.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없거나, 순수하게 느끼고 생각한 바를 표현할 수 없거나, 그 결과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 자아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거나 하는 일이 열등감이나 하찮다는 느낌의 근원이다. (217~218)
만일 개인이 자기 자신 또는 삶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극복한다면, 그리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외부 세계를 포용하는 것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는 개인으로서 힘을 획득하여 안정을 얻는다. 이 안정은 외부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가 일차적 속박이 되듯이 전前 개인적 단계에서의 특정적인 안정과는 다르다. 새로운 안정은 개인이 외부의 보다 높은 힘에 의한 보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삶의 비극적인 성질이 배제되는 것과 같은 안정도 아니다. 새로운 안정은 역학적인 것으로,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인 활동에 기인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순간마다 획득되는 안정이다. 그것은 자유만이 줄 수 있는 안정이며, 환상이 필요한 조건을 배제하기 때문에 환상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안정이다. (219)
자아의 독자성은 결코 평등의 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명제는, 인간은 모두 동일한 인간성을 부여받았고, 인간 존재의 근본적 운명을 나누어 가지며,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희구하는 양도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는 지배,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연대의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의 개념은 모든 인간이 비슷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220)
적극적인 자유는 또한 다음과 같은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즉, 독자적인 개인의 자아보다 더 높은 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의 삶의 중심이며 목적이라는 것, 또 개체성의 성장과 실현은 목적 그 자체로서, 설사 보다 큰 존엄을 가지는 것 같이 여겨지는 목표에도 결코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20)
모든 참된 이상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분석과 어떤 조건에 의해 초래되는 결과에 입각해 대답할 수 있는 경험적인 문제이다. (221)
희생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우리의 육체적 자아의 요구와 정신적 자아의 목표가 갈등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우리는 정신적 자아의 완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육체적 자아를 때로는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는데, 이는 삶의 비극적인 사실의 하나이다. 이러한 희생은 결코 그 비극적인 성질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비록 지고至高의 이상을 위해 참고 견디는 경우라 하더라도 결코 달콤하지 않다. 죽음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우리 개체성에 대한 최고의 긍정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희생은 파시즘이 가르치는 ‘희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파시즘에서의 희생은 인간이 자아를 확보하기 위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최고의 대가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조히즘적 희생은 삶의 달성을 바로 삶의 부정, 자아의 소멸 속에서 찾는 것이다. 그것은 파시즘이 모든 면에 걸쳐서 지향하는 것-개인적 자아의 소멸과, 보다 높은 힘에의 철저한 복종-에 대한 최고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살이 삶의 최대의 전도顚倒인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희생의 전도이다. 참된 희생은 정신적인 완전성을 희구하는 비타협적인 욕구를 전제로 하며, 이를 상실한 인간의 희생은 단지 정신적인 파탄에 대한 은폐에 지나지 않는다. (223)
민주주의의 미래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근대사상의 이념적 목표였던 개인주의 실현의 정도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는 개인주의의 범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가 빈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자유의 승리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 문화의 목표인 동시에 목적인 사회, 삶이 성공이나 그 밖의 어떠한 것으로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사회, 개인이 국가 또는 경제기구와 같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힘에도 종속되지 않고 조종되지 않는 사회, 마지막으로 개인의 양심이나 이상이 외부 요구의 내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것이며 그의 자아의 특성에서 생겨나는 목표를 표현하는 그런 사회로 발달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225)
자유의 실현을 위한 유일한 기준은 개인이 자신의 삶 및 사회의 삶을 결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그것도 단지 투표라는 형식적인 행동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과 일에서, 또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하는 점이다. (227)
인간이 사회를 지배하고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경제기구를 종속시킬 때에만, 또한 인간이 적극적으로 사회 과정에 참여할 때에만,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 모든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승리는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고 공격태세를 취하여, 지난날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품었던 것과 같은 목표를 현실화하는 데까지 전진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간 정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신념, 삶과 진리에 대한 신념 및 개인적 자아의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을 수 있을 때에만 니힐리즘의 힘을 이겨낼 수 있다.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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