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그램>
* 얀 시벨리우스 - 포횰라의 딸, Op.49
* 키모 하콜라 - 클라리넷협주곡 (클라리넷: 카리 크리쿠)
* 루드비히 판 베토벤 - 교향곡 5번 C단조 Op.67
오스모 벤스케와 미네소타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2004)의 평이 워낙 좋아서 연초부터 기다려왔던 공연을 지난 금요일에 보았습니다. 특히 5번은 음악평론가들도 수작의 반열에 올려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하여 큰 기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베토벤을 제외하고 두 명의 작곡가와 지휘자, 클라리넷 협연자 모두 핀란드 출신이라 이들이 보여줄 북구적 앙상블도 내심 궁금했구요.
첫 곡은 시벨리우스의 ‘포횰라의 딸’이라는 교향시로 재작년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처음 이름을 접하고 실연은 처음 들어본 곡입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프로그램 북을 슬쩍 읽어보니, 이 곡은 핀란드의 민족서사시 ‘칼레발라’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영웅이자 음유시인 ‘베이네뫼이넨’이 포횰라의 딸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원작의 내용을 자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영웅신화의 구조로 유추해 보건데, 이 곡은 칼레발라/포횰라, 베이네뫼이덴/딸의 갈등관계를 선과 악, 빛과 어둠, 나와 타자의 구도로 보아 시종일관 긴장과 대립을 연출하고 있는듯합니다. 첼로의 독주로 쓸쓸하고 음산하게 시작해서 점차 총주로 고조되고 확장되며, 부분부분 관현악의 밝고 경쾌한 날카로움까지... 전체적으로 북구의 감성을 잘 표현해 주는 좋은 연주였습니다.
두 번째 곡은 키모 하콜라의 클라리넷협주곡인데 제게는 작곡가 이름도 처음 들어볼 정도로 생소한 곡입니다. 현대곡이라 난해할 거라 예상했는데 다 듣고나니 이 협주곡은 감각적으로 귀에 감기는 흥미로운 곡이더군요. 특히 협연자 카리 크리쿠의 매력은 대단했어요. 1악장 서주는 마치 토카타와 같이 화려하고 강렬한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이후 클라리넷과 오케가 서로 주제를 주고받으면서 또 때로는 경쟁하면서 곡은 전개됩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펼쳐지는 독주 클라이넷 카덴차는 상당히 인상적인 여운을 남깁니다. ‘은폐된 선율(Hidden Songs)’이라는 부제가 붙은 2악장은 유려하고 서정적인 선율이 천천히 흐르면서 시작합니다. 클라리넷 협주곡하면 떠오르는 모차르트의 협주곡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부드럽고 조용히 전개되다가 갑자기 협연자가 발을 구르며 박자를 맞추고...’이건 뭐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협연자가 무대 뒤로 퇴장을 합니다. 깜작 놀란 관객 앞에 오케 단원들이 협연자를 호명하자 투우사처럼 다시 나타나서 탭댄스에 문워크를 추는 예술의 전당 클래식 공연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계속해서 즉흥적인 재즈와 락발라드와 같은 리듬이 마구 섞이면서 경쾌하고 사랑스런 연주가 전개되었지요. 스팅의 ’Shape of My Heart'음악도 들리고 정말 웃음이 절로 나오는 흥겨운 연주였습니다. 특히 후반부 하프반주의 역할이 눈에 띄게 좋았습니다. 점입가경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요? 3악장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유대풍, 발칸풍, 터키풍, 짚시풍 등 다양한 이국적 선율들이 축제나 결혼식/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의 즐거움과 흥겨움, 슬픔을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연출해 주어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고란 브레고비치의 음악이 자주 연상되더군요. 쉼없이 이어지는 4악장에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오케 단원들이 마치 광장이나 시장에 모인 군중들처럼 술렁술렁, 웅성웅성거리며 시작합니다. 이 악장의 부제인 Khasene란 말이 ‘결혼’을 뜻한다고 하니 결혼식에 모인 하객들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클라리넷 협연자와 오케 단원들은 경연하듯이 각자 연주 실력을 뽐내다가도 같이 어우러지면서 풍성한 앙상블을 전개하는데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동참하고 싶어지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아무도 박수를 안쳐서리ㅠ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쉴새없이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카리 크리쿠는 한 명의 무용수이자 연극배우와 같았어요. 클라리넷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퍼포먼스를 보여준 셈이지요. 관객들은 연주가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로 그를 찬양하고 그에게서 받은 감동에 보답했지요. 마지막 앵콜 해프닝까지큰 큰 웃음을 선사한 카리 크리쿠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곡인 이날의 하이라이트, 베토벤 교향곡 5번은 가장 기대가 컸던 곡입니다. 서울시향이 오스모 벤스케를 만나면 어떤 색깔의 운명을 연주해 줄지 궁금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가 본 들어본 국내 오케스트라의 운명 중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연이었습니다.물론 강하고 에너지가 충만한 연주는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균형잡힌 운명이었습니다. 특히 오스모 벤스키의 특징이 다이나믹 레인지를 강조해 매우 세밀하고 깨끗한 연주를 펼친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 연주였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집중력있는 앙상블에다가 구성과 짜임새도 탄탄하고 속도감도 대체로 표준이었습니다. 다만 3악장에서 관악기가 좀더 세게 불어도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4악장 마지막 총주에서 안개를 뚫고 나오는 한줄기 햇빛과 같은 승리의 감정을 장엄한 분위기로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 점은 개인적인 안타까움으로 남지만 그런대로 매우 훌륭한 연주였다고 생각합니다. 오스모 벤스케의 지휘하는 얼굴표정과 손짓, 몸짓도 열정적이고 단원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모습도 사랑스럽게 느껴져 다시 만나고 싶은 지휘자 중 한사람에 올려놓으려 합니다. 이번 연주를 만약 TV에서 방영해준다면 놓지지말고 꼭 보시길 강추드립니다.
첫댓글 눈물을 머금고..취소...................더 좋은 곳 다녀왔으므로......위안...ㅎㅎㅎ
안그래도 오셨을까 두리번두리번... 찾아었어요 ㅋㅋ 더 좋은 곳을 다녀오셨다니 좋네요~~
ㅎㅎ 더 좋은 곳... 이었을리가 없습니다 ^^
@브리앙 힝~~~ㅋㅇㅋ
프랑크푸르트에서 보자규...
네에 토요일에 뵈어요...오로스코 에스트라다도 기대됩니다^^
간절기 건강 조심하시구요~~
읽기만해도 흥분이 마구 쏟아지는 공연이었네요.
생생한 리뷰 감사합니다.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근데 실제 공연은 제가 쓴 것보다 훨씬 다채롭고 흥미진진했어요...
핀란드 3총사의 contemporary music의 진수를 보셨군요.
크리쿠는 진은숙의 클라리넷 협주곡도 좋은 표현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현대 클라리넷티스트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기교를 연구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연주하는 그의 노력으로 클라리넷 연주 폭을 넓혀 현대 작곡가들도
클라리넷으로 또 다른 세계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같습니다. 다양한 음악을 접하는 서울 시향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pure님의 생생한 평, 제가 음악회를 보고 온 느낌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도 프로그램북을 보고나서야 그분이 진은숙의 협주곡을 초연한 클라리네티스트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자유롭고 대중과 소통할 줄 아는 연주가라고 생각했지요. 상영님의 글을 읽어보니 그 이상으로 대단한 연주자군요. 하콜라는 이 곡을 크리쿠를 위해 작곡했다고 하더라구요. 크리쿠의 실력과 스타일을 믿으니 클라리넷으로 마음껏 해봐라라는 식으로...그날 하콜라도 예당에서 같이 연주를 듣고 무대로 올라가 지휘자, 협연자, 작곡가 셋이 인사했는데 보기만해도 뿌뜻한 광경이었죠. 저또한 서울시향에 감사드립니다. 그날은 실력있는 객원연주자가 대거 빠져서 내심 걱정했는데 좋은 연주를 해주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적인 현장에 있을 수 있어서 놀랍고 행복했습니다 ^^
저두요 ㅎㅎ 진정 행복한 시간이었답니다...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아쉬웠지요...
서울 시민으로서 서울 시향이 다양한 레퍼토어를 소화해 가며 성장하는 모습이 뿌듯하고, 재밌고 다양한 시도를 가까운 곳에서 직접 경험해 볼 수 있으니 관객으로서 또 좋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SPO가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내년에도 흥미돋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더욱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