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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암산 기슭을 찾아
◇ 당현천(堂峴川) : 노원구 상계동 41번지 · 중계동 203-2번지~중랑천 합류지점
- 상계동 당고개에서부터 발원하는 중랑천의 지천
당현천은 수락산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뻗은 수로를 따라 흐르는 중랑천의 지류(支流)이다. 현재 수락산 기슭의 노원구 상계동 41번지와 중계동 203-2번지에서부터 중랑천 합류지점까지 흐른다.
당현천의 본류(本流)는 노원구 상계동 41번지의 당고개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이고, 중계동 벽산아파트에서부터 흘러 당현2교에서 합류되는 물줄기는 당현천의 지류이다. 현재 이 지류는 완전 복개되어 아파트촌으로 변모되었다. 전일에는 이 물줄기를 ‘마전내’라고 불렀다.
당현천은 유로 연장 6,100m, 평균 하천의 폭이 44m, 유로 면적 26만 8,400㎡, 유역 면적 13.65㎢의 하천으로 중랑천의 지류 가운데 우이천 다음으로 규모가 큰 하천이다.
당현천은 미륵당이 있는 고개, 즉 당고개[당현(堂峴)]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상계동과 중계동을 구분하는 자연적인 경계역할을 하고 있다. 본래 한천(중랑천)에서 제일 위쪽을 상계동, 중간을 중계동, 아래쪽을 하계동이라 하였는데 그 기준이 된 것이 당현천으로 생각된다.
현재 당현천 위에 놓인 다리는 불암교 · 물넘이교 · 당현교 · 당현2교 · 당현3교 · 당현4교 등이 있다. 2005년 10월 13일, 노원구는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던 건천(乾川)인 당현천을 항상 물이 흐르는 하천으로 만들기 위해 노원역∼당현천 구간 864m, 마들역∼당현천 구간 2,144m에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지하 배출수를 공급하는 전용관로 공사를 완공하여, 당현천에는 하루에 7,730t의 물이 폭 2~4m, 깊이 20㎝의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른다.
◇ 불암산 나비정원 : 노원구 한글비석로 12길 51-27(중계동 산 42-3)
- 1년 내내 살아있는 나비를 볼 수 있는 정원
노원구에서 2021년에 개장한 불암산 힐링타운 사업지 중의 한 곳인 불암산 나비정원은 365일 살아있는 나비를 볼 수 있는 정원이다. 나비는 꽃의 꿀을 빨아먹고 살기 때문에 온실에는 각종 꽃들이 피어있다.
나비 정원 건물 1층에는 사육배양실, 채란실, 나비 온실 등이 위치해 있고, 2층은 곤충학습관으로 이뤄졌다. 곤충학습관에서는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 위기종 2급 곤충인 물장군, 두점박이 사슴벌레 등 각종 곤충 표본과 곤충 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원에는 유아숲 체험장, 정원지원센터, 전망대 등이 설치되어 있다.
나비정원을 둘러 본 뒤에는 인근의 철쭉동산과 전망대까지 돌아볼 수 있다. 단체 관람 시에는 예약이 필요하다.
2022년 겨울방학 시즌(12.20~2.26)에는 나비정원에서 세계 10개국 및 국내 잠자리 표본 26점(202마리)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세계 잠자리 전시회>를 열었다.
◇ 학도암(鶴到庵) : 노원구 중계본동 산 3번지(마애관음보살좌상 : 서울 유형문화재 제124호)
- 학이 찾아든다는 경치가 뛰어난 곳의 사찰
중계동의 불암산(높이 : 608m) 중턱에 자리한 학도암은 ‘학이 찾아드는 곳’이라는 이름만큼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절이다. 이 절의 안내문에는 「조선 후기 인조 2년(1624)에 무공대사(無空大師)가 불암산에 있던 절을 이곳에 옮겨 새로 지은 절이다. 고종 15년(1878)에 벽운대사(碧雲大師)가 고쳐서 다시 지었고,
6. 25전쟁 때 타버렸던 것을 1965년에 다시 지었다」고 씌어있다.
학도암은 대웅전이 있고, 그 왼쪽에 마애선각관음보살, 불법당,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ㄷ자’형의 건물로 안에는 아미타불을 으뜸 부처로 삼고,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있다. 아미타불 뒤에는 후불탱화와 신중탱화의 불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불법당은 20여년 전에 바위 굴을 뚫고 만든 법당으로 역시 아미타불을 으뜸 부처로 삼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있다. 삼성각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인다.
대웅전 뒤편에는 큰 바위 면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불상〔마애불(磨崖佛)〕인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유형문화재)이 있다.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준말로 자비로써 생명이 있는 모든 생물〔중생(衆生)〕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대웅전 뒤편 바위벽에 새겨진 50여 글자에는 1870년(고종 7)에 명성황후 민씨가 자비로운 부처의 마음〔불심(佛心)〕을 나타내어 불상을 조각했다는 내용과 1878년(고종 15)에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장선화상 등이 학도암을 수리하면서 마애불상의 조각[線刻]을 보강하였다고 씌어 있다.
이 관음보살좌상은 당당한 몸매에 얼굴은 가늘고, 긴 눈과 뭉툭한 코, 작은 입술 등으로 인해 새침한 인상을 주며, 머리에는 화려한 아미타불을 모신 보석으로 꾸민 관[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각 부분의 높낮이와 크기 · 굵기의 비례가 자연스러워 균형미가 있다.
또 보관 테두리 양편에는 귓전 위에서부터 한 줄씩 구슬을 단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양쪽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어서 세련미와 함께 화려함과 위엄이 돋보인다.
이 관음보살좌상의 장식이나 무늬, 옷 주름을 조각한 것을 보면 마치 부처의 그림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얇은 옷은 보살이 앉아 있는 화려한 연꽃무늬 자리 위에 부드럽게 펼쳐져 있으며, 왼손 손목에는 ‘만자(卍字)’ 무늬의 두꺼운 팔찌를 끼고 있어서 보살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이 보살상에서 특이한 점은 가슴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사각형의 홈인데 이것은 사리, 불경을 보관하는 장[감실(龕室)]의 흔적으로 짐작된다. 복장(服藏)은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와 불경 등을 넣어 놓는 것인데 마애불에 이러한 예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 보살상은 조선 말기의 불상이지만 왕실에서 후원하여 조각한 것인 만큼 조선 말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불교 조각의 전통을 볼 수 있으며, 최고의 기술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학도암 주차장 아래 바위벽에는 두 개의 높은 스님의 사리를 안치한 탑[부도(浮屠)]이 있다. 그 중 「청신녀 월영 영주지탑(淸信女月影靈珠之塔)」은 「가경 이십사년 기묘 시월(嘉慶二十四年己卯十月)」이라는 글자가 함께 씌어 있어서 1819년(순조 19)에 이 절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학도암에는 2000년까지도 한사람이 겨우 출입할 수 있을 정도였던 자연 동굴을 넓혀서 그 안에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일광보살좌상, 월광보살좌상을 모셔놓고, 약사전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2005년에는 무이(無二) 주지스님이 법당 오른쪽 공터에 430cm 높이의 돌조각의 지장보살좌상을 모셔 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에는 학도암에서 불공을 드리며 목탁 두드리는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깨어나서 하루 농사일을 준비하였다고 전한다.
◇ 윤두수 영의정 별장 터 (납대울 마을) : 노원구 중계동 91-1
- 임진왜란 · 정유재란 때의 난국을 수습했던 윤두수 영의정의 별장으로 알려진 곳
불암산 기슭의 ‘납대울’이라고 불리는 마을에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 : 1533~1601)의 별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납대울’이란 마을이름은 조정에 바치는 세곡(稅穀)을 모아 놓은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윤두수 정승의 별장으로 전하는 자리에는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집에는 경주 김씨가 대대로 살았는데 현재 원암유치원이 들어서 있다.
현재 ‘납대울’마을 입구, 슈퍼마켓 앞에는 ‘납대울 마을’이란 노원구청에서 세운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영신여자고등학교 내에는 ‘사랑바위’가 남아있고, 원암유치원 맞은편 쪽의 중계동 75-95번지에는 큰 바위가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납대울 마을은 일제 때인 1918년에 감리교회가 들어섰고, 1920년에는 배밭이 되었다. 현재도 학도암 밑의 불암산 기슭에는 배밭이 있다.
윤두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茫), 호는 오음(梧陰). 계정(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림(希琳)이고, 아버지는 군자감정 변(豆)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예조판서를 지낸 윤근수(尹根壽)의 형이다.
윤두수는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에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검열(檢閱)·정자(正字)·저작(著作)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에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수찬(修撰)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윤두수는 그 뒤 사헌부 장령·성균관 사성·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내고, 1565년에 문정왕후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에 대사간에 올랐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좌, 아우 윤근수와 함께 파직되었으나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7년(선조 20)에 왜구가 전라도 지방을 침범하여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수사 · 수령의 기강 쇄신과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다.
1589년에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고쳐 달라고 명나라에 주청한 ‘종계변무(宗系辨誣)’가 성취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군(海原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대사헌 ·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윤두수는 다시 기용되어,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당시 선조가 머물던 평양 행재소(行在所)에서 임진강전투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조선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해에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이듬해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했으며, 1595년에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여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臺諫)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로 물러났다. 1605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윤두수는 평소에 온화하고 화평했으나, 큰일을 당했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저서로는 ≪오음유고≫ · ≪기자지(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백사마을 : 노원구 중계동 산 104번지
-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중계동 산 104번지의 이주민 마을
백사마을은 중계본동의 광석리 남쪽의 불암산 기슭에 철거 이주민 마을로 중계동 산 104번지에 자리했다 하여 불린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967년 도심 개발로 강제 철거를 당한 청계천과 용산, 안암동, 영등포 등지의 주민이 옮겨오면서 형성되었다.
이후 1971년에 이곳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였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2009년 5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다.
전일에 이 마을은 부근의 중계동 광석리 마을 주민들이 나무를 하던 산이었다. 백사마을은 서울의 달동네 중의 하나로 서울시에서 2009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여라가지 사정으로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하다가 2021년 3월, 사업시행계획 인가로 재개발사업이 추진 중이다. 계획대로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면 2027년에 백사마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마을에 거주하던 사람은 1,200여 가구였지만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마을은 사회의 관심이 높아 신문 기사로 많이 보도되고, 많은 영화나 텔레비전이 촬영되었다.
1967년에 서울시가 이주대책으로 해준 것은 이곳 104마을에 30평 남짓한 천막이 전부였다. 그나마 분필로 넷으로 선을 그어 네 가구가 살도록 했다. 이리하여 104마을의 집들은 8평부터 시작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사 간 집을 사서 합치고, 남는 땅에 집을 지으면서 이곳의 주택은 1984년경 대부분 20평 남짓한 구조로 변경되었다.
백사마을의 재개발을 본격화하는데 서울시는 저층 주거지를 보전ㆍ관리하면서 아파트를 건립하는 방식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전면 철거 개발을 지양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주택철학이 반영됐다. 개발 콘셉트는 '원형보존'이다. 기존 지형과 골목길 등을 유지하면서 자연지형에 따라 형성된 저층 주거지를 리모델링과 신축을 통해 보존ㆍ관리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1967년에 104번지로 처음 이주해왔을 때부터 2007년까지 살았던 박해숙 할머니(76)는 마치 즐거운 옛날 얘기를 하듯 40년 전의 추억을 꺼내 놓는다. "내 아들이 50살이니까 정확히 44년 됐지. 여기 6통에서 내가 제일 먼저 집을 지었어요.
밤에 물을 뜨러 가면 '그르릉~'하면서 늑대가 뒤를 따라와요. 깜짝 놀라 뛰어 들어오면 시어머니가 남자가 치근대는 줄 알고 '언 놈이 붙잡던가?' 그랬어요. 산 속에 갑자기 사람들이 이사 왔으니 늑대가 먹을 걸 찾아 들어왔지요. 그땐 그랬어요."
박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땔감도 없어서 산에 있는 나뭇가지, 잡풀까지 모두 긁어서 땠다고 한다. 그마저도 산을 지키는 사람한테 붙잡히면 모두 두고 내려와야 했다. 용산에서 이사 왔다는 다른 할머니는 "윗목에 물이 얼고 걸레도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겨울을 보냈다"며 "연탄 한 장에 6원 50전하던 시절인데 그걸 아끼느라고 방이 얼어 붙었어요."라고 말했다.
워낙 산골이라 학교 가는 길도 멀고 험했다. '토끼길'이라고 부르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하계동의 '연촌초등학교'가 나왔다. 거기까지 아이들은 모두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이 길은 산짐승이 많아서 남자나 여자나 혼자서는 다니지 못하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