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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十七回 泣秦庭申包胥借兵 退吳師楚昭王返國
제77회: 신포서가 진나라 조정에서 울어 군사를 빌리고, 오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초소왕이 나라를 다시 찾다.
話說,伍員屯兵於隨國之南鄙,使人致書於隨侯,書中大約言:「周之子孫,在漢川者,被楚吞噬殆盡。今天祐吳國,問罪於楚君。若出楚珍,與吳為好,漢陽之田,盡歸於君,寡君與君世為兄弟,同事周室。」隨侯看畢,集群臣計議。楚臣子期,面貌與昭王相似,言於隨侯曰:「事急矣!我偽為王而以我出獻,王乃可免也。」隨侯使太史卜其吉凶,大史獻繇曰:「平必陂,往必復。故勿棄,新勿欲。西鄰為虎,東鄰為肉。」隨侯曰:「楚故而吳新,鬼神示我矣。」乃使人辭伍員曰:「敝邑依楚為國,世有盟誓。楚君若下辱,不敢不納。然今已他徙矣,惟將軍察之!」
한편, 오원이 수나라의 남쪽 국경에 주둔하여 사람을 시켜 편지를 수나라 군주에게 보냈다. 편지의 내용에 대략 말하기를, “주나라 자손으로서 한수 부근에 있던 나라는 초나라에 의해 거의 병탄되었습니다. 오늘 하늘이 오나라를 도와서 초나라 임금에게 그 죄를 물었습니다. 만약에 초왕 진(珍)을 내놓는다면 우리 오나라와 우호를 맺고, 한수 북쪽의 땅은 모두 군주에게 돌려드리며. 우리 주군과 군주는 대대로 형제가 되어 함께 주나라 왕실을 받들 것입니다.” 했다. 수나라 군주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여러 신하를 모아 상의했다. 초나라 신하인 자기(子期)가 얼굴이 초소왕과 비슷하다면서 수나라 군주에게 말하기를, “사태가 매우 급합니다! 나를 초왕으로 가장시켜 밖으로 내보내 오나라 군사들에게 바치면 초소왕이 몸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수나라 군주가 태사를 시켜 길흉을 점치게 하니, 태사가 점괘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평지가 있으면 반드시 비탈이 있고, 가면 반드시 돌아온다. 옛것을 버리지 말고, 새것을 탐내지 말라. 서쪽 이웃은 호랑이가 되고, 동쪽 이웃은 고기가 되리라.” 했다. 수나라 군주가 말하기를, “초나라는 옛것이고 오나라는 새것이다. 귀신이 나에게 예시했다.” 하고, 즉시 사람을 오원에게 보내 거절하기를, “우리나라는 초나라에 의지해서 나라를 유지해 왔으며 대대로 초나라에 조공하기로 맹세했습니다. 초나라 임금이 만약 이곳에 온다면 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초나라 왕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오직 장군께서 살펴주십시오.” 했다.
伍員以囊瓦在鄭,疑昭王亦奔鄭,且鄭人殺太子建,仇亦未報,遂移兵伐鄭,圍其郊。時鄭賢臣游吉新卒,鄭定公大懼,歸咎囊瓦,瓦自殺。鄭伯獻瓦屍於吳軍,說明楚王實未至鄭。吳師猶不肯退,必欲滅鄭,以報太子之仇。諸大夫請背城一戰,以決存亡。鄭伯曰:「鄭之士馬孰若楚?楚且破,況於鄭乎?」乃出令於國中曰:「有能退吳軍者,寡人願與分國而治。」懸令三日。時鄂渚漁丈人之子,因避兵亦逃在鄭城之中,聞吳國用伍員為主將,乃求見鄭君,自言:「能退吳軍。」
오원이 낭와가 정나라에 있어서 초소왕도 역시 정나라로 갔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또한 정나라 사람이 태자 건을 죽였는데 아직 원수도 갚지 못했으므로 즉시 군사를 이동시켜 정나라를 쳐서 성 밖을 포위했다. 그때 정나라는 현신 유길(游吉)이 얼마 전에 죽어서 정정공이 두려워하여 죄를 낭와에게 돌리니 낭와가 자살했다. 정정공은 낭와의 시신을 오나라 진영으로 보내면서, 초나라 왕은 사실 아직 정나라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오나라 군사들은 오히려 물러가려 하지 않고 반드시 정나라를 멸망시켜서 태자 건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정나라의 여러 대부가 성을 의지하여 한번 싸워서 존망을 결정하자고 했다. 정정공이 말하기를, “우리 정나라 군마와 초나라의 군마 중에서 어느 편이 강하오? 초나라도 싸움에서 졌는데 하물며 정나라겠소?” 하고, 이에 나라 안에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능히 오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과인이 정나라를 나누어 그와 함께 다스리겠다.” 했다. 방을 붙인 지 사흘 만에, 그때 악저(鄂渚)에 사는 어부의 아들이 병란을 피해 정나라 도성 안에 도망해 있다가, 오나라에서 오원을 주장으로 삼았음을 듣고 이에 정정공을 찾아와 뵙고 스스로 말하기를, “제가 능히 오나라 군사들을 물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했다.
鄭定公曰:「卿退吳兵,用車徒幾何?」對曰:「臣不用一寸之兵,一斗之糧,只要與臣一橈,行歌道中,吳兵便退。」鄭伯不信,然一時無策,只得使左右以一橈授之:「果能退吳,不吝上賞。」漁丈人之子,縋城而下,直入吳軍,於營前叩橈而歌曰:「蘆中人!蘆中人!腰間寶劍七星文,不記渡江時,麥飯鮑魚羹?」軍士拘之,來見伍員。其人歌「蘆中人」如故。員下席驚問曰:「足下是何人?」舉橈而對曰:「將軍不見吾手中所操乎?吾乃鄂渚漁丈人之子也。」員惻然曰:「汝父因吾而死,正思報恩,恨無其路。今日幸得相遇,汝歌而見我,意何所須?」
정정공이 말하기를, “경이 오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전차와 군사가 얼마나 있어야 되겠소?” 하니, 어부의 아들이 대답하기를, “신에게는 한 치의 무기도, 한 말의 양식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배 젓는 노 한 개만 주시면, 제가 길에서 노래를 불러 오나라 군사가 문득 물러가게 하겠습니다.” 했다. 정정공이 믿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별다른 대책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좌우에게 명하여 노 한 개를 가져와서 주면서 말하기를, “과연 능히 오나라 군사들을 물러가게 한다면 상을 아끼겠는가?” 했다. 어부의 아들이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가서 곧바로 오나라 진영으로 가서 노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기를, “갈대밭 속의 사람이여! 갈대밭 속의 사람이여! 허리에는 칠성 무늬 보검을 차고, 강을 건널 때 보리밥과 생선국 먹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그를 붙잡아서 오원에게 데리고 왔다. 그가 ‘갈대밭 속의 사람이여’ 하는 노래를 다시 부르니, 오원이 자리에서 내려와 놀라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했다. 어부의 아들이 노를 들고 대답하기를, “장군께서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노를 보지 못하십니까? 나는 곧 악저 어부의 아들입니다.” 했다. 오원이 측은하게 생각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부친이 나로 인해 죽었소. 내가 은혜를 보답하고자 생각했으나 그 방법을 찾지 못해 한탄하고 있었소. 오늘 다행히 그대를 만났소. 그대가 노래를 불러 나를 보기를 청했으니 나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이오?” 했다.
對曰:「別無所須也。鄭國懼將軍兵威,令於國中:『有能退吳軍者,與之分國而治。』臣念先人與將軍有倉卒之遇,今欲從將軍乞赦鄭國。」員乃仰天歎曰:「嗟乎!員得有今日,皆漁丈人所賜,上天蒼蒼,豈敢忘也!」即日下令解圍而去。漁丈人之子回報鄭伯。鄭伯大喜,乃以百里之地封之,國人稱之曰:「漁大夫」。至今溱洧之間,有丈人村,即所封地也。髯翁有詩云:「密語蘆洲隔死生,橈歌強似楚歌聲﹔三軍既散分茅土,不負當時江上情。」伍員既解鄭國之圍,還軍楚境,各路分截守把,大軍營於麋地,遣人四出招降楚屬,兼訪求昭王甚急。
어부의 아들이 대답하기를, “달리 바라는 바는 없습니다. 정나라 군주가 장군의 군사를 두려워하여 나라 안에 명령을 내리기를, ‘능히 오나라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라를 나누어 함께 다스리겠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의 부친께서 장군과 잠깐 만난 인연이 있어 오늘 장군께 정나라의 용서를 빌고자 온 것입니다.” 했다. 오원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기를, “아! 오원에게 오늘이 있게 한 것은 모두가 어부가 강을 건너 준 덕분이라! 하늘이 저렇게 창창한데 어찌 감히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날로 명령을 내려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어부의 아들이 돌아와 정정공에게 보고하니, 정정공이 크게 기뻐하면서 이에 백 리의 땅을 그에게 봉했다. 정나라 백성들이 그를 칭송해 부르기를, ‘어대부(漁大夫)’라고 불렀다. 지금도 진수(溱水)와 유수(洧水) 사이에 장인촌(丈人村)이 있는데, 그 곳이 즉 어부의 아들에게 봉해진 땅이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강가 갈대밭에서 몰래 한 말로 생사가 갈라지고, 노 젓는 노래가 초나라 노래보다 강했다. 오나라 삼군은 이미 물러가고 봉토을 나누어 받았으니, 오원은 당시 강 위에서 받은 은혜를 배신하지 않았다.” 했다. 오원은 정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군사를 돌려 초나라 지경에 돌아가서 각기 군사를 나누어 지키며, 대군은 미(穈) 땅에 영채를 세우고, 사람을 보내 사방의 초나라 속국에게 항복을 권하고 긴급히 초소왕을 찾았다.
卻說,申包胥自郢都破後,逃避在夷陵石鼻山中,聞子胥掘墓鞭屍,復求楚王,乃遣人致書於子胥,其略曰:「子故平王之臣,北面事之,今乃僇辱其屍,雖云報仇,不已甚乎?物極必反,子宜速歸。不然,胥當踐「復楚」之約!」伍員得書,沉吟半晌,乃謂來使曰:「某因軍務倥傯,不能答書,借汝之口,為我致謝申君:忠孝不能兩全,吾日暮途遠,故倒行而逆施耳!」使者回報包胥,包胥曰:「子胥之滅楚必矣。吾不可坐而待之。」想起楚平王夫人,乃秦哀公之女,楚昭王乃秦之甥,要解楚難,除是求秦。乃晝夜西馳,足踵俱開,步步流血,裂裳而裹之。
한편, 신포서(申包胥)는 영도가 함락되자 몸을 피하여 이릉(夷陵)의 석비산(石脾山) 산중으로 도망쳤다가, 오자서가 평왕의 묘를 파서 시신을 채찍질하고, 다시 초소왕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편지를 전했다.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자네는 옛날 초평왕의 신하로 북면하여 섬겼는데, 지금은 그의 시신을 욕보였으니 비록 원수를 갚는다지만 너무 심한 게 아닌가? 만물은 극에 이르면 반드시 되돌아오는 법이니, 자네는 마땅히 빨리 돌아가게. 그러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초나라를 회복시키겠다’라는 약속을 실천하겠네!” 했다. 오원이 그 편지를 받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말없이 신음하더니 곧 편지를 가져온 사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군무에 분주하여 답장을 쓸 수가 없다. 너의 입을 빌리니, 나를 위해 신포서에게 사례해다오. ‘충효를 둘 다 이룰 수가 없고, 나는 해가 지는데 갈 길은 멀다. 그래서 거꾸로 도리를 거슬러 시행했을 뿐이네!’”라고 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자 신포서가 말하기를, “오자서가 기어코 초나라를 멸하려는구나. 내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 했다. 신포서는 초평왕의 부인이 곧 진애공(秦哀公)의 딸이고, 초소왕은 곧 진(秦)나라 군주의 외손자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진(秦)나라에 초나라의 위급함을 풀어달라고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포서는 밤낮으로 서쪽으로 달려서 발바닥은 부르터서 갈라지고 걸음마다 피가 흘러서 옷을 찢어 그것을 싸매었다.
奔至雍州,來見秦哀公曰:「吳貪如封豕,毒如長蛇,久欲荐食諸侯,兵自楚始。寡君失守社稷,逃於草莽之間,特命下臣,告急於上國,乞君念甥舅之情,代為興兵解厄。」秦哀公曰:「秦僻在西陲,兵微將寡,自保不暇,安能為人?」包胥曰:「楚秦連界,楚遭兵而秦不救,吳若滅楚,次將及秦,君之存楚,亦以固秦也。若秦遂有楚國,不猶愈於吳乎?倘能撫而存之,不絕其祀,情願世世北面事秦。」秦哀公意猶未決,曰:「大夫姑就館驛安下,容孤與群臣商議。」
신포서가 달려가 옹주(雍州)에 이르러 진애공(秦哀公)을 뵙고 말하기를, “오나라는 탐욕스럽기가 마치 큰 돼지와 같고 악독하기가 독사와 같습니다. 오랫동안 제후국들을 차츰차츰 먹으려고 초나라부터 쳐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주군께서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풀숲으로 몸을 피하시면서 특별히 신에게 명하여 위급함을 상국에 고하게 했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손자의 정리를 생각하시어 대신 군사를 일으켜서 초나라의 위기를 구해주십시오.” 하니, 진애공이 말하기를, “진(秦)나라는 서쪽의 변두리 외딴곳에 있고, 군사는 적고 장수도 부족하여 스스로 지키기에도 겨를이 없소.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킬 수 있겠소?” 했다. 신포서가 말하기를, “초나라와 진(秦)나라는 국경이 접해 있어, 초나라가 침략을 당했는데, 진(秦)나라가 구하지 않으면, 오나라가 초나라를 멸한 다음 장차 그 화가 진(秦)나라에 미칠 것입니다. 군주께서 초나라를 존속케 한다면 또한 진(秦)나라도 공고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진(秦)나라가 초나라를 구해 진(秦)나라 편에 끌어들이면 오히려 오나라보다 세력이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능히 초나라 백성들을 위무하여 나라를 존속케 하고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다면, 초나라는 진심으로 그 덕에 감사하여 연년세세로 북면하여 진(秦)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하니, 진애공이 뜻을 정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대부는 잠시 여관에 머물러 쉬시오. 그동안 내가 군신들과 상의하여 보리다.” 했다.
包胥對曰:「寡君越在草莽,未得安居,下臣何敢就館自便乎?」時秦哀公沉湎於酒,不恤國事。包胥請命愈急,哀公終不肯發兵。於是,包胥不脫衣冠,立於秦庭之中,晝夜號哭,不絕其聲。如此七日七夜,水漿一勺不入其口。哀公聞之,大驚曰:「楚臣之急其君,一至是乎?楚有賢臣如此,吳猶欲滅之﹔寡人無此賢臣,吳豈能相容哉?」為之流涕,賦《無衣》之詩以旌之。詩曰:「豈曰無衣?與子同袍。王于興師,與子同仇。」包胥頓首稱謝,然後始進壺飱。秦哀公命大將子蒲子虎帥車五百乘,從包胥救楚。
신포서가 대답하기를, “우리 주군께서 풀숲에 떨어져 몸 쉴 곳도 찾지 못하고 계시는데 그 신하가 어찌 감히 여관에서 몸을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했다. 그때 진애공은 술에 빠져서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있었다. 신포서가 더욱 절박하게 구원군을 청했으나 애공은 끝내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신포서는 의관을 벗지 않고 진(秦)나라 조정 뜰에 서서 밤낮으로 부르짖어 통곡하여 그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와 같이하여 7일 밤낮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진애공이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초나라 신하가 그 임금의 위급함을 이렇게 지극하게 생각한단 말인가? 초나라에 이 같은 현신이 있는데도 오나라가 오히려 초나라를 멸하려고 하는구나! 과인에게는 저런 현명한 신하가 없으니 오나라가 어찌 우리나라를 그냥 둘 리 있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며 ‘무의(舞衣)’라는 시를 지었다. 시에 이르기를, “어찌 옷이 없다고 하는가? 그대와 같이 입으리라! 내가 군사를 일으킬 테니, 그대와 함께 원수를 무찌르리라!” 했다. 신포서가 머리를 조아려 감사한 뒤에 비로소 음식을 먹었다. 진애공이 자포(子蒱)와 자호(子虎)에게 전차 5백 대를 거느리고 신포서를 따라 초나라를 구하게 했다.
包胥曰:「吾君在隨望救,不啻如大旱之望雨。胥當先往一程,報知寡君。元帥從商穀而東,五日可至襄陽,折而南,即荊門。而胥以楚之餘眾,自石梁山南來,計不出二月,亦可相會。吳恃其勝,必不為備,軍士在外,日久思歸,若破其一軍,自然瓦解。」子蒲曰:「吾未知路徑,必須楚兵為導,大夫不可失期。」包胥辭了秦帥,星夜至隨,來見昭王,言:「臣請得秦兵,已出境矣。」昭王大喜,謂隨侯曰:「卜人所言:『西鄰為虎,東鄰為肉。』秦在楚之西,而吳在其東,斯言果驗矣。」
신포서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수나라에서 구원군을 기다리기를 마치 큰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 신포서가 먼저 가서 우리 임금에게 알려야겠습니다. 원수들께서는 상(商)과 곡(穀)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5일이면 양양(襄陽)에 이를 것입니다. 거기서 남쪽으로 꺾으면 바로 형문(荊門)입니다. 나는 남아있는 초나라 군사들을 모아 석량산(石梁山) 남쪽으로 나오겠습니다. 계산해 보니 두 달 안에 서로 만날 수 있겠습니다. 오나라 군사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틀림없이 방비가 없을 것이고, 또한 군사들이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어 귀국하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의 한 부대를 깨뜨리면 자연히 무너질 것입니다.” 하니, 자포가 말하기를, “우리는 지름길을 모르니 반드시 초나라 군사가 인도해야 합니다. 대부께서는 기일을 어기지 마십시오.” 했다. 신포서가 진(秦)나라 장수들을 이별하고 밤을 새워 수나라로 가서 초소왕을 뵙고 말하기를, “소신이 진(秦)나라 구원병을 청하여, 이미 출병해 국경을 넘었습니다.” 하니, 초소왕이 크게 기뻐하며 수나라 군주에게 말하기를, “태사의 점괘에 ‘서쪽 이웃은 호랑이가 되고, 동쪽 이웃은 고기가 된다.’라고 했는데, 진(秦)나라는 서쪽에 있고, 오나라는 동쪽에 있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고 하겠습니다.” 했다.
時薳延宋木等,亦收拾餘兵,從王於隨。子西子期并起隨眾,一齊進發。秦師屯於襄陽,以待楚師。包胥引子西子期等與秦帥相見。楚兵先行,秦兵在後,遇夫概之師於沂水,子蒲謂包胥曰:「子率楚師先與吳戰,吾當自後會之。」包胥便與夫概交鋒。夫概恃勇,看包胥有如無物。約鬥十餘合,未分勝敗。子蒲子虎驅兵大進。夫概望見旗號有秦字,大驚曰:「西兵何得至此?」急急收軍,已折大半。子西子期等乘勝追逐五十里方止。夫概奔回郢都,來見吳王,盛稱秦兵勢銳,不可抵當。闔閭有懼色。
그때 원연(薳延), 송목(宋木) 등이 또한 초나라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초소왕을 따라 수나라에 들어왔다. 자서(子西)와 자기(子期)도 수나라 군사들을 동원하여 일제히 출진했다. 진(秦)나라 군사는 양양에 주둔하여 초나라의 군사들을 기다렸다. 신포서는 자서(子西)와 자기(子期) 등을 이끌고 진(秦)나라 장수들과 만났다. 초나라 군사가 앞서고 진나라 군사가 뒤를 따라 진군하다가, 기수(沂水)에서 오나라 부개의 군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자포가 신포서에게 말하기를, “대부께서 먼저 초나라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군사와 싸우면, 우리는 마땅히 오나라 군사의 배후를 공격하겠소!” 하니, 신포서가 출전하여 부개와 겨루었다. 부개가 용기를 믿고 신포서를 없는 물건인 듯이 보았다. 약 십여 합을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자포와 자호가 진(秦)나라 군사를 몰아 대거 진격했다. 부개가 멀리 깃발에 진(秦)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서쪽의 진(秦)나라 군사가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가?” 하고, 급히 군사를 거두었으나 태반이 꺾였다. 자서와 자기는 그 틈을 타서 50리를 추격하고 멈추었다. 부개가 도망쳐 영도에 돌아와서 오왕 합려를 뵙고, 진(秦)나라 군사의 정예함을 매우 칭찬하고 당해내기 어렵다고 했다. 합려가 두려운 기색을 띠었다.
孫武進曰:「兵,凶器,可暫用而不可久也。且楚土地尚廣,人心未肯服吳,臣前請王立羋勝以撫楚,正虞今日之變耳。為今之計,不如遣使與秦通好,許復楚君﹔割楚之西鄙,以益吳疆,君亦不為無利也。若久戀楚宮,與之相持,楚人憤而力,吳人驕而惰,加以虎狼之秦,臣未保其萬全。」伍員知楚王必不可得,亦以武言為然。闔閭將從之。伯嚭進曰:「吾兵自離東吳,一路破竹而下,五戰拔郢,遂夷楚社。今一遇秦兵,即便班師,何前勇而後怯耶?願給臣兵一萬,必使秦兵片甲不回。如若不勝,甘當軍令!」闔閭壯其言,許之。
손무가 나아가 말하기를, “군사는 흉기입니다, 잠시는 쓸 수 있으나 오래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초나라 땅은 넓고 초나라 인심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신이 일전에 대왕께 초나라 공자 미승을 세워서 초나라 백성들을 위무하자고 청한 것은, 바로 오늘의 사태를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계책은 사자를 진(秦)나라에 보내 수호 친선을 한 후에 초소왕에게 왕위를 돌려주고, 초나라의 서쪽 변경을 떼어내서 오나라 땅으로 더하면 대왕께서 이익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초나라 궁궐을 오래 연연하여 그들과 대치하다가는 초나라 백성들이 분노하여 죽을힘을 다할 것입니다. 오나라 군사들이 교만하고 게을러지고, 거기에 호랑이나 늑대 같은 진(秦)나라 군사들까지 가세한다면 신도 만전을 보장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했다. 오원도 결코 초소왕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역시 손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합려가 장차 그것을 따르려 하자, 백비가 나와 말하기를, “우리 오나라 군사들은 동오에서 출발하여 단숨에 파죽지세로 달려와 다섯 번 싸워서 영도를 함락시켜 초나라 사직을 없애버렸습니다. 지금 진(秦)나라 군사를 한번 만나 싸워 졌다고 해서 즉시 군사를 물리려 하니 어찌하여 전에는 용맹하더니 뒤에는 겁이 많게 되었습니까? 원컨대 신에게 군사 일만 명을 주시면 반드시 진(秦)나라 군사의 갑옷 한 조각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달게 군령을 받겠습니다.” 하니, 합려가 그 말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孫武與伍員力止不可變兵,伯嚭不從。引兵出城,兩軍相遇於軍祥,排成陣勢。伯嚭望見楚軍行列不整,便教鳴鼓,馳車突入,正遇子西,大罵:「汝萬死之餘,尚望寒灰再熱耶?」子西亦罵:「背國叛夫!今日何顏相見?」伯嚭大怒,挺戟直取子西,子西亦揮戈相迎。戰不數合,子西詐敗而走。伯嚭追之,未及二里,左邊沈諸梁一軍殺來,右邊薳延一軍殺來,秦將子蒲子虎引生力軍,從中直貫吳陣。三路兵將吳兵截為三處,伯嚭左衝右突,不能得脫。卻得伍員兵到,大殺一陣,救出伯嚭。一萬軍馬,所存不上二千人。伯嚭自囚,入見吳王待罪。
손무와 오원은 군사를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힘써 말렸지만, 백비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영성을 나갔다. 두 나라 군사들이 군상(軍祥)에서 마주쳐서 진을 쳤다. 백비가 멀리 바라보고 초나라 군사의 대오가 정비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즉시 북을 울리고 전차를 몰아 돌격했다. 바로 자서를 보자 크게 꾸짖기를, “너는 만 번 죽었다가 아직도 찬 재에서 불을 지피려고 하느냐?” 하니, 자서도 역시 꾸짖기를,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야! 오늘 무슨 낯으로 나를 보느냐?” 했다. 백비가 대로하여 극을 비껴들고 자서에게 달려들었다. 자서 역시 들고 있던 과를 휘두르며 서로 맞섰다. 싸운 지 몇 합도 되지 않아 자서가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 백비가 추격하여 2리도 가기 전에 왼쪽에서 심제량(沈諸梁)의 부대가 달려 나오고, 오른쪽에서 원연의 부대가 달려 나왔다. 이어서 진(秦)나라 장수 자포와 자호가 생기가 팔팔한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진영의 가운데를 꿰뚫어 들어왔다. 세 갈래 군사들이 오나라 군사를 세 부분으로 잘랐다. 백비가 좌충우돌했으나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오원이 이끄는 군사가 도착하여 한바탕 무찌르고 백비를 구출했다. 백비가 이끌고 온 일만 명의 군사들은 남은 사람이 이천 명이 넘지 않았다. 백비가 스스로 죄수가 되어 오왕 앞으로 나가 죄를 기다렸다.
孫武謂伍員曰:「伯嚭為人,矜功自任,久後必為吳國之患,不如乘此兵敗,以軍令斬之。」伍員曰:「彼雖有喪師之罪,然前功不小,況敵在目前,不可斬一大將。」遂奏吳王赦其罪。秦兵直逼郢都,闔閭命夫概同公子山守城,自引大軍屯於紀南城,伍員伯嚭分屯磨城驢城,以為犄角之勢,與秦兵相持。又遣使徵兵於唐蔡。楚將子西謂子蒲曰:「吳以郢為巢穴,故堅壁相持,若唐蔡更助之,不可敵矣!不若乘間加兵於唐,唐破,則蔡人必懼而自守,吾乃得專力於吳。」子蒲然其計。於是子蒲同子期分兵一支,襲破唐城,殺唐成公,滅其國。蔡哀公懼,不敢出兵助吳。
손무가 오원에게 말하기를, “백비는 사람됨이 공이 있음을 자임하니, 후일에 반드시 오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번의 패전을 이유로 군령에 따라 그를 참하시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그가 비록 군사를 잃은 죄를 지었다고 하나, 전날에 세운 공이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적이 눈앞에 있는데 대장 한 사람을 참할 수는 없습니다.” 했다. 마침내 오왕에게 백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뢰었다. 진(秦)나라 군사가 영도에 바싹 다가오니, 합려가 부개에게 명하여 공자 산과 함께 영성을 수비하라 하고, 자기는 대군을 이끌고 기남성(紀南城)에 주둔했다. 오원과 백비는 마성과 여성에 나누어 주둔하여 기각지세를 이루어 진(秦)나라 군사와 대치했다. 또 사자를 당나라와 채 나라에 보내어 지원군을 보내라고 했다. 초나라 장수 자서가 진나라 대장 자포에게 말하기를, “오나라가 우리 영도를 그들의 소굴로 삼고 견고한 성벽에 의지하여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데, 만약 당나라와 채나라가 다시 도우면 우리는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당나라에 군사를 치는 게 낫습니다. 당나라가 함락되면 채나라 사람이 틀림없이 두려워하여 스스로 지킬 것이니, 우리는 오나라 군사들을 전력으로 칠 수 있습니다.” 했다. 자포가 그 계책이 옳다고 여겼다. 이에 자포는 자기(子期)와 함께 군사를 나누어 당나라 도성을 습격하여 당성공을 죽이고 당나라를 멸했다. 채애공이 두려워하여 감히 군사를 내어 오나라를 돕지 못했다.
卻說,夫概自恃有破楚之首功,因沂水一敗,吳王遂使協守郢都,心中鬱鬱不樂。及聞吳王與秦相持不決,忽然心動,想道:「吳國之制,兄終弟及,我應嗣位。今王立子波為太子,我不得立矣!乘此大兵出征,國內空虛,私自歸國,稱王奪位,豈不勝於久後相爭乎?」乃引本部軍馬,偷出郢都東門,渡漢而歸。詐稱:「闔閭兵敗於秦,不知所往,我當次立。」遂自稱吳王,使其子扶臧悉眾據淮水,以遏吳王之歸路。吳世子波,與專毅聞變,登城守禦,不納夫概。夫概乃遣使由三江通越,說其進兵,夾攻吳國,事成割五城為謝。
한편, 부개는 초나라를 점령하는 데 일등의 공이 있다고 자부했으나, 기수에서 한번 패전했다고 영도를 협력해 지키라는 오왕의 명령을 받고 마음속이 답답하여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왕의 군사와 진나라 군사가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대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생각하기를, “오나라의 왕위 제도는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전하게 되어있으니, 내가 응당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왕이 그 아들 파(波)를 태자로 삼았으니, 내가 왕이 될 수는 없다. 왕이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나라 안이 텅 빈 이때를 타서 내가 몰래 귀국하여 왕이라 칭하고 왕위를 빼앗는다면 어찌 먼 후일에 왕위를 서로 다투어 이기지 못하겠는가?” 하고, 즉시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영도의 동문을 빠져나가 한수를 건너 귀국했다. 부개가 거짓으로 일컫기를, “합려의 군사가 진(秦)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어서 내가 마땅히 다음 왕위를 잇고자 한다.” 하고, 마침내 스스로 오왕이라고 자칭했다. 그의 아들 부장(夫臧)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회수에 웅거하여 오왕 합려의 귀로를 막게 했다. 오나라 세자 파(波)와 전의(專毅)가 변란을 듣고 성에 올라 방어하고 부개를 성에 들이지 않았다. 부개는 즉시 사자를 삼강(三江)을 경유하여 월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동원하여 오나라 도성을 협공하여 일이 성공하면 오나라의 다섯 개 성을 떼어 주겠다고 설득하게 했다.
再說,闔閭聞秦兵滅唐,大驚,方欲召諸將計議戰守之事。忽公子山報到,言:「夫概不知何故,引本部兵私回吳國去了。」伍員曰:「夫概此行,其反必矣。」闔閭曰:「將若之何?」伍員曰:「夫概一勇之夫,不足為慮。所慮者,越人或聞變而動耳。王宜速歸,先靖內亂。」闔閭於是留孫武子胥退守郢都,自與伯嚭以舟師順流而下。既渡漢水,得太子波告急信,言:「夫概造反稱王,又結連越兵入寇,吳都危在旦夕。」闔閭大驚曰:「不出子胥所料也。」遂遣使往郢都,取回孫武伍員之兵。一面星夜馳歸,沿江傳諭將士:「去夫概來歸者,復其本位﹔後到者誅。」淮上之兵,皆倒戈來歸。
한편, 합려는 진(秦)나라 군사가 당나라를 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바로 여러 장수들을 소집하여 전쟁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려고 했다. 갑자기 공자 산이 보낸 사자가 도착하여 보고하기를, “부개가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휘하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부개의 이번 행동은 틀림없이 반역하기 위해서입니다.” 했다. 합려가 말하기를,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오원이 말하기를, “부개는 한 용감한 사내이니 염려할 게 없습니다. 걱정되는 일은 월나라 사람이 혹 변란을 듣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빨리 돌아가시어 우선 내란을 평정하십시오.” 했다. 합려가 이에 손무와 오자서를 영도로 돌아가 지키게 하고, 자기는 백비와 함께 배로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한수를 건너자 태자 파가 급한 편지를 보내 고하기를, “부개가 반역을 일으켜 왕이라 칭하고 다시 월나라 군사와 연결하여 쳐들어와서, 오나라 도성이 위태롭기가 아침저녁에 달렸습니다.” 했다. 합려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오자서가 예측한 바에서 벗어나지 않는구나.” 하고, 즉시 사자를 영도에 보내어 손무와 오원에게 회군하도록 했다. 한편으로 밤새도록 달려 오나라로 돌아가면서 강 연안의 장수와 군사들에게 전하기를, “부개를 버리고 돌아오는 자는 본래 직위를 회복시켜 주겠지만, 부개가 잡힌 뒤에 항복한 자는 모두 죽이겠다.”라고 했다. 회수 가의 군사들은 모두 창을 거꾸로 들고 달려와 귀순했다.
扶臧奔回谷陽。夫概欲驅民授甲。百姓聞吳王尚在,俱走匿。夫概乃獨率本部出戰。闔閭問曰:「我以手足相託,何故反叛?」夫概對曰:「汝弒王僚,非反叛耶?」闔閭怒,教伯嚭:「為我擒賊!」戰不數合,闔閭麾大軍直進。夫概雖勇,爭奈眾寡不敵,大敗而走。扶臧具舟於江,以渡夫概,逃奔宋國去了。闔閭撫定居民,回至吳都,太子波迎接入城,打點拒越之策。卻說,孫武得吳王班師之詔,正與伍員商議,忽報:「楚軍中有人送書到。」伍員命取書看之,乃申包胥所遣也。書略云:「子君臣據郢三時,而不能定楚,天意不欲亡楚,亦可知矣。子能踐「覆楚」之言,吾亦欲酬「復楚」之志。朋友之義,相成而不相傷。子不竭吳之威,吾亦不盡秦之力。」
부장(扶臧)은 곡양(谷陽)으로 달아나 돌아갔다. 부개(夫概)는 백성들을 몰아서 갑옷을 입혀 군사를 보충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왕 합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달아나 숨어 버렸다. 부개는 이에 홀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려와의 싸움에 나섰다. 합려가 묻기를, “나는 너를 수족으로 생각하여 서로 의지했거늘 어찌하여 반역을 일으켰느냐?” 하니, 부개가 대답하기를, “너는 왕료를 시해하고 반역하지 않았느냐?” 했다. 합려가 성을 내어 백비에게 시키기를, “나를 위해 저 반적을 잡아오시오!” 했다. 백비와 부개가 싸운 지 몇 합이 되지 않아서 합려가 대군을 휘몰아 바로 진격했다. 부개가 비록 용감했지만 중과부적을 어찌하랴. 대패하여 달아났다. 부장이 강에서 배를 마련하여 부개를 건너게 하여 송나라로 달아났다. 합려는 백성들을 위무하면서 오나라 도성에 돌아왔다. 태자 파의 영접을 받아 입성하여 월나라를 막을 계책을 상의했다. 한편 손무는 오왕으로부터 회군하라는 조서를 받고 바로 오원과 상의하는데, 갑자기 보고하기를, “초나라 군중에서 어떤 사람이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했다. 오원이 편지를 가져오게 하여 보니 신포서가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자네의 군신들이 영도에 주둔한 지 철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나, 초나라를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다! 이것은 하늘이 초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으려는 뜻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자네가 능히 초나라를 엎어버리겠다는 말을 실천하고 있다면, 나 역시 초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실천하고 있음이라! 친구의 의리상 서로 뜻한 바를 이루었으니 서로 해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 그대가 오나라의 위세를 다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진(秦)나라의 힘을 다하지 않겠네.” 했다.
伍員以書示孫武曰:「夫吳以數萬之眾,長驅入楚,焚其宗廟,墮其社稷,鞭死者之屍,處生者之室,自古人臣報仇,未有如此之快者。且秦兵雖敗我餘軍,於我未有大損也。《兵法》:『見可而進,知難則退。』幸楚未知吾急,可以退矣。」孫武曰:「空退為楚所笑,子何不以羋勝為請?」伍員曰:「善。」乃復書曰:「平王逐無罪之子,殺無罪之臣,某實不勝其憤,以至於此。昔齊桓公存邢立衛,秦穆公三置晉君,不貪其土,傳誦至今。某雖不才,竊聞茲義。今太子建之子勝,餬口於吳,未有寸土。楚若能歸勝,使奉故太子之祀,某敢不退避,以成吾子之志。」
오원이 신포서의 편지를 손무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오나라의 수만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로 쳐들어와서 종묘를 불사르고 사직을 무너뜨렸으며, 죽은 평왕의 시체를 매질하고 살아남은 초나라 군신들의 처첩들을 욕보였습니다. 옛날부터 신하였던 자가 원수를 갚은 일로 이렇게 통쾌한 일은 없었습니다. 또한 진(秦)나라 군사가 비록 우리 군사를 패배시켰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큰 손실이 아닙니다. 병법에 ‘할 수 있을 때 나아가고 어려움을 알면 물러서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초나라가 우리의 다급함을 모르고 있으니 물러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손무가 말하기를, “우리가 그냥 물러간다면 초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미승(羋勝)의 귀국을 청하지 않습니까?” 했다. 오원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입니다.” 하고, 즉시 신포서에게 편지를 써서 이르기를, “평왕이 아무 죄도 없는 아들을 쫓아내고, 죄 없는 신하들을 죽여서, 내가 실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여기에 이르렀네. 옛날에 제환공은 형(邢)나라를 세워 주고 위(衛)나라를 세워주었네. 그리고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세 번이나 진(晉)나라 군주를 세워주었네. 그러고도 그들은 땅을 탐하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네. 내가 비록 재주가 없으나 잠깐 그들의 의리를 들어 알고 있네. 지금 태자 건의 아들 미승이 오나라에서 근근이 살고 있으면서 한 뼘의 땅도 없네. 초나라가 만약 미승을 귀국시켜 죽은 태자의 제사를 받들게 해 준다면 내가 감히 물러나서 그대의 뜻을 이루게 해 주지 않겠는가!” 했다.
申包胥得書,言於子西。子西曰:「封故太子之後,正吾意也。」即遣使迎羋勝於吳。沈諸梁諫曰:「太子已廢,勝為仇人,奈何養仇以害國乎?」子西曰:「勝匹夫耳!何傷?」竟以楚王之命召之,許封大邑。楚使既發,孫武與伍員遂班師而還。凡楚之府庫寶玉,滿載以歸,又遷楚境戶口萬家,以實吳空虛之地。伍員使孫武從水路先行,自己從陸路打從歷陽山經過,欲求東皋公報之,其廬舍俱不存矣。再遣使於龍洞山問皇甫訥,亦無蹤跡。伍員嘆曰:「真高土也!」就其地再拜而去。至昭關,已無楚兵把守,員命毀其關。
신포서가 오원의 편지를 받아 보고 자서(子西, 공자 申)에게 말하니, 자서가 말하기를, “옛 태자의 아들을 봉하는 일은 바로 내 뜻과 같소.” 하고, 즉시 사자를 오나라에 보내 미승을 데려오려고 하자, 심제량(沈諸梁)이 간하기를, “태자는 이미 폐위되었고 미승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원수를 길러서 어찌 나라에 해를 끼치려 하십니까?” 하니, 자서가 말하기를, “미승은 필부일 뿐이오. 무슨 해를 끼칠 수 있겠소?” 했다. 결국 초소왕의 명으로 그를 불러서 큰 고을에 봉할 것을 허락했다. 초나라의 사자가 이미 출발하자 손무와 오원은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무릇 초나라 부고의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돌아갔으며, 또한 초나라 변경의 1만 호의 백성들을 오나라의 빈 땅에 이주시켰다. 오원은 손무를 물길로 먼저 가게 하고, 자기는 육로를 택하여 역양산(歷陽山)을 지나면서 동고공(東皐公)을 찾아 은혜를 갚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초가집은 모두 없어졌다. 다시 사람을 용동산(龍洞山)에 보내어 황보눌(皇甫訥)을 찾았으나 역시 아무런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원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고고한 처사들이로구나!” 하고, 그곳에 두 번 절하고 떠났다. 오원이 소관(昭關)에 이르렀으나 지키는 초나라 군사들은 없었다. 오원은 군사들에게 소관을 헐어버리라고 명했다.
復過溧陽瀨水之上,乃嘆曰:「吾嘗饑困於此,向一女子乞食,女子以盎漿及飯飼我,遂投水而亡。吾曾留題石上,未知在否?」使左右發土,其石字宛然不磨。欲以千金報之,未知其家,乃命投金於瀨水中曰:「女子如有知,明吾不相負也!」行不一里,路傍一老嫗,視兵過而哭泣。軍士欲執之,問曰:「嫗何哭之悲也?」嫗曰:「吾有女守居三十年不嫁,往年浣紗於瀨,遇一窮途君子,而輒飯之,恐事洩,自投瀨水。聞所飯者,乃楚亡臣伍君也。今伍君兵勝而歸,不得其報,自傷虛死,是以悲耳。」
오원이 다시 율양(溧陽)의 뇌수(瀨水) 가를 지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이곳에서 배를 곯아 어려울 적에 한 여자에게 걸식을 했다. 그 여자가 국과 밥을 나에게 주고 마침내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내가 그때 바위 위에 글을 새겼는데 아직도 글씨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 오원이 좌우의 부하들에게 흙을 걷어 내라고 하니, 그 바위 위에 글씨가 없어지지 않고 뚜렷이 남아있었다. 오원이 천금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으나 그 여자의 집을 알 수가 없었다. 즉시 군사들에게 천금을 뇌수 강물에 던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여자가 만일 나를 알아본다면 내가 그대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 것이라.” 했다. 오원이 1리를 가기도 전에 길옆에서 한 노파가 군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통곡했다. 군사들이 잡으려고 하며 묻기를, “할머니는 어찌하여 그리 슬피 곡을 하는가?”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나에게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간 딸이 있었는데, 옛날에 뇌수에 빨래하러 갔다가 우연히 한 곤궁한 군자를 만나 문득 그에게 밥을 주고는 그 일이 남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뇌수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내가 들으니 그 밥을 얻어먹은 사람이 곧 초나라의 망명객 오자서라고 했습니다. 오늘 오자서 장군이 싸움에 이겨서 돌아온다고 하는데, 내 딸은 그 보답도 받지 못하고, 헛되이 죽었으니, 그래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했다.
軍士乃謂嫗曰:「吾主將正伍君也。欲報汝千金,不知其家,已投金於水中,盍往取之?」嫗遂取金而歸。至今名其水為投金瀨。髯仙有詩云:「投金瀨下水澌澌,猶憶亡臣報德時﹔三十年來無匹偶,芳名已共子胥垂。」越子允常聞孫武等兵回吳國,知武善於用兵,料難取勝,亦班師而回,曰:「越與吳敵也。」遂自稱為越王。不在話下。闔閭論破楚之功,以孫武為首。孫武不願居官,固請還山。王使伍員留之。武私謂員曰:「子知天道乎?暑往則寒來,春還則秋至。王恃其強盛,四境無虞,驕樂必生。夫功成不退,將有後患。吾非徒自全,并欲全子。」員不謂然。
군사들이 그 노파에게 말하기를, “우리 대장님이 바로 오자서 장군이요. 천금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할머니의 집을 찾지 못하여 그 금을 강물 속에 던졌습니다. 어찌 가서 그 금을 가지지 않습니까?” 했다. 노파가 마침내 금을 건져서 돌아갔다. 지금도 그 물가를 투금뢰(投金瀨)라고 한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투금뢰의 강물은 출렁출렁 흘러가고, 망명객이 은덕을 보답한 것을 잊지 않는 듯하구나! 나이 삼십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지만, 꽃다운 이름은 오자서와 함께 길이 전해지도다.” 했다. 월나라 군주 윤상은 손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손무가 용병술에 능한 것을 알아 오나라 군사와 싸워 봐야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 역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월과 오는 적국이다.” 하고. 즉시 스스로 월왕이라고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합려는 초나라를 깨뜨린 공을 논하여 손무를 으뜸으로 쳤다. 그러나 손무는 벼슬 살기를 원치 않고 굳이 나부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오왕 합려가 오원을 시켜 말렸지만, 손무가 오원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장군은 천도를 아십니까?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오고 봄이 지나면 가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왕은 그 강성함을 믿고 사방에 근심이 없어졌으니 교만하고 즐기는 마음이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무릇 공을 이루고서도 물러나지 않으면 장차 후환이 있게 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온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군도 온전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하니, 오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武遂飄然而去。贈以金帛數車,俱沿路散於百姓之貧者。後不知其所終。史臣有讚云:「孫子之才,彰於伍員﹔法行二嬪,威振三軍。御眾如一,料敵若神﹔大伸於楚,小挫於秦。智非偏拙,謀不盡行﹔不受爵祿,知亡知存。身出道顯,身去名成﹔書十三篇,兵家所尊。」闔閭乃立伍員為相國,亦倣齊仲父楚子文之意,呼為子胥而不名。伯嚭為太宰,同預國政。更名閶門曰破楚門。復壘石於南界,留門使兵守之,以拒越人,號曰石門關。越大夫范蠡亦築城於浙江之口,以拒吳,號曰固陵,言其可固守也。(此周敬王十五年事。)
손무는 즉시 표연히 떠나면서 오왕에게서 받은 황금과 비단을 마차에 싣고 가다가 길가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 후에 그가 어떻게 생애를 마쳤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관이 찬양하여 이르기를, “손무의 재주는 오원보다 빛났고, 군법을 두 후궁에게 행하여 위엄이 삼군을 떨게 했다. 많은 군사를 한 사람처럼 제어하며, 적을 헤아리기를 귀신처럼 했다. 초나라를 원정하여 큰 뜻을 펼쳤으나, 진나라 군사에게 이기지 못한 것은,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계책을 모두 행하지 않아서였다. 벼슬도 받지 않고, 물러날 때와 있을 때를 알았으며, 세상에 나와서 공을 세워 몸을 빛내고, 이름을 남긴 뒤에 몸은 물러가니, 그가 쓴 병법 13편은 병가들의 경전이 되었다.”라고 했다. 합려는 즉시 오원을 상국에 임명하여, 제나라의 관중과 초나라의 자문의 예를 따라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서(子胥)라고 불렀다. 백비를 태재로 삼고 오자서와 함께 국정을 맡아보도록 했다. 다시 오나라 도성의 창문(閶門)을 파초문(破楚門)이라고 고쳤다. 또 오나라의 남쪽 변경에 돌로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 이름을 석문관(石門關)이라 칭하여 월나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월나라의 대부 범려(范蠡)도 역시 절강(浙江) 어귀에 성을 쌓아 오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게 하고는 그곳의 이름을 굳게 지킨다는 뜻으로 고릉(固陵)이라 했다. (이 일은 주나라 경왕 15년의 일이었다.)
話分兩頭。再說,子西與子期重入郢城,一面收葬平王骸骨,將宗廟社稷,重新草創,一面遣申包胥以舟師迎昭王於隨。昭王遂與隨君定盟,誓無侵伐。隨君親送昭王登舟,方纔回轉。昭王行至大江之中,憑欄四望,想起來日之苦,今日重渡此江,中流自在,心中甚喜。忽見水面一物,如斗之大,其色正紅,使水手打撈得之,遍問群臣,皆莫能識。乃拔佩刀砍開,內有饟似瓜,試嘗之,甘美異常。乃遍賜左右曰:「此無名之果,可識之,以俟博物之士也。」不一日,行至雲中,昭王嘆曰:「此寡人遇盜之處,不可以不識。」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초나라 자서(子西)와 자기(子期)는 다시 영도에 입성하여 초평왕의 해골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종묘와 사직을 새로 지었다. 또한 신포서를 보내어 수군을 거느리고 수나라에서 초소왕을 모셔 오게 했다. 초소왕이 마침내 수나라 군주와 회맹을 하여 침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수나라 군주가 친히 초소왕이 배에 오르는 것을 전송한 뒤에 돌아갔다. 초소왕이 큰 강 가운데에 이르러 배의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면서 지난날의 고생과 오늘 다시 이 강을 건너느라 중류에 있게 된 것을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갑자기 강물 위에 떠 있는 물건을 하나 보았다. 크기는 말만 하고 색은 붉었다. 초소왕이 선원을 시켜 그 물건을 건져 올려서 여러 신하에게 물건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허리에 찬 칼을 뽑아 그 물건을 자르자 안에는 오이와 비슷한 속이 들어 있어 맛을 보니 아주 달았다. 이에 좌우에 두루 나누어주며 말하기를, “이 이름 없는 과일을 알려면 박식한 선비를 기다려야 할 것 같소.” 했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운중(雲中)에 이르렀다. 초소왕이 한탄하기를, “이곳은 과인이 도적을 만났던 곳이니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했다.
乃泊舟江岸,使鬥辛督人夫築一小城於雲夢之間,以便行旅投宿。今雲夢縣有地名楚王城,即其故址。子西子期等離郢都五十里,迎接昭王。君臣交相慰勞。既至郢城,見城外白骨如麻,城中宮闕,半已殘毀,不覺淒然淚下。遂入宮來見其母伯嬴,子母相向而泣。昭王曰:「國家不幸,遭此大變,至於廟社凌夷,陵墓受辱,此恨何時可雪?」伯嬴曰:「今日復位,宜先明賞罰,然後撫恤百姓,徐俟氣力完足,以圖恢復可也。」昭王再拜受教。是日不敢居寢,宿於齋宮。次日,祭告宗廟社稷,省視墳墓,然後升殿,百官稱賀。
초소왕은 곧 배를 강 언덕에 대도록 하고, 투신(鬥辛)을 시켜 인부를 독려하여 운(雲)과 몽(夢) 사이에 작은 성을 쌓게 하여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묵을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운몽현에 땅 이름이 초왕성(楚王城)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그 옛터이다. 자서와 자기 등이 영도에서 5십 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 초소왕을 영접하고, 군신이 서로 위로하였다. 영도성에 당도하니 성밖에 백골이 널려있고 성안의 궁궐은 이미 그 태반이 무너져서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슬퍼져서 눈물을 흘렸다. 곧 궁궐로 들어가 그 모친 백영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모자가 서로 눈물을 흘렸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이 같은 큰 변란을 겪었습니다. 종묘사직은 무너지고 능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 원한을 어느 때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백영이 말하기를, “오늘 복위하여 마땅히 먼저 상벌을 밝히고 그런 다음 백성들을 쓰다듬고 보살펴서 서서히 기력을 키우면 회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했다. 초소왕이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날은 감히 침소에 들지 못하고 재궁(齋宮)에서 잤다. 다음 날 초소왕은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귀국을 고했으며 분묘를 살펴본 뒤에 궁전에 올라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昭王曰:「寡人任用匪人,幾至亡國,若非卿等,焉能重見天日。失國者,寡人之罪﹔復國者,卿等之功也。」諸大夫皆稽首謝不敢。昭王先宴勞秦將,厚犒其師,遣之歸國。然後論功行賞,拜子西為令尹,子期為左尹。以申包胥乞師功大,欲拜為右尹。申包胥曰:「臣之乞師於秦,為君也,非為身也。君既返國,臣志遂矣,敢因以為利乎?」固辭不受。昭王強之,包胥乃挈其妻子而逃。妻曰:「子勞形疲神,以乞秦師,而定楚國,賞其分也。又何逃乎?」包胥曰:「吾始為朋友之義,不洩子胥之謀,使子胥破楚,吾之罪也。以罪而冒功,吾實恥之!」遂逃入深山,終身不出。昭王使人求之不得,乃旌表其閭曰:「忠臣之門」。
초소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옳지 않은 사람들을 임용하여 거의 나라가 망할 뻔했소. 만약에 경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태양을 다시 볼 수 있었겠소? 나라를 잃을 뻔하게 한 것은 과인의 죄이고,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은 경들의 공이요.” 했다. 여러 대부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그렇지 않다고 했다. 초소왕이 먼저 잔치를 열어 진(秦)나라 장수를 위로하고 그 군사들을 후하게 호궤하여 귀국하게 했다. 그런 후에 논공행상을 하여, 자서(子西)를 영윤으로 삼고, 자기(子期)를 좌윤으로 삼았으며, 신포서는 진(秦)나라에 가서 군사를 빌려 온 공이 크므로 우윤(右尹)을 삼으려 했다. 신포서가 말하기를, “신이 진나라에 가서 군사를 빌려 온 것은 왕을 위해서였지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왕께서 이미 환국을 하셨으니 신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감히 그로 인해 이익을 취하겠습니까?” 하며,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초소왕이 다시 강권하자 신포서는 즉시 그의 처자들을 데리고 도망쳐 버렸다. 신포서의 처가 말하기를, “당신은 온 힘을 다해 진나라 군사를 빌려와 초나라를 안정시켰으니 상을 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도망칩니까?” 하니, 신포서가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친구의 의리 때문에 오자서의 계획을 발설하지 않아서 결국은 오자서가 초나라를 깨뜨리게 한 것은 나의 죄요, 죄를 짓고도 공이 있는 체하는 것은 사실 나의 수치요!” 했다. 마침내 신포서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리고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소왕이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살던 동네를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고 표창했다.
以王孫繇于為右尹,曰:「雲中代寡人受戈,不敢忘也。」其他沈諸梁、鍾建、宋木、鬥辛、鬥巢、薳延等,俱進爵加邑。亦召鬥懷欲賞。子西曰:「鬥懷欲行弒逆之事,罪之為當,況可賞乎?」昭王曰:「彼欲為父報仇,乃孝子也。能為孝子,何難為忠臣?」亦使為大夫。藍尹亹求見昭王,王思成臼不肯同載之恨,將執而誅之,使人謂曰:「爾棄寡人於道路,今敢復來,何也?」藍尹亹對曰:「囊瓦惟棄德樹怨,是以敗於柏舉。王奈何效之?夫成臼之舟,孰若郢都之宮之安?臣之棄王於成臼,以儆王也!今日之來,欲觀大王之悔悟與否?王不省失國之非,而記臣不載之罪,臣死不足惜,所惜者楚宗社耳。」
그래서 초소왕은 왕손요우(王孫繇于)를 우윤에 임명하면서 말하기를, “운중에서 나를 대신하여 과에 찔린 것을 감히 잊을 수 없소.” 했다. 그밖에 심제량(沈諸梁), 종건(鐘建), 송목(宋木), 투신(鬪辛), 투소(鬪巢), 원연(薳延)등은 모두 작위를 올리고 봉읍을 더하여 주었다. 또한 투회(鬪懷)를 불러 상을 주려고 하자, 자서가 말하기를, “투회는 왕을 시해하려고 했던 자이니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거늘 오히려 상을 주려고 하십니까?” 하니, 초소왕이 말하기를, “그가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으니 그는 효자입니다. 능히 효자가 될 수 있다면 어찌 충신이 되기가 어렵겠습니까?” 하고, 투회도 역시 대부로 삼았다. 남윤미(藍尹亹)가 초소왕을 뵙겠다고 하자 초소왕은 옛날에 성구(成臼)에서 자기를 배에 태우지 않았던 원한을 생각하고 장차 잡아 죽이려고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너는 과인을 길에다 버려두고 갔으면서 지금 감히 다시 오겠다니 무엇 때문인가?” 했다. 남윤미가 대답하기를, “낭와는 오직 덕을 버리고 원한을 샀다가 그 때문에 백거의 싸움에서 패했습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본받으려 하십니까? 대저 성구에서 제가 탔던 배와 지금 영도 궁궐의 편암함이 어느 것이 더 안락합니까? 신이 성구에서 대왕을 버린 것은 왕께 경계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뵈려고 하는 것은 대왕께서 잘못을 깨닫고 계신지 어떤지를 보려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잃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신이 왕을 태우지 않은 죄를 기억하신다면 신은 죽어도 아깝지 않으나 아까운 것은 초나라의 종묘사직입니다.” 했다.
子西奏曰:「亹之言直,王宜赦之,以無忘前敗。」昭王乃許亹入見,使復為大夫如故。群臣見昭王度量寬洪,莫不大悅。昭王夫人自以失身闔閭,羞見其夫,自縊而死。時越方與吳搆難,聞楚王復國,遣使來賀,因進其宗女於王,王立為繼室。越姬甚有賢德,為王所敬禮。王念季羋相從患難,欲擇良婿嫁之。季羋曰:「女子之義,不近男人。鍾建常負我矣,是即我夫也。敢他適乎?」昭王乃以季羋嫁鍾建,使建為司樂大夫。又思故相孫叔敖之靈,使人立祠於雲中祭之。子西以郢都殘破,且吳人久居,熟其路徑,復擇鄀地築城建宮,立宗廟社稷,遷都居之,名曰新郢。
자서(子西)가 아뢰기를, “남윤미의 말이 직언이니 왕께서는 마땅히 용서하시고 지난날의 실패를 잊지 마십시오.” 하니, 초소왕은 이에 남윤미의 알현을 허락하고 옛날과 같이 다시 대부로 삼았다. 초나라의 신하들이 초소왕의 도량이 넓고 깊은 것을 보고 모두가 기뻐하였다. 초소왕의 부인이 스스로 합려에게 몸을 허락하여 그 남편 보기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때 월나라가 바야흐로 오나라와 분쟁이 잦았는데, 초소왕이 돌아와 나라를 안정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축하하고 인하여 월왕의 종실 여자를 초왕에게 바쳤다. 초소왕이 그 여자를 후처로 삼았다. 월나라 여자가 아주 현명하고 덕이 있어 초소왕이 예를 갖추어 대했다. 초소왕이 여동생 계미(季羋)가 환난을 같이 한 것을 생각하여 좋은 짝을 골라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계미가 말하기를, “여자의 도리는 외간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건이 항상 나를 업고 다녔으니 그가 즉 나의 지아비입니다. 감히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습니까?” 했다. 초소왕이 이에 계미를 종건에게 출가시키고 종건을 사락대부(司樂大夫 ; 음악 담당)로 삼았다. 다시 옛 재상 손숙오의 영혼이 자기를 도왔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보내 운중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자서(子西)는 영도가 전란에 대부분이 파괴되고 또한 오나라 군사들이 오랫동안 주둔하여 영도 안의 길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하여 약(鄀) 땅에 성을 쌓아 궁궐을 축조한 후에 종묘와 사직을 다시 세우고 천도하여 신영(新郢)이라고 불렀다.
昭王置酒新宮,與群臣大會,飲酒方酣,樂師扈子恐昭王安今之樂,忘昔之苦,復蹈平王故轍,乃抱琴於王前奏曰:「臣有《窮衄》之曲,願為大王鼓之。」昭王曰:「寡人願聞。」扈子援琴而鼓,聲甚淒怨。其詞曰:「王耶王耶何乖劣?不顧宗廟聽讒孽!任用無忌多所殺,誅夷忠孝大綱絕。二子東奔適吳越,吳王哀痛助忉怛﹔垂涕舉兵將西伐,子胥、伯嚭、孫武決。五戰破郢王奔發,留兵縱騎虜荊闕﹔先王骸骨遭發掘,鞭辱腐屍恥難雪!幾危宗廟社稷滅,君王逃死多跋涉﹔卿士悽愴民泣血,吳軍雖去怖不歇。願王更事撫忠節,勿為讒口能謗褻!」
초소왕이 신궁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여러 신하와 잔치를 벌였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악사 호자(扈子)는 초소왕이 지금의 안락에 젖어 옛날의 고생스러움을 잊어버리고 다시 초평왕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초소왕의 앞에서 거문고를 가슴에 안고 아뢰기를, “신이 ‘궁육(窮衄 ; 코피가 터짐)’이라는 곡을 아는데 대왕을 위해 한번 연주해 보고자 합니다.” 하니, 초소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듣기를 원하노라.” 했다. 호자가 거문고를 당겨 타기 시작하니 그 소리가 매우 처량했다. 그 노랫말에 이르기를, “왕이시어, 왕이시어! 왜 어그러지고 못났던가? 종묘사직도 돌보지 않고 간신의 말을 들었구나. 간신을 등용하여 많은 신하를 죽이고, 충신과 효자를 주멸하여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두 사람이 동쪽으로 달아나 오나라로 넘어가니, 오왕이 애통해하여 원통한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쳐들어오니, 오자서, 백비, 손무가 결행했습니다. 다섯 번 싸워 영도가 함락되고 왕은 달아나고, 오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궁궐을 유린했습니다. 선왕의 해골은 파헤쳐지고, 썩은 시체가 매질 당한 치욕은 씻기 어렵습니다. 종묘와 사직은 거의 멸망될 뻔하였고, 왕께서는 죽음을 피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넜습니다. 대신들과 선비들은 슬픔에 젖어 백성은 피눈물을 흘렸고, 오군은 비록 물러갔으나 두려움은 끝나지 않았으니, 원컨대 왕께서는 나랏일에 힘쓰고 충신들을 위무하시어, 더러운 참언이 충신들을 해칠 수 없도록 해주십시오.” 했다.
昭王深知琴曲之情,垂涕不已。扈子收琴下階,昭王遂罷宴。自此早朝晏罷,勤於國政,省刑薄斂,養士訓武,修復關隘,嚴兵固守。羋勝既歸,楚昭王封為白公勝,築城名白公城,遂以白為氏,聚其本族而居。夫概聞楚王不念舊怨,自宋來奔。王知其勇,封之堂谿,號為堂谿氏。子西以禍起唐蔡,唐已滅而蔡尚存,乃請伐蔡報仇。昭王曰:「國事粗定,寡人尚未敢勞民也。」按《春秋傳》楚昭王十年出奔,十一年返國,直至二十年,方纔用兵滅頓,擄頓子牂,二十一年滅胡,擄胡子豹,報其從晉侵楚之仇,二十二年圍蔡,問其從吳入郢之罪,蔡昭侯請降,遷其國於江汝之間。中間休息民力近十年,所以師輒有功,楚國復興,終符「湛盧」之祥,「萍實」之瑞也。
초소왕은 거문고 곡조의 진정(眞情)을 깊이 이해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호자가 거문고를 거두고 층계 밑으로 내려가자 초소왕이 연회를 끝마쳤다. 이때부터 소왕은 아침 일찍 조회를 열어 저녁 늦게 파했으며 국정에 전념하였다.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였으며, 군사를 양성하여 무술을 훈련하였고, 다시 변경의 관문을 수리하여 군사들을 보내 엄하게 지켰다. 미승이 오나라에서 돌아오자 초소왕은 그를 백공(白公)에 봉하고 성을 쌓아 백공성(白公城)이라 부르고 마침내 백씨를 성씨로 하여 그 종족들이 모여 살게 했다. 부개가 초소왕이 옛날의 원한에 괘념치 않는다는 말을 듣고 송나라에서 오니 초소왕이 그 용기를 알고 그를 당계(堂谿)에 봉하고 당계씨라 불렀다. 자서(子西)가 초나라의 재난은 모두 채나라와 당나라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당나라는 이미 멸망시켰으나, 채나라는 있었으므로 채나라를 정벌하여 원수 갚기를 청했다. 초소왕이 말하기를, “나랏일이 겨우 조금 안정되었는데, 과인이 감히 백성을 더 괴롭힐 수 없소.” 했다. <춘추(春秋)>에 전하기를, 초소왕 10년에 피난을 떠났다가, 11년에 초나라에 돌아왔다. 20년에 이르러 비로소 군사를 일으켜 돈(頓)나라를 멸하고 돈나라 군주 장(牂)을 사로잡았다. 21년에 호(胡)나라를 멸하고 호나라 군주 표(豹)를 사로잡아 옛날에 그가 진(晉)나라를 따라 초나라를 침입한 행위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22년에 채나라를 포위하고, 오나라를 따라 초나라의 영도를 공격한 죄를 묻자 채소후가 항복을 청했다. 초소왕이 그 나라를 강(江)과 여수(汝水) 사이로 이주시켰다. 초소왕은 중간에 10년 동안 백성들을 휴식시켜 힘을 길렀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공을 이루고 초나라를 부흥시켰다. 마침내 담로검(湛盧劍)이 스스로 초소왕을 찾아오고, 강을 건널 때 이름을 알지 못했던 평실(萍實)이라는 과일을 얻은 상서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要知後事,且看下回分解。
그 다음 일을 알고 싶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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