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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동양정치사상: 대상과 방법 [최명/김영수]
청운 추천 0 조회 63 09.08.04 09: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양정치사상: 대상과 방법


최 명 (서울대)
김 영 수 (국민대)

 

1. 들어가며

동양정치사상은 정치에 대한 東洋사람들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정치란 무엇인가, 東洋사람들은 누구인가, 사상이란 무엇인가를 알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사상은 思考작용의 결과로서 생기는 意識의 내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 간단히 생각 또는 의견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단편적인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체계적인 의견 혹은 생각이면 더 좋다. 문제는 東洋사람들이다.
그에 앞서 동양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생각할 수 있다. 동양이란 원래 유럽인의 머릿속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Said 1978). 이것은 어떤 형태이든 동서의 교류를 염두에 둔 관념이다. 그러나 동서가 교류하기 전에도 오늘날 우리가 동양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었다. 동양사람들은 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정치에 관하여 체계적인 사고를 한 것은 아니다. 극소수의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정치에 관하여 심각한 사고를 한 것이다. 극소수라고해도 무수히 많은 사상가들이 있다.
학자들은 흔히 동양을 이슬람, 인도, 중국, 일본의 문명권으로 나눈다. 다른 문명과 문화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de Bary and Embree 1975). 정치사상도 그 문명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 문명권의 정치사상을 모두 고찰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에 국한하여 그 정치사상을 살피자고 한다. 물론 그것도 방대한 작업이다. 더구나 짧은 지면에 체계적으로 압축하여 서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니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러나 무모한 일을 왕왕 감행한다.
그런데 이 책의 테마가 소위 ‘대상과 방법’이다. 대상은 정치사상에서 ‘무엇을’, 방법은 ‘어떻게’에 해당한다. 그런데 실제로 사상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우주가 어떠하며, 그들이 살면서 당면하는 문제가 무엇인가에 의하여 크게 좌우된다. 말하자면, 사상이 사고의 결과로 생긴 의견 혹은 생각이라고 할 때, 사상가들은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동일한 시대 상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유사한 사상을 공유할 가능성이 크다.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물며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고대, 중세, 근대의 사상이 다르고,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다른 것이다. 중국정치사상이 일본정치사상과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사상에는 개인의 사상과 시대의 사상이 포함된다. 개인의 사상을 연구한다고 하면, 사상가 개개인의 著述과 활동이 그 일차적인 대상이 된다. 시대의 사상은 그 시대에 표출된 사상들의 종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사상을 연구할 때, 그 대상은 다소 복잡하다. 개인의 사상은 물론, 각종의 정치 · 경제 · 사회제도, 또는 그 시대의 역사에 대한 광범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상의 시대배경 혹은 시대의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어렵게 되었다.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대상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는가?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방법의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대상을 관찰하고, 비교하고, 분석하여 서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관찰하고, 어떻게 비교하고, 어떻게 분석하느냐는 것에 한 가지의 방법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소위 전통적인 방법의 한 두 예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기로 한다.
먼저 사상에 대한 읽기가 필요하다. 孔子의 사상을 연구한다고 하면 󰡔�論語󰡕�를 많이 자세히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 그 사상이 나타난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환경 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특정의 사상이 다른 사상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말하자면 상호의 영향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다음은 그 사상의 역사적 진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서술방법이 가능할 것이다. 학설 중심, 인물 중심, 혹은 年代 중심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楊幼炯 1973, 4). 또 문제적, 시대적, 종파적(宗派的)으로 서술할 수도 있다. (梁啓超 1923, 20).    
서양의 학자들은 대체로 정치사상과 정치철학을 구분하고, 또 후자를 정치과학과 구분하는 경향을 지닌다. 또 그들은 정치사상을 정치생활과 동시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편, 정치철학은 고대 그리스라는 특정한 정치 환경에서 출발하여, 그 전통이 전승과 단절의 과정을 겪으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동양은 좀 다르다. 정치사상은 고대부터 있었으나, 서양 사람들이 인식하는 정치철학은 없었다. 철학이라는 어휘자체가 예컨대 일본과 중국에서 사용된 것이 19세기 말이었다. 또 특기할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정치사상이란 용어는 보통으로 사용되나 정치철학이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중국이나 일본의 정치사상을 공부하는가? 과거이건 현재이건 어느 지역의 사상을 공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실적인 필요성도 작용한다. 예컨대, 중국의 사상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혹은 일본과 우리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그들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상을 떠난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사상은 우리의 판단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우리는 항상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한다. 무엇이 보다 나은 것이냐를 판단할 때, 사상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중국의 정치사상
  
(1) 특성과 전통

중국은 예로부터 ‘지대(地大) · 물박(物博) · 인다(人多)’라는 특징을 가진 나라다.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가 많다는 뜻이다. 중국은 대륙 국가이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자기네 영토가 곧 세계라고 생각하였다. 대륙 국가이기 때문에 농업 중심의 생활을 하였고, 자연히 농업을 숭상하는 전통이 생겼다. 농업은 평화시대만 아니라 전시에도 중시되어, 농전(農戰)이란 관념이 일찍부터 발전하였고, 秦나라가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농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전통시대의 중국사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계층으로 구성된다. 사대부는 토지의 주인이고, 농민은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이다. 생산에 종사하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은 ‘本’이고, 교역에 종사하는 상인은 ‘末’이라 하여 경시하였다. 생산이 교역에 선행되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중국인의 사상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정치사상도 이러한 현실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를 중히 여기고 현묘한 이론을 숭상하지 않는 것이 중국정치사상의 특성이다. 이것을 다소 부연하기 위하여 동서양의 학문 특성을 비교한다. 서양의 학술은 지식을 넓히는 것[致知]을 강조하고, 중국의 학술은 그 기본을 실천적 응용[致用]에 둔다. 지식을 넓히려고 하는 자는 진리의 추구를 목표로 하고, 방법에 구애됨이 없이 그의 주장이 모순 없는 하나의 체계 형성에 귀착시키려고 한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원리를 수립하려는 것이다. 반면에 실천적 응용을 중시하는 자의 목적은 실행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추상적 이론이나 논리의 일관성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론의 시비나 득실에 대한 판단은 다만 그것이 이행되고 실행 가능한가에 달렸다. 그래서 순자(荀子)는 ‘학문은 행동에 이르면 거기서 끝난다(學至於行而止)’고 했고, 왕양명(王陽明)은 ‘행동은 지식의 성취이다(行是知之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2천여 년 동안 중국정치사상의 대부분은 통치술(統治術)을 논의한 것이고, 순수이론을 탐구한 것은 아주 적다. (蕭公權 1998, 6-7의 각주 13; 蕭公權 1970, 41  ).
중국정치사상의 또 하나의 특성은 위대한 사상들이 소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거의 모두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후에는 창조의 여지가 적었다는 것이다. 인습(因襲)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진한(秦漢)에서 명청(明淸)에 이르는 2천여 년 동안, 중국은 동일한 정치체제만을 경험했고, 동일한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淸末의 西歐의 충격이 있은 다음에야 사상의 변화가 격렬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2천여 년 동안 중국인들은 그들 정치사상의 위대한 전통을 면면히 지속시켰다. 중국인들은 현세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서양과는 달리 종교가 발달하지 않았다. 공자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관하여 물은 계로(季路)에게,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또 죽음에 대하여는, “사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한 것(󰡔�論語󰡕� ?先進?) 등은 현세를 중시한 예이다. 그리하여 중국정치사상의 전통은 이러한 현세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통은 한 마디로 ‘내성외왕 구인구세(內聖外王救人救世)’로 표현된다. 여기서 내성은 수양의 극치를 말한다. 현세에 있어서 성인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이기도 하다. 외왕은 왕이 된다는 의미이다. 수양이 잘 된 사람이 왕이 되어서 백성과 세상을 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외왕은 제세(濟世)의 공능(功能)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 왕이 되었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예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堯 임금으로부터 宋대의 유가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정치사상의 도통(道統)이고, 전통인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중시한 것이다.
   
(2) 제자백가(諸子百家)

춘추시대는 주나라의 동천(東遷, 770 B.C.)에서 시작하여 晉나라가 한(韓)·위(魏)·조(趙)의 3국으로 분열된 403년에 끝난다. 그로부터 진시황이 221년에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약 2백년이 전국시대이다. 두 시대가 다소 다르기는 하나,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싸웠던 것은 같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큰 나라 일곱이 치열하게 싸웠다. 이렇게 말하면, 춘추전국시대는 전쟁만 하던 시대라는 인상을 주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제자백가라고 부르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속출하여 사상의 꽃을 피웠던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백가라고 하지만, 그들은 몇 개의 유파로 분류된다. 백가를 처음으로 분류한 사람은 漢나라의 司馬談이다. 그 아들인 司馬遷은 󰡔�역(易)󰡕�의 ?계사전(繫辭傳)?을 인용하면서 아버지의 要旨를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일은 그 극치는 하나이나 거기에 이르는 방법에는 백 가지가 있고, 귀착되는 곳은 같으나 길은 다르다[天下一致而百慮 同歸而殊塗]고 한다.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는 다 같이 바른 정치를 힘쓰는 것이지만 다만 입론하는 방법이 다르므로 배우는 사람이 혹은 잘 살피고 혹은 잘 살피지 못할 뿐이다.” (󰡔�史記󰡕� ?太史公自序?). 백가를 여섯 유파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파의 목적은 바른 정치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난세였기 때문에 모두 바른 정치를 동경했던 것이다.
약 백년이 지나 제자백가를 다시 분류한 사람이 유흠(劉歆)이다. 그는 당시에 전하는 여러 전적들을 망라하여 󰡔�칠략(七略)󰡕�이란 목록을 작성했다. 이것이 반고(班固)가 집필한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의 기초 사료이다. ?예문지?에 기록된 자료가 많이 일실되었지만, 그래도 남은 것들이 제자백가의 사상으로 전해진다. 그것들이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 목록에 기록된 자료들을 여기서 열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예문지?에 의하면, 유흠은 사마담의 6가에 종횡가 · 잡가 · 농가 · 소설가를 추가하여 10가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정치사상으로서 특히 중요한 것은 유 · 묵 · 도 · 법의 4가이며, 여기서는 병가(兵家)를 추가하여 5가의 사상을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병가를 포함시킨 것은 각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이겨야 했고, 따라서 전쟁이론이 중요한 정치이론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1) 유가

유(儒)는 본래 학자 혹은 문사를 일컫는 말이다. 유는 옛 경전에 밝은 교사들이었고, 동시에 고대문화의 전수자였다. 공자가 이 학파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흔히 그를 이 학파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춘추 말에 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정치에 직접 종사한 적도 있고,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기고 했고, 말년에는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의 언행을 제자들이 단편적으로 기록한 󰡔�논어(論語)󰡕�는 체계적인 것은 아니나, 그것을 읽으면 그의 사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공자의 정치적 목표는 윤리형의 이상(理想)국가의 실현에 있었다. 이를 위하여 그가 주장한 것은 덕치주의(德治主義)이다. 지배자가 솔선하여 덕을 실천하면 사회는 잘 다스려 진다는 것이다. 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닦아서 먼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군자는 타고 난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하여 형성되는 인간이다. 따라서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란 말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며, 위에서 말한 ‘내성외왕’도 같은 의미인 것이다. 결국 그의 모든 것은 ‘인간됨[作人]’에서 출발한다.
덕은 ‘인(仁)’ · ‘의(義)’ · ‘예(禮)’ 등의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그 가운데 공자가 가장 중시한 것은 인이다. 그것은 정의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런데 인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사랑은 인간관계의 친소와 원근을 고려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기초는 남을 자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는 것을 정치에 적용하면 ‘인치(仁治)’가 된다. 위에서 말한 ‘덕치’와 같다고 할까?
또 공자는 정치질서가 확립된 주(周)나라를 동경했다. 주례(周禮)의 실현을 희망했고, 주 문화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정명(正名)의 실현이다. 각자가 사회에 있어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할 때, 질서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권한을 침해하지도, 침해받지도 않는 상태의 질서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아야한다[必也正名乎]”고 주장했다. 공자는 이러한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유가가 중국정치사상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공자가 죽은 후 유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학파가 특히 뛰어났다. 맹자는 공자로부터 일백수십 년 후의 인물이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 배웠다. 당시는 진나라가 상군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에 힘쓰고, 초와 위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싸움에 이기어 적을 꺾고,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에 미쳐 날뛰어 싸움하고 치는 것을 현명한 일로 여기는 전국시대의 중기였다. 뿐만 아니라 겸애(兼愛)와 위아(爲我)를 각기 주장한 묵가(墨家)와 양주(楊朱)의 일파가 천하에 가득하고, 신도(愼到) · 송견(宋?) · 소진(蘇秦) · 장의(張儀)의 무리들이 자신의 설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맹자는 당(唐: 堯) · 우(虞: 舜) · 삼대(三代: 夏·殷·周)의 제왕의 덕을 부르짖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 잡고, 사설(邪說)을 없애고, 치우친 행동을 막고, 음란한 말을 몰아내는 것”(󰡔�맹자󰡕� ??文公?하)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자신만이 천하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떠들었다(?公孫丑?하). 인기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사기󰡕�는 “그가 어디에 가서 말을 하여도 용납되지 않았다”(?孟子荀卿列傳?)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사상가로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높이고, 유학을 보존하고 옹호하려고 노력한 그의 목적은 성공하여, 후대에 와서 유학의 아성(亞聖)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맹자의 기본철학은 성선설(性善說)로 알려진 심성론(心性論)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측은(惻隱) · 수오(羞惡) · 공경(恭敬) · 시비(是非)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기초가 되는 본성이다. 이것을 잘 실천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의 仁의 관념이 맹자에 와서 仁心으로 발전한 것이다. 맹자는 여기에 義를 추가하여 인의(仁義)에 기초한 인정(仁政)과 왕도(王道)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義란 사람이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이다.
“사람마다 모두 차마 남에게 잔학하게 굴지 못하는 착한 마음이 있다....차마 남에게 잔학하게 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남에게 잔학하게 굴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그것을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公孫丑?상). 그리하여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춥게 살지 않게 되고,” 또 “산 사람을 기르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형벌을 덜고 세금징수를 적게 하고 깊이 밭 갈고 얌전히 김매게 하고, 장정들은 일 없는 날을 이용하여 효성과 우애와 충성과 신용을 배워, 집에 들어가서는 부형을 섬기고, 밖에 나가서는 연장자와 윗사람을 섬기게” 하는 것이 인정이라고 하였다(?梁惠王?상).
그런데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 역시 주나라의 제도를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는 춘추 말에 살았기 때문에 존주(尊周: 주나라 제도의 높임)를 기본 목적으로 삼았고, 맹자는 주나라의 존재가 별 볼일 없던 때에 살았기 때문에 대주(代周: 주나라 제도를 대체함)를 갈망하였다. 시대 상황의 차이는 정치이론의 차이를 낳는다. 공자는 귀족의 관점에서 주의 제도를 옹호했고, 맹자는 백성의 관점에서 주의 제도를 회고했다. 민본설(民本說)을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대단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밭일하는 백성들의 마음에 들개 되면 천자가 된다(?盡心?하).”고 하였다. 민본설은 정권이양의 이론이고, 또 인정과 왕도의 기본이 된다.
선진 유가로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이 순자(荀子)다. 그는 유학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공자를 높이 받들었다. 그러나 순자는 공자와 맹자의 학설이 도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에 그것이 난세의 정치학설로서 쓸모가 없음을 간파했다. 더욱이 그는 군권을 앞세운 절대군주의 등장을 목전에 둔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현실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내세웠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반박하며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 것이다. 방법은 무엇인가? 禮로써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는 일이다. 禮란 일정한 사회의 격식과 분별이다. 질서 있는 사회에 살기 위해서는 예에 대한 교육이 필수적이다. 또 정치도 모름지기 예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른바 예치(禮治)인 것이다.
맹자가 주장한 내면적 도덕규범인 인의와는 달리 순자의 예의는 외면적인 규범이다. 그 점에서 그것은 법에 가까운 것이다. 순자의 제자 가운데 법가의 한비자와 이사가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2) 묵가

묵가는 묵적(墨翟)의 영도 아래 엄격한 조직과 기율을 배경으로 발전한 학파이다. 묵적은 하층계급 출신으로 실용기술에 능했다고 하며, 따라서 생산을 중시하고 절약을 강조하였다. “근본을 튼튼히 하고 비용을 절약한다(彊本節用)”는 것이 개인과 사회를 함께 충실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한편 유흠(劉歆)은 묵가가 청묘(淸廟: 종묘)의 수위 출신들이라고 하였다. 청묘는 예제(禮祭)를 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히 귀신을 숭상하게 되었고, 그것에 참여하는 현인을 존경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효를 천하에 보이는 전통을 좇았기 때문에 상동(上同)을 주장하였다.
묵가의 학문도 요 · 순의 도를 숭상했다고 하고, 묵적 자신도 처음에는 儒者의 업을 배우고 공자의 술을 수용했다고 한다. (󰡔�회남자󰡕� ?要略訓?). 그들의 특징은 유가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었다. 그들의 사상은 공자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귀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만일 귀신이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귀신을 두려워 할 것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성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이유이다. 묵가들이 청묘출신이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으나, 묵적은 보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이다. 묵적은 7국의 제후가 패권을 다투는 시대에 살았고, 따라서 제후들의 권한을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지(天志) 혹은 천의(天意)를 포함하는 ‘명귀(明鬼)’라는 관념을 믿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묵자가 가장 중시했던 것은 “천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묵자가 생각한 것을 요즘의 말로 표현하면 공리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이익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질서라는 문제도 있다. 묵자는 사회질서의 유지에는 어느 정도의 권위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묵자가 말하는 권위주의에는 ‘天志’와 ‘상동(尙同)의 주장이 있고, 또 공리주의에는 비공(非攻: 전쟁을 반대함)과 비악(非樂: 음악을 반대함) 등의 이론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묵자가 주장한 겸애(兼愛)에서 나온 것이다.
겸애는 보편적인 사랑이다. 공자가 주장하는 仁은 인간관계에 따라서 차별하여 사랑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혼란한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없다. 무차별한 보편적인 사랑만이 천하를 구할 수 있다고 묵자는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치란(治亂)의 입장에서 그래야 된다는 것이다. 남을 자기 사랑하듯 한다면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겸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사랑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무렵부터 묵가사상은 급속하게 쇠퇴했다. 비합리적인 이론을 옹호하려는 논리가 ‘묵변(墨辨)’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3) 도가

도가는 본래 황로(黃老)학파였다. 漢代에 와서 도가로 불렸다. 도가하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이다. 노자는 유가와 더불어 중국사상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도가의 창시자이다. 그에게는 󰡔�노자󰡕� 혹은 󰡔�도덕경(道德經)󰡕�이란 책이 있고, 장자에게는 󰡔�장자󰡕� 혹은 󰡔�남화경(南華經)󰡕�이라는 책이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난세였기 때문에 백가들은 한결같이 치세를 동경했고, 난세를 치세로 바꾸는 방법을 생각했다. 도가들도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질서와 행복을 추구했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노장의 생애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사기󰡕�의 기록도 허황하다. 공자보다 좀 연상이라고 하고, 공자가 그에게 예를 물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그의 출생지가 안휘성(安徽省) 와양현(渦陽縣)에서 발견되었다지만, 그는 長江유역의 남방 기질을 대표한다. 현실적이고 투쟁적인 북방사람들의 기질과는 대조적으로 남방 사람들의 그것은 낭만적이고 평화적이라고 한다.
사마천은 노자가 “無爲로써 自化하고 淸靜으로써 自正하였다.”고 하였다 (?老莊申韓列傳?). 아무것도 아니하고 가만 두어도 백성들은 스스로 교화되고, 맑고 고요하면 백성들은 스스로 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가 생각한 道의 다른 표현이다. 만물은 항상 변한다.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상(常)’도 있다. ‘반(反)’이란 법칙이 그것이다. 그래서 “되돌아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反者道之動, 󰡔�道德經󰡕� 40장]이라고 말한다. 사물의 상대성이 여기서 발견된다.
노자의 다른 중요한 개념은 ‘무(無)’이다. 反이 도의 用이라고 하면, 무는 도의 體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일이란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 󰡔�道德經󰡕� 37장)고 하였다. 정치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는 첫째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상으로 여겼다. 둘째, 현명함에 대한 숭상을 반대하였다. 셋째, 문화를 없애고 지혜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무력행사를 삼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이 노자의 정치사상이었다.
장자는 전국시대 중기, 맹자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장주(莊周)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事蹟도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의 사상은 노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의 목표는 쾌적하게 사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되느냐가 그의 관심사였다. 그는 타고 난 대로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위적인 것에 반대한 것이다. 본성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과의 조화라고 하였다. 정치적 관계 혹은 사회의 각종 제도는 인위적으로 제정된 것이고, 따라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말은 들었어도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장자󰡕� ?在宥?)고 말하였다.
요컨대, 도가들은 “무위로써 다스리는 것(無爲而治)”을 이상으로 삼았다. 노장사상은 한나라 초에 각광을 받았고, 일종의 자유방임주의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무제 때 와서 유학이 숭상되자 도가사상은 쇠퇴하게 되었다. 도가사상은 기본적으로 소극적인 사상이다. 

4) 법가  

법가는 덕치를 주장한 유가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학파이다. 덕이나 인의를 내세워서는 국가를 다스릴 수 없다. 통치를 위해서는 법을 확립하는 것만이 필요하다고 법가는 말한다. 법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지만, 법가의 등장은 전국시대이다. 봉건과 종법이 무너지면서, 종전의 인륜(人倫)규범으로는 사회질서가 유지되지 않았다. 각국의 제후들은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냉엄하고 각박한 법치에 관심을 두었다. 秦나라가 부강하게 되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법가를 중용했기 때문이다.
법가의 대표인물은 전국시대 말의 한비자(韓非子)이다. 그는 韓나라의 귀족으로서 形名과 法術의 학을 좋아하였다.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대단한 문장가로서 10여 만자의 저술을 남겼다. 󰡔�한비자󰡕�란 이름으로 55편이 전한다. 그것은 신도(愼到)의 세치(勢治), 신불해(申不害)의 술치(術治), 상앙(商?)의 법치로 알려진 3파의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여 독특한 통치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신도는 趙나라 사람으로 군주의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권세라고 주장하였다. “현명한 자가 불초한 자에게 굴복하는 것은 권세가 약하기 때문이고, 불초한 자가 현명한 자를 복종케 하는 것은 지위가 높기 때문”이라면서, 요임금도 필부였다면 이웃집도 바르게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지배와 복종은 도덕의 우월성이나 재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권세에 달렸다는 주장이다.
신불해는 전국 초기의 鄭나라 사람이다. 韓나라의 재상을 지내면서 술치를 주장했다. 術은 군주가 신하들을 상대로 행하는 권모술수이다. “술이란 군주가 갖고 있는 것으로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고, 관직에 따라 책임을 묻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갖고, 신하들의 능력을 살피는 것이다.” (󰡔�한비자󰡕�?定法?). 술치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군주는 신하들의 직분을 명백히 해야 하고, 군주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상앙은 衛나라 사람으로 秦孝公 아래서 10년 동안 재상을 지내면서 두 차례에 걸친 변법을 시행하였다. 그가 말하는 법치는 “천하의 관리와 인민으로 하여금 모두 법을 알게 함으로써” 통치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법률은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이다. 하루라도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법은 너무 각박했기 때문에 상앙은 자신의 법에 의하여 처형되고 말았다. 한비자는 군주의 통치에 있어서 이 세 학파의 주장이 모두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였다. 
“현명한 군주는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하늘 같이 공평하고, 사람을 씀에 있어서 귀신 같이 밝다. 하늘 같이 공평하면 비난을 받게 되지 않고, 귀신 같이 밝으면 곤란한 일이 없다. 권세가 잘 행해지고 교화가 엄격하면 사람들은 거역하지 못한다. 군주가 비방과 칭찬을 한결같이 행하면 사람들은 감히 떠들지 못한다. (중략) 그런 연후에 오로지 한결같은 법을 시행하여 상벌을 제대로 내리고 사사로운 것을 금하여 처벌하면 군주의 권세는 방해받지 아니한다. 그러면 상 받을 공과 벌 받을 죄가 있음을 [사람들이] 반드시 알게 되고, 이를 알게 되면 군주의 도는 완전하게 된다.” (󰡔�한비자󰡕� ?八經?). 한비자는 진나라로 초빙되었으나, 이사(李斯)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5) 병가

과거에 선진정치사상을 논의할 때 병가는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전쟁이 계속되던 난세였기 때문에 전쟁전문가들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뛰어난 전쟁이론가들도 많았다. 병가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병가라고는 하나 전쟁이 능사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른다. 되도록 피하자.’ 이것이 그들의 공통된 사상이다. 따라서 국가 사이의 분쟁도 가능하면 정치로 해결하여야한다는 정치우위를 내세웠다. 예컨대, 병서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손자(孫子)󰡕�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謀攻?).”
싸우지 않고 어떻게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가? “전쟁을 잘 하는 방법은 계략을 치고, 그 다음은 외교를 치고, 그 다음은 군사를 치는 것이다(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謀攻?).” 계략을 친다는 것은 적의 계략을 미리 알아서 방어의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적의 계략을 알기 위해서는 적을 연구하고 첩자를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나, 국내정치를 확고히 다지면 적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외교를 친다는 것은 외교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의미이고, 마지막으로 불가피한 경우에만 무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서󰡕� ?예문지?의 ‘병서략(兵書略)’은 병서 53家를 꼽고 있고, 그 가운데 병권모가(兵權謀家) 13가를 들고 있다. 여기에는 󰡔�오손자병법󰡕�·󰡔�제손자병법󰡕�·󰡔�오기󰡕�·󰡔�범려󰡕�·󰡔�한신󰡕� 등의 병서가 열거되어있다. 그런데 오늘날 비교적 온전하게 전해지는 병서는 󰡔�손자󰡕� 13편이다. 제나라 사람 손무가 지었다고 전한다. 손무는 용병에 뛰어난 인물로 인정을 받아 오왕 합려(闔閭)의 장군이 되었다. 사마천은 말한다. “그 뒤 오나라가 서쪽으로 초나라를 무찔러 서울인 영(?)을 점령하고, 북으로는 제나라와 晉 나라를 위협하여, 그 이름을 천하에 알리게 된 데에는 손자의 힘이 컸다(󰡔�사기󰡕� ?孫子吳起列傳?).”
󰡔�손자󰡕� 13편은 정치 · 경제 · 용병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저술이다. 먼저 정치론이다. 그의 전제는 전쟁이 인민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과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특히 주의(主義) · 시간 · 공간 · 정신 · 기율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적을 아는 일이다. 정보전 혹은 첩보전이 중요하다. 또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속임수를 써야한다(兵者 詭道也, ?始計?)”고 가르치고 있다. 병불염사(兵不厭邪)가 그의 주된 사상인 것이다.
손자의 경제론에서는 속전속결의 이론을 펴고 있다. 전쟁은 돈이다. 빨리 끝내는 것만이 피해를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졸속으로 끝낸다는 말은 있어도 교묘하게 오래 끈다는 것은 없다. 무릇 전쟁을 오래 끌어서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것은 있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作戰?).
그러나 손자병법은 한마디로 용병론이며, 손자의 정치와 경제론은 용병론의 부산물이다. 용병에서는 “正攻法으로써 적을 대하고, 奇攻法으로써 승리를 얻는” 것(?兵勢?)이 중요하다. 또 격류와 같은 氣勢와 독수리와 같은 節度를 강조한다. 그러나 결국 “전쟁은 속임수로써 성립되고, 이로움으로써 움직이고, 이합집산으로써 변화에 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軍爭?). 나폴레온도 󰡔�손자병법󰡕�을 탐독했다고 한다. 모택동의 게릴라 전법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제자백가의 주요 사상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정치사상의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일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음양가(陰陽家)이다. 음양가의 대표는 추연(鄒衍)이다. 그의 사상은 󰡔�사기󰡕�?맹순열전?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음양의 생성소멸에 대한 변화를 깊이 관찰하였다. “천지개벽 이래 5덕(木·火·土·金·水라는 5行의 德)의 움직임에 따라서 정치가 합당함을 얻고, 길흉의 조짐이 여기에 따를 것을 설명하였다.” 음양가의 신비적 우주관은 漢代 유가에 큰 영향을 미쳤고, 또 왕조가 바뀔 때 중요한 정치이데올로기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이외에도 허행(許行)의 농가(農家)가 있다. 유가에 반대하면서 실천을 강조하였는데, 문헌이 결핍되어 현학(顯學)이 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3) 전제(專制)천하의 사상

진시황(秦始皇)은 기원전 221년에 6국을 통일하였다. 그로부터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청나라가 무너질 때까지 2천여 년 동안, 중국의 정치는 전제정치였고, 그것을 뒷밭침하는 정치사상은 ‘창조’의 ‘인습(因襲)’이었다. 무수한 사상가가 있었고,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였다. 다만 춘추전국의 百花齊放과 비교할 때 상대적인 의미에서 ‘인습’인 것이다. 인습이라고 해도, 특징은 있을 것이다. 제자백가의 정치사상이 난세를 치세로 바꾸는 방법의 문제라고 하면, 전제정치의 정치사상은 한마디로 왕권과 왕제를 옹호하는 문제가 중심이었다. 그러면 전제천하의 정치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秦漢의 정치사상

秦은 고대와 그 후를 구분하는 경계이다. 봉건제가 폐지되고 군현제도가 실시되었다. 새로운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중앙집권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경제는 소농경제가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전제군주의 통치가 사상과 문화에 침투하게 되었다. 특히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선진시대의 자유로운 학문풍토를 파괴하였다. 그렇다고 과거의 학파들이 모두 소멸한 것은 아니다. 漢의 발전에는 유생(儒生)들의 힘이 컸고, 도가와 법가도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사라진 묵학을 제외하면, 진한시대는 유가·법가·도가가 서로 융합되고 흡수되는 시대였다. 그러면서 각파의 내부의 투쟁도 있었다. 예컨대, 한대의 유가는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으로 나뉘어 싸웠고, 또 전자는 참위학(讖緯學)으로 발전하였다. 주요 사상가 혹은 저술은 아래와 같다.

① 이사(李斯): 법가의 정치를 실행한 마지막 인물이다. 법가사상은 이사에 이르러 극성에 달함과 동시에 쇠퇴에 접어들었다. 순경의 제자로서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그의 사상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존군(尊君), 집권(集權), 사학(私學)의 금지 및 독책(督責)의 道이다.  
② 가의(賈誼): 한초의 정치사상은 상앙과 이사의 정치에 대한 반발이다. 가의는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다. 공맹과 황노를 조화시켰다. 한 文帝 때 사람으로 정삭(正朔)의 개정, 관복의 변혁, 제도와 관직 명칭의 변경함에 있어서 유가의 본색을 보였다. 정치론에서는 인민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다. “인민은 제후의 근본이다. 교화는 정치의 근본이다. 도는 교화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③ 동중서(董仲舒): 한 경제(景帝) 때의 박사. 󰡔�춘추번로(春秋繁露)󰡕�와 󰡔�천인마책(天人三策)󰡕� 등을 저술하여, 고대의 ‘천인상응(天人相應)’을 계승한 ‘천인상여(天人相與)’를 주장했다. 그 자신이 창작한 ‘삼통(三統)’설과 당시 유행하던 ‘오행’의 원리를 각종 정치사건에 결부시켰다. 그 후 음양오행설과 ‘참위’가 크게 유행하였다. 정치사상의 퇴화였다. 군권신수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대 유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④ 환담(桓譚): 󰡔�신론(新論)󰡕� 29편을 저술하여 후한 광무제(劉秀)에게 상주하였다. 중화문화의 중흥을 알지 못하고 讖에만 빠져있는 그를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세인들의 주의를 끌기에는 힘이 부족하였다. 참위설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론의 요지는 ‘때를 따르는 것[因時]’이었다.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시속을 살펴 교화를 행하고, 잃을 것을 살펴 울타리를 세운다.”고 하였다. (蕭公權 1998, 560).
⑤ 󰡔�여씨춘추(呂氏春秋, BC 241)󰡕�: 진시황의 상국인 여불위(呂不韋)가 빈객을 모아 짓게 한 책이다. 그것이 만들어진 것은 진시황의 통일 이전이나, 한대 이후까지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책의 정치적 의의는 새로운 왕을 세워 진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사상의 내용은 고학(古學)을 펼쳐 법가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씨춘추󰡕�는 진시황을 비난하고, 진을 6국의 반열에 놓고 효공 때부터 행해왔던 부강겸병(富强兼倂)과 임법상공(任法賞功)의 정책을 부인했다. 여불위가 왜 그러한 책을 편찬하게 했는가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책을 통하여 여불위는 사람들의 칭송을 모으고, 천하의 인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책의 사상은 선진시대의 위아적 인생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유가의 관점에 동정하여, 군주가 다스리나 근본은 인민이라는 고대적 군치민본(君治民本)을 제창한 것이다.
  󰡔�여씨춘추󰡕�가 한대 잡가의 선구적인 책이라면, 도가의 정통을 이어받은 󰡔�회남홍렬(淮南鴻烈, BC 130년 경, 속칭 󰡔�淮南子󰡕�)󰡕�이란 책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회남왕 유안(劉安)이 빈객과 방술의 선비를 초청하여 엮은 것으로 노자의 뜻을 답습하였다. 정치가 일어나는 것은 쇠세이다. 우주의 본체는 道이며, 유형의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생성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⑥ 왕충(王充): 고문학의 영향을 받아 󰡔�논형(論衡, AD 80년 경)󰡕�을 저술했다. 그 기본은 ‘허망을 미워하는 것’이고, 자연주의에 입각한 천인상분(天人相分)의 숙명론을 내세운 것이다. 천도는 자연이다. 군주는 하늘의 명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재지변이 군주에게 경고하는 것이라는 참위학을 부정했다. 또 교화나 국가의 안위가 모두 수(數: 운명)에 달려있고,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리는 것[以不治治之]”이 가장 합리적인 치술이라고 하였다. 黃老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하늘의 역할을 부인한 점에서 왕충의 사상은 큰 진보였다. 그러나 그의 숙명론은 전통 유가의 천인관을 넘어서지 못했다. 유가의 금문학과 참위학의 잘못을 폭로한 공헌이 있다.      
⑦ 왕부(王符): 후한의 화제(和帝)와 안제(安帝) 때 벼슬길에 올랐으나, 은거하고 36편의 책을 지었다. 󰡔�잠부론(潛夫論)󰡕�이라 하였다. 군주의 기원과 역할, 군주와 하늘과 인민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요지는 순자와 비슷하였다. 또 천치(天治)와 민본의 원리를 밝히고, 임현(任賢)과 상덕(尙德)이 치술의 요체임을 주장했다.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하층지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문벌제도를 비판하였다. 군도가 옳지 못하고,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계급모순이 극에 달한 시대의 사상가였다.
⑧ 중장통(仲長統): 군벌이 할거하고 전쟁이 빈번하던 동한 말기에 살았다. 󰡔�창언(昌言)󰡕� 34편을 지었다고 하나, 일부만이 󰡔�후한서󰡕� 등에 전한다. 치란의 원인을 밝히고, 전제군주제도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난세는 길고 치세는 짧다.” 그것은 통치자가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토지겸병으로 재산이 지나치게 불균등해진 결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나라 정전제도의 부활 등의 탁고개제(托古改制)를 주장하였는데, 비관적이었다. 사회의 혼란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구제의 방법에도 회의적이었다. 난세에 살았으면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선진유가와 달리 비관적인 치란순환의 퇴화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2)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8 AD)

秦은 통일 후 15년 만에 단명으로 끝났고, 漢은 전·후 합하여 약 4백년 지속되었다. 漢末에 천하는 3국으로 분열되어, 󰡔�삼국연의󰡕�는 “천하대세는 분열이 오랜 즉 반드시 통일되고, 통일이 오랜 즉 반드시 분열된다[分久必合 合久必分]”는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중국인의 역사철학의 한 단면이다. 삼국시대는 난세였다. 전국 말 법가사상이 풍미한 것과 같이 󰡔�삼국지󰡕�의 영웅들은 대체로 법가였다. 한나라가 儒를 지나치게 숭상하여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삼국시대는 전쟁이 계속되던 시대였다. 제갈양(諸葛亮)과 조조(曹操) 등은 병서를 남으나, 법가의 저술은 없다.
위진남북조시대의 특징은 분열이다. 隋의 통일까지 거의 4세기동안 남방과 북방이 대치한 시대다. 통치세력의 악정과 부패가 두드러졌고, 민족간의 갈등이 첨예화된 시대였다. 사상과 문화 역시 다원적이었다. 유가사상의 퇴조하면서 도가사상이 성행하였고, 또 불교가 전래되어 큰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유·불·도의 투쟁이 현저한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① 위진의 현학(玄學): 노장사상은 본래 유세(遺世)의 위아사상이다. 위진시대는 중국역사상 둘도 없이 부패하고 퇴폐적인 쇠세였기 때문에 노장사상이 유행한 것이다. 당시의 도가사상을 현학이라 한다. 玄은 󰡔�노자󰡕�에서 나온 개념이며, 현학은 󰡔�노자󰡕�·󰡔�장자󰡕�·󰡔�주역(周易)󰡕�을 숭상했다. 󰡔�주역󰡕�은 유가의 철학서이고, 그것이 숭상된 것은 유가의 경학이 도가사상과 접근하였음을 뜻한다. 청담이 유행하였는데, 노장의 계승이었다. 정치사상은 ‘무위(無爲)’와 ‘무군(無君)’으로 요약된다. 무위와 무군은 각기 선진의 노자와 장자에 가까웠다. 많은 사람들이 노장을 표방하고, 저술을 남겼는데, 체계적인 것은 적다. 하안(何晏) · 왕필(王弼) · 향수(向秀) · 곽상(郭象) · 장담(張湛) 등이 특히 ‘무위이치(無爲而治)’의 대표였고, 완적(阮籍) · 유령(劉伶) · 도잠(陶潛) · 포경언(鮑敬言) 등은 ‘무군(無君)’을 주장했다. 갈홍(葛洪)이란 인물도 있었다. 󰡔�포박자(抱朴子)󰡕�116편을 지었다. 그의 정치사상은 유가와 도가 사이를 배회하였다. 요점은 유군론(有君論)이며, 무위의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이 점에서 위의 현학자들의 무군사상과 다르다. 군주제도가 생김에 따른 역사발전을 논의하였는데, 기본적으로 군주의 이익을 내세운 전제군주이론을 주장한 것이다. 또 그는 현학자들의 청담풍조와 사대부들의 방탕한 생활을 비판했다.
② 󰡔�열자(列子)󰡕�: 열자의 이름은 열어구(列圄寇)이며 장자보다 먼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열자󰡕�라는 책은 위진시대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며, 이 시대의 퇴폐사상을 담고 있다. 위진시대는 쇠란의 시기였고, 禮敎에 대항하는 반동의 시기였다. 반(反)예교가 반(反)전제의 조류와 합치면서 방랑의 인생관이 주장되었다. 이를 기초로 한 무군론이 대두되었는데, 󰡔�열자󰡕�가 그것을 대표한다. 군신의 도를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③ 부현(傅玄): 유가사상이 위진시대에 와서 쇠미해지고 노장사상이 번창했으나, 유가사상의 발양을 외친 인물이 晉初의 부현이다. 󰡔�傅子󰡕�라는 책에서 그는 인의를 숭상하고, 예악을 일으키고, 제도를 정비하고, 상공(商工)을 억누를 것을 강조했다. 현실을 중시하면서 질서를 확립하자는 것이 그 사상의 특징이며, 한마디로 유학부흥론을 역설한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유가사상의 동면기에 해당하나, 현학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후대 理學의 길을 연 과도기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불교가 일으킨 논쟁을 살펴보고, 다음 시대로 넘어가기로 한다.
④ 불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한대이며, 위진시대에 크게 번창했다. 동진 이후 유교와 불교, 도교와 불교의 논쟁이 그치지 아니했다. 그 내용은 이적(夷狄)과 화하(華夏),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문제로 요약된다. 전자는 異族종교와 민족문화의 충돌이었고, 후자는 출가가 전통적인 유가의 윤리와 어긋나기 때문에 발생한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은 정치적 분규로 발전했다. “하늘아래 왕의 땅이 아니 것이 없고,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는 전통적인 관념과 누구도 정치적 ‘국외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의 대립이었다. 불교의 흥기는 현학과 더불어 唐宋 이학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지만, 불교가 일으킨 논쟁은 隋唐으로 통일되면서 대략 마감되었다. 유가 세력이 부흥한 것이다. 그러나 오대(五代)의 난이 일어나면서 노장과 불교가 한때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一治一亂의 순환은 정치세계 뿐만 아니라 사상영역에서도 이루어진다.      

3) 수당오대(隋唐五代, 589-959)

隋는 수명이 짧아서 여러 면에서 唐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는 통일 왕조였다. 均田制 위에 수적법(輸籍法: 인구 이주법)과 부병제(府兵制)를 채택하여 토지개간에 힘썼다. 과거제를 개창하여 관리등용의 문호를 넓혔고, ‘개황률(開皇律: 형률을 가볍게 함)’을 통하여 통일과 안정을 길을 열었다. 왕조의 처음은 다 괜찮은 법인 모양이다. 수와 당은 유가사상이 우세하였다. 도가와 불교는 정치적으로 미미하였다. 특히 당태종의 정관(貞觀)의 治와 현종의 개원(開元)의 治는 유학이 그 바탕이었다. 천보(天寶)의 난(安史의 난)에서 五代시기를 거치면서 천하가 쇠세로 접어들자, 민귀(民貴)의 유가사상과 노장의 無君사상 등이 다시 등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추세였다.

① 왕통(王通): 수당 유가의 종사(宗師). 그러나 노장의 요소도 있어서, 무위를 주장했다. 다만 노장은 무위로써 개인적인 소요를 추구했다면, 왕통은 무위로써 민본의 목적을 달성하려한 것이 다르다. 그의 사상은 6대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것은 한초에 가의가 유가와 도가를 조화시켜서 ‘과진(過秦)’론을 제시한 것과 같다. 유교를 體로, 도교를 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애민과 후생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다. 또 민귀군경(民貴君輕)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맹자의 답습이다. 수양제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하에 문인 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② 한유(韓愈, 768-824): 일생동안 ‘명교(名敎)’를 일으키고 인의의 장려를 주장했다. 송대 이후 그는 유가의 정통으로 존숭되었다. 맹자를 높이고, 순자를 폄하했다. 그러나 존군억민(尊君抑民)을 내세운 점에서 오히려 순자에 가까운 것은 아이러니이다. 최초의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고, 백성들은 자생 자치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군주와 관리의 가르침과 양육을 받아야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군주는 분업을 관장하는 지존의 지위에 있으며, 정치사회는 분업과 합작의 조직이다. 그 속에서 신하와 백성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면 죽어 마땅하나, 군주는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해도 죄책이 없다고 하였다. 이 점 또한 맹자와 다르다. ?논불골표(論佛骨表)? 등을 지어 불교에 반대했고, 도교에도 물론 반대했다. 문장이 뛰어나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③ 유종원(柳宗元, 773-819): 당말 민본사상에 입각하여 학정의 폐단을 비판한 유가의 異端이다. 그러나 맹자의 인심(仁心) ·인정(仁政)설을 많이 따랐다. 정치제도는 시대적인 추세에 맞게 항상 고쳐져야 한다고 하였다. ?봉건론? 등의 글에서 발전사관을 피력했다. 유종원 보다 한층 더 학정을 비판한 인물로서 임신사(林愼思)가 있다. 번잡스럽고 가혹한 부담을 제거하는 것이 백성을 기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역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④ 당 후기의 도교: 당대 후기와 5대 시기는 정치의 혼란이 극심하였다. 도가사상이 다시 대두되었으며, 그 가운데 원결(元結), 󰡔�무능자(无能子)󰡕�, 담초(譚?) 등이 유명하다. 원결은 “가혹한 정치를 제거하고 이민을 애휼하라”고 하면서, 정치가 흉악하면 ‘퇴폐이망(頹廢而亡)’이라 하였다. 도교를 體로, 유교를 用으로 보았다. 󰡔�무능자󰡕�는 책명이다. 저자는 미상이다. 사람을 포함하여 만물의 생명은 유한하나, 그 氣만은 영원하다고 하였다. 평등사상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든 성인과 봉건사회의 윤리를 비판했다. 또 천하가 혼란스럽다고 해도 구태여 그것을 구하여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담초는 5대 도가의 대표작인 󰡔�화서(化書)󰡕�를 집필하여, 도(道)·술(術)·덕(德)·인(仁)·식(食)·검(儉)의 여섯 가지 덕화를 주장하였다. 공맹과 노장을 겸용하여, 무위를 이상으로 삼았으나, 족식(足食)을 기본 치술로 삼았다. 명군론(明君論)을 주장한 나은(羅隱)도 이 시대의 주요 사상가이다. 명군론은 전제군주를 인정하면서 명군과 폭군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4) 송원(宋元: 960-1367)

송의 통일은 5대의 분열을 종식시켰으나, 불완전한 것이었다. 요(遼)와 하(夏)가 병립하고, 금(金)과 원(元)이 차례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제군주통치가 강화되기도 했으나, 그 폐단이 두드러진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사상은 두 파로 나뉘어 크게 발전하였다. 하나는 성리학자들인 ‘이학파(理學派)’이고 다른 하나는 공리주의자들의 ‘사공파(事功派)’였다. 전자는 당대 유가의 학술을 계승한 것이고, 후자는 쇠약해진 국세를 부강케 하려는 입장이다. 모두 공자에 의거하였으나, 정치사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은 물론 후자이다. 이들은 心性에 대한 탐구가 공허하다고 생각하여 실질적인 부강의 時務를 궁구하였다.

① 사공파: 송대 공리사상의 대표는 왕안석(王安石)이다. 그는 ‘유위(有爲)’의 치술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실천의 정치가였다. ‘신법(新法)’을 통하여 변법을 추구했다. 빈약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제도를 중시하게 되었고, 인재가 근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의 변법은 한때 성공한 듯 하였으나, 수구파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였다. 정책의 과격성은 ‘방임’이라는 전통에 어긋났고, 또 사대부들의 기득이익을 침해했던 까닭이었다. 또 ‘주례(周禮)’를 정책의 이론적 기반으로 삼은 점에서 구사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왕안석에 앞선 사공파로서 이구(李?)가 있다. 그는 禮가 수신과 치국의 기본이라고 하였다. 그의 󰡔�예론(禮論)󰡕�은 선진 순자에 가까웠다. 또 민생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했고, 義와 利의 문제에 있어서 공맹과 달리 후자를 중시했다. 또 이들 이외에 진량(陳亮)과 섭적(葉適)도 널리 알려졌다.  
② 이학파: 여기에 속하는 인물들은 新儒學과 관련된 사상가들이다. 기본적으로 유학자들이지만, 도가사상과 불교 가운데 어느 것을 좀 더 수용하였는가에 따라 둘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소옹(邵雍)·주돈이(周頓?), 후자에는 정호(程顥)·정이(程?) 형제와 주희(朱熹)·육구연(陸九淵) 등이 속한다. 장재(張載)는 중간에 위치한다. 이 여섯 사람을 흔히 송 육현(六賢)이라고 한다. 이들의 사상체계는 서로 다르고 복잡하다. 그러나 정치사상은 대체로 일치한다. 하·은·주 삼대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으며, 한당의 유가적 성취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는 방법을 유일의 정술(政術)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정치의 실제에 나아가 그 정술을 적용한 적도 거의 없었다.  
③ 중간파: 이학파에 속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위에서 언급한 사공파도 아닌 정치실천파가 있었다. 수구(守舊)사상을 지닌 인물들로서 구양수(歐陽修) · 사마광(司馬光)이 그 대표이다. 그들의 정치사상은 체계가 없었고, 과거를 답습했다. 예컨대, 사마광은 전제정체가 완성되는 시기에 살면서 전통유가의 仁政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컸다. 신법의 몰락과 그 후에 전개된 당쟁의 책임이 이들의 몫이다. 소순(蘇洵) 3부자도 이들과 가까웠다. 특히 소순의 󰡔�육경론(六經論)󰡕�은 心理 분석을 통하여 정치를 해석한 다소 독창적인 저술로 평가된다.   

5) 명청(明淸)

명과 청의 시대를 함께 다룰 수 있는가도 문제이다. 그러나 이 두 시기는 전제사상에 대한 반발과 옹호로 점철되었다는 점에서 같이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사상은 민본과 민족에 대한 관념에 주의하게 되었다. 선진시대의 옛 학문이 부활되기도 했지만, 근세의 학풍이 불기 시작했다. 인습의 전환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내적인 원인이다. 전제정치와 이민족 지배의 폐단과 피해가 元代에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노장의 무위, 불교의 허무, 혹은 심성론과 같은 과거의 사상으로는 현실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이다. 민본(民本)과 양이(攘夷)사상이 대두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외적 원인이다. 해통(海通)으로 서양사상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파천황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명대 정치사상의 대체적인 기반은 유가에 있었고, 다만 전제군주청치의 폐단에 대한 비판이 심했을 뿐이다. 더구나 존군사상의 힘도 만만치 않아서 명대는 전환의 전야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전환의 본류는 청대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① 민본사상의 발흥: 유기(劉基)와 방효유(方孝孺)
유기는 원의 가혹한 정치에 대항하여 貴民의 사상을 천명했다. 맹자를 따르면서 天·人을 함께 밝혔다. 다만 맹자가 하늘이 수명(授命)의 주재이고 민의를 통해 천심에 달한다고 했음에 반하여 유기는 理氣 2원설을 좇았다. 하늘의 氣에 병이 들어 주재의 능력을 상실하면 인사(人事)로써 하늘의 잘못을 바로 잡아 하늘의 본심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욱리자(郁離子)󰡕�란 저술이 있다. 방효유는 유기의 민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을 또한 내세웠고, 격렬하게 양이(攘夷)를 외쳤다. 또 군주의 올바른 직분을 강조하였다. 종법과 정전(井田)에 관한 주장은 자못 독창적이어서 명대 유자의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지재집(遜志齋集)󰡕�이 있다.     
② 전제사상의 옹호: 장거정(張居正)과 여곤(呂坤)
명말의 행정가였던 장거정은 존군을 종지로 삼으면서 전제사상을 옹호했다. 군주의 권위를 높이고, 국시를 정하고, 기강을 진작하고, 소인배를 몰아내야 된다고 하였다. 여곤은 귀민과 존군의 중간에서 양자를 함께 주장했다. 󰡔�신음어(呻吟語)󰡕�등의 저술이 있다. 치용이 학자의 천직이요, 윤상이 처세의 기강이라고 하였다. 인민은 군주를 높임으로써 안정되고, 군주는 인민을 안정시킴으로써 높아진다고 하였다.
③ 양명학(陽明學)의 등장: 왕수인(王守仁)과 이지(李贄)
송대에 이미 理學과 心學의 구별이 있었고, 이것은 程씨 형제가 만든 것이다. 그 후 이학은 주자의 노력으로 程朱理學이 되었고, 心學은 육구연의 손을 거쳐 양명학으로 발전하였다. 양명학은 왕양명이 완성시킨 심학이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이치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문을 체득하였다. 학문의 요체는 ‘양지를 일깨우는 것[致良知]’이다. 그는 일찍이 “마음에서 구하여 아니라면[非] 그것이 비록 공자에게서 나온 말이라도 감히 옳다[是]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상의 자주를 표명한 것이다. 양명학이 전제정치자체를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나, 전제정치에 이용되는 정통의 학술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지는 이것을 극단으로 전개했다. 명교(名敎)를 깨뜨리고 개인의 자유와 독립된 인격을 제창하였다. 거기에는 또 소박한 평등사상이 내포되었다. 사상전환의 맹아인 것이다. 
④ 청초의 반전제사상: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당견(唐甄)·왕부지(王夫之)
명초의 민족사상은 원의 멸망과 더불어 자연히 약화되었고, 민본사상도 전제정치를 이기지 못했다. 마태오리치를 위시한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여온 지식과 사상도 크게 수용되지 못했다. 청의 등장으로 중국은 다시 오랑캐의 지배로 들어갔다. 3백여 년 전 원의 세조가 송을 멸망시켰던 국면으로 후퇴한 것이다. 명의 유민들은 흥망의 요인을 탐구하고, 오랑캐의 타도와 반전제를 외쳤다. 청초의 그 대표가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의 황종희이다. 그는 왕학의 범위를 넘어서 경세치용의 학풍을 열었고, 전제정치에 극력 반대했다. 귀민과 ‘천하위공(天下爲公)’을 내세우면서 군주제를 비판했다. 권력분권을 목적으로 한 여러 가지 변법을 주장했다. 특히 학교를 여론기관으로 삼아 정치를 감시하자고 하였다. 민치로 한발 다가선 것이다.      
󰡔�일지록(日知錄)󰡕�의 고염무는 이학과 심학을 모두 비판하는 입장에서 경세치용을 강조했다. 시대가 비슷했기 때문에 정치적 주장은 황종희와 유사했다. 다만 황씨가 민본에 입각하여 전제를 비판했음에 반하여, 고씨는 민본보다는 지나친 권력의 폐단을 바로 잡는 데 치중했다. 실제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의 󰡔�군현론(郡縣論)󰡕�은 중앙의 권력을 억제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잠서(潛書)󰡕�를 지은 당견도 귀민사상을 주장했고, 대체적인 사상은 황씨와 고씨와 유사했다.
위의 세 사람과 좀 다른 차원에서 고려해야 할 인물이 왕부지이다. 그는 철저하게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멸청(滅淸)은 실패했으나, 잠재적 영향을 컸다. 왕씨는 정치제도를 순전히 역사적 시각에서 논했다. 한 시대의 득실에 구애되지 않고, 정치진화라는 객관적 사실을 중시한 순수학자였다. 정치에서는 “옛 사람을 맹목적으로 본받아서는 안 된다. 참된 뜻을 살피고 당시의 상황을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잠시 시행해 보아 맞지 않으면 곧 다른 법제를 만들어 제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한다면 법제가 문란해지고 폐해만 많아져서 옛 도가 끊기고 만다.”고 하였다. 이러한 원리에서 출발하여 역대의 정치제도를 논했다. 특히 선거·정전·병농(兵農)의 문제에 있어서 독창적인 논의가 발견된다. 저술로는 󰡔�황서(黃書)󰡕�·󰡔�독통감론(讀通鑑論)󰡕�·󰡔�송론(宋論)󰡕� 등이 있다.   
⑤ 태평천국(太平天國)
청초의 멸청운동은 강희(康熙)와 같은 걸출한 임금이 나타남으로써 자연히 쇠약해졌다. 그 뒤를 이은 옹정(雍正)과 건륭(乾隆)도 민족사상에 대한 억제정책을 성공적으로 폈다. 정치와 관련이 없는 고증학(考證學)이 유행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정치사상은 활기를 잃었다. 가경(嘉慶)·도광(道光) 연간부터 청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자, 정치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재연되고, 변법이 주장되었다. 그러다가 태평천국이 일어났다. 그것은 중국 역사에서 자주 있었던 교비(敎匪)반란의 하나로서 청조 정치의 악독한 폐단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민족사상의 부흥이다. 또 서교(西敎: 기독교)라는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다. 도광과 함풍(咸豊) 때에 와서 홍수전(洪秀全)과 양수청(楊秀淸) 등이 난을 일으켰다. 그 사상은 반청복한(反淸復漢)·봉천 박애(奉天博愛)·평등상현(平等尙賢)으로 요약된다. 반청은 민족주의, 박애는 민생주의, 상현은 국가경영방법에 각기 부합한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난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층계급출신으로서 민권관념도 없었고, 또 근대정치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따라서 천국이 쉽게 망한 것은 군사적 실패 보다는 정치사상의 ‘불건전성’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증국번(曾國藩) 등의 한족은 그들의 이념이 공교(孔敎)를 모멸한다고 격분하여 싸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청은 신해년(1911)을 기다릴 것 없이 망했을 것이다.      
⑥ 무술유신(戊戌維新)
아편전쟁으로 시작한 서구열강과의 전쟁, 태평천국의 난, 염비(捻匪)의 난 등으로 청조는 그 원기를 거의 상실했다. 그 와중에서 동치유신(同治維新)이 일어났다. 이것은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면 중국이 부강할 수 있다는 물질기술의 유신이다.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개념이 서서히 등장한 것이다. 
한편 서양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서양 문물의 유입이 자연히 늘게 되었다. 서양의 기술뿐 아니라 그 학문과 정치제도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또 유학파도 생겼고, 그들은 서양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중국에 소개했다. 엄복(嚴復)·하계(何啓)·곽숭도(廓嵩燾) 등이 그 대표였다. 특히 엄복은 서양근대국가들이 자유를 ‘體’로 삼고 민치를 ‘用’으로 삼았기 때문에 발전했다고 하였다. (蕭公權 1970, 90). 당시로서는 탁견이었다. 그들의 영향은 적지 않았지만, 큰 변화를 부르지는 못했다.     
청일전쟁(1894)에서 패배한 중국은 마지막 유신을 시도하였다. 무술유신이다. 그것은 동치유신에서 시작된 변법운동의 연장이다. 기술유신에서 정치유신으로의 변모를 꾀한 운동이란 점에서는 의미가 크다. 유신의 거두(巨頭)는 강유위(康有爲) · 양계초(梁啓超) · 담사동(譚嗣同) 등이다. 그들의 사상은 각기 다르며 복잡하다. 강씨가 ‘대동(大同)’이란 이상사회를 꿈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라면, 양씨는 점진적 민주주의자였고, 담씨는 급진적인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유신 당시에는 그들이 만주정권의 유지, 군주정체의 보존 및 서양의 경험을 거울삼은 제도의 개혁이라는 공통된 목표에 합의했다. 서양기술의 도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동치유신과 다른 점이며, 민족개념과 민권개념이 결여된 위로부터의 개혁이란 점에서 태평천국과 대비된다. 조정이 우매하고 구당(舊黨)세력이 완고했기 때문에 ‘백일유신(百日維新)’에 그치고 말았다. 

(4) 소결론

중국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부터 청이 망한 1911년까지 2천여 년 동안 왕조는 바뀌고 치란의 성쇠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동일한 전제군주 정치체제를 유지했다.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역시 기본적으로 동일하였다. 그러한 예가 지구상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자백가 이후 정치사상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사상의 인습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청이 망한 것은 1911년의 신해(辛亥)혁명에 의해서였다. 신해혁명은 전제군주정치의 종말을 고한 대사건이며, 명청에서 시작한 사상의 전변을 대미(大尾)로 몰고 간 사건이다. 그러나 신해혁명에 영향을 준 사상들을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다만 동맹회(同盟會)의 손문(孫文) ? 황흥(黃興) ? 장병린(章炳麟) 등이 주창한 민족혁명이론이 그 하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 특히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와 오권헌법(五權憲法)은 새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사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蕭公權 1970, 92). 그러나 혁명 후 수립된 공화정부는 입헌주의에 대한 회의(懷疑)만을 불러일으켰을 뿐, 국권회복과 근대화의 길을 열지 못하고, 중국을 또 하나의 긴 ‘亂’의 시대로 접어들게 하였던 것이다. 다양한 서구의 사상이 급속하게 소개되었으나, 승리한 것은 공산주의였다. 중국의 공산주의는 한동안 모택동사상(毛澤東思想)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중국적 혹은 아시아적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라고 선전되었다. 1949년에 탄생한 공산정권은 새로운 형태의 전제정치를 수립하였다. 그렇다면 秦漢 이후 중국의 정치사상은 전통사상이든 공산주의와 같이 수입된 사상이든 한결같이 전제정치체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상이라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다.

3. 일본의 정치사상

(1) 서론

일본정치사상은 한국의 학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대개는 한국이나 베트남과 동일하게 중국정치사상을 수용하여 변용시킨 것이라는 인상이 지배적이다. 그러한 지적은 대체로 그르지 않다. 그러나 헌팅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중국의 모범적 수용자였던 한국과 달리, 일본은 수입된 사상을 자신들의 전통과 융합시키거나 심하게 변형시켰다. 에도 중기의 고가쿠(古學)와 고쿠가쿠(國學)에 이르자, 일본인들은 중국적 사유를 뛰어넘어 자신들만의 정치적 사유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한국과 비교하여 일본은 자신만의 개성이 뚜렷한 정치사상을 발전시켜왔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있으면서도, 일본정치사상이 개성을 가지게 된 가장 중요한 근저에는 ‘天皇’과 그것을 정신적으로 정당화시켜 온 ‘神道’가 놓여 있다. 일본의 정치체제는 크게 <고대 천황제-중세/근세 막부제-근대 천황제-현대 민주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에 발생한 천황제는 한번도 중단되지 않고 형태를 바꾸며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신토(神道) 역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천황’과 ‘신토’의 존재에 의해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정치공동체가 ‘神國’이라는 정치적 자의식을 유지해왔다. 일본의 국학자들이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바처럼, 그 연면한 생명력은 인류의 정치적 경험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희유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 모든 일본정치사상은 ‘천황’을 근본적인 문제로 취급하였다. ‘천황’을 자신의 체계안에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심하게 변용되기도 하였고, 그것에 저항하여 소멸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정치사상은 인류가 경험한 수다한 정치적 사유를 전개하였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丸山眞男 1972).
다음으로 일본정치사상의 두드러진 특징은 뛰어난 현실주의이다. 고매한 형이상학은 일본정치사상의 선호대상이 아니다. 그 반면 한국인들은 현실과 자아 사이에 윤리적 커튼을 개입시키는 방식에 익숙해 있다. 중국에서도 실험되지 않았던 주자학이 그토록 순결한 방식으로 5백여년에 걸쳐 실천되어 온 것도 그 일례이다. 그 반면 일본인들은 현실에 대해 투명하다. 이 때문에 이상주의적 정치사상일수록 일본에 수용되면 곧바로 회의에 직면하여 폐기되거나 현실에 맞게 변용된다. 17세기에 수용된 주자학은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그 근본 명제인 ‘理’를 부인 당했다. 근대의 기독교도 천황제와 타협했다. 근대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서양문명 역시 부국강병의 도구임을 누누이 역설하고 있다.(󰡔�文明論の?略󰡕�) 요컨대 한국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은 ?정치사상?에서 ‘정치’를 중심으로 ‘사상’을 보는 경향이 강하다. 즉 사상의 ?도구적 인식?과 ?도구적 再生?에 뛰어나다. 이념의 취약성은 역설적으로 정신적 자유와 다양성을 가져왔으나, 동시에 천황제와 그에 대한 정서적 애착으로 인해 근본적인 한계를 노정해 왔다. 모든 것이 가능하나, 어느 하나도 자신의 독립성과 순결성을 지킬 수 없었다. 한국처럼 하나의 이념을 모두 폐기하고 새로운 이념을 실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일본인들의 정치생활에서 ‘和’를 핵심적인 가치로 정립시켰다. 일본 최초의 정치사상가로 운위되고 있는 쇼우토쿠 태자(聖德太子)의 근본적인 정치적 명제도 이것이다. 그것은 요컨대 정치를 절대원리의 투쟁으로 보지 않는다. 150여년에 걸친 센고쿠(戰國)의 격렬한 전쟁에서도 이념은 거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토(神道) 역시 그 훌륭한 典範이다. 그것은 천황제의 정신적 기반이지만, 본래부터 원리가 아니라 자연적 심정과 같은 것으로, 어떠한 이념과도 융합하여 훌륭하게 자신을 보존하여 왔다. 신토를 이념적으로 체계화시킨 고쿠가쿠은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와카(和歌)의 세계에서 잘 드러나는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이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세계를 초월하여 있는 것에 의지하여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는 부정된다. 일본인들은 신조차도 현실로 만들었다. 천황이 그 예이다. 그리고 현실 속의 신과 神國 속에서 일본인의 정치적 삶은 하나가 되는 ‘和’에 이르는 것이다. 국학이 강조하고 있듯이, 천황에 대한 순진한 신뢰와 복종은 일본인들이 발견한 최고의 정치적 질서이다. 사무라이는 원래 천황하의 율령제에 대한 안티 테제로 등장했으나, 18세기의 고쿠가쿠와 막말 존왕양이 운동에 이르러서는 천황제 원리의 열렬한 실천자가 되었다. 요컨대 ‘천황’, ‘현실주의’, ‘和’, ‘무사도’는 모두 깊은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다.
아래에서는 위의 논의에 근거하여,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정치사상의 대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대 일본정치사상( -1192)

1) 신화의 정치사상

일본의 고대는 원시문명으로부터 천황제 율령국가를 거쳐 1192년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기까지의 시기이다. 고대 일본정치사상의 첫 표현양식은 ‘신화’이다. 이것은 󰡔�고지키󰡕�(古事記)와 󰡔�니혼쇼키󰡕�(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신화와 역사가 혼재되어 있다. 그 내용은 역대 천황의 업적에 관한 기술로서, 천황가가 대대로 일본을 통치해 온 역사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 핵심은 ?천황? 통치의 정당성이다. 원시사회의 자연적 결합으로부터 인위적인 정치공동체로 전환되면서, 일본 최초의 정치사상이 직면한 문제는 그들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정치권력, 특히 권력에 의한 질서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고대문명은 이와쥬쿠(岩宿), 죠오몬(?文), 야요이(?生)로 변천해 왔다. 기원적 4-5세경 야요이 시대에는 중국과 한반도의 도래인들에 의해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정치질서가 탄생했으며, 농경신을 위한 제사가 행해졌다. 청동과 철기가 사용되고, 고대 정치권력의 출현을 시사하는 장대한 고분이 축조되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祭器는 무기형으로 제작되어 무기 자체가 신이 되는 무력숭배가 나타났다. 공동체의 규모는 무라(村)에서 쿠니(國)로 바뀌었다. 350년경에는 야마토(大和) 정권이 수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자는 종교적 샤만(司祭王)으로부터 군사적 수장(軍事王)으로 변화되었다. 471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辛亥銘 鐵劍에는 조상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고 ?左治天下?란 명문이 새겨졌다. 5세기에 광범위한 영역을 통치하는 왕권이 확고하게 확립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확대된 공동체의 통합은 처음에는 조상신과 산천에 대한 신앙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덤의 조성은 물론 죽음에 대한 의식의 탄생을 뜻한다. 이에 의해 고대인들은 현세와 죽음의 세계,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일상적인 공간과 신성한 공간을 양분하였다. 그리고 두 대립 요소를 통합하는 공동의 의식에 의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 촌락에서의 삶을 이상화시켰다. 고대인에게 있어 신화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신화는 구체적으로 인간 및 세계의 탄생과 양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조상신과 산천에 대한 신앙은 그러한 의식의 산물이었다. 일본의 고대문명이 발생한 나라(奈良, 야마토大和) 분지 동남부의 미와야마(三輪山)는 467m의 높이의 산이다. 이곳은 신이 거주하는 神體山으로서 숭배되어 오늘날도 사람의 출입이 금지(禁足地)되고 있다. 이 시대의 정치의식은 신화적 의식과 다르지 않았다. 샤만의 신비력은 곧 정치적 정통성의 근거였다. 3세기 무렵 일본의 야마타이(耶馬台)국의 여왕 히미코(卑?呼)는 신의 계시를 들었으며, 그 능력에 의해 장기간 지속된 전쟁을 종식시켰다고 한다.

야요이를 이은 아스카 문명(593-710)에서는 도래인들 - 특히 백제 - 에 의해 보다 고도한 세계관이 유입되어 고대인들의 소박한 의식과 습합되었다. 神道를 제외하고, 17세기 전까지 일본인들에게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불교였다. 한국과 달리 유교나 도교는 부차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2)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의 ?헌법 17조?

6세기 전반 불교 수용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발생했다. 552년 백제는 불상과 불경을 보내 불교 수용을 권했다. 당시 일본 정치를 지배하고 있던 두 귀족 가문인 소가(蘇我)씨는 불교 수용을 찬성하였다. 모노노베(物部)씨는 반대하여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다. 소가씨가 모노노베씨를 타도하여, 불교는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일본문명에서 외래문물의 수용을 둘러싼 기나긴 항쟁의 첫 시작이었으며, 형이상학적 문제가 정치 투쟁의 이슈가 된 첫 발단이기도 했다. 그것은 요컨대 정치의 세계가 자연적 세계로부터 설명되어야 할 세계, 즉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 세계로 변모되었음을 보여준다.
불교가 고대 정치체제 전체의 원리로 탁월하게 재해석된 것은 아스카 문화의 비조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에 의해서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국내 정치 상황은 소가(蘇我)씨의 세력이 천황가를 능가하고 있었으며, 호족간의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이런 혼란 속에서 씨족 문벌 정치를 청산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을 등용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그가 지향한 것은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였으며, 그 토대가 되는 정치이념은 ‘불교’였다.
그는 󰡔�三經義疏󰡕�(勝?經義疏, 維摩經義疏, 法華經義疏)을 저술할 정도로 불교에 대해 심오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고, 유교 경전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다. 593년 스이코 천황의 섭정이 된 쇼오토쿠는 603년 官位 12階의 관제를 제정했으며, 604년 처음으로 曆日을 사용하고 ?憲法 17條?를 공포했다. 620년에는 역대 천황의 계보를 기록한 󰡔�텐노오키(天皇記)󰡕�와 國史인 ?곳키(國記)?를 편찬했다. 이 모든 작업은 물론 천황 지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고대 국가의 성숙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는 단지 정치권력의 정당화로부터 천황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 정치사상의 과제가 되었다. 또한 정치적 정당성이 신화적 내러티브에서 역사적 이야기(모노카타리, 物語り)로 전환되었으며, ‘신화’와 단순한 ‘무력’으로부터 ‘법’에 의한 통치체제(律令國家)의 수립에 의존하는 시대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통합원리가 바로 ?헌법17조?였다.
헌법 17조는 실정법이 아니라, 정치의 큰 규범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천황제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조정의 귀족과 관료들에 대한 훈시이다. 그것은 이 시대의 정치사상이 충분한 반성의 산물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바람직한 질서의 형성에 대한 세 가지 사유가 혼합되어 있다. 첫째는 그 유명한 ‘和’의 방법이다. 제 1조는 이렇다.

和를 貴하게 여기고, 거슬리지 않는 것을 宗으로 삼으라. 사람에게는 모두 ?이 있다. 또한 깨달은 자는 적다. 이 때문에 君父에 순종하지 않고, 또한 가까운 마을(隣里)에 어긋난다. 그러나 위가 和하고 아래가 睦하여 모든 일을 논의하면 사리가 스스로 통하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日本書紀󰡕� 卷 22, 推古天皇 十二年 夏四月)

이는 호족들간의 정쟁이 혹심했던 그 시대에 절실한 정치적 규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현실적 통찰이 깔려 있다. 사람은 모두 무리를 짓고 자기 견해를 주장하지만, 실제로 참답게 알고 있는 자는 적다는 견해도 그러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제 10조는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음의 분노를 끊고, 화냄을 버리며, 사람의 잘못에 성내지 마라. 사람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고, 마음은 각자가 집착하는 바가 있다. 저가 옳으면 내가 그르다. 내가 반드시 聖人이 아니며, 저가 반드시 愚人이 아니다. 모두 범부일 뿐이다. 시비의 이치를 누가 잘 확정할 수 있겠는가? 서로가 어질고 어리석은 것은 고리에 손잡이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저가 화낸다 해도 내가 잘못될 것을 두려워하라. 나 홀로 옳다 해도 다중에 따라 함께 행동하라.

쇼오토쿠 태자의 인간관은 극히 회의주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인간상에 절망했는지도 모른다. 이 조항은 불교의 세계관, 특히 나가르쥬나(龍樹, 150-250년경)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인간들의 부질없는 다툼으로 인해 인간을 경멸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인간들의 약점을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관조하고 있다. 결론은 우리가 모두 범부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우리가 옳다는 가능성이 있을 때조차도 우리의 견해를 포기하는 것이 훌륭하다고 본다. 때문에 쇼오토쿠의 ‘和’는 복종에 대한 단순한 요청이라기보다 관조의 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和’는 정치적 관용(political tolerance)의 훌륭한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에서의 ‘和’는 구체적으로 협의에 의해 정치를 운영하는 것이다. 마지막 17조는 이렇다.

대저 일은 독단함이 불가하다. 반드시 여러 사람을 모아 논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작은 일은 가벼우니 반드시 여러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대사를 논할 때는 잘못된 바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므로 서로 논변하면, 마땅한 이치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유교, 특히 주자학의 가르침과 뉘앙스가 약간 다르다. 17세기말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가 지적하고 있듯이, 주자학은 시비분별을 엄하게 하여 조금의 가차도 없다. 公論을 강조했던 조선정치는 동시에 ‘是非’의 정치이기도 했다. 군자와 소인을 준별했던 조선정치의 입장에서 보면, 쇼오토쿠의 제 10조는 원칙의 포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즉 ‘和’보다 ‘同’의 원리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쇼오토쿠는 유학적 사유에 결여된 정치적 관용의 근거를 비정치적인 불교의 세계관으로부터 훌륭하게 발견해 냈다.
둘째는 복종의 방법이다. 그런데 和의 원리는 에도의 이에(家) 관념이나 武家의 ?켕카료세이하이?(喧??成敗)로 성립되기 전에는 조직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헌법17조?에는 이런 ‘화’와는 이질적인 사유도 존재한다. 제 3조는 이렇다.

천황의 명령(詔)을 받들면 삼가라(謹). 君은 하늘이고 臣은 땅이다. 하늘은 덮고 땅은 싣는다. 四時가 순행하여 萬氣가 통한다. 땅이 하늘을 덮으려고 하면 반드시 무너진다. 따라서 군이 말하면 신은 받들어야 한다. 위가 행하고 아래는 따른다. 詔를 받들 때는 반드시 삼가야 한다. 삼가지 않으면 반드시 敗한다.

이것은 유교적 사유의 카피이다. 협의에 의한 ‘和’ 이면에 천황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자연적 질서로 정당화하려는 노력도 존재했다. 이것은 천황제가 구상하는 질서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律令은 그 정치적 표현이다. 18세기의 고쿠가쿠(國學)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천황에 대한 순진한 복종을 일본심의 진수로 이해했다. 그는 󰡔�古事記?와 󰡔�日本書紀󰡕�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것이 幕末 尊皇攘夷論의 정신적 토양이 되고, 메이지 유신에서 천황절대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세 번째의 방법론은 ‘禮’이다. 예는 ‘和’와 ‘謹’의 중간물이다. ‘화’처럼 협의적이지는 않지만, ‘근’처럼 일방적이지도 않다. 예는 상하질서(位次)를 전제로 하지만, 상하 쌍방에게 요구된다. 제 4조는 다음과 같다.

群卿百僚는 禮로써 본을 삼는다. 치민의 본은 요컨대 예에 있다. 위에 예가 없으면 아래가 가지런하지 않다. 아래가 예가 없으면 반드시 죄를 받는다. 따라서 군신이 예가 있으면 位次가 어지럽지 않는다. 백성에게 예가 있으면 국가는 저절로 다스려진다.

이것은 공자 이래 중국 유학이 발견한 최고의 문명적 정치질서였다. 그 요체는 힘이 아닌 인간의 자각과 자발적 행위로부터 발생하는 질서이다. 그것은 위계적이지만, 동시에 상호존중(friendship)을 전제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르쳐야 할 자(君子)과 배워야 할 자(小人)가 존재하므로, 우리 모두가 평범하다는 ‘和’의 급진성은 없다.
이 세 가지 방법은 일본 정치사의 각 국면과 집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和’의 질서는 중세말기와 戰國 시대의 농민 봉기(一揆, 잇키)에서 중시되었다. 복종의 질서는 막부제의 무가국가와 메이지 천황제에서 전형적으로 요구되었다. 예의 질서는 에도 주자학에서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복종이 ‘和’의 이념으로부터 정당화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이해는 쇼오토쿠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헌법17조?는 외래 문명이 토착의 전통과 어떻게 종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첫 번째 사례였다. 특히 일본 불교가 인생관으로서 확립되기 훨씬 앞서서 그는 심오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일반 승려들처럼 불교를 사후의 문제라든가 관념적인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도덕’으로서 일본인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고지키󰡕� 같은 당대의 일본적 사유를 넘어서 있었다. 그는 불교와 유교의 원리를 일본 현실에 비추어 재해석하긴 했지만, 神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일본인의 새로운 ‘생사관’을, 그리고 자신에게 있어 유일하게 진실된 생사관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정치사상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정치로까지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정치적인 불교사상사에서도 확실히 희귀한 것이다. 그의 방식은 일본에 있어 문명융합의 원형이 되었다. 쇼오토쿠는 그러므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치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난 센스에도 불구하고, 안이함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세 가지 질서 사이에 어떤 긴장도 느끼지 못한 것은 그 증좌이다. 쇼오토쿠는 그런 점에서, 원리보다는 좋은 점을 취한다(良いとこ取り, 이이토코 토리)는 일본적 절충주의 혹은 실용주의의 시조이기도 했다.

3) 천황제와 律令制의 정치사상

쇼오토쿠 태자의 고대 정치사상은 646년 다이카(大化 2) 改新에 의해 현실적으로 확립되었다. 이것은 천황가의 인물들이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가(蘇我)씨를 몰아낸 쿠데타 이후에 이루어졌다. 개혁의 핵심은 분권적 정치세력을 중앙집권적인 일원적 정치질서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그 대안이 천황제 국가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토지에 질서를 부여해야 하며, 그 핵심 수단이 신분제와 관료제, 公民制, 公田制였다. 이를 통해 지방의 호족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인민과 토지를 통일적인 권력하에 재편시켰다. 그 규칙이 ?律令?이다. 다이카 5년간에 발표된 각종 법령과 689년 지토오(持統) 천황하의 아스카키요미하라령(飛鳥淨御原令), 700년 몬무(文武) 천황대의 타이호오령(大?令)은 고대국가의 정점에 선 율령으로,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율령은 단순한 법률이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근대국가가 도래되기 까지 이후 1200여년에 걸쳐 정당한 정치적 질서의 전범으로써 인식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핵심적 정치적 상상력중 하나도 이것에 의존하고 있었다.
다이카 개신의 이념적 정당화는 󰡔�고지키󰡕�(古事記, 712)와 󰡔�니혼쇼키󰡕�(日本書紀, 720)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이카 개신에 의한 현실적인 개혁은 당의 제도를 수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호족들이 분권적 지배권을 행사하기 이전의 상태, 즉 고대천황들의 이상적 지배 시대로 복귀하기 운동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고대 천황들의 정치를 역사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고지키󰡕�와 󰡔�니혼쇼키󰡕�는 그러한 정치적 의도에서 탄생된 것이다. 두 책은 고대 일본인의 다양한 사상과 감성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서 일본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일본사상사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천황’인데, 이 천황의 근본적 의의를 결정한 것이 바로 이 두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인들은 다양한 자연신으로 숭배했으며, 또한 무수한 인격신을 숭배했다. 그 숫자는 무수하여 통상 ‘팔백만 신’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고지키󰡕�는 이 신들에 관해 대담한 해석을 가하고 있다. 즉 천황가의 조상은 다카마가하라(高天原)의 통치자인 아마테라스오오가미(天照大神)이며, 모든 신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계통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여러 일본 씨족의 조상신들이 이 계통에 편입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인들은 모두 천황가의 계보에 속하게 되었다.
두 책의 내용은 대략 유사하나, 󰡔�고지키󰡕�는 보다 신화적이며, 󰡔�니혼쇼키󰡕�는 역사서술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초대 진무(神武) 천황 이하 8대 천황까지는 순전히 가공의 천황이다. 대략 10대 스진(崇神) 천황부터 역사적 인물일 것이라는 설이 있기는 하나 그것조차도 확증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이 책들에 기술되어 있는 모든 내용이 다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두 책은 모두 내적으로는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공동의 의식에 기초한 정치체의 완성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이 새로운 의식이 신화와 역사의 갈림길에서 혼재되어 탄생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인들에게 다른 정치체와 구별되는 독자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했다. 즉 천황제 국가의 성립과 대외적 자의식의 발생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율령 반포를 전후한 7세기 후반에 최고의 정치적 수장은 오키미(大王)로부터 덴노(天皇)로 개칭되었고, ?日本?이라는 국호가 성립되었다. 새롭게 형성된 의식은 또한 자신의 신체인 국토를 발견하게 되었다. 713년 찬진된 地誌로서, 일본 각 지역의 명칭 유래, 지형, 산물, 전설 등을 기록한 󰡔�후도키󰡕�(風土記)가 그것이다. 759년 성립된 󰡔�만요슈󰡕�(萬葉集)는 그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일본인들의 정서를 유감없이 발로하고 있다. 약 4500수의 와카(和歌)가 수록된 이 책에는 민중들의 노래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표기방식이 한자의 음과 훈을 조합하여 일본어를 기록하는 ?만요가나?(万葉?名)였다는 점이다. 요컨대 8세기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화와 역사, 국토와 정서를 발견한 시대이며, 그들의 정신이 살아갈 집으로서 그들의 언어를 획득했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와 중국의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함으로써 획득했던 문화 융합과 창조의 전형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일본문화가 지닌 독특한 창조의 방식이자 힘으로써, 일본 문명이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사람들의 정신적 자원이 순수하게 국풍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인들의 정신적 풍요는 활발한 국제적인 교류에 의존했다. 쇼오토쿠 태자는 600-614년 사이에 遣隋使를 5차를 파견했고, 당이 건국되자 견당사를 파견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초의 하쿠호오(白鳳) 문화, 710-94에 걸친 나라 시대의 덴뾰오(天平) 문화의 귀족적 세련성은 근본적으로 중국문화의 직접적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인의 정신을 가장 깊이 사로잡았던 것은 불교였다. 그러나 불교는 우선 鎭護불교였다. 국가는 사찰을 건립하고 법회를 열어 호국경전을 강설케 함으로서 국가의 안전과 왕실의 복을 기원했다. 요컨대 이 시대의 불교는 국가권력의 아우라였을 뿐 정신적 각성을 동반한 것이 아니었다. 부처는 신토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혜택이나 재앙을 초래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더욱이 민중들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신도와 불교의 습합(神佛習合)은 흥미롭다. 일본인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때 결코 이전의 사상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 방면에서 불교와 신도의 공존을 모색한 것은 일본인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습합방식은 두 가지이다. 신토의 신이 불교에 귀의하는 형(本地垂迹說), 신토의 신이 불교 사원을 수호하는 형(反本地垂迹說)이 있다. 垂迹이란 임시적 모습이다. 본지수적설은 부처가 일본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신토의 신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이 나라에 나타났다는 설이다.(山王一實神道, 眞言宗의 兩部神道) 이는 실로 편리한 발상이며, 지극히 일본적인 사상이다. 이러한 사고는 헤이안 시대 말엽에 널리 보급되었다. 반본지수적설은 본지수적설의 반대이다. 일본의 신이야말로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존재이며, 불교는 일본의 신이 외국에 나타난 임시적 모습이었다는 것이다.(伊勢神道) 무로마치(室町) 시대에는, “유교는 가지와 잎이고, 불교는 꽃과 열매이며, 이 모든 것을 밑받침하는 뿌리가 바로 신도”라는 생각도 등장했다.


(3) 중세 정치사상(1192-1603)

1) 무사와 幕府의 정치사상

일본의 중세는 무사들의 시대로 가마쿠라 막부(1192-1333), 난보쿠쵸(南北朝1336-1392), 무로마치(室町) 막부1338-1573), 센고쿠(戰國, 1467-1568) 시대로 나뉘며, 1603년 에도(江戶) 막부에 의해 근세가 시작되었다.
고대 율령국가는 토바(鳥羽) 상황의 사망후, 왕위계승를 둘러싸고 무사들이 일으킨 1156년 호오겐(保元)의 난, 1159년 헤이지(平治)의 난을 계기로 붕괴되기 시작하여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朝)에 의해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성립됨으로써 중세로 들어섰다. 율령국가의 붕괴는 크게 두 가지 문제, 즉 첫째, 천황 권력의 약화와 분산, 둘째, 토지 사유화에 의한 장원제의 발달과 공전제의 쇠퇴에 기인했다. 첫째, 천황의 권력은 셋쇼(攝政)과 칸파쿠(關白), 죠코(上皇. 퇴위한 천황)에 의해 대체되어 정치적 권위가 붕괴되었다. 셋쇼는 원래 황족이 담당했으나,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황족외에 처음으로 셋쇼가 된 이후, 외척을 독점한 후지와라가가 대대로 이 직위에 취임하여 권력을 행사했다. 1068년 고산죠오(後三?) 천황이 즉위함으로써 후지와라씨는 외척의 지위를 상실하고 천황의 친정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시라카와(白河) 천황은 즉위 14년후 아들 오리카와(堀河) 천황에게 양위한 후, 상황으로서 정치를 좌우함으로써 인세이(院政)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시작했다.
둘째, 후지와라가는 권력을 이용하여 지방에 방대한 사유지를 점유하고 장원화하였다. 시라카와 천황은 귀족의 장원을 억제하면서도 자신 역시 율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측근을 지방장관(고쿠시 國司)에 임명하여 개인 재정을 확보하고자 했다. 1129년 토바 천황 이후 공전의 사유화는 일반화되었다. 12세기 전반 장원은 전체 경작지의 60%에 달했다. 도다이지(東大寺), 엔랴쿠지(延?寺), 고오후쿠지(興福寺) 등의 大寺社도 황족과 귀족들의 기진에 의해 대규모 토지를 집적한 지주로 변신했다. 또한 11세기 중엽부터 대개간의 시대를 맞이하여 각지에서 개발 영주들이 등장했다. 이들 지방영주들은 私領을 지키기 위해 율령에 의해 파견된 지방장관 고쿠시(國司)의 제재를 벗어나고자 했다. 사원들은 강력한 승병을 조직했으며, 호족들 역시 무력을 양성했다. 이들은 율령제가 아닌 새로운 권력체제를 원했던 것이며, 토지와 군대의 사유화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천황 권력과 공전제의 쇠퇴는 모두 율령국가의 핵심적 근간이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여 성립된 정치체제가 무사들의 막부체제였다.
무사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기 위한 지방 호족 또는 지주들의 투쟁과정에서 성장했다. 사무라이란 본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궁성을 떠난 하급 귀족이자 전투 전문가였다. 이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일정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여 사유 전답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간지주, 혹은 영주이자 토지 소유자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일본 사무라이의 특징은 그들이 스스로 토지를 경작하고 농민과 함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다. 성곽 축성시에는 영주(大名)도 직접 현장에서 일하고, 영주 부인 역시 취사 담당하였다.
이들의 힘이 성장하자 중앙정부의 천황과 귀족들은 권력 투쟁에서 이들의 무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 반면 지방호족들은 지방장관의 제재를 벗어나기 위해 중앙권력과 결탁하여 토지를 공인받고자 했다. 白河 천황대로부터 대사원 역시 종교적 위세와 승병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수도 교토에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院政을 처음 시작했던 白河천황이 1081년 신변 보호를 위해 처음으로 무사들을 동원한 뒤, 무사들은 급속히 중앙의 권력에 접근했다. 가장 강력한 무사집단은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 가문이었다. 1180년 안토쿠(安?) 천황의 즉위를 둘러싸고 두 가문이 격돌하여 전후 5년의 전쟁끝에 겐지가 승리했다. 이 전쟁은 전국적이고 장기간의 군사행동이 일반적인 사회구조로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며, 일본 역사에서 이후 700년 동안 계속된 무사 시대의 개막을 여는 서장이 되었다.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朝)는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軍)에 임명되어,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정식으로 등장했다. 그는 수도 교토가 아닌 가마쿠라에 막부를 열고, 각 지역의 무사단을 조직했다. 고케닌(御家人)으로 불리는 이 무사단은 쇼군의 恩賜와 쇼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인격적 주종관계로 맺어졌다. 그 정치적 의미는, 재지 영주층을 막부의 가신단으로 흡수, 이들의 불안한 소유권을 안정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었다. 朝廷으로 불리는 천황과 公家(쿠게=귀족층)의 권력을 대체했던 것이다. 막부는 이와 함께 각지에 슈고(守護)와 지토오(地頭)를 파견하여 지방 군사력을 장악하고, 교토의 조정을 막부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로써 <천황-막부>의 이중 권력과 막부에 의한 실질적 통치라는 중세 및 근세의 전형적인 정치질서가 성립되었다. 이 체제의 독특성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새로운 천황으로 등극하지 않고, 천황가와 공가를 보존시켰다는 점이다. 즉 상징적 정통성과 현실적 정통성을 공존시켰다.(公武二元性) 두 개의 정치적 정통성이 경쟁하여 일방을 흡수 소멸시키려는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존의 논리와 정서를 창조해내는 것은 때때로 위기에 직면했지만, 이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막부체제는 각 막부에 따라 각기 독특한 자기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근간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즉 상징적 정통성과 현실적 정통성의 이원적 공존, 중앙권력(막부)과 지방권력(재지 영주)의 분권에 의존했다. 요컨대 가마쿠라 이후의 일본정치체제가 지닌 특징은 정치권력의 다원성과 분권성에 있다. 천황의 일원적 지배가 현실에서 종식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복원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의해서였다.
분권의 원리는 각 영역을 지배하는 법률의 다양성으로 표현되었다. 1232년 쇼군을 대신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싯켄(執權) 호요죠오 야스토키(北?泰時)는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를 제정했다. 이는 쇼군하의 무사집단 고케닌(御家人)을 규율하는 최초의 武家法이었다. 천황조정의 귀족들을 지배하는 법은 公家法이었으며, 재지 영주의 영지를 지배하는 것은 영주가 정한 本所法이었다. 寺社도 독립적이었다. 무가법은 공가법과 본소법의 적용 범위를 침범하지는 않았지만, 공가법과 본소법은 막부의 무가법을 넘어설 수 없었다. 즉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무가법이었다. 그러나 무가법은 공가법과 본소법을 충분히 존중했다. 즉 지배와 복종, 분권과 독립성이 조화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천황지배를 표현했던 율령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하나의 이상으로서, 즉 천황의 상징적 정통성에 상응하는 상징적인 규범으로써 현실의 배후에 드리워져 있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것은 근대국민국가를 지향했던 메이지 유신에 의해 부활되었다.
가마쿠라 막부기에 무사들은 禪宗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사무라이 사상은 본래 불교나 신도 같은 종교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원래 전투 전문가라는 비정한 살육자 집단이며, 타인을 죽이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애라든가 종교적 죄의식을 품지 않았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朝) 군대의 사고방식은 이러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부모도 자식도 내리쳐라. 가족이 죽는 것도 당연하다. 죽으면 그 송장을 밝고 넘어 싸움을 계속할 뿐이다. 그러나 헤이케(平家) 군대의 사무라이들은 부모가 전사하면 공양을 올리고 자식이 전사하면 탄식하며 슬퍼한다. 우리들 미나모토의 사무라이는 그런 나약한 짓을 하지 않는다.(󰡔�平家物語󰡕�)

사무라이의 선종은 귀족들의 밀교, 민중의 정토 불교와 대비된다. 간명하고 직선적인 불교인 선을 통해 무사들은 교토의 공가에 비견할 정신적 근거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것은 󰡔�式目󰡕�이 율령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한편 아미타불이 무사의 수호신인 하찌만(八幡)의 本地佛이라는 의식이 발생했다. 부처가 일본에 모습을 바꾸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와 무사들의 전통적인 정신적 근거를 일원화시키려는 노력이자, 그것을 손쉽게 만드는 편리한 사유방식이었다. 또한 아미타불은 관음보살과 함께 민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부처였으므로, 무사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대시키는 것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중심에 섰던 무사들이 정신세계가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권력의 중심에 들어간 무사들은 오히려 무상함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는 이러한 무사들의 세계를 반영한 군끼모노(軍記物)가 많이 나타났다. 헤이케이(平家)의 흥망을 그린 󰡔�헤이케이 모노가타리(平家物語)󰡕�는 전란의 와중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흥망성쇠와 생노병사를 불교적 무상관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2) 민중불교의 시대

11세기는 율령체제가 붕괴되는 전조를 이루었던 시대였다. 院政이 시작되어 천황권력은 형해화되었고, 사원세력이 강대해졌으며, 무사세력이 대두되기 시작되었다. 전통이 붕괴되고 새로운 규범이 등장하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부처가 입적한 후 正法, 像法의 시대를 지나 말법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생각했다. 귀족들 사이에는 정토 사상과 쿠마노(熊野) 사상이 유행했다. 이것은 모두 현세 밖의 어딘가에,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정토나 쿠마노의 바다 저편에 관음보살이 다스리는 補陀落 정토가 있다는 믿음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096년 교토에서는 뎅가쿠(田樂)이 유행하여 사람들은 민중과 귀족 모두 미친 듯이 춤을 추어,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미친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1117년 료오닌(良忍)은 융통염불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한 사람의 공덕이 모든 사람에게 통하며 모든 사람의 공덕은 한 사람에게 통한다는 他力往生 신앙이었다. 염불에 의한 구원의 제시는 불교를 서민들에게 가져왔다. 고통스런 시대를 살기 위해서는 서민들에게 간단하고 손쉽게 이를 수 있는 정신적 안식처가 필요했다.
가마쿠라 시대는 찬란한 불교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불교는 막부의 정치적 요구에만 부응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불교는 민중의 세계로 내려왔다. 헤이안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문을 중시한 것과 달리, 이해하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가 등장했다. 이에 의해 민중들은 비로소 외래적 사유의 세례를 받았다.
죠도슈(?土宗)를 개창한 호넨(法然, 1133-1212)은 24세때 석가상에 매달려 기도하는 대중들의 모습을 보고는,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불교 본연의 길임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43세에 염불에 의한 구원(專修念佛)을 자각했다. 그에 따르면,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구제하고자 했다. 그런 구제를 받기 위해서 단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소리 내어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아미타불이 그 소리를 듣고 구제해 줄 것이다.

만일 불당과 불탑을 건립하고 불상을 만들지 않아서 왕생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일부의 부자들만이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만일 불교를 깊이 공부하고 지혜를 연마한 자들만이 왕생하는 것이라면 역시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왕생의 자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시어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받는 일이 없도록 하셨다. 그저 염불을 외우는 稱名念佛만으로 왕생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選擇本願念佛集󰡕�)

염불만으로 충분하다고 잘라 말한 것은 호넨이 처음이었다. 그의 제자 신란(親鸞, 1173-1262)은 방황끝에 29세때 호넨을 만났다. 그는 스승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1250년 淨土眞宗을 열어, 육식과 결혼을 인정하고, 악인이야말로 아미타불이 가장 먼저 구원할 자라는 ?惡人正氣說?을 주장했다. ‘나무아미타부츠’(南無阿彌陀佛?라는 간단한 염불에 의해 누구라도 부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특히 죄 많은 중생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더 크게 열려있다는 이 주장이 민중들에게 어떤 정신적 위안과 기쁨을 불러 일으켰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정치적으로 불온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 의미를 확장해 보면, 상층 계급의 정신적?도덕적 우월성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란의 가르침은 센고쿠 시대에 확산되기 시작하여, 농민들의 자치적 정치운동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法華宗의 니찌렌(日蓮, 1222-82)은 더욱 과격한 주장을 했다. 그는 신토는 물론이고 모든 불교종파의 가르침을 공격하고, 오직 󰡔�南無妙法蓮華?󰡕�에 대한 신앙만이 진리임을 주장했다.(󰡔�開目抄󰡕�, 󰡔�?心本尊抄󰡕�) 일본 曹洞宗의 개창자로서, 엄격한 선을 실천했던 도오켄(道元, 1200-53))은 산속에 들어가 권력과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전통적인 일본의 진호불교에는 낯선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불교는 정신적인 의미에서 처음으로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이후 일본 불교는 지배자, 민중, 그리고 진리를 찾는 자의 불교로 삼분되었다.

3) 센고쿠(戰國)의 정치사상: 무사국가와 농민자치 사상의 경쟁

1467년 오우닌의 난(?仁の?)으로부터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교토 입성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150년에 걸친 대전란의 시대를 살았다. 센고쿠 시대(1467-1568)이다. 이 시대를 전후한 시기는 실로 일본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가 센고쿠 다이묘오들이 화려한 전쟁의 시대였던 것만은 아니다. 이 시대에 이채로운 것은 오히려 사회 하층민들의 대규모 봉기였다. 막부 권력이 약화됨에 따라 모든 인간집단들은 ‘자립’을 위해 다채로운 정치적 활동을 보여주었다. 재지 영주와 농민, 寺社와 상인들은 자치조직을 결성하고, 武家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 싸움의 최종적인 승리자는 武家였으며, 그 최종적인 결과가 도쿠가와(德川) 막번체제였다.
막부의 힘에 의한 정치적 통합에 균열이 시작된 것은, 막부의 지방장관 슈고(守護)의 힘이 과도하게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唐의 節度使 제도와 같은 폐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로마치 막부는 율령제의 소산인 國司制를 폐지하고, 지방에 슈고를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막부의 사무라이도코로(侍所)에서 관장되고 있었다. 슈고에게는 가마쿠라 말기 본래의 직권인 大犯 3箇條외에 관할지역의 寺社와 宿驛의 관리, 산적과 해적 토벌 등의 권한이 추가되었다. 남북조기에 슈고의 권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여 쿠니카타(國方)로 불렸다. 이는 관할지의 전제권력자가 되었음을 뜻했다. 슈고직이 세습화되자, 이들의 독립성은 확고해졌다. 1342년 코오군(光嚴) 상황의 행차와 마주친 미노(美濃)의 슈고 토키 요리토오(土岐賴遠)는 말에서 내리라는 명령에, “뭐라고? 인(院)이라고 하였느냐, 이누(犬)라고 하였느냐. 이누라면 활로 쏘아서 떨어트려주마.”라고 말하고, 상황이 탄 수레에 활을 쏘았다. 그는 쇼군의 명으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 슈고의 무모함이라기보다, 낡은 권위를 부정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대두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센고쿠 시대의 주역인 센고쿠 다이묘오의 전신으로, 새로운 시대와 사상의 개막자들이었다.

농촌에서는 다양한 인간집단이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모색하여, 자신들만의 집단과 조직을 결성했다. 먼저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지자무라이(地侍)들은 장원과 公領의 토지 최소단위인 묘덴(名田) 관리자 묘슈(名主)로서, 원래 백성(地下, 지게)과 같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만으로 입신할 수 있었던 이 시대에 이들은 점차 농민과 다른 무사(지자무라이)로서 아이덴티파이하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 무력이 필요했던 다이묘오나 지방영주 고쿠진(國人)들은 이들을 가신으로 조직하여 독립적인 군단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독립된 광역적인 지역연합체(?鄕, 소고)를 조직하여, 지자무라이 집단(도오묘오츄우 同名衆)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막부의 지토(地頭), 고케닌(御家人) 계통에 속했던 집단은 지방영주로 정착하여 고쿠진으로 불렸다. 이들은 새로운 토지를 얻거나 수호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적 통로를 모색하여, 슈고의 개입을 받지 않는 막부 직할군(奉公衆, 호코슈)이 되거나, 혹은 슈고의 가신(被官, 히칸)이 되었다. 좀 더 급진적인 방법은 고쿠슈(?衆)를 형성하여, 그들 자신의 실력으로 권익을 지키는 것이었다.
지자무라이층이 大名이나 고쿠진의 가신으로 출세하기 위해 다투어 촌락을 떠나자, 촌민들은 생명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독립집단인 햐쿠쇼오츄우(百姓中)로서 아이덴티파이하고, 자치촌락인 소오손(?村)을 결성했다.
생산력과 교역의 발전에 따라 형성된 도시에서는 상인 집단인 쵸오슈우(町衆)를 기반으로 소오쵸오(?町) 공동체가 결성되었다. 오사카의 홍간지(本願寺) 주위에는 자치도시 지나이쵸오(寺?町)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각 계층이 독립적인 집단과 조직을 결성하게 된 근저에는 요리아이(寄合의 전통이 있었다. 요리아이는 원칙적으로 동일한 자격을 가진 자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모이는 것이다. 카마쿠라 막부 중기의 싯켄(執權) 토쿠소오(得宗) 사저의 요리아이는 대표적인 예이다. 지방에서도 일반 농민인 지게(地下)의 요리아이도 활발하게 열렸다. 그들은 유대를 위해 놀이와 식사를 함께 했으며, 함께 렝카(連歌)를 짓기도 하였다. 이것이 일상적인 정치적 합의형성의 장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자치조직은 불교로부터 탄생했다. 지자무라이나 농민, 상인들의 조직은 모두 그 생활영역, 즉 무라(村)나 도시(町), 쿠니(國)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이 결국 武家 권력에 정복당한 것은 조직의 이러한 협소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쿠니를 벗어난 보다 광역의 조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민중불교를 선언한 잇코슈(一向宗=淨土眞宗)와 호케슈(法華宗)이었다. 15세기 후반 혼간지(本願寺) 法主 렌뇨(蓮如)의 포교활동으로 호쿠리쿠(北陸)에 일향종(淨土眞宗)의 문도가 급증했다. 렌뇨의 포교 원칙은 농민층을 주체로 한 신자를 촌락 단위로 송두리째 획득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소오손의 중심이 되는 “스님(坊主)와 토시요리(年寄), 오토나(長), 이 세 사람만 각지에서 불법에 마음을 쏟으면, 나머지 일반인은 모두가 교의를 믿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불법이 번성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一向宗은 또한 승려만이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자립성을 존중해, 그들에 의한 포교를 인정했다. 그 결과 교세가 급격히 팽창했고, 신자들의 형제애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전국 시대의 불안한 환경을 그들은 신앙과 신앙공동체의 힘으로 이겨나가려고 하였다. 그 결과 一向宗은 전국시대에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까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다이묘오를 능가하는 새로운 정치적 힘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488년 카가국(加賀?) 잇코오 잇키(一向一揆)는 슈고 토가시 마사치카富?政近)를 멸망시켰는데, 그 기반이 된 것은 ?鄕에 해당하는 쿠미(組)였다. 5-6개의 쿠미는 다시 郡으로 구성되었고, 4개 군이 ?國을 조직되어, 카가를 지배했다. “토민이 사무라이분을 모두 쿠니에서 쫓아”내어, 카가는 농민이 가진 쿠니가 되었다. 이는 엣츄우(越中), 에치젠(越前), 깅키(近畿), 토오카이(東海)로 확산되었으며, 전체는 홍간지의 법주 아래 조직되어 홍간지 佛敎王國의 양상을 나타냈다. 이러한 광역적인 힘의 조직력에 의해 불교조직은 武家 권력의 최대의 경쟁자로 등장했다. 15세기 중반 오다 노부나가가 이들과 대결하여 철저히 파괴했던 이유는 이로 인한 것이었다. 즉, 강고한 신앙, 그리고 렌뇨라는 희대의 조직가가 제시한 쿠니와 군을 초월한 광역적 조직력이야말로 잇코슈우가 가진 최대의 정치적 힘이었다.
이러한 자치조직의 발달로 권리 수호를 위한 사회 하층민과 중간층의 봉기(잇키 一揆)가 일상화되어, 15-16세기에 걸쳐 50차례나 발생했다. 1428년 야마시로(山城)와 야마토(大和)에서 ?일본 개벽 이래(日本開闢以來)?라는 토쿠세이잇키(?政一揆: 채무탕감의 요구)가 봉기했다. 야마토에서는 운송업자(馬差 바샤쿠) 등과 합류하여 봉기가 성공했다. 코오후쿠지(興福寺)에서는 도쿠세이령을 공포했다. 야규우(柳生)의 마애불에 “캄베(神?) 4개 鄕에는 쇼오쵸오(正長) 원년 이전의 부채가 없는 것으로 한다“는 글귀가 새겨졌다.
1441년 오오미(近江)에서 바샤쿠의 잇키 발생하여, 엔랴쿠지(延?寺)는 寺領 각지에 도쿠세이령 발포했다. 그러나 잇키는 더욱 확대되어 교토의 유명한 寺社를 점거하였으며, 참가 인원 3만여에 달했다. 이에 막부는 도쿠세이령을 발포하여, 寺社를 제외한 민간 금융업자인 고리대업자, 양조업자 등의 채권을 무효화시켰다.
1485년 야마시로노쿠니잇키(山城?一揆)에서는 남부의 고쿠진이 집회를 열고, 그곳에서 교전중이던 다이묘오들의 군대에게 철수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이들은 다음 해 독자적인 법률(國中?法)을 정하였다. 이것은 종래의 장원제 틀을 바꾸는 것은 아니나, 쿠니(國의) 주권자가 잇키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고쿠진 집회에는 “위로는 60세, 아래로는 15세”의 土民이 집결하였고, 일반 농민인 지게(地下)도 참가하였다. 잇키의 지도부는 36인중(三十六人衆)으로 소코쿠(?國)라는 집행기관 구성하여, 매월 3인이 책임자가 되어, 일년 일순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권력 구성원간의 평등 원리로서, 공화제적 정체를 의미한다. 이 원리와 조직이 이후 1세기 동안 각지의 잇키와 도시에 채택되었다. 지자무라이층의 소고 연합은 고쿠진 영주의 고쿠진 잇키와 농민의 소오손 결합 등 양쪽과 관련을 가지고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참여자들의 이해는 상당정도 달랐다. 그러나 농민의 참여로 고쿠진 영주의 이해에 좌우되지 않고 항존적인 자치조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었다.
1532년 무렵에는 권력 공백상태의 교토에서 쵸우슈우(町衆) 주체가 되어 법화잇키(法華一揆)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잇코슈인 홍간지를 방화하여 종교전쟁의 양상을 띠기도 하였다. 나라에서는 호상을 중심으로 교토와 반대로 잇코오잇키가 발생하여, 興福寺의 승려들을 시외로 추방하였다.
향촌 자치조직의 발달과 잇키는 이들에게 다이묘오나 막부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스루가(駿河), 토오토오미(遠江), 미카와(三河) 3개 쿠니의 센고쿠 다이묘오(戰國大名)였다. 그가 1553년 제정한 分國法인 󰡔�카나모쿠로쿠츠이카󰡕�(?名目?追加)에는 분국내 개별 영주의 슈고 사절 불입(守護使不入) 특권에 대해, “<그것은 쇼군이 전국의 쇼군직을 임명할 때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자신의 역량으로 쿠니의 법도를 정하여 질서(靜謐)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슈고의 사절이 들어 갈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3개 쿠니로 구성되는 분국의 권력이 쿄토의 막부로부터 자립해 있다는 사실과, 분국내 개별영주가 슈고, 즉 국주(國主)인 다이묘로부터 자립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립성이 통일적이고 전제적인 권력을 구축하려는 센고쿠 다이묘오의 이해와 충돌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1494년 지자무라이와 토호층으로 구성된 코야마토잇키슈우(小倭一揆衆) 46명과 햐쿠쇼오슈(百姓衆) 360명은 계층별로 각기 연서한 키쇼오몽(起請文)의 오키테(?)를 신세이 쇼오닌(眞盛上人)에게 제출했다. 이 오키테에서 사무라이들은 종자(被官)에 대한 재판권을 상호 제한할 것, 백성들은 경작권과 농작업을 상호보증하고 간선도로(大道)의 흙은 경지의 매립토로 사용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이는 전체 이익을 위해 잇키 집단 개개인의 영주적 요구를 억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집행기관으로 로분슈(老分衆)을 설발, 그 안에 도쿠세이슈우(德政衆)을 설치하여, 도쿠세이소송(德政相論)을 처리했다. 이 작은 규모의 자치권력은 소코쿠잇키의 축소판이었다. 이것이 군 규모로 발전한 것이 오오미국 코가(甲賀)군의 코가군츄소오(甲賀郡中?), 쿠니 규모는 이가소오코쿠(伊賀?國)이며, 쿠니를 초월한 최대 규모가 잇코오잇키(一向一揆)였다.
잇키적 원리가 코쿠진 영주층으로 구성되는 다이묘오 권력 중추부로 미치고 있던 사례도 적지 않다. 히고(肥後)의 전국 다이묘 사가라(相良)씨의 권력은 영역 내 3군 단위로 결성된 고쿠진 층의 군츄우소오(郡中?)의 소중담합(所中談合) 公界論定에 의해 강하게 제약되었다. 즉 다이묘오의 公(公儀, 코우기)과 군츄소오에서 보이는 公界(쿠가이. 世間 公衆을 의미하는 중세어)의 公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다이묘오들이 경쟁적으로 분국을 형성하려고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는 16세기 전반에 들어 본격화되었으며, 1550년경 전환기를 맞아 국경 재편을 둘러싼 총력전 단계에 돌입했다. 이들에게는 위계적으로 잘 조직된 군사체제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들의 필요는 향촌 자치의 요구와 양립할 수 없었다. 고쿠진과 지자무라이들의 독립 영지(本領)는 給地로, 농민들의 토지는 토지조사(檢地)를 통해 세금을 징수해야 했다. 그것은 이들과의 전쟁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잇키 권력과 코우기(公儀) 권력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요컨대 이 시대의 센고쿠 다이묘오들은 안과 밖의 전쟁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4) 근세 정치사상(1603-1868)

15세기말과 16세기초는 동아시아에 심대한 변화가 발생했던 시대였다. 여진족이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중화세계의 정신적 질서를 붕괴시켰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파멸적인 타격을 받고, 주자학에 의문을 품은 실학과 북학 같은 새로운 사상이 탄생했다. 다른 한편 중화세계의 붕괴를 슬퍼했던 일부 조선인들은 스스로 소중화가 되고자 하여, 중화는 東國化되었다. (정치적 사대와 정신적 사대의 분리)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에도 시대를 열었다. 일본 근세의 시작이다.
1543년 포루투칼인이 조총을 가지고 일본에 왔다. 신대륙을 향한 유럽의 동진은 그 끝에 달하여, 동서양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조총은 전국시대의 전쟁 양상을 일변시켰다. 무사의 명예심과 武勇에 의존했던 돌격전은 조총에 의한 조직적인 대량살륙전으로 바뀌었다. 조총의 군사적 의미를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에 의해 그는 최초로 덴카비토(天下人)가 되었으며, 전국 통일의 단서를 열었다.

1) 센고쿠(戰國) 통일과 에도(江戶) 막부의 정치사상: 武家國家의 길

노부나가는 군사전략의 천재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일본의 모든 권력을 武家에 수렴시켜, 단일한 무가국가를 수립하려는 그의 명료한 목표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일체의 전통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특별한 이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기면 官軍, 지면 叛軍”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이 시대는 자신의 손에 쥔 칼만이 정의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아니 ‘정의’가 아니라 ‘생존’만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용납되었다. 하극상은 상례였다.
1568년 교토에 입성(죠라쿠 上洛)한 노부나가는 73년 마침내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의 교토 입성은 쇼군과 천황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형식을 빌렸다. 또한 천황조차 없앴던 것은 아니었다. 인습에 구애되지 않았던 그도 천황제의 인습적 정통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직면한 진정한 어려움은 전통보다도 15세기를 통해 성장한 자립적 집단들이었다. 잇키 권력이 그것이다. 특히 잇코슈의 정치적 잠재력은 무가 국가의 건설을 위해 말살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위험성은 강대한 조직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구상으로 발전되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1494년 코야마토잇키슈우(小倭一揆衆)는 신세이 쇼오닌(眞盛上人)을 자치권력이 지닌 정치적 정통성의 상징으로 삼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 대안이 모호했던 잇키 권력에게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부처가 다스리는 나라 佛法領이 그것이다. 정토종의 가르침이 특별히 이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정치적 상징화를 통해 ?자치?와 정치권력을 조화시키는 방식이었다. 농민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또한 잇키 과정에서 창안된 공화제적 통치기구가 정치조직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一向宗 본래의 정치사상은 ?王法爲本?이었다. 즉 “통치자에 복종하여 정치질서를 돕는 것이 불법의 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잇코슈의 신도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무가의 무단지배를 피하고 싶었다. 이 때문에 지도부와 상당한 긴장이 조성되었다. 각지에서 일어났던 잇코잇키는 무가의 지배에 반대하여 명백히 자치 권력을 지향했다. 1488년 카가국(加賀?)의 잇끼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노부나가가 교토를 제압하자, 잇코슈의 11대 法主 겐뇨(?如, 1543-92)는 그를 방문하였으며, 5천관의 자금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잇코슈를 제압하기 위해 점차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그는 신자의 움직임을 보고할 것, 혼간지가 지령을 내릴 때는 노부나가에게 허가를 받을 것, 마음대로 다른 다이묘오들과 교섭하지 말 것, 혼간지의 중요 거점 이시야마혼간지죠(石山本願寺城)를 양도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혼간지의 독립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에 겐뇨는 1570년 노부나가를 토벌하라는 격문을 전국의 문도들에게 발하였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먼저 교토 근교의 불교총본산중 하나인 엔랴쿠지(延?寺)를 침입하여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승려 3천인을 살해했다. 다음으로 나가시마에서 봉기한 잇코잇키 세력을 공격하여,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신도 2만명을 모두 학살했다. 에치젠(越前)에서는 포로가 된 7만명을 살해했다. 전후 10년에 걸친 이 전쟁은 결국 잇코슈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이 무자비한 학살극에 의해 자유와 신앙을 희구했던 중세 농민들의 자치는 종말을 맞이했다.

1582년 노부나가는 오오미국(近江?)에 아즈치성(安土城)을 완성하고, 7중의 天主閣을 세웠다. 그곳의 天人影向圖에는 三皇五帝와 석가, 공자의 10대 제자 등이 그려졌다. 그것은 노부나가가 위대한 神儒佛을 초월한 존재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었으며, 다가올 막부 권력의 특징을 예시하고 있었다. 막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부나가가 취한 가장 인상적인 정책중 하나는 무사와 토지의 분리였다. 일본 사무라이의 기원은 토지로서, 그들의 삶의 의의는 자신의 토지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 분리정책은 상비군의 필요성 때문에 취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정치적 효과는 이를 통해 무사들의 자립성이 상실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주군이 거주하는 성 아래(죠카마치 城下町)에 집결하여, 확고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로써 농촌 반란의 싹을 제거했던 것이다.
노부나가의 무가국가 건설은 그의 후계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계승되었다. 오와리의 백성의 아들로 태어나 마침내 텐카비토(天下人)의 지위에게까지 오른 그는 바로 센고쿠의 시대상이 낳은 아들이었다. 농민에게 주어진 하나의 길이 자치였다면, 또 하나의 길은 바로 히데요시의 길이었다. 그의 눈부신 立身揚名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모든 자치권력을 부정하는 전제국가의 수립을 의미했다. 그는 다이묘오들에게 소부지레이(?無事令=私戰 금지령)을 내려 歸服을 요구했으며,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오죠오(北?)씨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천하통일을 달성했다. 
통합의 첫 번째 편성원리는 兵農분리 정책이었다. 그는 전국적인 토지조사(檢知)를 단행하여, 貢租를 납입하는 농민과 그것을 수취하는 무사의 신분을 분리했다. 이어 刀劍沒收令(刀狩令, 카타나카리레이)을 내려 농민의 무장을 해제하고, 帶刀를 무사만의 특권으로 정했다. 한편 무사들은 죠카마치에 집결시켜, 무사의 촌락 지배가 배제되었다. 이로써 무사와 백성의 잇키 구조가 해체되었다. 이것은 자치권력을 부정하고 통일적 권력을 세우려는 센고쿠 다이묘오들의 오랜 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전국의 다이묘오들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 과제를 달성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였다. 히데요시의 사후 1600년 세키가하라(?が原)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가신 연합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실질적인 천하통일을 달성했다. 1603년 이에야스는 쇼군(征夷大將軍)의 지위에 올라, 에도 막부를 열었다. 이로써 150여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는 막을 내렸다.

토요토미씨를 멸망시켜 통일의 대업을 완전히 종료시킨 1615년, 이에야스는 이후 300여년간 지속될 법령을 발포했다. 그것은 무로마치 막부의 켄무시키모쿠(建武拭目)와 히데요시의 오키테(?)을 집대성해 발전시킨 것이었다. 첫째, 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는 무사들의 법률 준수 의무와 모반?도당의 결성 금지, 자의적인 성곽 보수와 혼인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무사들로부터 자립성을 박탈하여,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킨츄우나라비니쿠게쇼핫토(禁中竝公家諸法度)는 천황과 귀족들에 관한 법률이었다. 이는 노부나가 이래의 공가 통제책을 총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전의 규정이 공가에 한정된 것이었던 반면, 여기에는 천황(禁中) 역시 대상이었다. 그 제 1조에는 “천자는 諸藝能의 일, 첫째는 학문이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또한 武家의 관위를 공가의 관위와 구별시킨 것은, 율령제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실질적으로 무가권력을 독립시키는 조치였다. 그것은 에도 막부체제가 취한 권력의 이원적 형식이기도 하였다.
셋째, 쇼슈쇼혼잔쇼핫도(諸宗諸本山諸法度)는 종교세력에 대한 법률이었다. 이것은 사찰내의 승진기준과 요직 선출, 수행의 의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寺法은 이에야스의 승인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서, 종교 역시 최종적으로 막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함을 명확히 했다.
이상의 세 법은 당대의 핵심적인 정치세력 전체에 대한 규정으로서, 이는 막부가 모든 정치 및 사회권력의 정점에 선 지배자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이들 모두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운 체제를 세웠던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법률이 전통적인 규정과 관습의 집대성이었듯이, 에도 막부는 이들의 존립을 인정하면서 단지 무가권력과 막부에의 복종을 요구했다. 이것은 1192년 가마쿠라 막부의 결론이자, 150여년의 전란 끝에 내려진 평화를 위한 최후의 결론이기도 했다. 이로써 잇키 권력이 주장했던 코오기(公儀)가 부정되고 무가 권력이 최고의 코오기임이 선언되었다.

에도 막부체제는 군대의 편성체제가 곧바로 정치체제화된 것이었다. 1603년 에도 막부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누구도 더 이상의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渡?浩, 󰡔�近世日本社?と宋?󰡕�, 10.) 오히려 전쟁은 하나의 일상과 같은 것으로, 전쟁이 곧 정치였다. 병농의 분리, 檢地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군대 편성하의 직위와 역할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고, 토지의 대소(石高 고쿠다카)에 따라 軍役의 의무를 지는 체제였다. 군역에 따라 전 사회구성원을 재편성했던 것이며, 그것이 곧 정치체제였다.
이 때문에 일본 전체는 하나의 커다란 兵營으로 조직되었다. 즉 전쟁에서의 역할(役)에 따라, 전체 구성원 혹은 집단을 각각 분류하여 특정한 역할(役人) 속에 고정시키고, 그 역할에 부여된 규칙(法度)에 따라서만 행위하도록 하였다.

?川의 지배자들은, 大軍을 이끌고 있는 것에 의해, 팽대한 수의 사람들을 조직하여 조작하는 것을 습득하였다. 그들은 그 기술을 군사적 영역으로부터 사회적?정치적 영역으로 ?用할 수 있었다. 그 군대의 규모는, 그 무렵의 유럽이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군사적 통제가 사회질서의 모델을 형성함에 이르렀다. 포괄적 안정을 구하여, 이들 지배자들은 정치적 統御와 사회적 통합을 가능한 확대하였다. 즉 마을 마을은 군대적 생산단체로 되어, 누구나 ?야쿠닌(役人)?으로 되었던 것이다. 役에 쓸모없는 것은 非公民的인 것이고, 이 단체에 대한 불순종이나 이것으로부터의 이탈은 사회 파괴의 주요한 형태로서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이런 ?은 法?이데올로기?규율을 가지고 싸우는 대상이었다.(Herman Ooms, 1985, 383)

이것은 “천황과 쇼군을 정점으로, 전 사회적으로 조직된 ?役?의 체계”로서, 그 내부는 “무사와 농민, 상인(町人, 죠닌)이라는 세 개의 커다란 신분이 구별됨과 동시에, 각각의 신분 내부에도 복잡한 계층의 구별이 있어서, 사람들은 각각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에 응하여, 무엇인가의 ?役? 혹은 ?직분?을 지고, 그것을 충실하게 수행하여 가는 것이 바른 삶의 방식으로 이야기되”는 체제였다.(尾藤正英 1992, 40; 河田正矩 1740)

삼가 세상 사람들은 家職의 大道를 油?하지 말고 힘써 지켜서, 이단의 잘못된 길로 빠지지 말라. 오로지 家業에 전력하는 것이 유교?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世人들은 이 이치를 잘 터득하여, 道라고 하는 것이 家業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절대로 내가 제시한 것 이외의 異端?外道로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河田正矩, 1740)

직분은 개인이 아니라 이에(家)라는 사회적 형식에 부여되었으며, 개인은 그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도 정치체제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야쿠(役)를 담당하는 단위로서의 이에를 정치 행위자로 파악했다. 이것은 중세 일본의 인간들이 ?村이나 ?鄕 등 지역과 계층에 의해 구성된 집단에 의해 행위했던 것과 대비된다. 1636년, 제 4대 쇼군 도쿠카와 이에츠나(?川家綱)가 발포한 ?쇼시핫토?(諸士法度)에는 ‘家業’에 전념할 것을 명하고 있다. 무사의 발생 이래 <주군-가신>관계는 개인적인 은혜와 奉公을 기본축으로 했지만, 이 때에 이르러 가신의 봉공대상은 주인 개인에서 이에로 변경되었다. 에도 사회는 무사는 물론이고 농민과 상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크고 작은 무수한 이에가 상자처럼 중첩적으로 쌓여 구성된 사회였다.(渡?浩 2001, 47/158) 현대에도 존속되고 있는 일본의 이 독특한 사회제도 및 인간의 아이덴티티는 이렇게 하여 탄생되었다.(村上泰亮?公文俊平?佐藤誠三, 1979)
쇼군은 최고 사령관으로서 정치적 수장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체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의사의 결사체라기보다,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거대한 하나의 메커니즘이었다. 그 메커니즘의 작동원리에 대해 소라이는, 다수의 인간을 자신의 신체의 일부처럼 움직이는 것, 즉 軍의 구성원이 “납득도 없이 사지에 나아가게 하는 術”이라고 말하고 있다.(荻生?徠, 󰡔�鈐?󰡕� ? 5)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되어야 하므로, 법도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법도는 메커니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체제의 창설자 이에야스는 “국가는 하나의 새와 같다”고 말했다. “새의 뜻(志)은 大?”이며, 나머지 깃털이나 발 등은 자신의 ?분별?없이 “下知를 잘 듣는 것이 제일”이다.(?東照宮遺訓?) 그러므로 이 정치체에서는 법률 외의 개인의 시비판단은 그것만으로도 死罪에 해당했다. 이런 정치체의 가장 훌륭한 기본원리는 軍法이었다.

그러나 위협적인 요소는 아직 남아있었다. 새로이 수용된 기독교와 서구의 영향이 그것이다. 이에야스는 무역 촉진을 위해 처음에는 기독교를 용인했다. 그러나 선교사가 잇달아 도래하고, 신자가 70만명에 이르자, 1612년 에도, 교토, 나가사끼 등 직할 대도시에 기독교 금령(쇄국정책)을 내리고, 성당의 파괴를 명했다. 1613년 이에야스의 체제구상의 일급 브레인으로서, 모든 法度를 기초한 臨?宗의 승려 콘치인 스으덴(金地院 崇傳, 1569-1633)은 ?바테렌(伴天連, 기독교)추방문?에서 “일본은 神國이며, 기독교의 가르침은 正宗인 신과 불을 어지럽히는 邪宗이다. 기독교국인은 … 邪法을 확산시켜 정종을 혼란시키고, 일본의 정치를 개변하고 하고 있다. 이는 커다란 화란의 징조이다.?라고 선언했다.(?慶長の禁?令?) 히데요시의 충직한 가신이었던 다카야마 우곤(高山右近)는 히데요시의 배교 강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전하를 모욕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 그리스도교를 그만두라는 것에 관해서는 설사 전세계를 하사받는다고 하여도, 자신의 영혼의 구제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저의 몸과 봉록, 영지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좋은 대로 하십시오.

이것은 무가국가의 원리와 공존할 수 있는 이념이 아니었고, 초월적 존재에 둔감한 일본사상에 있어 실로 희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배교를 강요하기 위해 잔혹무비한 형벌이 가해졌으며, 스페인 선박의 일본도항과 포루투칼인의 내지 정주가 금지되었다. 이에 저항하여 1637년 시마바라(島原)에서 3만 7천의 농민신도들이 봉기했다. 이를 진압한 막부는 1664년부터 모든 사람은 사찰의 신도(檀家, 당카)가 되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宗門改め, 슈몽아라타메)하도록 했다.(寺請制度, 테라우케 세이도)
중세의 대전란을 경험한 일본은 현세적인 ‘질서’와 ‘평화’를 위해, 정신의 자유가 초래할 조금의 혼란도 용인하지 않으려 했다. 기독교에 대해서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주자학자들도 정신적인 내적 망명자((internal exile)들로서 삶을 영위했다. 1702년에 발생한 유명한 아코우(赤穗) 사건에서,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를 감행했던 46인의 사무라이들이 4대 쇼군 도쿠카와 츠나요시의 󰡔�부케쇼핫도(武家諸法度)󰡕� 제 5조, “徒黨을 결성하고, 서약을 하는 것은 禁制”라는 조항을 위배한 죄로 처형당하자, 당시의 유명한 유학자 무로 큐소(室鳩巢)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義人錄󰡕�을 내서 함께 읽고 울며, 忠善이 복 받지 못함을 슬퍼하고, 天道가 알지 못함을 恨스럽게 여겼다. … “姜太公은 軍士에게 말하여, 능히 伯夷?叔弟의 죽음을 면하게 했는데, 室子는 집에서 헛되이 담론하여, 諸士가 法家의 논의를 면하지 못하게 했다. 命이로구나.”(󰡔�義人錄󰡕�, ?序?)

이 사건은 무로의 윤리적 深淵을 건드려 그를 복받치는 슬픔에 잠기게 했다. 그러나 그런 슬픔은 단지 46사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슬픔은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정치체, 즉 법가가 지배하는 사회에 속해 있는 자신에 대한 슬픔이었다. 에도인들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분리된 세계에서 살았다. 이에야스가 제정한 󰡔�武家諸法度󰡕� 제 3조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法은 예절의 근본이다. 법으로써 理를 破해도, 理로써 법을 破하지 못한다. 背法의 무리들은 그 죄과가 가볍지 않다.(近世武家思想󰡕� 454)

모든 체제는 통상 장엄한 이념으로 외양을 장식하고 싶어 하지만, 이에야스의 이 선언은 간결 명쾌하여 일말의 주저도 없다. 즉 전국시대의 삼엄함을 거쳐 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호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法에 대한 모든 영역의 복종, 이것이 에도 정치체제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질서와 평화는 풍요를 가져왔다. 17세기에 경지면적은 비역적으로 증대되어, 18세기 전반에는 16세기말의 약 2배에 달했다. 생산 확대는 교역을 활발하게 하여 도시가 탄생되고, 상인층이 대규모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물론 무사들이 토지를 떠나 죠카마치에 집결하게 된 것과도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가나자와(金?)의 상인인구는 7만명, 나고야(名古屋)?가고시마(鹿?島)가 6만명, 히로시마(?島)?후쿠오카(福岡)는 4만명이었다. 오사카의 인구는 40만이었고, 에도는 무사 60만과 상인 40만을 합쳐 무려 100만이었다. 막부는 전국적인 도로망을 정비하였으며, 해상교통로를 완비하고, 화폐를 발행했다. 사무라이들은 물론 금욕을 미덕으로 간주했지만, 주자학과 비교할 때 그들은 인간의 욕망 자체를 악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에도 시대에 놀라운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이 풍요를 바탕으로 에도의 각종 문화와 사상이 꽃피었다.

2) 에도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16세기말-17세기 전반에 도시상업이 발전하면서, 거대한 상업자본이 발생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전국 각지에서 대량의 상품이 생산되었다. 한편 흉작과 세금체납으로 인해 전답을 저당 잡힌 농민들은 결국 토지를 상실했다. 지주제가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토지에 정착한 농민과 그들이 납부하는 공조는 막부체제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전답의 매매는 금지되어 있었다. 요컨대 지주제는 체제의 문제였다. 막부는 이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1723년 이것은 결국 포기되었다.
경제의 발전은 막부체제에 또 다른 위기를 초래했다. 쌀의 증산은 미가를 하락시키고, 막부의 재정과 무사의 생활을 궁핍하게 했다. 막부와 무사들은 농민들이 납부하는 정액의 공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들어 막부는 무사들의 봉록을 제대로 지급할 수 없을 정도였다. 1716년 즉위한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가 취한 방책은 먼저 공조수입의 확대를 위해 신전을 개발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미가를 더 하락시켰다. “참기름과 백성은 짜면 짤수록 나온다”는 모토하에 공조를 증액했으나, 농민의 저항으로 인해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에 막부는 미가 인상과 물가 인하를 강제로 명령했다. 그것은 시장을 마비시켰다. 마지막 방법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다. 1615년 이에야스의 무가제법도에는 “제국의 사무라이는 검약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사의 미덕이었을 뿐 현실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1731년의 ?검약령?은 고위 무사인 하타모토가 3년내에 의복을 바꾸어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것은 분수를 지키는 것이라기보다, 분수 이하로 절약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에도 시대의 지배자들은 상업화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발밑에서 체제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온갖 대책을 강구했으나, 근대 세계가 도래할 때까지 끝내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다. 요컨대 막부의 정책은 농업사회에 적합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 그 한계를 깨달은 정치가가 있었다. 작은 성의 성주로부터 로쥬(老中)가 된 타누마 오키츠구(田沼意次)는 시대에 앞선 개명적 정치가였다. 그는 상업주의적 대책으로 전환했다. 그는 화폐량을 늘리고 전매제를 실시했으며, 독점조합을 인정하고 법인세를 징수했다. 이는 막부재정을 개선시켰으나, 동시에 물가 상승과 인플레를 가져왔다. 그것은 빈부격차를 확대시키고 농민을 몰락시켰으며, 도시 영세민의 생활을 압박했다. 또한 거의 오직이 없었던 막부 관료들의 부패를 초래했다. 1783년 아사마야마(?間山)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켜 대흉년을 몰고 왔다. 텐메이(天明)의 기근이다. 도후쿠 지방에서만 20만명이 아사했으며, "자신의 아이을 잡아먹는 자도 있고, 사람은 귀신과 같다"(覺王院義觀, 󰡔�北行日記󰡕�)고 하였다.
타누마의 상업주의적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던 전통주의자들은 그를 실각시켰다. 막부의 친위 가문격인 고산케(御三家)를 중심으로 하여 시라카와(白河) 번주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집권했다. 칸세이 개혁(?政改革)이라 불리는 사다노부의 정치는 전통으로의 복귀였다. 그는 뇌물근절과 국가기강을 강조하고 타누마정권하의 관리들을 대량 파면했다. 전매기관과 독점조합의 일부도 해산되었다. 또한 민중교화를 위해 외설적인 소설과 시사 풍자적인 黃表紙를 금지시켰다. 異學禁止令을 발포하고 하야시가의 유시마 성당을 쇼오헤이자카가쿠몬쇼(昌平坂?問所)로 개칭하여 막부의 관학으로 바꾸었으며, 유자들을 등용했다. 도시에 유입한 농민들에게는 舊里歸農令이 내려졌다.
상업의 발달과 상업주의에 대한 농민들과 도시하층민의 반발도 컷다. 텐메이의 기근 때, 도시하층민들은 쌀소동(米騷動)의 형태로 잇키를 일으켰다. 1787년(天明 7) 5-6월 전국 28개 도시에서 쌀소동이 일어나, 미곡상을 약탈했다. 이것은 흉년시 쌀을 매점하여 고가로 판매하는 상행위와 기근시에 쌀을 푸는 관행의 무시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봉기자들은 절도 금지, 화재 조심 등의 규율을 지켰다. 요컨대 이 봉기들은 단순한 불만의 폭발이 아니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행동이었다. 농촌에서는 명주 독점조합이 거래수수료를 징수하려는 것이나, 숙영중매상(門屋)이 도로연변의 주변촌락에 대한 人馬 징발을 막부에 출원한 것에 대해 잇키가 발생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점차 부유해져 정치권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사회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해갔다. 타누마의 정책에 반대한 사다노부조차도 상인들의 협조없이는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사다노부는 에도 금융자본의 실력자로서 궁핍한 다이묘오들에게 대출(大名貸)하고 있었던 미타니 산쿠로(三谷三九?) 등 豪商 10명을 칸죠쇼고요다치(勘定所御用達)에 임명하여, 그들의 풍부한 자금력에 의해 쌀값을 조절하고자 했다. 하타모토나 고케닌을 대신하여 농민으로부터 봉록미를 수취, 판매하는 상인인 후타사시(札差)는 점차 무사들의 채권자가 되어, 현실 생활에서는 무사들도 이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넘치는 부는 문화를 창조했다. 겐로쿠(元祿, 1688-1704) 문화는 통상 죠닌(상인)의 문화라고 한다. 에도 시대는 출판의 시대이기도 했다. 경제력의 향상과 생활상의 필요 때문에 읽기, 쓰기가 크게 보급되었고, 도시에서는 부유한 상인을 겨냥하여 다종다양한 책이 출판되었다. 1692년에 출판된 종류는 7,187종에 달했다. 내용에 있어서도 불교와 유교 서적의 비중은 여전히 높았지만, 서민들도 읽을 수 있는 일본어로 된 책(和書)도 다수 출판되었다. 부유한 상인의 호색 풍류기를 그린 소설 1682년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코쇼쿠이치다이오도코󰡕�(好色一代男)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니혼에이다이쿠라󰡕�(日本永代?)는 근면, 절약, 才智 등 상인의 처세법을 그리고 있다. 명예를 중시하는 인생관이나 花?鳥?風?月?雪를 애호하는 중세의 미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성욕과 물욕을 긍정하고 즐기는 상인의 세계관인 것이다. 일본 근세는 농민과 사무라이의 세계관 속에서 상인의 세계관이 새롭게 성장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우아함을 추구하기도 했다. 1685년 간행된 교토 안내서 󰡔�쿄오하부타에󰡕�(京羽二重)에 諸師諸藝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에는 47종의 諸藝와 241명의 師가 실려 있다. 게(藝)란 학문이나 교양, 예컨대 儒學이나 란가쿠(蘭學), 꽃꽂이, 茶道, 바둑, 렝카(連歌), 검도 등을 말한다. 師는 그것을 초심자에게 가르치는 것을 생활 수단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다양한 학문과 교양, 예능이 번성했다. 그리고 그 문화적 축적이 공가나 승려, 무사, 상층농민들에게까지 확대되어 겐로쿠 문화가 꽃피었다.

3) 에도 儒學과 고쿠가쿠(國學)의 정치사상: 주자학과 中國性으로부터의 탈피

시바 료타로는 “에도시대 270년간은 마치 일본 전체가 학교에 입학한 시대”였다고 말했다. 전국시대까지 소수의 전문적인 學問家에 독점되어 있었던 지식은 에도 시대에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서민들에게까지 미쳤다. 지식이 모든 사람의 것임을 처음으로 천명한 것은 1603년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의 공개강의였다. 그의 강의에는 “청중이 사방에서 모여서, 門前이 시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에도 시대의 사상적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막부는 이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권력의 위험 요소가 아닌 한 아무런 터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선이 주자학외의 모든 사유를 斯文亂賊으로 예단하고, 엄하게 금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사상의 자유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에도의 사상계는 자유분방한 사유가 꽃피웠으며, 신분의 제약도 없었다. 그런 모든 사유는 개인적 취미활동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에도 유학도 일종의 게(藝)였다. 즉 개인의 학문적 취미 정도였다. 수신과 치국평천하의 이념으로 인식되었던 조선과는 판이하다. 주자학의 理와 상하에 기초한 질서정연한 우주론은 봉건적 신분질서의 정당화에 적합한 이념이었으나, 에도의 지배자들은 주자학에 무관심했다. 에도 정치체제가 천명의 소산도 아니었거니와, 무가 지배의 정당성을 특별히 옹호할 필요성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주자학의 첫 수용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는 이에야스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망한 그는 산천으로 은둔했다. 하야시 라잔은 세이카의 제자로, 그의 추천에 의해 이에야스의 侍講이 되었다. 그러나 막부는 그를 經世之士가 아니라 단순한 지식 전문가로 취급했으며, 유자가 아닌 승려의 자격으로 봉공토록 했다. 유학자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주자학은 지배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으나, 점차 일본 사회에 침투했다. 이에야스의 ?武家諸法度? 제 1조 “文武弓馬의 도에 정진하라”는 조항은, 1683년 4대 쇼군 츠나요시에 의해 “문무충효에 힘쓰고 예의를 바르게 하라”는 항목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武斷으로부터 文治로의 전환을 뜻했다. 또한 승려로 봉직하던 하야시가를 다이가쿠노카미(大學頭)로 임명하고, 유시마(湯島)에 孔子廟인 聖堂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에도의 유학은 치자의 학문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두 가지 대립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일상생활의 바람직한 교훈으로서, 다른 하나는 유학을 治術로서 정립하여 더욱더 치자의 학문임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주자학은 양자를 결합하는 사유이다. 이에 반해, 두 견해는 양자를 분리하거나 무관계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두 견해에 공통된 것은 주자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이다. 즉 현실적 인간과 현실적 정치로부터 출발하여 유학을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이 현실주의는 일본 유학이 성취한 독특한 특성이다. 정치조차 형이상학화시키고자 했던 조선 유학과는 정반대이다.
주자학이 불교로부터 독립된 지 50년도 되지 않아 주자학의 근본 이념이 부정당했다.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는 리의 존재를 긍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것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초월자로서가 아니라, 단지 자연과 사물내에 존재하는 질서(條理)로 이해했다. 그런 의미에서 性이나 天을 모두 理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고(󰡔�聖敎要錄󰡕� 中), 공자의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古學) 예컨대 주자가 말하는 바처럼 인간의 本然之性이나 氣質之性은 선악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 전에는 無의 상태라고 본다. 그 사상의 요체는 요컨대 현실로부터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학자들의 습관적인 사고처럼 고대를 이상세계로 보는 상고주의나 중국을 이상적인 나라로 숭모하는 중화주의도 부정했다.(󰡔�中朝事實󰡕�) 왕정을 이상정치로 보지도 않았으며, 막부정치를 긍정했다. 경험적 실재, 그리고 ‘지금 여기’로부터의 사유에서 현실적 인간과 일본에 대한 긍정이 도출되었다.(丸山眞男 1948, 120-123, 144) 이 두 가지 점은 에도 유학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자, 일본인의 세계관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의 또 다른 기여는 평화시대를 살아가는 무사에게 존재의 의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평화가 도래하자 전사로서의 무사들은 사회적 존재의의를 상실했다. 소코는 이들 무사들에게 조선의 유학자들과 같은 도덕적 의무를 부여했다. 즉 서민들이 생활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인 반면, 무사들은 이들을 도덕적으로 지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武敎要錄󰡕�) 이러한 논리는 중국이나 조선같이 사회계층 속에서 도덕적 모범을 발견할 수 없었던 일본유학이 취한 현실적 대안이었다. 주자학에 대한 그의 부정도 주자학이 무사들의 일상윤리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환은 단지 전술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사무라이 출신으로서, 에도시대의 대표적 兵學 山鹿流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즉 그의 사상은 사무라이의 세계관이 유학에 들어가, 유학의 내용을 자신의 성격에 맞게 변형한 것이었다. 그것은 神道의 사상융합 방식과 유사한 것다. 즉 고정된 모습 없이 현실에서 필요한 것을 임의로 취하여 자기화시키는 것이다. 소코에 의해 무사도는 지식 및 도덕과도 결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에도 무사계급의 전형적인 세계관과 삶의 유형이 탄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코의 사상은 일본 근세 유학과 무사도의 정신적 기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의 사상은 경험적 인간관은 소코적 사유의 심화에 해당된다. 그 역시 리를 부정하고, “천지 사이에는 단지 이 일원기뿐이다.  알아야 한다. 리 있은 뒤에 기를 생하는 것이 아님을. 모든 리란 오히려 이 기중의 조리일 뿐이다.(語孟字意)”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천리를 보존하여 인욕을 멸한다”(存天理 ?人欲)는 주자학의 모토를 부정하고, 그와 같은 주장은 오히려 불교와 같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인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인욕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진실로 예의로써 이를 고르게 한다면, 情은 곧 義이니, 어찌 미워할 것이 있겠는가?” 나아가 그는 인간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비판한다.

내가 󰡔�通鑑纂要󰡕�를 보니, 그 인물평이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하여, 조금도 가차가 없어 엄하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斷決 심각하여 고금에 완전한 사람이 없다. 거의 申韓 刑名의 기상이 있어서, 聖人 幽谷의 의미가 없다. 나를 지킴이 심히 굳세고, 남을 꾸짖음이 심히 깊다. 폐부에 스며들고 골수를 뚫어 졸연히 각박한 무리가 된다. 오로지 理만 주장하는 폐가 하나로 여기에 이르렀다. 슬프구나.(󰡔�童子問󰡕�)

그는 孔孟의 현실적인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해, 논어와 맹자에 대한 철저한 독해를 주장했다.(󰡔�論語古義󰡕�,󰡔�語孟字義󰡕�) 古義學의 탄생이다. 진사이는 상인 출신이었다. 소코의 사상이 무사도와 유학의 결합이었다면, 진사이는 상인의 눈으로 유학을 바라보았다. 거래와 교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상인들에게 이단이나 正邪같이 단호한 이분법은 낯선 것이다. 소코가 무사들에게 도덕적 기준을 가져다주었다면, 진사이는 당대에 성장하고 있던 상인계급에게 똑같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소코와 진사이의 현실주의적 유학 해석은 아직 도덕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학을 도덕과 완전히 분리시킨 유학자가 등장했다. 에도 유학의 최고의 이단자 오규 소라이(荻生?徠, 1666-1728)이다. 그는 醫業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소라이는 첫째, 주자학이 주장하는 바처럼, 진리(道)란 천지자연에 내재되어 그로부터 유추되는 형이상학(理學)이 아니라 정치학이라고 주장한다. "선왕의 도는 선왕의 지은 바이다.(制作) 천지자연의 도가 아니다“(󰡔�弁道󰡕�)는 말은 이 점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둘째, 개인의 도덕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정치적 방책이라고 본다. 그는 "사람의 도는 한 사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억만인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 …… 억만인을 잘 합하는 자는 君이다. 억만인을 잘 합하여, 그 親愛 生養의 性을 따르게 하는 것이 선왕의 도이다."(弁道)라고 말한다. 요컨대 유학의 진정한 가르침이란 선험적으로 부여된 진리에 따라 개인의 도덕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필요에 의해 뛰어난 선구자가 만인을 위해 만들어 낸 인위적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그 극치가 고대 성인들이 치국안민을 위해 제작한 예악형정이다. 이 때문에 그는 공자의 가르침도 부족하다고 본다. 고대 성인의 가르침을 알기 위해 그는 육경의 세계로 돌아갔다. 古文辭學의 탄생이다.
소라이학의 의미는 다양하다. 첫째, 소라이의 주장은 유학을 개인 혹은 계층 윤리로 해석한 소코나 진사이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었다. 단순한 윤리에 빠져, 당대의 현실문제에 대해 아무런 상상력도 제공하지 못하는 유학에 소라이는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유학을 통치술로 인정하지 않았던 막부의 지배자들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즉 일본 유학의 왜소성과 주변성에 대한 강한 반발이었다. 셋째, 겐로쿠 시대의 상업화에 대한 전통주의적 반발이었다. 겐로쿠 시대는 상업화의 진전에 따라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유민화된 농민이 도시빈민층이 되어 범죄예비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라이는 이로부터 질서있고 안정된 고대 이상세계의 근본적 붕괴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 해결책으로 소라이는 무사계급의 歸農과 농민의 이동에 대한 엄격 통제를 주장하고 있다. 넷째, 당대의 제도적 무능성을 절감하고, 뛰어난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해 시대의 구원을 대망하고 있다. 그의 사상의 중심에 서 있는 聖人이 바로 그런 자이다. 시대에 대한 소라이의 좌절감은 그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정치와 도덕을 분리하는 그의 사상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근대의 개막을 보고 있다.(󰡔�日本政治思想史硏究󰡕�) 그러나 그의 사상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고대의 이상세계를 희구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에서 선 분열된 의식의 소유자였으며, 사라져 가는 세계를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구세자였다. 겐로쿠 시대가 낳은 아들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그와 같은 분열은 그 사상의 지향과 그 결과가 낳은 분열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원했던 것은 주자학으로도 구원될 수 없었던 전통질서의 회복에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사상은 유학 자체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소코와 진사이의 유학은 통치술로 존립할 수 없었던 일본유학이 취했던 생존방식이기도 했다. 즉 도덕으로서의 유학이다. 그러나 소라이가 그 도덕조차 부인하고, 현실의 경세책으로서도 실패하자, 유학은 역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 공백을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고쿠가쿠(??)가 메웠다.

쇼오토쿠 이래 일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불교나 유학에 의해 표현해 왔다. 18세기에 들어 일본은 스스로의 고유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고쿠가쿠는 일본 고유의 경험과 언어로 자신의 정체를 해석하고 생의 윤리로 확립하고자 했다. 그것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일차적으로 中國性(가라코코로: 漢意)을 극복하여, 그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카모노 마부치(賀茂眞淵: 1697-1769)는 “좋을 것도 없는 중국을 생각하여, 우리가 받들고 공경해야 할 것을 비난한다”(󰡔�學びのあげつろひ)󰡕�)고 주장한다.
카라쿠니(唐國=중국)를 부정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카라쿠니는 난리가 계속되어 평화가 없는 상황이고, 마침내 오랑캐(淸)들에게조차 지배당하고 있다. 둘째, 카라쿠니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이다. 셋째, 그런데도 “儒라는 도를 가지고, 천하의 理를 풀고” 있다. 요컨대 “카라쿠니에서는 이 도리로서 다스려지고 있는듯이 설함은 모두 空言”이다. 카라쿠니의 실태는, 스메라쿠니(皇國=일본)에 비해 참담한 것이다. 외국인의 그럴듯한 이론을 진짜로 받아들여, 실태에 눈을 감고 외국 모델을 칭양하며, 이 나라를 외국화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이리하여, 일본은 중국성의 呪縛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자기긍정으로 전회한다.
모토오리 나가노리(本居宣長, 1730-1801)가 일본 최고의 古書로서, 일본 건국의 유래와 천황들의 계보를 신화적으로 노래한 󰡔�고지키(古事記)󰡕�를 주석하여 󰡔�고지키덴(古事記傳)󰡕�을 쓴 것은 일본심의 원형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고지키󰡕�의 세계에서 불교와 유교의 도덕적 교설과는 다른 정신세계와 삶의 형식을 발견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만사를 신들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神道의 세계(카무나가라노미치: 惟神の道)였다. 다른 한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로부터 있는 것을 그대로 느끼고 드러내는(모노노아와레: 物のあはれ) 고대인들의 거짓없는 마음과 삶을 발견했다.
이 神道와 人情이 일본성의 핵심이다. 그것은 유학과 불교 이전에, 외래적인 것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일본심이다. 따라서 ?이니시에미치?(古道)로의 회귀는 본성의 회복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다. 나가노리에 의하면, “저, ?가라고코로?(漢意)에 더렵혀진 亂世의 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이 나라야말로 ?마고코로?(眞心)의 나라, ?나호키고코로?(直心)의 나라, ?시키시마(敷島)의 야마토고코로(大和心)?의 나라”였다. 마고코로는 어설픈 智로 움직이지 않는 나호키코코로(直き心)이다. 와카(和歌)의 근원이기도 한 ?直き心?은 반드시 善이나 正이 아니다. 다만 ?直?하게 할 뿐이다. 惡事도 ?直き心?으로 행해진다면 隱慝이 아니며, 결국 大事에는 이르지 않는다.
그런데 무사들이야말로 이런 ?直き心?의 소유자들이다. “대저 武는 허풍스런 ?文?과 달리, 본래 ?直?이다. 진실로 武의 意가 直이라면, 소홀하지 않게 私 없이, 손을 헛되이 하지 않고 家를 다스리고, 천하도 다스려야 한다” 실제로 고대의 일본은 武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렸다. 이러한 논의는 더욱 진전되어, 나카시마 히로타리(中島廣足: 1792?1864)는 ?모든 도의 본의는, 천하 士民의 마음을 정직하게 하여, 다만 오로지 나에게 복종하여, 一大事의 때, 나를 위하여 죽음을 영광으로 함과 같이 존재하는 것?(󰡔�童子問答󰡕�)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사도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幕末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친, 일본 국수주의의 사상적 모체이기도 하다.
경험적 윤리로서의 무사도는 18세기 고쿠가쿠(國學)에 의해 독립적인 이념의 근거를 얻었다. 고쿠가쿠는 무사도의 정신을 순수한 일본심과 연결시켰다. 고쿠가쿠가 가진 더욱 중요한 정치적 의미는 신토(神道)와 천황의 부활이었다. 불교의 도래 이래 신토(神道)는 유입되는 모든 사상의 옷을 입고 생존해왔다. 또한 가마쿠라 막부 이래 천황 역시 주어지는 모든 정치적 상황을 받아들여 존속해왔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규정했듯이 현실의 정치적 의미는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노리나가의 고쿠가쿠는 천황제가 지닌 정치적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고양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상상력이 현실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말 尊王攘夷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쿠가쿠가 불러일으킨 일본에 대한 긍지가 외적의 침입에 의해 위협당하게 되자, 천황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상징을 중심으로 강력한 정치적 통일운동이 발생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蔭)은 그러한 운동의 심볼이자 순교자였다. 그리하여 아이로니칼하게도 고대상으로부터 근대국민국가가 탄생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그 운동의 역사적 결말이었다.

(5) 소결론

무사도와 고쿠가쿠의 인간은 외적 대상에 대한 절대적 헌신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고자 했다.(self through identification) 근대화된 일본에서는 그 대상은 국가, 혹은 천황이었다. 나가노리는, “그 시대의 정부가 정한 바를 지키고, 世間의 風儀에 따르는 것이 神道”(󰡔�くず花󰡕� 附錄)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일에도 ?마고코로? 그대로 ?上에 순종하였던 것이 古道이기 때문이다(渡?浩 1997, 188). 근대의 일본인은 대상화된 객체와의 일체화 및 그에 대한 완전한 순종에 의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 윤리는 고쿠가쿠에 의해 참다운 일본심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2차대전후 동경 전범재판에서 마루야마 마사오가 목격한 근대의 일본인은 주체가 없는 ‘무책임성’의 인간이었고, 천황절대주의 체제는 ?무책임의 체계?였다. 그는 그것이 근대 일본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행동윤리와 사회체계가 근대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본다.

국가주권이 윤리성과 실력성의 궁극적 원천이며 양자의 즉자적 통일인 곳에서는 윤리의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끊임없이 권력화로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윤리는 개성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곧바로 외적인 운동으로 다가오게 된다. 국민정신 총동원과 같은 것이 거기서의 정신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丸山?男 1997, 53).

그렇다면 현대 일본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를 위해 마루야마는 후꾸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재해석하고 있다. 󰡔�?文明論の槪略?を?む󰡕�가 그것이다. 후꾸자와는 근대일본 문명이 나아갈 바를 “一身이 獨立하여 一國이 독립할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마루야마의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윤리의 내면화?를 통한 ?자유로운 주체?의 형성을 뜻한다. 따라서 “일본제국주의에 마침표가 찍힌 8월 15일은 동시에 초국가주의 전 체계의 기반인 국체가 절대성을 상실하고, 비로소 처음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된 일본국민에게 그 운명을 넘겨준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丸山眞男 1997, 64). 그리하여 전후 일본정치사상의 최대의 과제는 ‘주체성’의 문제가 되었다. 그것이 새로운 문명의 목적이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면, 일본인은 그 자신에게 의미있는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오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는 이 점을 노벨상 수상연설인 ?애매한 일본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丸山眞男 1972; 1984;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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