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지역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문장가로 한문소설 『천군기(天君紀)』등을 저술한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의 한문 소설을 번역한 『황중윤 한문 소설-일사(逸史)·삼황연의(三皇演義)』가 출간됐다. 펴낸 곳 ‘새문사’, 신국판(신A5, 225×152) 663p 분량, 정가 33,000원. 김인경(金仁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박사 학위 논문 준비 중)씨와 조지형(趙志衡.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 태동고전연구소 수학, 경희대·인하대·인천가톨릭대 강의)씨가 번역했다. 이 책은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의 <삼황연의(三皇演義)>, <일사(逸史)>, <동명선생문집(東溟先生文集)>에 실려 있는 한문 소설 6편 『천군기(天君紀)』, 『사대기(四代紀)』, 『옥황기(玉皇紀)』,『천군기(天君紀)』Ⅰ, 『천군기(天君紀)』Ⅱ,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을 번역하여 싣고, 뒤쪽에 한문 원문 전체를 실었다.
기성면 삼산리 일명 승지봉산(承旨峰山)에 위치한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의 묘지 황중윤의 한문 소설은 그동안 고전 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지만 정작 울진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특히 한문 소설이어서 일반인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번역본 발간에 따라 한국학 연구자와 고전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황중윤의 작품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고, 그 가치 또한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천군기(天君紀)』는 16세기 무렵부터 심화되고 있던 조선 성리학의 심성론(心性論) 탐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마음(心)의 수양 문제를 마음을 의인화한 천군(天君)이 통치하는 국가의 위기와 회복해가는 과정에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다. 연의소설(演義小說,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허구적인 내용을 덧붙여서 흥미롭게 쓴 중국의 통속 소설)의 형식과 표현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 작품은 마음을 의인화한 작품으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천군전(天君傳)』이나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의『수성지(愁城誌)』와 맥락을 같이 하지만, 또 다른 차원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제까지 조선 후기에 정태제(鄭泰齊, 1612∼?)가 지은 창작물로 알려져 온『천군연의(天君衍義)』는 실상 황중윤의『천군기(天君紀)』를 다르게 바꾸어 새롭게 고친 변개(變改)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이 책의 역자(譯者)들은 황중윤의 문집에 남아 있는 서문 등에서『천군기(天君紀)』가 1633년(인조 11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이때는 황중윤의 나이 57세로 10여 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벗어난 해인만큼, 천군기는 황중윤의 유배 기간인 1623년에서 1633년 사이에 창작됐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했다. 『사대기(四代紀)』는 동양의 전통적인 순환론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으로, 사계절의 변화를 왕조(王朝)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빗대어서 가상의 역사서로 꾸미고 있다. 소설은 봄의 온화함, 여름의 맹렬함, 가을의 풍성함과 쓸쓸함, 겨울의 혹독함 등 사계절의 특성에 맞추어 제왕의 성품과 통치 방식을 연계시키고 있다. 역자들은 “소설이 가지는 내용의 구성 방식과 체재는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작품으로 알려지는 『화사(花史)』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면서, “『화사(花史)』가 화초(花草)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반면, 『사대기(四代紀)』는 소설 소재의 범위를 사계절로 확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역자들은 『사대기(四代紀)』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은 동소(桐巢) 남하정(南夏正, 1678~1751)의 『사대춘추(四代春秋)』가 있는데, 국명(國名)과 제왕(帝王)의 시호(諡號), 성품과 통치 방식 등에서 유사한 설정이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고 밝혔다.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묘지의 문인석(文人石)(좌),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묘지의 비석(碑石)(우) 『옥황기(玉皇紀)』는 중국의 왕조 교체 또는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다 옥황상제(玉皇上帝, 도가에서 하느님을 일컫는 말)의 뜻과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것이고, 역대의 성군(聖君)과 성현(聖賢), 위인(偉人)들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수행하여 선관이 되었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천군기(天君紀)』와 『사대기(四代紀)』 등 황중윤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도가적(道家的)인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옥황기(玉皇紀)』는 혼돈씨(混沌氏)의 아들인 옥황상제가 즉위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눈 후에 인간 세상을 주관할 관리들을 내려 보낸다는 내용으로 소설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벌어진 천조(天曹)와 진인(眞人)들의 비밀스러운 사적(史蹟)을 모두 알고 있는 소설의 저자(著者) 자신인 동명(東溟)이 진관에게 글을 올리면서 끝을 맺는다. 이 소설에서 황중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선술(神仙術)을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성을 기르고 보존하는 것이라는 기조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결국 이 작품 속에서의 옥황상제는 역사의 이면에서 작용하는, 역사를 움직이는 일관된 힘이나 법칙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역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특이하게『옥황기(玉皇紀)』는 공간 구성면에서 옥황상제가 직접 다스리는 천상계(天上界), 인간들이 살아가는 지상계(地上界), 천상계와 지상계 사이에 있는 제선국(梯仙國), 생전에 죄를 지은 이에게 벌을 내리는 지부(地府) 등 네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 황중윤은 특히 이 소설에서 옥황상제가 지상계의 인간들을 천상계로 바로 올려 보낼 것인지, 제선국에 둘 것인지, 지부에 맡길 것인지를 판단하는데, 역자들은 이에 대해 해당 인물에 대한 저자 황중윤의 포폄(褒貶)의식(옳고 그름과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견해)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은 임진왜란 당시에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의 탄금대(彈琴臺) 전투의 패배를 재조명한 몽유록(夢遊錄, 꿈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 작품) 작품이다. 역자들은 황중윤의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계선(尹繼善, 1577~1604)의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데, 동일한 소재를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황중윤의 한문 소설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진 것도 이 소설 『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으로 알려진다. 황중윤은 이 소설에서 유생(儒生)의 수궁(水宮) 연회(宴會) 참석이라는 모티프를 기반으로 하여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물에 투신한 신립을 몽유자(夢遊者)가 만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꿈속에서 과연 전투 패배의 책임이 신립 개인에게만 있는 것인지를 따져보는 기회로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꿈속에서의 대화를 통해 황중윤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만 전가하는 사이에 정작 짚고 넘어갔어야 할 사회적 모순, 제도적 모순과 병폐를 너무도 쉽게 간과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결국 신립의 패배만 기억 속에 남은 채 그러한 패배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문제들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황중윤은 소설을 통해 지적하면서, 전란을 야기한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한편, 역자들은『달천몽유록(㺚川夢遊錄)』은 발견될 당시부터 소설을 시작하는 부분이 빠져서 떨어져 나가고 없어 주인공이 꿈속에 들어가는 과정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황중윤의 한문 소설에 대해 역자들은 “황중윤의 작품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허구적 서사의 여러 가능성과 결합시킨 결정체”라며, “정사(正史)나 야사(野史)와 구별되는 가상의 역사 서술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 나타나는 허구는 사대부 문인들의 지적 수준과 교양, 문예 취향에 기반을 둔 수많은 전고((典故, 전례(典例)와 고사(故事))와 문학적인 관습들로 쌓아올린 세계라는 점에서 소설속의 허구와 차이가 난다”면서, “이로 인해 문재(文才)를 과시하는 희필(戱筆, 장난삼아 지은 시문이나 서화)이라는 평가가 뒤따르기도 하지만, 허구 축조 방식에서 나타나는 이런 특이성이야말로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고 평하고 있다.
■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황중윤은 1577년(선조 10년)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과 어머니 의성(義城)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평해(平海), 자(字)는 도광(道光), 호(號)는 동명(東溟)이다. 20세에 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의 차녀와 혼인하면서 장인인 박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24세에는 부친 황여일의 명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0~1620)를 찾아가서 몇 달 동안 머무르면서 학문을 배웠다. 황중윤이 지은 「천군기서(天君紀敍)」에 특별하게 언급되는 스승들이 바로 대암 박성과 한강 정구 두 사람이다. 황중윤은 생원으로 1612년(광해군 4년) 36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39세 때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어「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정언·헌납·낭청·사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특히 40세 때에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제수됐으나 인목대비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분노를 사서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1616년 신경희(申景禧, 1561~1615)의 옥사에 연루가 되어 추고를 당했고, 1618년 다시 사서에 기용됐다. 이 해에 명나라에서 요동 순마를 위해 병마 7천을 요청해왔고, 조정에서 징병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어서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입직하다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遞職, 벼슬을 갈아냄)됐고, 다음해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무과시험시에 관원들이 뇌물을 받은 것을 고발했다. 1620년 44세 때에 주문사(奏聞使,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로 임명되어 표문(表文, 예전 외교 문서의 한 종류)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1623년(인조 1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했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주화론자(主和論者)로 몰리면서 양사의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해남(海南)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해남에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와 교유했고, 윤선도의 사촌 동생들인 윤선진(尹善進)과 윤선일(尹善一)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어 이듬해 내지로 양이(量移, 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던 일)되었고, 1633년 57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다. 황중윤은 울진에 돌아온 후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월야동(月夜洞)에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도를 즐기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1648년에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황중윤의 묘소는 기성면(箕城面) 삼산리(三山里) 일명 승지봉산(承旨峰山)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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