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릉시의 구도심 명주동 거주민이다.
20년 전 나는 홀로된 장모님을 모시기 위해 처갓집이 자리잡은 신라시대부터 영동지방의 중심지였던 전통깊은 이 동네의 주택을 사서 이사했다. 그 때 평당 가격은 약 250-300만원 정도로
3층 건물 포함하여 3억 8천만원 정도의 내 전재산이 투입되었었다.
부동산에 관심있는 친구들은 나를 “자살골 넣으러 간다”고 걱정하기도 했고
또 어떤 친구들은 “효자 났네”라며 조롱하기도 했고,
골목길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명주동 동네 어르신들은 내가 지나가고 나면 뒤에서
“ 저 양반이 처가 구하러 온 사람이래”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내가 이사온 뒤 주민평균 연령이 75세 정도였던 동네 주민의 나이는 조금은 젊어졌고,
두 다리만으로 걷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 뒤 20년 우리 마을은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되고
‘강릉 단오제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지정기념’으로 예산이 투입되기도 했다.
일본인이 지은 적산가옥 몇 곳에는 뜻있는 젊은이들이 와서 카페를 차렸고 더러더러 서울 사람들도 드나드는 곳이 되었고, 대구나 군산 등을 모방하여 근대문화유산 골목투어까지 생겼고
폐교된 초등학교를 이용하여 음악 연주장과 미술전시장이 생기고
시청 경찰서 우체국이 떠나간 자리는 강릉대도호부관아가 복원되어 각종 문화행사가 열려
이따금 활기를 띄기도 하는 동네가 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걱정된 나는 얼마 전에 동네 복덕방에 들려 슬쩍 땅값을 물어보았다가 실소하고 말았다. 내 우려와 기대와는 달리 평당 가격은 요즘 조금 올라 300만원 정도라고 한다.
올라서 내가 20년 전 구입한 값이 되었단다.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기우를 한 내가 바보였던 것이다.
그 때 내가 8천에 팔았던 아파트는 지금 2억이 되고 그 때 은퇴를 생각하며 평당 2만원에 사두었던 밭은 지금 30만원이 되었다는데 이 곳 구도심은 제법 활기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20년 전의 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라남도 목포와 이 곳 강릉의 환경은 조금 다를 것이다.
아니 오히려 서울사람들의 접근성이나 관광지로서의 미래가치는 강릉이 목포보다 조금 나을 지도 모르겠다. 서울 변두리 한 아파트단지만도 못한 인구 20만의 낡은 변방도시의 늙은 골목길에 은행융자까지 내어 십여 채의 집을 샀다니 그녀는 진정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나전칠기 박물관을 세우려 했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고 게다가 그 골목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니 그것은 이 시대 광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그 집은 수리도 할 수 없고 거래도 거의 끊겨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상식이고 거주민들은 문화재 지정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지정되려고 했다면
그것은 투자나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보존이나 유지가 목적일 것이 분명하다.
돈벌이나 부동산투자를 강남이나 서울 변두리에서 하지 않고 국토의 끝자락인 목포 그것도 죽어가는 구도심에서 했다면 그녀는 부동산 투자의 바보이거나 문화재지킴이 열사이거나 둘 중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기업의 상품이름 지어주고 번 돈으로 재산행사를 할 수 없는 재단을 남편 이름으로 만들고, 나전칠기를 좋아하여 박물관을 준비하고, 본인이 자식이 없어 조카의 이름으로 카페를
열었다는 것으로 보면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목포에 던져 넣을 각오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나는 손혜원의원에게 간절히 빌어본다.
손의원, 부탁하건대 우리 동네로 이사 오시고 우리 동네에 박물관 세우고 투자 좀 해 주시오.
조카 보내면 내가 잘 돌보아 주리다.
이 곳은 바다도 그리 멀지 않고 미세먼지도 적고 동네도 아주 조용하다오.
돌아이인 당신이 투자하기에 여기보다 더 적절한 곳이 없을 듯하오.
그래서 같이 망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