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위기 맞아,
아시아 AC081
기아는 기술 욕심이 대단한 브랜드였다.
1944년, 국산 최초의 자전거 ‘3000리호’를 만들었고 이륜차와 삼륜차 제조로 기틀을 다졌다.
1974년엔 4도어 소형 세단 브리사를 출시해 승용차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자체적으로 엔진을 개발해 자동차 기술 국산화의 꿈에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합리화’란 명분 아래 기아의 꿈은 허무하게 짓밟혔다. 현대차도 억울하긴 마찬가지였다.
1977년 2월 내놓은 1톤 트럭 포터는 국내 최초의 디젤 소형 상용차였다.
직렬 4기통 1,760㏄ 디젤 엔진을 얹고 4단 수동기어와 맞물려 뒷바퀴를 굴렸다.
당시 포터는 1981년까지 누적판매 5만 대를 돌파할 만큼 소상공인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하루아침에 단종시킬 수밖에 없었다.
‘승합차=봉고’의 인식 심은 주인공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는다’는 말이 있다.
기아는 좌절하지 않고, K-360과 브리사를 통해 제휴했던 동양공업(현 마쓰다 자동차)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 점찍은 모델은 마쓰다 봉고. 일본에서 1966년 처음 데뷔한 ‘원박스카’다.
1980년 9월, 기아는 봉고 1톤 트럭을 도입해 판매했다. 디젤 엔진 최고출력은 70마력으로, 현대 포터보다 15마력 높았다.
진짜 출사표는 이듬해 8월 선보인 봉고 코치였다. 마쓰다의 지원을 받아 만든 12인승 밴이다.
차체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4,485×1,620×1,995㎜. 직렬 4기통 2.2L 디젤 70마력 엔진을 얹고 뒷바퀴를 굴렸다.
1,430㎏의 차체를 최고속도 시속 110㎞까지 끌었다.
그러나 봉코 코치 출시 당시만 해도 기아산업조차 돌풍을 일으킬 거란 기대는 하지 못했다.
봉고 코치
이미 1977년 현대 HD-1000 미니버스 등 비슷한 차종이 나온 바 있다.
그러나 1톤 트럭 뼈대에 차체 얹은 ‘가지치기’에 머물렀다. 의자는 불편했고 승차감은 딱딱했다.
반면 봉고는 일본에서도 원박스카가 메인이었다. 승용차 느낌 물씬한 인테리어와 편안한 승차감이 대표적이다.
여러 명의 승객을 한 번에 실어 나르는 승합차의 등장에 소비자는 열광했다.
기아에게 봉고 코치는 두 번째 승합차 도전이었다. 처녀작은 AC081이었다.
기아산업은 1976년 상용차를 생산하던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했다.
1980년 6월, 봉고 코치보다 1년 2개월 앞서 AC081을 선보였다.
1.4톤 트럭 기아 타이탄의 섀시에 보디를 얹은 승합차로, 12인승과 15인승으로 나눴다.
그러나 판매 부진 때문에 데뷔 1년 만에 자취를 감췄다.
트럭 기반의 미니버스 압도한 상품성
AC081은 트럭 섀시를 바탕 삼아 승합차치고 실내가 좁았다.
특히 “머리공간이 부족하고 승차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재미있는 건, 이듬해 기아가 마이너체인지 모델로 AC076을 선보이며 ‘미니밴’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5년 남짓 짧은 생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시트를 없앤 화물차인 AV081과 AV076도 외면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현대 HD1000도 한계는 명확했다.
1977년, 1세대 포드 트랜짓의 섀시를 바탕으로 미쓰비시 델리카의 디자인을 참고해 독자 개발한 미니버스다.
AC081과 마찬가지로 트럭에 뿌리를 뒀다. 그래서 실내가 좁고 승차감도 불편했다.
윈도 벨트 라인이 높아 개방감이 뛰어나지 않았다. HD1000 역시 자동차 공업 합리화조치를 계기로 자취를 감췄다.
현대 HD1000 ‘혼라이프 SUV’라는 괴상한 차종이 나오는 요즘, 봉고가 겨눈 과녁은 사뭇 달랐다.
이 시절 우리나라는 가족 구성원이 많았다. 가계소득이 올라 주말 나들이를 즐기는 문화도 꽃피웠다.
기아는 봉고 출시 후 ‘봉고 캠프’ 행사를 열어 레저 수요를 공략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출시 첫해 1,077대를 팔았고, 이듬해 1만3,091대를 팔아 ‘대박’을 터뜨렸다.
봉고 코치의 가격은 648만 원. 당시 승용차 판매 1위 현대 포니 2의 가격이 자가용 기준 347만 원이었다.
약 300만 원 더 비싼 가격을 매기고도 연간 1만 대 이상 팔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즉, 기아의 틈새공략은 적중했다. 혹자는 ‘무모한 도박’이라며 봉고의 실패를 예상했다.
하지만 결국 위기의 기아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봉고 신화’가 싹튼 순간이었다.
봉고 생산 공장 위기에 빠진 기아 일으켜 세운 구세주
당시 기아산업의 TV 광고를 보면 이런 문구가 있다. ‘
봉고끼리 만나면 인사해요.’ 정장 입은 젊은 남성이 굽잇길을 달리며, 마주 오는 봉고 운전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뒷좌석에 탄 유치원생 아이들도 창밖으로 손을 내민다. 지붕에 자전거를 싣고 여행 떠나는 가족도 눈길을 끈다.
이처럼 봉고는 소비자가 승용차처럼 운행할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갔다. 연료효율성을 강조한 점도 눈에 띈다. ‘
1,200원이면 하루 50㎞를 운행합니다.’ 당시 신문광고 카피다.
심지어 하루 100㎞ 주행을 기준으로 월간 유류비를 표로 세세하게 적어 놓았다.
봉고 코치는 일반 승용차보다 훌쩍 큰 덩치를 지녔지만, 고속주행 연비가 탁월한 2.2L 디젤 엔진을 앞세워 업무용뿐
아니라 자가용도로도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봉고 광고 또한, 출시 초기 12인승 모델인 봉고 코치만 내놨지만 이듬해 3인승과 6인승 봉고 밴을 선보였고,
1983년에는 2종 보통 면허로도 운행할 수 있는 9인승 봉고 나인을 라인업에 더했다.
1985년엔 수출 전략 모델인 봉고 타운을 출시했는데, 기존 디젤 엔진 대신 직렬 4기통 1.4L 90마력 가솔린 엔진을
얹고 앞바퀴에 디스크 브레이크를 달아 안전성을 높였다. 기아에게 봉고는 ‘구세주’와 다름없었다.
당시 기아 직원들은 왼쪽 가슴에 단 이름표 위에 봉고 상표를 불였다. 아침 인사는 “봉고를 팝시다”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봉고 코치는 자가용뿐 아니라 유치원, 교회, 병원 등 기관을 중심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결국 1981년까지 누적적자 500억 원을 넘던 기아는 이듬해 39억 원 흑자로 탈바꿈했다.
봉고 광고(2) 뜨거운 인기 힘입어 베스타로 진화해
매력적인 안팎 디자인도 봉고의 인기를 한 몫 거들었다. AC081이나 HD1000처럼 투박하지 않은 유선형 차체다.
창문 크기가 커 개방감이 뛰어났고 사이드 미러도 큼직해 후방시야가 쾌적했다.
실내는 4열로 구성했는데, 의자를 모두 펼치면 4인 가족을 위한 침실로 변신했다. 여름마다 주요 휴양지에 마련한
‘봉고 캠프’는 이동 전시장 역할을 했다. 특히 봉고는 현대적 승합차의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봉고차’를 승합차의 대명사처럼 쓴다. 당시 봉고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다.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된 이후 현대차가 내놓은 그레이스도 현대에서 나온 봉고차’로 불릴 정도였다.
1986년 3월, 기아는 봉고 코치의 후속 베스타를 선보이며 인기를 이어갔다.
베스타
베스타는 베스트(best)와 에이스(ace)의 합성어로, 다양한 신기술로 가득 찬 봉고의 후속 타자다.
예컨대 국산 미니버스 최초로 사륜구동 시스템을 품었고, 지붕엔 선루프를 심었다. 천장에 에어컨 송풍구도 마련했다.
엔진은 2.2L 디젤과 2.0L 가솔린을 준비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땐 국내 최초의 전기차 ‘베스타 EV’가 선도차와 중계차로 활약했다.
1986년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가 풀리면서 기아는 다시 승용차 사업에 뛰어든다.
소형차 프라이드와 중형차 콩코드를 앞세웠다. 프라이드는 미국 포드, 일본 마쓰다와 합작으로 만든 글로벌 전략 차종.
콩코드는 현대 쏘나타와 대우 로얄 프린스가 양분하고 있던 중형차 시장에 도전한 새 주역이다.
족쇄를 푼 기아산업은 1990년 사명을 ‘기아자동차’로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