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말나식(제7식)
들어가기
유식의 '식(識)'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말해서 마음이고 유식이라고 하는 말은 '오직 마음'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는 이 학설의 기본적인 주장을 요약한 명칭이다.
유식은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고 마음이 어떤 형태로 작용하는가를 심도 있게
추구한 이론이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심리학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서양심리학에 속하는 '무의식의 발견'은 물론 선구자는 있다해도
결정적인 의미로는 19세기말 프로이드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식에서는 늦게 봐도 3세기, 프로이드보다 약 1600년 전에 '말나식',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심층심리학이 발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친이 유식학을 집대성한 시점에서 생각해도 1500년 이전에
무의식의 발견은 이미 되어 있었으며 이것은 견해에 따라서는 대단한 사실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자아의식·이기성의 면을 파헤치고 있는 말나식에 대해 알아 봅시다.
본론
가. 말나식의 성립
불교는 固定的,實在的 自我의 存在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물론 유식사상도 무아사상의 선양이 궁극적 목적이다.
우리는 자기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을 보고 육체와 정신이 통일되어
이곳에 자기의 실재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식은 비록 실재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지만 假說을 세워
자아가 있다고 보고, 자아란 무엇인가를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근원적인 자아의식을 발견하는데 이것이 俱生의 我見인 第七末那識이다.
말나식의 말나에 대한 원어는 Manas이고 이것은 man(생각하다)의 名詞形이다.
이것은 '思量' 으로 번역되듯이, 일반적으로 대상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육 의식을 'Mano-vij na'라고 하여 똑같이 'man'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제육 의식과 구별하기 위하여 보통 '末那'· '末那識'·'第七末那'
또는 단지 '意'라고도 부른다.
불교에서는 모든 진리의 근원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사실상 그 심층과 작용이 불가사의한 마음에 대하여 역대의 論師들이 마음의 심층을 밝혀 내고자 전생을 다 바쳤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로 마음의 활동을 述語化한 것이 바로 '業'思想으로 볼수 있는데 ,
'業'이란 우리 중생의 신체적이고 心的인 모든 행위를 총칭하는 술어로서,
이 업은 보통 善·惡·無記의 三性의 업으로 분류되는데,
한편으로는 이를 진리와 비진리적인것으로 분류하여 有漏業과 無漏業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업의 體性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說一切有部'에서는
'思'의 心所가 업이 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思'는 곧 '造作'의 의미로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心所〕이
所緣의 대상에 대해서 審量하고 思惟하며 결정하는 데 있어서
善·惡·無記의 업을 조작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思'는 眼識과 耳識 등 여러 心識 중 특히 意識의 행위를 말하며
이를 意業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결국 意識的인 善業도 있지만 대부분 迷惑의 體로서 惡業을 발생하여
우리〔五蘊〕를 今生 또는 來生의 고통의 세계로 輪廻케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上座部' 계통의 '輕量部'에서도 역시 업의 체를 심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업에는 '表業'과 '無表業'이 있어서,
'表業'은 '思'를 체로 하여 '思'가 作業할 때 표면으로 나타나는 작용을 말하고
'無表業'은 表業에 의하여 조성되기는 하지만 마음 속에 潛在하여 있는 業力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도 역시 '思'에 의하여 조성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표업은 종자론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심식에 潛在해 있다가 緣을 만나면 發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평소에 작동하는 업의 功力이 아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잠재해 있다가
다시 惡의 種子로서 중생을 惡道에 輪廻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惡業은 或에 의하여 조성되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隨眠 또는 煩惱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大衆部'에서는 처음에 우리 중생의 심성은 원래 淸淨하다고 주장하다가 현재 윤회하고 있는
중생들의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어서 결국 客塵煩惱를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상이 대두된 것은 아무리 중생의 심성이 청정하다고 하더라도
禪定과 無心한 때나 善心인 때일지라도 凡夫의 現實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범부의 윤회를 원만히 설명하기 위한 수단에서 이러한 학설이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大衆部에서 隨眠思想과 種子說을 먼저 창안하였고
그 후에 輕量部가 그 영향을 받았으며, 결국 兩部는 종자설의 효시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제칠 말나식의 淵源思想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후세에 대중유식학자들이 소승의 眠食등 유식외에도 번뇌를 일으키는
心體가 잠재적으로 있다고 인정하고 제칠 말나식을 성립한 것에서 알 수 있으며,
결국 말나식은 위에서 말한 隨眠思想등을 더욱 구체화시킨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말나식의 연원사상은 제육 의식의 所依根의 문제에서 대두되기도 한다.
즉, 소승불교에서는 識의 體가 하나이며 意根도 全滅後生하는 心識作用의 前作用을 말하는데, 이러한 이론은 매우 불완전하기 그지 없으며 이를 대중적으로 더욱 확실히 정립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第六 意識의 所依根으로서 意根을 확립하게 되며, 또한 識體에 대한 體別의 입장에서 第七 末那識의 성립을 요구하는 사상이 싹트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 말나식의 특징
第七識이 다른 識과 다른 것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이 있음을 『成唯識』에서는
밝히고 있다.
①恒審思量
②아뢰야식을 대상
③我癡, 我見, 我慢, 我愛의 四煩惱와 함께 한다.
우선, 四煩惱에 대해 먼저 논하면, 제칠말나식이 사번뇌와 항상 상응한다는 것은
말나식이 활동하는 한 그에 부수하여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나식이 心王이라 말하면
사번뇌는 心王의 존재 방식을 특징지워주는 심리작용인 心所인 것이다.
①我癡
이것은 자아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無明이라고도 한다.
無明은 본래 無知를 의미하는데 유식불교에는 내부인 마음으로 돌렸다.
쉽게 말하면, 자기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가 큰 힘에 의지되어 있다는 것,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기라는 것,
불교의 표현으로 하면, 空, 無我의 자기, 혹은 因緣所生, 五蘊假和合의 자기라는 것,
그러한 자기의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진정한 자기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②我見
이것은 自我는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로 我執이라고도 한다. 즉, 자기의 견식을 고집하며,
자기 위주의 주장만을 절대적인 것이라 하며, 겸손하게 남의 주장을 듣지 않는 것이다.
아견은 단순히 의식·인식의 오류가 아니고 무의식의 구조, 심층구조이며,
'심층의 자기 이미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콤플렉스의 가장 강력한 형태로서 '심층자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③我慢
我見에 의해 설정된 自我는 존재한다라고 거만하게 우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이미지화된 '자신'을 과시하고 의지하면서
그것이 상처를 받았다든지 충족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④我愛
我愛는 我貪이라고도 하며 설정되어진 허상의 자아상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한 生死輪廻의 苦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恒審思量이라는 것은 영원의 과거로부터 항상 끊이지 않고 恒轉하여
나머지 일곱개의 識(전오식, 육식, 팔식)에서 항상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제칠말나식은 생사유전의 사이에서 언제나 활동을 계속하는 심층심리인 것이다.
끝으로 말나식의 대상은 아뢰야식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아뢰야식의 견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말나식이 所緣으로 하는 것은, 바로 자기이다.
단지 자기만을 대상으로 집중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앞서, 말나식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뢰야식의 견분이라고 하였다.
견분이란 '삶의 最先端'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하며,
그 대상에 대해서 작용하면서 살고 있다.
이것이 유식의 인간인식이다. 그 작용하고 있는 최선단이 견분이며, 말나식이 대상으로써
애착을 가지며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그 아뢰야식의 견분이다.
가장 밑바닥의 자기의 사나운 물줄기처럼 계속 작용하는 그 자기를 사랑하며,
신체적 자기라고 그릇 인식하면서 진행한다.
<아뢰야식>이란 사나운 물결같은 자기였다.
한시도 멈추는 일이 없으며 힘찬 물줄기처럼 활동하고 있는 자기이다.
그런데, <말나식>은 그 사나운 물결같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솔직히 보지 않는다.
인간은 안정을 구하기 때문에 사나운 물결같은 자기에게 불안을 느낀다.
무엇엔가에 의지하려고 한다.
《아함경(阿含經)》에 사나운 물결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서
언덕의 풀잎을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겨우 잡은 풀잎과 함께 떠내려가면서 물속에 잠겨버린다는 짧은 이야기가 있지만,
안정을 구하는 인간의 몸부림치는 모습이 잘 파악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말나식은 그 사나운 물결같은 자기의 진상에 눈을 감고,
오히려 상주불변(常住不變)의 自我像을 만들어 세우며,
그 허상에 애착을 품으며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를 아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우리들도 몸이 불편할 때는 그러한 딜레마에 빠지는 수가 있다.
몸이 불편하기 대문에 곧 병원에 가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병명을 아는 것이 무섭다.
자기의 지금의 병세를 아는 것이 무서워서, 하루하루 연기하고 만다.
자기에게 형편이 좋은 것은 나아가서 알려고 하며, 또 알고 나서는 선전도 하고 싶어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눈을 돌리려고 하며 피하려고 하며 자기 마음대로의 소원을 가지려고 한다.
이와 꼭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말나식이다.
말나식을 독립적으로 조직화한 것은 세친(世親)이었다.
무착(無着)의 《섭대승론》에서는 아뢰야식의 한면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또 분명한 위치는 아직 주어져 있지 않았다.
다. 이기적 에너지의 전환
말나식의 훌륭한 점은 그 이기적 에너지가 변해서 자애의 근원이 된다는 점이다.
악이 그대로 선하게 된다는 데 있다. 생각해 보면 이기성이란 악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향상에 있어서나 문화의 발전에 있어서
뜻밖에도 이기성이 근원이 되어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말나식의 교설은 그 에너지를 크게 전환시켜가는 그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말나식은 자기만을 애착하고 있다. 그 밖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것이 말나식이었다. 그 말나식이 수행에 의해서 진리와 존재의 평등성과
그리고 무아인 진실한 자기의 진상에 각성하는 것이다.
그 순간 자기만을 향해 좁게 쏠리던 눈이 크게 백팔십도 회전하며,
모든 것에 대한 평등한 눈이 열려진다. 이기성이 자애로 변하는 것이다.
自我라는 한 점을 중심으로 해서 크게 넓어져 간다. 利己가 남을 사랑하는 것으로 변한다.
자기를 사랑해 본 일이 없는 사람,
자기의 我의 억센 것에 대해서 아무 반성도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迷妄과 彷徨에 대해서 동정이나 이해를 가질 수 있을까.
안혜(安慧)는 수행이 완성되면 말나식은 없어져 버린다고 주장했다고 하낟.
이 학설은 현장(玄裝), 기(基) 등의 계통에서 전해져 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정확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나,
여하간 그것이 누구의 설이건간에 수행이 완성할 때 이기성의 근원의 말나식이
사라져서 없어진다고 본다. 즉, 수행이 원만히 끝나면 이기적 자아애 같은 것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며, 맑고 깨끗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법(護法), 현장, 기로 계승되어온 학계에서는 수행이 완성하였을 때도
말나식의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말나식이라고 불려진 마음의 주체는 그대로 남으며 백팔십도 전환해서 진실한 자기에게로
눈을 뜨게 되며, 이타평등(利他平等)의 자애의 근원으로 소생(蘇生)한다는 것이다.
이기성을 악(惡)이라고 한다면 악으로서 작용한 힘,
그 자체는 그 악을 전환하여 자비애타(慈悲愛他)의 귀한 정신으로 약진하는 것이다.
八識이란 인간의 구조는 변하지 않으며 원래의 相 그대로이다.
더우기 속이 아주 다른, 방황하는 미숙한 인간도 완성된 부처·보살도 八識이라는
인간의 구조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호법, 현장 계통의 유식이다.
결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제칠식은 언제나 우리의 심층의식에서 작용하여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我執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칠식이 아집이지만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일상적 인간 존재는 아집에 의하여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의 평화를 유지하는 욕망이 있는 동시에 전쟁을 계속 유지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칠말나식을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 생명은 상당히 이성적으로 태어난 것 같지만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복잡한 관계 안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수많은 실로 짜여진 모양과도 같다.
그 모양은 분명히 형태로서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데 모여져 짜여졌지만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공기가 없이 인간은 잠시도 살 수 없을 것이고, 물이 없다면 단 몇 일을 살기 힘들 것이다.
그러한 모든 사물의 관계 속에서 '나' 역시 그러한 관계망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사라져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렇다해도 자신은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원히 살고 싶은 것과 같은 불가능한 것을 계속해서 바라는 것이
분명 우리들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집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등의 의문은 갖지 않는다.
말나식에서 말하는 '평등성지'로의 전환은 무엇일까.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가운데 하나이며 그것과 같은 것이며 평등한 것이며,
그중에서 우연한 하나의 형태로 모양지워져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숙한
바닥으로부터 아는 지혜로 변화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결국 범부에게 있어서 이미 잘못 익혀오고 잘못 길들여진 그동안의 습관과 관념을 수정하고
교정할 때, 마음의 구조와 그 기능에 대한 원리를 먼저 터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수행을 계속해 간다면 아라한에 이르고 불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유식은 말나식의 부분에서도 깨달음에 대한 원리적인 가능성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