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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1일 주일메세지
하나님의 그리스도
말씀 : 누가복음 9 : 18 - 36
요절 : 누가복음 9 :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 시니이다 하니"
우리나라는 서구사회가 300년에 이룬 것을 50년 만에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압축성장'이라고 부릅니다.
압축성장의 과정을 경험한 사람에게서는 '빨리 빨리 문화'가 있습니다. 압축성장의 결과물을 맛보며 자란 세대들은 '좋은 것, 즐거운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는 매우 많은 문제들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올바른 영향력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 '십자가를 통한 부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진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가 무시당한다고 슬퍼하고 손해 보는 것이 많다고 위축되고 억울하다고 대들면 싸운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보장된 영광과 상급을 상실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다시금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 시대의 악영향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와 영광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의 그리스도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할 때,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핵심 주제에 대하여 곧바로 거론하기 보다는 핵심주제와 비슷한 주제를 먼저 이야기 하여 생각하게 한 다음 핵심이슈를 꺼내면 대답하는 사람에게나 질문하는 사람이나 서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라는 질문을 하실 때, 먼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 대답하며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보았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면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경험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 다시 온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전하시는 메세지가 세례 요한과 같을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엘리야에게 감명 받은 사람은 엘리야가 다시 온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렸는데,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이사야서를 읽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말씀을 자주 인용하신다고 생각하여 이사야 같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부분을 전체로 말하기 좋아합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견해를 예수님께 전해 드리며 '예수님은 누구실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아는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믿는 사람이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제자들은 사람들의 견해를 예수님께 보고 하면서 자신들도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그 동안 본 것과 체험한 것과 말씀 들은 것들을 기초로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베드로는 가장 분명하고 가장 빠르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이십니다. 베드로는 정답을 말하였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정답을 말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세다 빈들에서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컸습니다. 이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셔다가 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경제 문제의 해결자 였습니다. 예수님만 모시고 있으면 경제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날 이후 떼를 지어 다니며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 다녔습니다. 내친 김에 다윗 왕 시대와 같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고 주변 나라로부터 조공 받는 강력한 나라를 이루어주시기 원하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으므로 베드로에게 함부로 '메시야'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메시야는 어떤 메시야이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유대인들은 먹고 사는 문제와 함께 자기들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로마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면 이 문제만큼은 반드시 해결해주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강력한 메세지를 전하시며 사람들의 큰 인기를 끌자 혹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각종 병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자 드디어 오신 것인가? 기대가 커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빈 들에서 오천명을 먹이시자 그들의 기대는 확신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왕으로 모시자'
그들이 믿는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메시야로써 어떤 길을 가시겠다고 하십니까?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 받고 죽임 당하는 길을 가겠다고 하십니다. 그 길을 가신 후 사흘 만에 살아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는 정치적 메시야가 되지 않으시고 왜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야가 되겠다고 하십니까? 죄와 사망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경제문제와 정치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문제와 사망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로 보시는 죄와 사망을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급하고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취업문제가 시급하다고 봅니다. 청년들은 취업되더라도 안정된 직장에 취업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금수저', '흙수저'는 차별과 불공평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공기업에 취업하면 행복합니까? 제가 졸업할 때, 취업 인기도 1순위는 한국전기통신공사였습니다. 공무원 근무조건에 급여는 사기업만큼 준다고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주) KT 가 되었습니다. 한국방송공사는 (주) 한국방송이 되었고, 한국이동통신공사는 (주)SK텔레콤이 되었습니다. 포항제철공사는 (주)포스코가 되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에 들어간다고 해서 나의 인생이 편안해 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회사 들어갈 궁리하느라 비참하니 차라리 처음부터 금수저로 태어나면 어떻겠는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1997년 20대 대기업그룹을 찾아보니, 현대, 삼성, LG, 대우, 선경, 쌍용, 한진, 기아, 한화, 롯데, 금호, 한라, 동아건설, 두산, 대림, 한솔, 효성, 동국제강, 진로, 코오롱 이것이 1위~20위까지 순서대로 열거한 것입니다. 이중 4위 대우, 6위 쌍용, 8위 기아, 13위 동아건설, 19위 진로 그룹이 그룹이 해체되거나 완전히 망했습니다. 이외에도 한일합섬, 신동아, 동부, 동양 그룹들이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한진, 한화, 롯데, 금호, 두산 그룹은 형제간에 서로 원수지고 싸웠거나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현대와 삼성은 형제나 자녀가 자살하였고 현대건설회장은 자기 집무실에서 뛰어내렸으며 진로 회장은 객지를 떠돌다가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자기 인생 감당하기도 힘든데, 아버지가 피땀 흘려 가꾼 회사라고 하며 물려 받으라고 하니, '부담된다' '괴롭다' 흥청 망청 일탈에 빠져드는 재벌 2세, 3세는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날 취업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급하고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없으면 취업되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없으면 재벌 2세라 해도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없습니다.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나는 취업을 하건 재벌이 되건 누군가를 감당하기보다 누군가 나를 감당해주어야 하는 존재일 뿐 입니다.
나의 죄문제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써 해결됩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장 9,10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써 나의 죄문제, 죽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난 받는 메시야 버림받는 메시야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나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갑질 피해를 당하는 일은 슬픕니다. 불합리하게 나에게 일방 강요하고 억압하면 마음이 원통합니다. 우리는 이럴 때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도 폭탄을 만들어서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시당하며 사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억울한 일 당하는 것을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하여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처럼 고난 받고 버림 받고 무시 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과 같이 영광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고난 받는 삶이라는 것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무시당했는데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무시당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 그렇습니다.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억울하면 하소연했지만 이제는 하소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내가 덧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불합리하면 항변했는데 이제는 대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없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어떤 영광에 이르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과 같이 고난을 영접하고 버림 받고도 감사하고 무시당하고도 기뻐하는 삶을 삽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내가 열심히 일 한 것을 빼앗아 가면 화 납니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성과를 만들어냈는데 내가 한 것을 가로채다니 울화통이 터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상급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한 것들 다 챙기고 보답을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나라의 영생과 그 나라의 큰 영광과 상이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나의 존재, 나의 업적, 나의 성과가 사라지는 것을 참으면 복이 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처럼 사는 것이 실생활에서 큰 손해를 당하게 합니다. 당시는 종교 지도자들이 핍박하고 출교까지 시켰습니다. 사회생활이 All Stop되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됩니다.
로마시대에는 황제숭배를 거부했다고 맹수에게 던지고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오늘날 대학사회에서는 '너 기독교야? 너 개독이야?' 친구들이 난리를 칩니다. '교회 다니는 오빠' '교회 다니는 여자'는 극혐입니다. 우리나라 15세 미만 기독교인 비율이 3.5%라고 합니다. 기독교인 비율이 5% 미만이면 미전도종족이라고 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예수님처럼 고난받고 참고 인내하면 바보가 되는 느낌입니다. 확실히 바보 맞습니다. 이런 괴로움이 싫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면 결국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매우 중요하며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을 잃습니다.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께서 너 모른다고 하시면 그것이야 말로 끝장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취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승리, 가장 큰 승리를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는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 길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가장 큰 승리를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2. 저의 말을 들으라
28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르치신 후 8일째 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서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이 기도를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기도 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그릇된 메시야관 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만민의 구주가 아니라 이스라엘만의 구주로 믿고 있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했고 사탄 마귀를 물리쳐주시는 것보다도 로마를 물리쳐 주실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제자들이 받아들이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 위에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되게 하셨습니다. 그 옷은 희어져 광채가 나고 그 모습은 영광과 위엄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변화된 모습은 십자가를 다 지신 후에 부활하셔서 얻게 될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최후의 승리를 얻으신 모습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변화되신 그 곳에 갑자기 두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 두 사람도 그 모습이 영광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들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며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 다 이 땅에 있을 때에는 고생을 아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지 모세도 엘리야도 하나님께 제발 자신들을 데려가 주시고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지금 영광 중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나눈 대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누는 주제는 예루살렘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 고난을 통한 영광을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인 모세와 엘리야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질 영광의 모습을 먼저 보여 주심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영접하도록 도우십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32,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들을 데리시고 산에 가신 것은 이들도 함께 기도의 동역을 감당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도를 잠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이들은 십자가와 고난 얘기가 나오자 마음에 근심과 짐이 생겼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이들의 기도를 막히게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흉내라도 내고자 눈을 감으면 찾아오는 것은 졸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횡설수설하는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베드로가 비몽사몽간에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을 내뱉었지만 그의 말에는 그의 관심사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기도하러 올라간 산에 기도의 전을 짓는 대신 영광스런 모습을 하신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더불어서 그냥 그대로 있고 싶었습니다. 아예 초막 셋을 지어서 장기거주를 하고 싶었습니다. 냄새나는 병자들과 귀신들려 고함지르고 상처받아 분노하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많은 양들이 기다리는 산 아래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편안하고 고난과 수고 없이 살고 싶습니다. 쉽고 빠르게 안전하게 안정을 얻고 싶고 행운을 잡고 싶습니다. 영광과 안정이 보장된 곳이라면 그곳에 초막 셋을 우리도 짓고 싶습니다. 오늘날 캠퍼스는 안일합니다. 돈은 필요하지만, 고난은 조금이라도 감당하기 싫어합니다. 고난을 회피하는 곳에는 소득도 없습니다. 고난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에게 영광도 멀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영광의 비전을 주어도 영광에 조금이라도 안주해보고자 횡설수설하는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 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 고난을 통한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신 길입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인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죄악된 인간들에게 결코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가르치시고 친히 가시고자 하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확증하여 주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고" 사람들은 고난받는 메시야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는 메시야는 필요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는 길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자기들의 기대와 자기들의 소망을 충족시켜주는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음에 영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마음으로 머리로 전 인격과 삶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그 본 것을 아무것도 말 하지 못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죄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이 길이 구원받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을 완주할 때, 승리와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십자가와 부활, 고난을 통한 영광의 진리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과 우리의 실제 생활이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복음 진리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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