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알렉세이 메스너
“사회적 책임은 비단 국가나 기업체만의 의무가 아닙니다. 인민 개개인이 각각 책임있는 자세를 견지하고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알렉세이 메스너, 2000년 신년연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메스너는 러시아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를 “붕괴 후 혼란과 경제공황 사태를 수습하고 러시아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유능한 정치인”으로 평가하지만, 또 어떤 이는 “언론사와 기업집단을 장악해 러시아 정치의 발전을 결정적으로 저해한 부패사범”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그러나 메스너가 현대 러시아의 모습을 완성시킨 인물이라는 중립적 수사에는 지지자와 비판자들 모두 공통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98년 수상(примьер) 임기를 시작한 메스너는 선거법 개정을 통해 결선투표제와 혼합비례대표제, 7%의 강력한 봉쇄조항을 신설하는 것으로 정치개혁에 박차를 올렸습니다. 이는 신생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기성정당의 힘을 빌려야만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 있게끔 하여 대부분의 급진적 어젠다를 ’순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정계는 지배적 여당인 정의사회당(PSO), 그리고 ‘약한 야당’ 진보당(PPR)의 1.5당제로 개편되었습니다. 진보당은 사회주의, 생태주의, 대중주의, 좌익 민족주의, 심지어 왕년의 유라시아주의자들까지 포괄하는 진보 빅텐트 정당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여당에 반대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뭉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정권을 탈취하는 일이 언젠가는 생기겠지만, 결코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햇수로 약 10년 남짓의 집권기동안 메스너는 ‘질서있는 민주주의’, ‘사회적 가치’, ‘건전한 공동체의식’, ‘책임사회’라는 슬로건을 당과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만들었습니다. IT산업의 비약적 발전, 그리고 사실상 무제한의 사찰을 가능케 하는 법조항들로 인해 정부는 인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몇몇 극단주의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건전한 인민들은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왜 우리나라에는 블랙박스와 CCTV가 이렇게 많은지“, ”과연 넴초프는 자살한 것이 맞는지“, ”언론이 정말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는지“,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인지“ 등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의문을 품었던 이들이 사실은 마약에 중독된 낙오자들이거나, 외국의 간첩이거나, 혹은 정신이상자로 밝혀졌으니, 아마 그럴 것입니다.
26. 아미나트 나가이
“당신들이 세계무대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완충지대’로서의 지정학적 입지 뿐입니다. 국제정치적 자살행위를 멈추지 않는다면, 파멸을 거부하는 인류의 몸부림이 당신들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 나탈리야 마그나트, 2012년 유럽위원회(European Council) 회의에서.
러시아에서는 심심치 않게 사회적 논란과 정부의 모순적 행태가 나타나는 편입니다. 2002년의 “러시아 공화국 대 아미나트 나가이” 대법원 재판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나가이에게 걸린 수많은 혐의들을 하나둘씩 기각한 재판부, 갑자기 기소를 취하한 검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법정을 빠르게 빠져나간 변호인단과 피고. 이 모든 것은 잘 짜여진 연극같았습니다.
알렉세이 메스너는 대중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내각서기”의 자리에 나가이를 앉혔습니다. 그녀는 모든 정책에 관여하면서도 모든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웠죠. 2001년 앨 고어 대통령과의 START III 협정 체결, 이듬해의 유럽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 CEIN 민주질서보호협정, 종교중립법 등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에 그녀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덕분에 세계는 자기파괴적 핵전쟁의 공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러시아는 전략적 파트너들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으며, 사회는 보다 ’안전‘해졌습니다.
2007년 메스너가 약속된 임기를 모두 마치자, 나가이는 새 후보군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지도자는 국제적 균형과 국내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무게감있는 인물이어야 했고, 무엇보다 ’공범자‘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선택된 인물은 왕년의 둘도 없는 동지이자 한때의 반체제 사범이었던 나탈리야 마그나트였습니다. 마그나트는 기존 당 중진들에 비해 경력이 한미하여 많은 이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으나,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이어가기에는 제격인 인물이었죠. 그리고 그녀는 ’동지‘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경제위기, 중동전쟁, 국제 테러리즘 등의 굴곡을 겪고도 살아남은 세계협조체제는 마그나트의 임기 중에도 잘 유지되었습니다. 2010년대 초중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아랍의 봄, 그리고 동유럽 소요사태에서 강대국들은 그 동안의 교훈을 잘 실천했습니다. ”급격한 현상변경은 모두를 위험에 빠지게 한다“는 교훈 말입니다. UN평화유지임무를 빙자한 다국적 정보작전의 성과로 ‘위협요소’는 적절히 제거되었으며, 동유럽은 여전히 동서방 간의 균형과 교류를 유지하는 완충지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가이는 세계의 급변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 원흉으로 기후변화, 전염병, 대규모 난민사태 등을 꼽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 ‘태평성대’가 막을 내린다면 그 원인은 제3세계 주변부의 위기가 강대국들이 차지한 중심부로 틈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뜻을 같이하는 세계의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함께 ‘람스도르프 컨센서스 재단(LCF)’을 세웠습니다. 비운의 개혁가이자 인권의 옹호자였던 예브게니 람스도르프의 이상을 본받아 재난에 대비하겠다는 것이었죠. 물론, 고통의 총량은 크게 바뀌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27. 안드레이 사사노프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사사노프는 2022년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국제적으로 ‘독재자’로 분류되지만, 실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은 언제나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반박에 막히고 맙니다. 사사노프는 총 여섯 번의 선거에서 성과를 증명해냈으며, 이는 실제 독재자들도 이루어내기 힘든 일입니다. 즉 가장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더라도 사사노프가 오직 압제와 철권만으로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는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보여집니다.
현재진행형인 24년의 임기동안 사사노프는 우크라이나의 대통령뿐 아니라 CEIN의 실질적인 관리자로 활동했습니다. 몰도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을 정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이란, 인도 등 많은 협력국들에게 옵저버 지위를 준 것은 사실상 그의 업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오랜 다툼은 양국 모두가 CEIN의 국경개방협정과 민주질서보호협정의 영향을 받게 되자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듯 풀어졌습니다. 메스너, 나가이, 마그나트 등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동안 사사노프는 내부를 탄탄히 다진 셈이었죠.
우크라이나의 경제규모는 나날이 상승하여, 러시아 영향권의 명실상부한 2인자이자 동서유럽을 통틀은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야당의 존재감이 희미하고 정교회와 결탁한 정권이 몇몇 급진적 운동가들을 절찬리 체포하고 있으며 언론자유지수가 매우 낮은 국가이지만, 어쨌든 우크라이나인들은 사사노프를 사랑합니다. 안 그러면 지들이 뭘 어쩌겠어요?
사사노프는 또한 람스도르프 컨센서스 재단의 행사에도 꽤 자주 참여하는 편입니다. 측근 중 하나인 페트로 포로셴코를 재단의 주요 후원자로 둔 것도 그의 결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가능한 최소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 말입니다. 2009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15차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LCF는 앨 고어 전 미국 대통령 등 명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코펜하겐 기후변화협정의 체결을 견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서있던 사사노프, 그리고 람스도르프 서클의 인물들은 앞으로도 세계를 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END. 벨 에포크..?
2022년 현재, 세계는 여전히 평화롭습니다. 뭐.. 일단 적어도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한 국가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편입니다. 벨 에포크라는 말이 있지요. 맨 먼저 ’참 좋은 시절‘이라 불렸던 시대는 약소국들의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와 강대국들의 책임성 부재로 인해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적어도 강대국들은 교훈을 얻은 것 같군요.
중국이 코펜하겐 협정을 비준하고 자체적으로 조금씩이라도 탄소 중립을 향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보인 건 고무적인 일입니다. 미국과 유럽, 러시아는 세계의 공장 중국의 노고를 보상하기 위해 다른 저개발지역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죠. 어차피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70억 인구 중 누군가가 희생해야 합니다. 세계의 고통과 고난, 빈곤, 폭력, 비극을 누군가는 짊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전제라면, 적어도 이미 그런 데에 익숙한 이들이 계속 짊어지는 것이 낫겠지요. 그런 비극을 꼭 전세계 모든 이들이 경험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는 북반구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희생이 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의 실패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건 희생당한 이들에게도 예의가 아닐테니까요. 그렇기에 모든 자유는 그것의 상실을 막기 위해 지도되어야 하고, 민주주의는 질서정연해야 하며, 평화는 관리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현 체제의 수혜자들만이라도‘ 계속 안온한 일상을 누리게끔 하는 방법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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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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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은 세상 아닙니까?
- 대단원이 마무리되었군요. 부족한 글 항상 읽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빠른 시일 내에 이제는 진짜로 롤플레잉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보겠습니다. 언제라고 확정짓기는 어렵겠지만..
- 뭔가 점점 쓸수록 주제의식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어차피 시작부터 두서없는 글이었으므로 그러려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른바 ‘만선일동조론’을 완성했다. (비록 기타 잇키 등의 협동주의 사상가들은 민족주의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았지만, 기층민중의 경우는 달랐다.) 또한 삼한 중 하나인 백제가 남부여를 계승했고 반도계 도래인은 백제와 강한 연결고리를 맺었으므로 현재 반도와 열도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부여의 일족에 해당한다는 ‘급진적’ 해석 또한 시도하였다.
이는 1951년 부산(동래) 지역에 연방의 신행정수도가 건립되는 과정에서 ‘부여특별구(Speciala Distrikto de Puyo)‘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뿐만 아니라 각 가맹국 정부의 후원을 받은 고고인류학자 및 언어학자들은 퉁구스어족과 일본어족의 연결고리를 부여어족으로 지목하였다. 이로써 만주어, 한국어, 일본어 등의 언어들은 ’부여 제어족’이라는 큰 묶음으로 묶인 것이다.
따라서 현행 교육제도의 원형이라 불리는 초중등인문교육백서(1954)는 동아시아사 과목의 일반적 서사를 “부여계 민족과 화북(지나)계 민족의 쟁투와 교류”로 설정했다.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동아연합에 가맹하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화북계 민족(한족)과 부여계 민족은 마치 유럽의 게르만계와 라틴계의 관계처럼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사이“로 얼버무려졌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논리가 교육에 깊숙히 틈입한 사례는 역사학 및 고고인류학의 발전에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평가이다. 일본어 반도 기원설을 적극 주장해 연방정부의 연구 프로젝트들을 수차례 수주받았던 미국인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동아시아인들의 정치성 과잉이 순수학문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발언을 남기며 고국으로 떠났고, 이러한 비판은 대학가에서 공공연하게 공유되고 있다.
[만협추 외전] 동아에서 언어교육을 추구하면 안되는 걸까?
동아연방은 대표적인 이중언어 사용국이다. 이는 행정언어이자 외교언어인 에스페란토어와 각 구성국의 생활언어가 혼용되는 체제로서, 가령 조선에서는 에스페란토어가 의회나 공영방송 등에서 사용되고 일상적 대화에는 조선어가 사용되는 방식이다. (다만 포르모사와 필리핀에서는 에스페란토가 생활언어의 지위까지 차지하였다.)
다만 연방 및 아시아권 전반에서 통용되는 에스페란토어(이하 동아어)는 자멘호프 박사가 고안한 원본 에스페란토어(이하 원본어)와는 상당히 상이한 특징을 보인다. 조선어, 일본어, 한어, 광동어 등에서 차용한 어휘가 상당부분을 차지하며, 형식형태소를 비롯한 여러 부분들에서 동아시아계 언어들의 흔적이 다량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시를 한번 들어보자. “교수님께서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돌아오셨다”라는 문장이 있다.
(원본어) Profesoro revenis el Seulo per aviadilo.
(동아어) Profesoro hikokiro Seulo ni revenisi.
동아시아어의 특징을 따라 어순이 도치되었으며, ro(조선어의 ‘-로’), ni(일본어의 -に)와 같은 접사가 사용되었다. 또한 “돌아오셨다”는 원본어로 revenis이지만, 동아어에서는 존대어미가 추가되어 -i가 붙은 revenisi가 되었다. 이외에도 동아시아 언어권에서 구별하기 어려운 자음들이 상당부분 대체되는 등 사실상 같은 어족의 다른 언어와 같은 변화흘 거쳤다.
이에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TEF)는 동아어를 정통 에스페란토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홍명희를 초대 이사장으로 하는 동아 에스페란토 협회(EFOA)가 새로 발족되었다. 물론 언중의 수 면에서 압도적이다 못해 절대적이던 EFOA 쪽이 표준이 되었음은 당연지사이다. 1956년 양 협회는 원본어와 동아어를 각기 다른 별도의 언어로 인정하는 데 합의, 에스페란토어족이라는 분류를 만들었다.
그러나 원본어가 이대로 사장된 것은 아니었다. 만주 및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집단 이주한 유대인들은 이디시어, 라디노어, 히브리어 등으로 분화된 민족언어를 통합하고 동아연방과 소련이라는 두 열강의 영향권으로부터 자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원본 에스페란토어에 주목하였다. 프로이모 로텐베르그를 비롯해 유대인 자치소비에트공화국과 만주 유대인자치구를 정치적으로 연계하려고 시도한 이들 역시 존재했지만, 이는 이러한 시도를 “시오니즘의 재림”으로 판단한 혁명수호청과 KGB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E.E.샤츠슈나이더 프로이모 로텐베르크... 여기선 만주로 왔구나?
@E.E.샤츠슈나이더 유대인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러시아-동아 에스페란토 분탕(..)을 치는 로텐베르크 vs 현실에 적응해서 동아 에스페란토로 현실 동아 게토 발전을 꾀하는 이사쿠 토-마스의 세계선..(?)
@통장 도마야말로 범아 대-복어계획의 가장 큰 수혜자긴 하겠네요 ㅋㅋㅋㅋ
+ 유대자치소비에트공화국 초대 수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떽! 아나키스트한테 못하는 말이 없누!”로 일축하는 스테인베르그의 모습이라던지… 재밌겠네요 여기도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어느덧 아버지의 가업을 따라 철도-유통망의 황태자가 된 도-마는 동-철과 합작하여 경성에 조선 테마 파크 설립을 추진하기로 하고, 후보군 중 하나로 한때 동물원이 있던 한 궁궐에 주목하는데....(?)
@E.E.샤츠슈나이더 스테인베르그라면 충분히 그럴것도 같네요 ㅋㅋㅋ 아니면 죽(?)
@E.E.샤츠슈나이더 그런데 만협추 세계관의 리츠는 어케 되었으려나.
일단 독립 당시에는 2살이었는데.
@돈이 곧 진리 가족은 전부 ’재교육‘받거나 죽거나 망명했을테니까 망명이라면 그 나라에서 살거고 나머지면 어딘가로 입양되지 않았을까요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나비효과란게 이런것인게...복어계획의 시행이 저런 결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