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수도암 원문보기 글쓴이: 광제
수도암은 재가자들에게 염불선을 중점으로하는 도량이며,조계종단은, 선종을 근본으로 하면서, 염불,주력,간경, 절 수행 등 다른 수행방법도 흡수하는 통불교(通佛敎)입니다.
어떤 사찰은 참선이 최상승 근기가 하는 수행법이라고 하고 있고, 그 사찰의 많은 신도분은 참선을 하는 최상승의 근기라는 자부심이 그 도를 넘어 다른 수행방법을 하고 있는 불자들은 멸시(?)하는 형태를 보인다고 하며, 제가 작년에 조계사에 강의를 받으러 다닐때, 조계사가 운영하는 시민선방에는 주로 노보살님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의 위세(?)도 상당했었고, '나다' 라는 상(相)에 꽉 차 있는 모습을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9월 28일 조계종 한국불교역사 문화기념관에서 개최된 '한국 불교를 위한 대 토론회 - 현대 명상문화와 선의 과제'에 방청객으로 참석을 해서 토론회를 지켜보기도 했었습니다.
불교를 좀더 폭넓게 알고 이해하자는 취지와, 혹시, 간화선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불자님을 위해, 아래에 그 내용을 올려봅니다.
올리는 자료는 1)화두. 누구에게 어떻게 받나? (일타 큰스님.조계종교육원) 2)2011년 9월 28일 '불교 닷컴'에 보도된 '한국 불교를 위한 대 토론회 - 현대 명상문화와 선의 과제' 입니다.
--------------------------------------------------------------------------------------
<자료 1) 화두. 누구에게 어떻게 받나? (일타 큰스님.조계종교육원)>
<출처: 일타큰스님 법어 ‘선수행의 길잡이’ 中에서 P.122~P.126)
/ 김현준 엮음 / 효림출판사(2006.8.25. 출간)>
화두, 누구에게 어떻게 받나?
참선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겠다는 결심, '나'의 본래면목을 깨달아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겠다는 발심이 된 사람이라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두는 이러한 발심이 되었을 때 도가 높은 선지식을 찾아가서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선지식은 수행자가 참선을 할 확고한 마음가짐과 기틀을 갖추었는지를 살펴본 다음, 그에게 적절한 화두를 제시합니다.
특히 도가 깊은 선지식인은 수행자와 가장 연이 깊은 화두를 던져 단번에 의심의 고리를 걸어주기때문에, 도가 깊은 선지식을 만나면 큰 의심 속에서 참으로 갈등 없이 오도(悟道)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수월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옛 세상에는 참선을 해서 깨친 도인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참 드물어.
그 까닭이 무엇이여? 내가 그 까닭을 말할 것인게, 잘 들어봐.
옛날 스님들은 스스로 도를 통하지 못했으면 누가 와서 화두참선법을 물어도 '나는 모른다'며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았어.꼭 도를 통한 스님만이 가르쳐 주었는데, 그 도통한 스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시거든. '저 사람이 지난 생에 참선하던 습관이 있어서 이생에도 저렇게 참선을 하려고 하는구나 저 사람이 전생에 공부했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도를 통했으니까 환히 다 아실 것 아니여?
그래서 '옳다, 이 화두였구나' 하고 바로 찾아주시거든.
그러니 그 화두를 받은 사람은 지난 생부터 공부하던 화두니까 잘 안하고 배길 수 있나? 꼭 공부하던 화두를 일러주니까 틀림없이 공부를 이루고 도를 통하는 거야.자신만만하니까 도통하는 거야."
전생에 이어서 현생에서도 같은 화두로 공부를 할 수 있게끔 지도하는 도통한 선지식!
참선을 하고자 하는 이는 이러한 도인스님을 찾아가 화두를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 분을 찾으면 도 닦기가 힘들지 않습니다. 이미 익힌 화두로 정진을 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그만큼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럼 확철대오(廓徹大悟)하고 도통하신 스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지금은 실로 도통한 스님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그래서 꼭 맞는 화두를 받기도 힘이 듭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의심의 고리가 꽉 걸리는 화두, 각 개인별로 가장 적합한 화두를 주는 선지식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있는가? 선지식 자신이 참구하는 화두를 주거나, '이 무엇고 무자 마삼근'화두 등 많은 도인을 배출한 두세 가지 화두를 정해놓고 그 중에서 하나를 간택해 줍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미 다른 화두를 받은 이에게까지 자신이 즐겨주는 화두를 들라고 일러주기도 합니다. 특히 재가불자들이 단체로 화두를 타러오면 일률적으로 수십 명 모두에게 한 가지 화두를 주어 들게 합니다.
이 답답한 현실에 대해 수월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다 글렀어. 또 말세고 말이여. 모두가 이름과 위치에 얽매이다 보니 누가 와서 화두를 물을 짝이면 '모른다'거나 '도통한 스님께 가라'고 하지 않아. 아무렇게나 일러주고 만단 말이지. 안 일러주면 자신의 이름과 자리 값이 떨어지니까 말이여.그래서 화두를 여덟 번 받았느니 아홉 번 받았느니 하는데,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도통을 한다고 할 것인지."
이것이 참선공부 하는 이들의 현실이요, 이 시대 불자들의 슬픔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도인 핑계만 대고 화두선을 팽개칠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참선에 마음이 가고 화두를 받아 단번에 생사를 벗어나는 공부를 하고 싶으면 이 공부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화두를 간택할 수 있는 지침이 있습니다.
1천 7백 가지 화두 중에서 48가지만을 제시한 『무문관(無門關)』이나 1백 가지 화두를 깊이 있게 다룬 『벽암록(碧巖錄)』, 그리고 대혜스님께서 가려 뽑고 또 뽑은 '무자 등 7가지 화두(2월 법공양 참조)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도인 부재 시대, 제대로 화두를 받을 수 없는 시대의 공부인들을 위해, 이들 지침서 중에서 가장 간절히 의심이 생기는 화두를 택하여 정진하게끔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이 땅의 선지식들이 전생의 공부인연까지는 관찰하지 못할지라도,화두선의 전통에 따라 활구의 화두를 줄 수 있는 안목은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이 지구상에서 화두선의 맥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곳도 우리나라요
참선정진을 가장 잘 하고 있는 나라도 우리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선방의 선원장급 스님들은 초심자들을 능히 지도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들을 찾아가 화두를 받고, 화두 드는 법에 대한 지도를 받으면 됩니다.<끝>
------------------------------------------
<출처: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 中에서 P.162~P.167)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발행 / 조계종출판사(2005.5.3 출간)>
수행자 자신에게 꼭 맞는 화두는 있는가?
화두를 두고 자기에게 맞다, 맞지 않다 분별하지 말라. 화두 자체에 좋고 나쁜 것은 없다. 사람에 따라 더 잘 들리는 화두가 있고 잘 안 들리는 화두가 있을 뿐이다.
수억 겁 동안 익혀 온 업이 저마다 달라 수행법 중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고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화두 중에서 개인에 따라 의심이 잘 드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수행자의 타고난 됨됨이나 살아온 과정에 따라 간절한 의심을 촉발시킬 수 있는 화두가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 수행자의 기틀에 맞는 화두를 잘 선택해 줄 수 있는 선지식을 우리는 명안종사(明眼宗師)라 부른다.
화두는 선지식이 저마다 다른 수행자들의 근기에 맞춰 적절하게 쓴 영약이다. 선지식은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그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화두를 주고,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그 유를 깨뜨리기 위한 화두를 준다. 그러기에 수행자는 선지식이 제시한 화두에 쉽게 의심이 걸리는 것이다.
수행자는 스승이 내려준 화두에 대하여 그것이 자신에게 ‘맞다, 맞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맞다,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분별에 떨어진 것이다. 스승이 내려준 화두를 의심해야 하는데 화두를 참구하지 않고 그 자체에 시비를 삼는 것은 발심이 잘못되어 있거나 스승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선지식이 간택해 준 화두를 붙들고 한결같이 참구해야 한다. 어떤 화두이든 하나의 화두만 꿰뚫으면 공안의 깊고 낮음이나 어렵고 쉬움, 같고 다름에 관계없이 모든 화두가 타파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두 자체에는 깊고 낮거나 어렵고 쉬운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그렇게 달리 보일 따름이다. 이와 관련하여 천목 중봉 선사는 <산방야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쩌다 고금의 기연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이리저리 따지려 들지 말고 그 자리에서 단박 깨쳐 생사의 바른 뜻을 꿰뚫어 버려라. 마치 눈 앞에 수만 길이나 되는 장벽이 서 있는 것처럼 오래도록 공안을 참구하다가 홀연히 의심덩어리를 타파하라. 그러면 백 천만 가지 공안의 심천(深淺), 난이(難易), 동별(同別)을 한꺼번에 뚫어 자연히 남에게 묻지 않게 될 것이다.
화두란 헛된 알음알이나 생사심 같은 그릇된 견해를 한 칼에 베어 버리는 취모검(吹毛劍)이다. 따라서 화두에 좋은 화두와 나쁜 화두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자기에 맞는 화두 맞지 않는 화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받은 화두는 어떤 화두이든 모두 나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기 위해 제시된 참된 가르침이라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제시된 화두를 들고 간절히 의심해 나가야 한다. 다만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 지금까지 들었던 화두가 맞지 않으니 다른 화두를 제시한다면 바꿔서 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선지식이 다시 화두를 제시해 주기 전에는 비록 참구하고 있는 화두에 진정한 의심이 나지 않아 당장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 같더라도 지극하고 간절하게 들어가면 진의(眞疑)가 돈발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간혹 화두가 잘 들리지 않을 때는 선지식에게 자주 찾아가 발심을 증장하는 방법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발심 재발심하여 의정이 생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화두는 언제 누구에게 받을 수 있는가?
화두는 확고한 발심이 되었을 때 선지식을 찾아가 그 선지식으로부터 간택(揀擇)받아 그 가르침에 따라 참구해야 한다. 누누이 말하지만 화두는 발심이 되었을 때 제대로 들린다. 발심이 안 된 상태에서 억지로 조급하게 화두를 들게 되면 병통이 생긴다.
흔히 화두 타러 간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화두는 아무 때나 주고 받는 게 아니다. 선지식은 수행자가 발심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잘 판단하여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 올바른 선지식은 수행자의 근기를 보고 화두를 제시한다.
화두는 생각의 길이 끊어진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을 쓸 줄 아는 선지식만이 그것을 잘 활용해서 수행자에게 적절한 화두를 내릴 수 있다. 화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이 화두를 제시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나며 끝내는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화두 공부는 선지식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가르침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화두를 주거나 자기 스스로 화두를 든다면 화두 공부에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진정한 선지식이 나의 온 생명을 걸 수 있는 화두를 제시했을 때만이 그 화두는 힘을 가진 활구(活句)로 작용한다.
화두는 이렇게 선지식의 열린 안목과 적절한 방편에서 주어질 때 잘 들리게 된다. 화두 공부를 점검하는 일도 화두를 제시한 선지식이 해 주어야 간절한 발심을 유지하면서 화두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
화두를 참구하는 이유는 바로 깨침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화두를 타파하고 그 문 없는 문을 확 열어젖히고 나가기 위해선 이처럼 선지식의 지대한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화두는 반드시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야 하며 점검도 그 스승으로부터 틈틈이 받아야 한다.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말씀한다.
“스승 없이 홀로 깨닫기란 만(萬)에 하나도 드물다.”
“스승 없이 홀로 깨닫는 자는 천마외도(天魔外道)다.” 라는 말이다.
종문에서는 수행자의 깨달음이 조작이 없고 거짓이 없게 하기 위해 먼저 깨달은 선사에게 점검과 인가를 받는 가풍이 지켜져 왔다. 그래서 생명을 걸 만한 선지식을 찾아가 화두를 결택(決擇)받아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예외가 있기는 하다. 고려시대 보조 국사는 일정한 스승 없이 공부하였다. 태고 국사는 스스로 깨달은 뒤 명안 종사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 선사에게 인가를 받았다. 근대 선의 중흥조인 경허 선사도 화두를 스승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 화두를 결택해 공부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예로 든 선지식들은 상상근기의 수행자들로 만에 하나의 경우라고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들도 많은 선어록과 경전을 통하여 항상 부처님과 역대 선지식들의 말씀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태고 국사는 깨달은 뒤 자신의 경지를 인가 받기 위하여 머나먼 타국 땅인 중국에까지 다녀왔다.
간화선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지식을 찾아 뵙고 화두를 받아 지녀야 한다. 그러나 마땅한 선지식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차선책으로 스스로 화두를 들 수도 있다. 단 이러한 경우에는 발심이 된 상태라야 하며 정견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화두 드는 방법과 공부를 지어나갈 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화두 공부하는 도중에라도 선지식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 기울여야 한다. 화두 수행의 점검과 깨달음의 인가는 선지식만이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끝>
--------------------------------------------------------------------------------------
<자료 2)2011년 9월 28일 '불교 닷컴'에 보도된 '한국 불교를 위한 대 토론회 - 현대 명상문화와 선의 과제'>
간화선 최상승 수행 근거 미약하다”
이제열 원장 9월 대토론회서 “객관적 이유 있어야”
“안국선원 결과가 간화선 대중화 성공인가” 의문도
2011년 09월 28일 (수) 22:07:35
서현욱 기자 mytrea70@yahoo.co.kr
‘현대 명상문화와 한국 선의 과제’ 토론회는 한국 간화선의 대표적 주자로 이름 높이고 있는 수불 스님(안국선원장)이 주제발표자로 나서 관심을 모았다. 월암 스님(한산사 용성선원장)이 ‘간화선 수행의 현실진단과 개선방향’을, 김태완 무심선원장과 이제열 유마선원장이 토론자로 참석해 간화선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
“간화선 최상승법 근거 미약…객관적 이유 필요”
9월 대토론회 발제자와 토론자는 간화선의 현실인식이 매우 달랐다. 수불 스님은 명상 수행이 간화선의 수승함을 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고 보았지만, 김태완 무심선원장과 이제열 유마선원장은 ‘간화선이 최상승법’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은 간화선이 최상승법이라는 주장이 객관적이지 않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제열 유마선원 선원장은 토론자 중 조계종의 간화선 대중화에 대한 이견의 폭이 가장 컸다.
그는 9월 28일 오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대토론회(현대 명상문화와 한국 선(禪)의 과제)’에 토론자로 참석해, 간화선 수행의 어려움과 수행자들의 인격적 완벽성, 인가의 문제, 교학과의 관계, 화두 타파 후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선병의 문제 등에 대한 근본적 문제점 등을 지적하며 사실상 한국불교의 최상승 수행법으로 꼽히는 간화선의 대중화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이제열 유마선원장은 우선 간화선이 최상승법이라는 기존 한국불교계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수불 스님이 간화선은 최상승법으로 명상 수행자들을 잠재적 간화선 수행자로 보고 대중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에 정면 반박한 것이다.
“수많은 선지식이 간화선 지도했지만 성과 없었다”
이 원장은 “수불 스님의 발제는 확철대오한 선지식의 입장보다는, 간화선 대중화를 위한 수행의 역사에서의 초유의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나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그동안 수많은 선지식이 간화선의 문제점을 말하고 간화선 통해 중생 문제 해결 가능성을 가르치고 이에 이르는 지도법을 말씀했지만, 그것이 수불 스님의 지도방법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며 그동안 조계종의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원장은 “간화선을 수행하는 분들은 한결같이 간화선이 모든 수행법 중 최상승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간화선 안에서 시각이 고정돼 있기 때문”이라며 “왜 간화선이 다른 수행법보다 최고 수행법인지 객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불교에는 수많은 수행법이 있고 이들 역시 열심히 닦기만 하면 얼마든지 삼매를 얻고 지혜를 얻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며 “티베트 수행과 명상이 간화선만 못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 수 없다. 만약 남방불교, 일본 불교 등이 자신들의 수행이 부처님 가르침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면 간화선은 이들을 어떻게 제압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 이제열 유마선원장.
안국선원 결과가 간화선 대중화 성공일 수 없다
이제열 원장은 수불 스님이 안국선원에서 간화선 7일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해 일부 성과를 얻는 것이 간화선 대중화의 결과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일부의 성과를 전체의 성과로 과대포장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 간화선을 지도한 스님들이 많았지만 실제 수불스님의 안국선원처럼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수불스님 개인과 안국선원이란 도량에서 얻어진 간화선 체험 결과를 종단에서 의존해 간화선 대중화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에는 생각을 달리 한다”고 밝혔다.
“안국선원서 생사해탈 인정할 수행자 나왔나”
수불 스님이 20여 년 동안 2만여 명에게 간화선을 지도한 경험을 근거로 간화선의 우월함과 대중화 가능성을 주장했지만, 이제열 원장은 안국선원에서 수행한 사람 중 누가 생사해탈의 경지에 다다랐냐는 질문을 던져 머쓱케 만들었다.
그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주위에서 간화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체험했다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안국선원에서 체험한 간화선 수행자들을 분석했다고 하는데 그 중 과연 생사해탈을 했다고 인정할 만한 수행자가 나왔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 체험이 중간단계의 하나라면 이는 꼭 화두를 참구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간화선은 증오((證悟)를 인정해 왔지 해오(解悟)를 인정해 오지 않았다. 수행의 결과 증오가 아닌데도 중간 체험인 해오에 대해 결과를 인정 하는 것은 활구 참선을 근본으로 하는 전통 선법에 걸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간화선 수행의 결과물을 안국선원과 함께 종단에서 제대로 검증해 간화선 대중화를 위한 모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제열 원장은 ‘명상과 선’이라는 제수행의 문제를 간화선 하나로 국한시키는 행태를 비판했다. 불교에 존재하는 다양한 수행법을 도외시했다는 것이다. 불교가 발전하고 불자와 일반인들을 수행의 세계로 접근하게 하기 위해서는 ‘선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게 이 원장의 주장이다.
“염불 주력 위빠사나가 더 쉬울 것”
간화선의 용이성에 대해서도 회의론을 제기했다. 그는 “재가수행자들 사이에서 화두의 수행의 용이성은 대체로 회의적”이라며 “쉽기로 말한다면 염불 수행이나 주력 수행, 위빠사나 수행이 더 쉬울 것”이라고 했다.
이제열 원장은 간화선 수행자들의 인격적 완벽성에 의문을 제기해 간화선 수행이 한국불교 출가자들의 인성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고 질타했다. 이 원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월암 스님도 수행과 인격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비관적으로 평가하며 간화선 수행자들의 인격적 완성을 문제삼았다.
이 원장은 “돈오하면 부처님처럼 완전한 인격과 행위가 도출되어야 한다”면서 “바라밀의 완성이 성불이라면 깨달음 후의 행위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가의 문제도 지적했다. 과거 많은 선지식 있을 때도 인가 받기 어려웠는 데 지금은 어떻게 인가받아야 하냐면서 “오늘날 간화선 수행자에게 인가를 내릴 만한 선지식이 있는 지” 물었다. 또 간화선과 교학의 관계에서 수행자들의 경전 무용론에 대한 문제제기와 간화선 수행의 깨달음과 법성과의 관계도 물었고, 선병에 대한 대응법도 물었다.
그는 “이번 토론회에서도 실제 한국에서 명상문화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 생략됐다”며 “간화선 대중화에 앞서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명상문화에 대한 종단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들은 부처님에게 귀의하지 않고 ‘견성’ ‘대오’ ‘깨달음’ 등 불교 영양분을 섭취해 사회에 내뱉고 있다. 종단에서는 이에 대해 심각하게 연구한 후 어떻게 정법을 선양할 것인지 , 간화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수불 스님 “말로 지적말고 직접 체험해야”
이제열 원장의 이 같은 문제제기에 수불 스님은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는 2천 5백년이라는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다. 20~30년 사이 한국사회에서 퍼지고 있는 간화선 외 수행방법들은 선지식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일부 숫자 늘리기에 급급한 개인들에 의해 전파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간화선 체험과 관련 말로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해야한다”고 답했다. 또 토론자들의 대부분 질문 역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 직접 체험을 통해 알아가야 한다”는 말로 답했다.
또 명상이 한계점이 있다는 주장을 편 수불 스님은 “위빠사나를 염두한 게 아니라 모든 명상을 염두한 것 말이다. 자신은 위빠사나를 제대로 수행한 전문가에 묻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고 했다. 간화선 이외 수행법의 한계성을 언급한 게 아니라는 말로 논란을 피한 것이다.
▲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
월암 스님 “귀신굴서 방장·조실 나와 문제”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 역시 간화선 수행과 한국불교의 수행풍토에 일침을 가했다.
월암 스님은 한국불교 현실을 “재가불자는 불교적 인생관이 빈약하고, 출가수행자는 수행이력과 일치하지 못하고, 깨달음과 실천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는 기형적 신앙형태가 연출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스님은 “급변하는 세상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귀신굴에 오래 앉아만 있으면 정진을 여법하게 하는 것이며, 이런 살림살이가 뒷날 조실이 되고 방장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납자가 있다면 한심스런 일이다. 이렇게 해 지도자가 된들 무슨 안목으로 세상을 구하고 대중을 깨우치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수행풍도에 대해서도 신랄히 비판했다.
또 스님은 간화선인 일부 수행자들의 생활방편으로 전락하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월암 스님은 “간화선 수행자들이 간화선 정신에 바탕을 두고 철저히 간화방법론에 의해 수행과 깨달음을 실천하며, 아울러 교화의 방편을 시설하고 있는지 반추해 봐야 할 것”이라며 “적정무사에 안주해 선미를 탐착하는 일부 수행전문가의 생활방편으로 전락되고 있다면 간화선 정신을 구현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깨달음 제일주의 “사상정립부터 해라”
월암 스님은 간화선수행자들의 사상정립을 우선 요구했다.
스님은 “간화선 수행자가 철저한 간화정신에 토대하지 못하고 있기에 간화선 수행에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며 “일부 참학자들 중에는 간화선이 깨달음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수행함에는 사상적 전제가 필요 없이 화두참구만 잘하면 된다고 하지만 이로 인해 ‘깨달음제일주의’에 빠져 적정과 무사안일에 침잠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여기게 됐다. 간화선이 깨달음만 추구해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의 일을 도외시 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했다.
이어 스님은 “인천(人天)의 사표가 돼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간화선 수행자가 아무 사상적 정립 없이 바로 선수행에 착수할 수 없다”며 “간화행자는 참선수행에 임하기 전에 꼭 갖춰야 할 사상적 정립이 전제돼야 한다"며 간화선 수행자들에게 간화정신의 확립을 강조했다.
월암 스님은 특히 간화선의 수행의 성과가 없는 이유를 수행법의 문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문제로 보았다.
그는 “조계종 제방선원에는 안거마다 2여 수선대중이 운집해 정진에 매진하고 있고, 재가불자를 위한 선원이 개설돼 선수행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간화선 위기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간화선 수행법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많은 부분 간화선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선원특성·선지식 역할 재고 '급선무'
월암 스님은 간화선 수행자들에게 먼저 인과법(因果法)을 믿을 것을 주문하고, 한국 선불교의 문제를 이론과 실참의 양극화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좌선 중심의 수행풍토도 비판했다.
스님은 “한국 선불교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이론과 실참이 양극화돼 있다는 점”이라며 “몰론 대혜가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아 간화선을 제창하고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은 선은 선이라 말할 수 없다 했지만 깨닫기 전에는 오직 앉아서 참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 수행행태는 일종의 편향된 시각‘이라고 피력했다.
월암스님은 천태지자선사의 어록을 인용해 “선사께서는 언어문자에 집착해 이론만 천착하고 그 공능에 매몰돼 선을 실참하지 않는 학자들을 향해 ‘문자법사(文字法師)’라 칭했다. 또 언어 문자를 배척하고 실천의 지혜가 없이 오로지 앉아있음만으로 선을 삼는 선사들을 항해 ‘암증선사(暗證禪師)’라 비판했다”고 말했다.
월암 스님은 조계종의 수행풍토의 문제를 승풍의 문제와 연결해 비판했다. 물질적 풍요에 빠져 수행납자의 가풍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수행납자의 윤리적 긴장과 절제 부족”
스님은 “오늘날 우리 승풍은 안빈낙도의 수행자적 생활이 결핍돼 있다‘며 ”수행납자로서의 윤리적 긴장과 절제가 부족하다.“며 ”세속이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쾌락적 풍조에 오염되었다 하여 출가수행자의 생활형태가 무비판적으로 세태를 흉내 낸다면 이것 역시 수행납자의 가풍이라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스님은 ”출가해 사문이 된다는 자체가 명예와 이익을 멀리 하고 오직 수행해 널리 제도하고자 함을 명심해야한다“고 꼬집었다.
월암 스님은 “간화선 전통에서 볼 때 현재 우리 선문의 수행풍토의 문제점은 동중수행(動中修行)의 약화에 있다”며 “오늘의 선원풍토로 볼 때 선수행의 문제점은 오로지 좌선일변도의 정진 분위기 속에서 동중공부(動中工夫)에 대한 면역을 전혀 키우지 않은데 있다.”고 지적했다.
“평생 좌복에 앉아 보낸다고 자랑할 일 아니다”
또 “초학자는 고요히 앉음으로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평생토록 좌복 위에 앉아 세월을 보낸다는 것은 간화선 역사와 사상에 비춰 보더라도 결코 자랑이 아니다”며 좌선 중심의 수행풍토를 비판했다.
스님은 아울러 “수행과 인격은 일치한다. 1년 수행, 10년 수행에 따라 인격이 형성돼야 한다. 평생 좌복 위에 앉아 있어도 인격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수행을 거꾸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월암 스님은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도 제시했다. 스님이 제시한 대안은 △승납 안거 차이 고려한 선원 특성화 △수행자 수행방법 통계화 △동중선 노동선 △선교겸수 강화 등이다.
스님은 “기초선, 염불선, 남방선, 간화선 등 선원 구별 없이 모두 뒤섞여 정진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며 ”선원에 앉아 누가 무슨 방법으로 수행하고 있는지, 동중선, 노동선, 선교겸수의 강화 등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월암 스님은 “장로 선지식이 선원에 직접 나아가 납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과 이름, 각자의 본참공안을 파악하고 그 공부의 진척에 따라 간절하게 지도한 옛 가풍을 살리기 위해서는 조실방장이 형식적인 문장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선원에서 실질적으로 납자를 지도하는 스승으로 위상과 역할이 재고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월암 스님은 “간화선은 1대1 맞춤 교육”이라며 “조실, 방장스님 등이 수행자와 선지식 대화 통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간화선이 1천년 이야기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이 시대 살아있고 대중들에게 핵심적 문제로 간화선이 살아 있으려면 오늘날 간화선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선지식들이 가풍을 이어받아 철저한 지도를 펼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 김태완 무심선원장
‘조계종의 선이 조사선인가 간화선인가’
김태완 원장은 ‘조계종의 선이 조사선인지 간화선인지’를 물었다. 또 간화선지침서로 이름높은 <몽산법어>가 올바른 지침서인지 물었다. 김 원장은 <몽산법어>를 ‘삿된 견해’로 판단했다.
조계종의 선이 조사선인지 간화선인지의 물음은 조계종 종헌에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종지로 밝히고 있는 점을 상기하며 이는 조사선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원장은 “수행체계를 정립할 때는 교단의 종지인 조사선은 어떤 것인지 간화선은 어떤 방편을 도입한 것인지 정리되어야 한다”며 “조계종이 조사선을 말하지 않고 간화선만 말한다면 선의 토양을 협소하게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몽산법어>를 ‘삿된 견해’라고 비판한 이유로 “육조 혜능 문하의 조사선이나 대혜종교, 무문혜개, 교봉원묘의 간화선에서나 좌선하여 공부하거나 선정의 힘을 공부하라는 가르침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었다.
아울러 몽중일여, 즉 꿈속에서도 화두가 나타나야 깨달음에 가깝다는 주장 역시 찾을 수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수불 스님은 “몽중일여를 체험하지는 못했으나, 잠이 들기전에 화두를 들고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화두를 생각한다면 그것이 몽중일여의 경지로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