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은 홍익대 판화과를 졸업하고, 영국 왕립예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설치미술가다. 그녀의 작업은 설치미술, 회화, 판화, 실크스크린 등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그녀가 10일까지 원서동 아트 스페이스 에이치에 전시하고 있는 설치 작품들은 ‘도시’와 ‘도시가 생산 하는 것들’에 관한 담론(談論)들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차분히 역설해내고 있다.
토포하우스 선정 ‘떠오르는 아티스트’전(2010), ‘벨트 2010’전(인사갤러리)에 이은 이번 개인전은 전시회의 개념에 맞게 인사동 본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진(陣)을 치고, 자신의 분신일지도 모르는 숱한 석고 유닛들을 찬찬히 식재(植栽)한다. 낯설어야 마땅하지만 이내 친숙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도시의 모습들은 도시인들에게 정서적 혼돈과 미완(未完)의 불안감을 제공한다.
회색을 뛰어넘는 이윤정의 백색제의, ‘조합과 배치를 달리하며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고 있는 수많은 도시의 대량 생산품들은 진시왕릉을 지키고 있는 병마들처럼 진용을 갖추고 있는 도시의 우울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의 브루노의 모습이다. 작가 이윤정은 규격동일의 제품, 메마른 도시인, 현대인들의 건조한 정서를 따스하게 응시한다.
작가는 전시된 작품의 개별 이름보다는 언뜻 언뜻 보이는 도시의 ‘스쳐가는 풍경’이란 주제 속에 모든 작품들을 진설(陳設)한다. 비정도시(非情都市)의 풍경은 상품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회용 소모품이 되어버린 인간들도 빠른 급류를 타고 자연스럽게 상품 대열에 합류한다. 지성인들의 방황이 시작되는 발원인(發源因)은 ‘비정상’에 대한 인지와 지각에서 온다.
‘스쳐가는 풍경, Passing Landscape’은 풍광을 안고 있는 시골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터인 분주한 도시가 상실한 잔혹한 상처의 일면을 들추어낸다. 도시인들은 도시의 덫에 쉽게 포획되고, 일정한 구속을 ‘자유’나 자연스러움으로 여긴다. 작가는 우리에게 개성이 상실된 도시의 쓸쓸한 풍경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개념의 ‘도시보기’, ‘도시학’을 미학과 연계시킨다.
그녀가 석고로 깎아 내린 수많은 작품들은 ‘아파트’로 지칭되는 세트 메뉴, 대량 생산 상품들의 획일적 이미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도시의 건물들 안에서 규칙적으로 찍혀 나오는 기호, 무늬, 사각형의 모형은 생존 공간에 대한 설명이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단순히 ‘한 장이 아닌 중첩된 콜라주’처럼 작고 큰 틀의 여러 이미지들의 조합을 오브제에 투영시킨다.
이윤정을 읽어내는 또 다른 지표는 최근 10여 년 간 다양한 나라에서의 전시, 금년 러시아, 서울, 홍콩에서의 작업과 아울러 그녀의 화려한 국내외 수상 실적이다. 국내에서 그녀는 한국현대판화공모전 우수상(한국현대판화협회, 2012), 토포하우스 신진작가 선정(2010), 서울국제판화사진아트페어(아르코미술관 신진작가 비평워크숍) 최우수 작가에 선정 되었다.
영국에서도 그녀는 연구와 작품 활동으로 존 퍼셀 펄쳐스상 최우수상(런던, 2008), 런던과 동방의 작가상 최우수상(런던, 치체스터 자유경쟁제, 2008), 우수학위 영예상(아트나우, 런던,2007), 왕립 버설리 스킴 예술대학원상(런던, 2007), 왕립예술대학원 맨그룹상(런던, 2006)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의미 있는 수상실적을 올렸다.
깊어가는 가을, 쓸쓸함이 감도는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공명(共鳴)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작은 외침은 도미노처럼 번질 것 같다. 그녀가 집중하고 있는 도시의 모습들은 언젠가는 뜨거운 복원력으로 초록을 찾고, 원래의 빛을 찾을 것이다. 뒤틀어지고, 왜곡된 도시에 ‘사랑’을 피워내고자 하는 예술가의 열정은 직접 만나 얘기하다보면 수시로 감지된다.
이윤정, 아담한 체격에서 뿜어 나오는 강력한 지성의 불꽃은 차가운 도시를 녹이고, 자신의 작품들을 상대로 실핏줄이 돌게 할 것이다. ‘스쳐가는 풍경, Passing Landscape’展은 방황하는 지성들의 처소(處巢)가 될듯하다. 작가가 도시에서 찾아낼 인정이 흐르는 시냇물은 없는 것일까? 그녀의 불안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한 묘책은 분신인 작품들 밖에 없다. 행운을 빈다.
/장석용 객원기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