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 황희> <관용의 리더십>
세종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더 이상 설명 할 필요가 없는 성군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물론 과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고,
대마도 정벌과 여진족 소탕 및 4군 6진 설치를 통해 영토 확장을 이룩하여 태평성대를 구가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특히 한글을 창제한 것은 쉽고 과학적인 글을 보급함으로써 서민들이 학문과 이치를 깨닫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세종대왕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러한 세종의 공로는 당대에 큰
업적으로 평가 받지 못한다. 당시 양반들은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마치 자신들의 특권이고 품위를 지키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꾀나 오래 지속 되었다.
태조니 세종이니
하는 호칭은 왕이 승하하고 난 후 붙여 지는 정식 명칭인데, 끝에 ‘조‘로 끝나는 것은 생전의 업적을 크게 평가하여 붙이는 명칭이다. ‘종‘으로 마친 임금들은 대체적으로 평범한 평가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면 되고, 광해군,
연산군과 같이 ‘군‘으로 끝날 경우는 정식
왕으로서 예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된다. 예전엔 ‘조‘로 끝나면 동생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고, ‘종‘으로 끝난다면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조‘자가 부여된 임금은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6명뿐이다. 태조는 개국의 주역임을,
세조는 단종, 인조는 광해군
등 전왕으로부터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 하기 위해 사후 불가피하게 높은 평가를 한 측면이 있으며, 선조는 임진왜란을
극복한 왕으로, 그리고 영조와 정조는 재임 시의 치적을 높게 평가한 경우로, 순조는 아버지 정조를 뒤이어 내란과 전염병을 극복한 왕으로 이 같은 명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종은 어머니인
민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세째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는 세자로 책봉된 형 양녕대군이 폐세자 된 해인
태종 18년에 22살의 나이로 조선의 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태종은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4년간 더 생존한다. 세종의 장인인 심 온은 관직을 두루 거친 명망 높은 인물이었으나,
세종이 즉위 한 직후, 모함으로 인해 선왕인 태종의 명령으로 사사되었다.
태종이 병권을 갖고 있었기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끝내 장인의 죽음에 침묵했다. 이에 앞서 세종은 세자로 책봉된 형 양녕대군을 통해 권세를 추구하려 했던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처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지켜 봤다. 그가 절대적인 아버지의 힘을 인정 해야만 했던 이유이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다.
또한 세종은 큰 형인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를 끝까지 반대한 이유로 유배 가 있었던 황 희를 불러 들여 오히려 자신의 참모로 중용한다.
바로 이런 점들을 들어 세종은 성격이 매우 인자하고 꼼꼼한 성격이었으나 반대로 의심이 많고, 매우 냉철한 소유자로 평가 받는다.
아울러 세종은
세자의 빈들로 인해 많은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아들 문종의 첫 번째 빈은 남편이 자신의 침소를 찾지 않자 ‘압승술‘이라는 민간비법을 썼다.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뒤금치를 가루로 내서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것이다. 결국 발각되어 폐빈 된다.
두 번째 빈인
순빈 봉씨는 문종의 후궁 (후의 현덕왕후 권씨 – 단종의 모친)이 회임 한 것을
질투하여 세종내외에게 자신도 임신했다느니 유산했다느니 거짓말을 하다 탈로가 난 것에 더해 그의 몸종과 동성애를 한 것도 발각되었다.
그 녀의 아버지 봉 여는 폐빈 되어 집으로 쫓겨 온 딸을 교살하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정황을
살펴 보면, 세종은 그가 좋아하는 학문에 몰두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즉위
후, 집현전을 재정비하여 문화와 과학의 발달은 물론 국력성장과 태평성대를 이뤄 낸 배경에는 산전수전 겪은
경험을 토대로 주도면밀하게 추진한 세종의 꼼꼼함에 더해 연륜을 바탕으로 군주를 잘 챙긴 황희의 실무형 참모역할이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황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꼽힌다. 그가 세종 때 재상으로 24 년씩이나 봉직할 수 있었던 배경엔 그의 청빈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꼼꼼하고 의심 많은 군주의 신임을 받기 위해 황희는 모든 것을 버렸다.
말년에 비가 새는 초가집에 살면서 누더기 같은 이불과 서책들이 전부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질 정도다. 그는 세종이 사망한 후 2년 간 더 생존하다 89세에
생을 마감한다.
황희는 생전에
연공서열을 파괴하고 실력 위주의 인재를 등용하고자 한 세종의 뜻을 받들어 이의 기반을 마련한다. 이 때 등용된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성삼문, 장영실이다.
베푸는 미덕과
배려를 바탕으로 상대를 설득시켰던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인 황희가 완벽주의자이며 열정 넘치는 군주의 완급을 오래 동안 잘 조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신과 원칙을 바탕으로 펼친 <관용의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조선의 7대 임금 세조와 그의 참모 신숙주에 대해서 논해 보고자 합니다>
첫댓글 조와 종에 대해 궁금했는데 잘 배웠습니다. 그런데 선조 인조는 전쟁을 초래하고 백성들을 큰 고통에 빠지게 한 사람들인데 업적이 있는 왕으로 이름이 붙혀졌다는 것은 이름 붙이는 사람들의 역사의식에 문제가 있었던 같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특히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굴욕의 주체였습니다. 당시 병자호란은 조선역사의 최대의 치욕적인 것입니다. 청나라에 포로로 갔다 돌아온 개화파 큰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자신의 입지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어진 인자를 더해 인조라니 후대의 역사해석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필자께서는 祖와 宗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祖는 (중)시조, 宗은 선대 왕의 정식 혹은 직계 계승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태조는 왕조의 태두를 열은 사람이었으므로 한중 역대 왕조의 첫 임금에게는 祖가 붙여졌고, 세조는 단종의 계승자가 아니면서 왕이 되었으므로 자기 계열로서는 왕계의 시초를 열은 사람이며, 선조, 인조, 영조도 아버지로부터 승계받은 임금이 아니죠(이 세 임금 때문에 형제 간에 왕위 계승자를 祖로 잘못 이해해오셨던 듯). 정조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로부터 승계된 것이 아니고...
그리고 군은 폐위되어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환원)된 임금이죠. 나머지 다른 임금들은 부자관계에서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한 임금들로서 그들에게는 宗이 붙게 되죠. 예외로 태종은 형 정종의 보위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宗을 붙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정종의 아들이란 신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해 왔습니다. 금수강산님의 말씀대로라면 당연히 인조에 대한 평가가 왜곡될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금수강산님의 시리즈 글을 재미있게, 유익하게 읽고있는 독자입니다. 하지만 우려의 마음에서 외람되게 몇 마디 남겼습니다. 죄송~~^.^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작성한 글 중에 중조는 중종이었음을 바로 잡습니다. 제가 배운 지식은 학원강사가 수험생에게 쉽게 가르쳐 주는 수준이고 님께서는 대학교수님 수준으로 깊이가 느껴집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종이라는 명칭 중 부자승계가 아닌 경우가 강화도령 철종도 있었고, 대원군의 아들 고종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어떤 것인가요?
이에 더해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조라는 칭호가 붙여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아뭏든 이런 논의는 재미를 넘어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종에게 종자가 붙여진 것은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강화의 나뭇꾼)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조에서는 왕의 사후에 붙여지는 칭호에 종법제가 중요하게 작용하였지만 철종의 경우, 그는 분명 헌종의 후계자가 아니죠. 하지만 무력하고 무능한 왕이 필요했던 당시 외척이자 세도가들(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게는 매우 적임자로서 발탁되었으므로 그에게 계승자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합리화가 필요했겠지요. 그런 합리화에 의해 철종에게는 종자가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순조는 묘호가 원래 순종이었지만 철종 때 정원용의 주장에 의해 순조로 바뀌었죠. 헌종 사후 철종을 옹립하게 된 근저에는 정원용의 주장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압니다. 순조의 묘호가 바뀌게 된 배경에는 바로 철종의 계승을 정당화하던 의도와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됩니다. 새로운 계보의 형성이 의도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신분상 왕위를 계승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던 고종은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종(효명세자)의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그에게 종이 붙여진 것은 이미 종법제에도 맞지 않지요. 바로 당시 정치적, 사회적으로 문란했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지요? 하지만 제가 식견이 짧아 자세한 정황은 관련 문헌을 더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주요 관심분야가 아니라 소홀했는데 이 기회에 살펴보아야겠네요.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깊이가 한층 돗보이고 흥미롭습니다. 왕의 묘호는 후세에 붙여 지는 이름이라 당시에도 갑론을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