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베데스다’ 파일을 폐기하며
‘베데스다’는 요5:1-18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에 있는 연못의 이름이다. 예루살렘에는 성벽을 쌓고 문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그 문들 중에 양문이라고 하는 문이 있었다. 그 양문 곁에 크지 아니한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못을 베데스다라고 한다.
이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은 간헐천(間歇川)이었다. 샘물이 솟아 나오다가는 뚝 끊어지기도 하고, 또 갑자기 솟아 나오다가는 또 끊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간헐천이라고 한다. 물이 괴어 있는데다가 샘물이 아래서 또 솟아나다 보니 물이 뒤집히는 것이다. 그리고 끊어지면 다시 조용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뒤집어 놓는다는 것. 그리고 그 물이 동하기 시작할 때 맨 먼저 뛰어드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 전설을 믿고 많은 병자들이 여기로 모여든 것이다.
이 간헐천이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각종 병자들은 모여들었고, 급기야는 앞 다투어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는 간병인의 도움을 구하지 못했던 고로 연못가에서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이곳을 방문하셨고, 38년 된 병자의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셨다. 병자와 예수님의 대화 몇 마디로 38년이나 병에 찌든 사람이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신 것이다.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고 새 삶을 누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찬양의 가사로 옮긴 것이 고(故) ‘김 성수’ 목사의 ‘베데스다’라는 곡이다. 그는 이 곡에서 그의 신학적 소양을 도구 삼아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난 내용을 추론 또는 과장을 섞어서 내러티브(narative)로 전개한다. 물론 그의 내러티브는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신학적인 소양을 기초로 한 추론일 뿐이다. 그가 나레이션(naration)을 통해 읊조린 내용을 대충 기술하면 이렇다.
“... 그러나 세상에 조금이라도 소망을 두고 있는 한 우리의 눈은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주님의 눈에 보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절망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위의 나레이션에서 김 성수 목사가 소유한 신학적인 사고를 두세 가지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그는 이 나레이션에서 구원받았으면서 아직도 율법적인 신앙에서 얽매인 사람, 즉 로마서 6장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깊은 갈등 속에 사로잡힌 사람을 전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 상태의 사람과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6장의 사람은 불신자가 아니라 성령과 자신의 소욕에 갈등하는 사람으로서, 7장으로 넘어가면서 이 갈등은 해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알미니안(arminian)적 사고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미니안적 사고란, 인간 스스로 주님을 찾아가서 구원을 호소할 수 있는 능력이 본래부터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애초에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영적으로 모두 죽은 존재라고 말한다. 따라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영적인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벙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에덴에서 사람을 쫓아내고 화염검을 두셔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셨기 때문이다(참고, 창 4:24). 기독교는 하나님이 죽은 우리에게 다가와 살려주신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서 구원을 호소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밝게 하셔서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구원의 순서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김 성수 목사의 신학적 약점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십자가의 사건’으로만 최소화시킨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의 죽음과 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끝나는 종교라면 아직까지 무덤 속에 있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김 성수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구속의 상태를 십자가에 국한시킨 나머지, 성령으로 인한 그리스도인의 내적 감동과 기쁨까지 타락한 것으로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도모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까지도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김성수 목사가 내러티브에서도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김 성수 목사가 기독교의 특성을 아직도 무덤 속에 있는 종교로 정초하면서 기독교 특유의 생기 넘치고 역동적인 힘을 부여하는 부활의 사건을 대폭 축소시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 장사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무덤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무덤은 그를 잡아둘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의 돌을 박차고 나와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을 높인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마치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찬란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데 김 성수 목사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에 빠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애곡의 소리만 넘치는 장례식 집이 아니라, 어린양과 신부가 혼인을 하는 잔칫집이다.
김 성수 목사의 이런 신학적인 패턴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필자는 김 성수 목사의 이런 패턴을 고대 서양의 플라톤 철학에서 온 것으로 의심한다. 플라톤 철학은 “이데아(Idea)만이 진실하고 영원한 것이며, 질료는 가치 없고 저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 성수 목사는 “하늘의 것만이 신령한 것이고, 물질로 구성된 인간은 무익한 존재”라는 생각 아래서 그의 신학적인 색깔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설교에서 플라톤을 자주 들먹였다. 한 때 김성수 목사는 다이내믹하고 열정에 기반한 설교로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신학적 기초 위에 세워진 설교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복음성가 가수로서의 찬양 가사들도 신학적인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베데스다라는 찬양이 그러하다. 필자는 폐기된 파일을 다시는 구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김 성수 목사의 나머지 찬양들도 다시 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