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의 들꽃에세이 51>
약한 듯 강하며 흔한 듯 귀한 나무 - 땅비싸리(山豆根)
학명: Indigofera kirilowii Maxim. ex Palib.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장미목 콩과 땅비싸리속의 낙엽성 저목
잎과 꽃이 싸리나무와 비슷하여 이름에 ‘싸리’자가 붙었다. 땅채송화, 땅나리, 땅빈대, 땅귀이개처럼 식물명 앞에 ‘땅’이 붙으면 키가 작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땅비싸리』는 ‘싸리나무를 닮은 키 작은 나무’라는 뜻. 언뜻 키가 작고 모여 나는 모습이 초생으로 보이지만 엄연히 목본이며, 뒷동산의 밭두둑에서부터 산허리의 비탈면까지 흔한 것에 비한다면 화초나 약재 용도의 귀함은 새삼스럽다. 땅비싸리의 이명은 논싸리, 땅비수리, 젓밤나무, 황결(黃結), 고두근(苦豆根) 등이다.
학명 인디고훼라(Indigofera)는 쪽빛염료를 의미하는 인디고(indigo)와 포함한다는 뜻의 훼로(fero)의 합성어로 이 식물에서 푸른색 원료를 얻었다. 아시아·이집트·그리스·영국 등의 고대인들도 알고 있었으며 인도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이 식물에서 염료를 얻는 것이 주요 산업이었다 한다. 일본명은 죠유센니와후지(朝鮮庭藤)인데, 조선 정원의 등나무를 닮은 나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땅비싸리』는 1차천이(自然遷移)의 선구식물이다. 즉 해안지방이나 화산에 의해 새로 생긴 땅처럼 과거에 식물군락이 전연 없었던 토지에서 시작되는 환경 종이며, 역시 벌채나 화재 등으로 원래의 삼림이 착란 된 뒤 자연적으로 재생하여 숲을 이루는 벌채지식물군락의 식생형이다. 땅을 기듯이 넓게 뻗는 뿌리에서 분지하여 지면 위로 올라오므로 쉽게 군락을 이룬다. 이런 생태를 이용하여 새로 터를 닦아 생땅이 드러난 정원의 경사면이나 절개지에 심으면 적당하다.
봄에 올라오는 어린 개체는 줄기와 잎과 꽃대가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다. 줄기는 ‘삼지구엽초’나 ‘꿩의다리’처럼 낭창낭창하며 이에 비해 잎은 상대적으로 보드랍고 여리다. 이때쯤 꽃대도 살짝 붉어지기 시작하는데 여간 착하지 않다. 나비 모양의 꽃은 콩과식물의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땅비싸리의 꽃은 다른 싸리나무들의 꽃에 비해 상당히 크다. 어린 아이들 허리춤의 높이로 사월 말부터 유월 말까지 담홍빛 꽃을 줄기차게 피워댄다. 우리나라에는 꽃 이삭이 잎보다 긴 ‘큰땅비싸리’와 잎 뒷면에 털이 없는 ‘민땅비싸리’ 등 3종이 분포한다.
생약명은 산두근(山豆根: 산에서 나고 열매가 콩 같은 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뿌리를 약재로 쓴다. 보통 약재상에 나오는 산두근은 베트남에서 자생하는 ‘월남괴(越南槐)’가 기본으로, 우리나라의 땅비싸리는 그 대용이다.
「산두근」의 맛은 쓰며 성은 차다. 폐·위로 들어가 모든 약독을 풀고 통증을 멎게 한다. 찬 성질로 열을 다스리고, 인후를 안정시켜 기침을 멈추며, 부종과 황달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다. 약리작용으로는 심장 수축력 증강, 백혈구 상승 작용, 면역 증진, 항암 작용 등이 알려졌다. 다만 약성이 쓰고 차므로 비위가 약한 사람은 피하도록 한다.
바야흐로 봄꽃들의 현란한 축제마당에서 산비탈의 허전한 자리 하나를 지키고 있는 나무지만 우리 같은 탐화가들의 셔터사회에선 은막의 스타처럼 반갑다. 양지쪽 밝은 숲 자리에 단아한 키, 상대적으로 맑고 큰 송이모양꽃차례(總狀花序), 드레시한 깃모양겹잎(羽狀複葉), 미끈한 줄기,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서성이는 듯한 표정은 매력적이다. 산인 듯 산 아닌 곳에서 풀인 듯 풀 아닌 존재로 태어나 지상을 늘 낮고 맑게, 굳세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생태성은 남다르다. 땅비싸리의 꽃말이 ‘사색’이라 했던가. 문득 생각이 골똘해진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