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항자(密航者)란 「법적으로 유효한 증명서 없이,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몰래 외국에 들어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에 따라 국가마다 「출입국관리법」을 만들어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런데 이 밀항의 역사는 유구한 것 같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아도 거의 1천년 전인 고려 문종(文宗) 임금의 아들이며 한국 불교 천태종을 창설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도 송(宋)나라에 밀항으로 건너갔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2022년도 '라임 재판' 출석 직전 전자팔찌를 끊고 도주한 뒤 잡힌 K모씨(某氏)도 오래전부터 '중국밀항'을 준비해왔던 것으로 전해져 관계당국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었다고 보도됐다.
중국에서도 북미쪽으로 밀항한 자들이 현지에서 정착하여 불법 취업으로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돈을 부쳤는데 복건성(福建省) 연강(連江)현 관두진에서만 주민 1만여명이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매년 가족에게 송금하는 돈은 5천만달러가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고, 2000년 설(春節)에는 하루 3천만 달러가 송금되는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통상 밀항의 제일 큰 목적은 돈벌이에 있다고 하는데 위의 사례들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밀항의 방법으로는 비행기는 거의 불가능하므로 주로 선박을 통해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밀항자가 있는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박측 입장으로서는 밀항자가 발견될 경우, 그들의 국적을 증명할 수 있거나 자백(自白)이 있어야 다음 기항지에서 당사국의 정부(영사관이나 대사관)에 인계할 수가 있지만, 만약에 그것이 증명 안 되는 경우, 본인이 국적을 밝혀도 당사자국에서 자국민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그 밀항자는 경우에 따라서는 영영 선내에 머물도록 해야 하는 난감한 일이 발생한다. 또한 이에 수반되는 모든 경비는 선주(船主)부담으로 되어 있으므로 본선(本船)으로서는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밀항자가 발견되면 즉시 맨 먼저 옷을 벗기고 소지품부터 철저히 조사한다. 글자가 적인 종이는 무조건 압수 보관한다. 국적증명의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밀항자에 대한 대비책으로 보험을 부보하는 회사도 있다.
과거 역사적으로 지배국와 피지배국의 관계는 대개 비슷하지만 식민지가 독립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은 여전히 막강한 지배자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과 많은 식민지들, 네델란드가 300년 동안 지배한 인도네시아, 60년 가까이의 벨기에와 자이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고 35년간 지배한 일본의 경우들이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한동안 일본으로의 밀항이 심했던 배경도 이와 같은 현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밀항하다 적발된 밀항자를 수용하였던 귀에 익은 오무라(大村) 수용소의 통계를 살펴보면, 1950년 12월부터 1970년 9월까지 오무라 수용소에서 한국으로 송환된 자는 약 1만6,4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많은 돈을 주고 작은 선박의 밑바닥에 숨어 깜깜한 밤중에 출항했는데, 마침 폭풍을 만나 겨우 도착한 곳에 내렸다. 여기가 어디냐고 일본말로 물으니 우마야마라고 하기에 일본인줄 알았는데, 그곳이 지금의 경남 마산(馬山)이었다고 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마산(馬山)을 일본말로 우마야마라 했으니….
1986년 6월의 일이다. 아프리카의 자이르(Zaire)의 마타디(Matadi)항을 출항항 뒤의 일이다. 자이르란 나라는 이 [신항해일지 10_승선중의 발병(3) 5.통신국장의 눈수술]에서 자세히 기록한 바 있으니 참고하시면 된다.
대서양연안에서 한참 동안 콩고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선주(船主)는 홍콩회사이면서도 선박국적은 Panama였던 Eastern summit(이스턴스미트)호 시절이다. 총톤수 30,000톤 급의 다목적 화물선이었다. 벨기에 국영해운업체(CMB)가 옛 식민지였던 자이르와의 통상을 위해 자국(自國)선박을 투입하여 정기적으로 운항하던 것을 경비절감 수단으로 부정기선으로 바꾸고는 편의치적선인 Panama 선적의 본선(本船)을 용선(傭船)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양국 사이에는 밀수(密輸)나 밀항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마타디항을 출항하여 벨기에로 항해하는 선박들의 갑판사관(甲板士官)을 비롯한 부원들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출항전 밀항자의 색출이었다.
* 편의치적선(便宜置籍船 : 선적을(즉 명의만) 타국적으로 바꾼 선박.
남미 칠레에 입항했을 때의 'E/summit'호
통상 밀항자는 입국하려는 나라와 밀접한 연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전에 어떤 루트를 통하던 밀항하는 선박명, 출입항 날짜, 시간 등이 상호 연락되어야만 가능하며, 밀항에 성공해도 생활할 수 있도록 숙식을 제공 받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본선의 입항일자와 출항일자를 선장인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으니까.
식민지 시절에 어떤 형태로든지 먼저 건너가서 자리를 잡아 이미 그 나라 국적을 얻고 당당하게 잘살고 있는 부류들이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국(母國)의 친지들을 불러들이거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하는 거간꾼, 속칭 부로커들이 성업 중이었다. 방법은 선박밖에 없었다.
이미 마타디항(港)의 밀항자들은 국제적으로 해운업계에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홍콩의 선주로부터 조심하라는 문서나 전문(電文)도 몇 번이나 왔었다. 그래도 불가항력이었다. 알고 덤벼드는 도둑은 막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소련이나 유럽 선박에서는 항해 중 밀항자가 발견되면 즉시 인정사정없이 마치 쥐새끼 버리듯이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했다. 그럴 만하다고 수긍이 갔다. 그래도 뒤탈이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견된 경우는 다음 기항지에 미리 연락을 하고 입항하면 출입국관리사무소(Immigration)에서 나와 국적을 확인하고 데려가 해당 국가의 대사나 영사를 불러 인계한다고 했다.
6월 9일. 마타디항을 출항하여 10일째. 전날 저녁에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잠을 설쳤는데, 새벽에 당직사관이 밀항자가 있다고 보고해 왔다. 순간 섬찟했다. 5월 30일 출항했으니 꼬박 열흘은 굶었기에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먹을 것을 찾아 밤중에 나왔다가 발각된 것이다. 네 사람이었다. 몸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일등항해사와 갑판장은 당장 바다에 던져버리자고 노발대발하면서 지시(Order)만 기다린다. 그들을 사전에 발견하지 못한 일차적 책임자들이다. 벨기에인(人) 수퍼카고(감독)가 승선하고 있어 상의했다.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자기와는 관계없으니 “버리든 말든 선장이 알아서 하시오.” 한다. 흔히 있는 일이란다. 그만큼 일상화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너(船主)측 사장 영감의 찌프린 얼굴이 떠올랐다. 무조건 본선을 나무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고민 할 것 없이 나도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누구의 얼굴인지는 모르겠으나 근엄한 어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공자님의 모습이 아닐까도 싶었다. 막 돌 지난 아들 정모 녀석의 생글거리는 얼굴, 그리고 부처님 앞에 정성을 다해 백팔 배(拜)를 올리던 아내의 모습이 불현듯 스친다. 한참 동안 망서려졌다.
“참자! 그들도 사람인데 죽일 수야 없지않나”. 생각을 바꾸니 오히려 마음은 편하고 안정이 된다. 일단 빈 컨테이너 속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의 밥만 주도록 했다. 놈들이 죽을 고생을 해봐야 다시는 안 올라온다는 얘기도 들었으니까. 기회 있는 대로 불러내어 상처 나지 않게 두들겨 패라고도 했다. 숙달된 해군중사 출신 갑판장의 특기였으니 안심하고 맡겼다.
출항 전 갑판부원 모두가 이 잡듯이 뒤졌다는 데도 도대체 어떻게 3단으로 쌓아 올린 높은 빈 컨네이너 안으로 들어갔는지 재현시켜 봤다. 맨 손발로 마치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오르내린다. 어쩌면 아직 인간으로서 미분화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보통사람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수퍼카고(감독)를 통역으로 국적 증명서(자백서), 사진 등 서류를 만들었다.
3일 뒤인 6월 11일, 서아프리카의 세네갈의 다카(Dakar)항에 입항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관계 직원들이 왔다. 범죄자들인데 수갑도 채우지 않는다. 놀란 것은 종족(種族)은 달라도 같은 검은 색깔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한통속이었다는 것이다. 정식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가는데 밀항자 중 한 녀석이 배에서 맞았다고 항의를 했다. 나가던 관리들이 홱 돌아서더니 적반하장. 이제는 선장을 범법자(犯法者) 취급하고 조사하려 한다. 멀쩡하던 한 놈은 갑자기 쩔뚝거리기도 한다. 많이 해 본 수작들임에 틀림없다만, 무시무시한 공작(工作)이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렇다면 나도 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나는 때린 적 없다. 지휘봉으로 이리저리 지시만 했지 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먹여주고 옷 갈아 입혀 살려서 여기까지 데려오지 않았나. 이런 식이면 다음에 혹시 이런 경우가 또 있어도 굶어 죽든 말든 물 한 방울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나도 패고 싶었다. 이제 당신들 보는 앞에서 한 번 두들겨 패보자.” 하면서 개거품을 물며 옆에 세워져 있는 지휘봉을 들고 일어섰더니 알았다고 그만두란다. 연기(演技)를 하면서도 진땀이 났다. 결과적으로 억울하게 담배와 위스키만 빼앗겼다. 까딱하면 우리가 피해자가 아닌 범법자(犯法者)가 될 뻔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한국 선원들의 심성(心性)이다. 유럽이나 소련 선원들은 발견 즉시 윗선에 보고도 하지 않고 바다에 던져 버린다는데, 한국 선원들은 범법자들인데도 불쌍하다고 선장이나 상급자의 지시를 어겨가며 몰래 먹을 것도 주고 자기의 헌옷을 갈아 입히고 일이나 심부름 좀 시켰다고 용돈까지 쥐어주기도 했으니, 그 인간적인 선의(善意)야 말로 눈물겹도록 갸륵한 일이지만, 이것이 그들 세계에서는 한국 선원들이 승무한 선박을 노려 밀항하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을 정도였다. 담당 책임자들에겐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무라면 “너무 불쌍해서…” 하는 데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 후 두어 달이 지난 뒤, 같은 마타디항 부두에는 그 밀항자들의 다시 활보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으니 요지경 세상이었다. 본선에서는 그들을 담당했던 일등항해사와 갑판장은 상륙해도 조심하라고 했다. 혹시라도 보복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계속)
첫댓글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차마 바다에 던지지 못하는 인정 많은 한국인.
이 인정이 화를 불러오니 '뿌린대로 거두리라'도 명언이 될 수 없네요.ㅎ
'밀항자'엔 여자도 있남요? 우문이겠죠?ㅎ
옛말로 마도로스의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이면 생활의 고충담에서 고달픈 삶이 아니고 삶과 죽음간을 오락가락하는 삶이 되겠습니다.
힘겹다는 바람새의 입을 봉하게 하는 마력의 회고록입니다.
글을 쓴다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박학해야^^
나는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여자도 있었을 검다. 왜? 밀항으로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소?
여러번 죽었다 생각하고 지금은 덤으로 살고 있는 셈이지요. ㅎㅎㅎ. 부산넘
석암 자네 (위대한 선장)마도로스 생활 소설 같네.
읽어 줘서 고마우이. 소설도 아니고 nonfiction도 아니고 사실 그대로지. 나는 하나도 위대한 것이 없는데 그 넘들
그리고 주위의 사정과 환경들이 그렇게 만들어 냈지롱. 그래서 일찍부터 백발이 된 것 같네.
그래도 용케 잘 버티었다는 생각이라 늘 감사하지요. 건강하시고. ㅎㅎㅎ 부산넘
원양 화물선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글 잘 읽었습니다. 없는 나라에서 몰래 숨어들어온 밀항자를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너무하지만 그것이 관례라면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