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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나라 중국(中國)
11. 하밀(哈密)과 선선(鄯善) 인근의 풍광(風光)
돈황(敦煌)에서 하밀(哈密)까지 버스로 9시간 30분(430km)이 걸리고, 다시 하밀에서 선선(鄯善)까지 4시간(320km) 동안 사막 가운데를 달린다. 돈황(燉煌)이 있는 깐수성(甘肅省)으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경계를 벗어나 신강(新疆) 지구로 들어서면 도로상태가 훨씬 나아서 빨리 달린다.
황량한 사막은 시뻘건 흙더미와 돌 부스러기들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의 연속인데 노중(路中)에 용변을 보라고 차를 세워 내려보니 길옆은 온통 말라빠진 똥(便)이 널려있고,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휘몰아치는지 소변을 보면 바지 앞을 적시기 일쑤다. 여자들은 나지막한 언덕 너머로 바람에 휘둘리며 달려갔다가 소변으로 젖은 신발의 모래를 털어내며 돌아온다. ^^*
그 옛날, 우리는 지금 차를 타고 달리면서도 지치는 이 이 메마른 황무지 길을 낙타에 짐을 실은 대상(隊商)들이 하염없이 걸어갔을 생각을 하면 저절로 머리가 수그려진다. 허미(哈密)가 가까워지자 그 황량한 벌판에도 먹을 풀이 있는지 야생 낙타들이 풀을 뜯으며 몰려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 오아시스 농산물
자그마한 오아시스 도시 하밀(哈密)은 공업과 무역의 중심도시로 부상하고 있다는데 인근에 대 유전(西河油)도 있어 주목받는 도시이다. 그러나 예전부터 하밀과(哈密果-멜론)의 산지로 유명하여 20여 종의 멜론과 포도가 중국 전역으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충분한 일조량과 좋은 물 덕분인지 당도가 무척 높고 포도는 물론 멜론도 무척 달고 맛있어서 우리도 질리도록 먹었는데 우리나라 과일값보다 무척 싸다.
오아시스 포도 / 당도가 무척 높은 수십 종의 건포도 / 포도 건조장
포도는 말린 건포도가 시장마다 종류별로 엄청나게 많이 쌓아놓고 파는데 건조 방법에 따라 품질이 다르고 가격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나무에 매달린 채로 말리는 것이 제일 상품이고, 송이로 따서 건조장에 매달아 자연풍으로 말리는 것이 다음인데 한 달쯤 걸린다고 한다. 요즘은 약품처리로 일주일 만에 말리는 것도 있다는데 제일 하품이고 인체에 유해하다고 한다. 이 부근은 가는 곳마다 흙벽돌로 구멍이 뻥뻥 뚫리게 지은 포도 건조장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12. 유목민 카자흐(Kazak) 족
파리쿤 목장 / 파오 안주인의 환대 / 회왕묘
하밀(哈密)에서 1시간 20분 거리에 있는 천산산맥 기슭의 파리쿤(巴里坤)은 유목민들의 터전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며, 유목민 카자흐족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위구르(维吾尔)인은 서양인 외모를 닮은 아랍계통으로 무슬림들인데 비하여, 카자흐족은 전형적인 몽골계 인종으로 우리 한국인과 외모도 거의 같고 순박하여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카자흐족 승마체험을 했는데 말도 자그마하고 순하다. 승마체험 후 방문한 카자흐 천막집 파오(Pao)에서는 전통복장을 갖춰 입은 주인여자가 흰 비단 천을 들고 환영의 인사를 하며 파오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 마유(馬乳)로 만든 치즈와 하밀과(哈密果)를 대접한다.
다음날, 시설이 훌륭한 하밀 홍성호텔(哈密 紅星賓館)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회왕묘(回王墓)를 관람했다.
회왕묘는 회족(回族)이 세웠던 하밀국의 역대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회교사원 모습의 건물도 있고, 역대 회왕들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쪽 귀퉁이인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에서 사막 지프차(Jeep) 타기를 했다.
상당히 높은 모래 언덕을 가속을 이용하여 모래에 안 빠지고 용케도 올라가는데 아슬아슬하다. 엄청난 굉음을 내는데 한번 갔다 와서는 엔진을 식히려고 물을 붓는데 엄청난 김이 치솟는다.
13. 하서회랑(河西回廊)의 화염산(火焰山)
하서회랑 화염산(火焰山) / 천불동(千佛洞) 석굴
다음 행선지인 고창고성(高昌故城)으로 가는 길목에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화염산(火焰山)이 있는데 이 거대하고 황량한 골짜기 한가운데쯤, 수많은 부처님의 조각을 모신 천불동(千佛洞)이 있다.
중국 남북조시기에 조성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 천불동 석굴은 모두 70여 개인데 고대 고창국(高昌國)의 사원(寺院)으로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훼손이 심하여 안타까웠다.
더울 때 기온이 50도를 넘고 지표온도는 80도가 넘어 계란을 깨어 놓으면 바로 계란플라이가 되어 버린다는 화염산은 서유기에서 우마왕(牛魔王)과 철선녀(鐵煽女)가 현장법사 일행을 불로 괴롭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타 죽을 것만 같은 열기를 내뿜는다. 중국영화 ‘서유기(西遊記)’를 이곳에서 찍었다는데 높은 봉우리에 실제로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후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계곡 밑바닥은 물이 흘러 미루나무 종류인 듯 푸른 숲을 이루고 있고, 까마득히 쳐다보이는 산은 온통 검붉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길옆에는 영화세트인가 말을 탄 현장법사를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모시고 가는 실물 크기의 조형물도 서 있었다.
화염산 계곡 중간쯤 까마득한 사면(斜面)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고 꼬무락거리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이는데 옆쪽으로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길도 보인다. 올라간 후 썰매를 타고 내려올 모양이다.
이 뜨거운데 미쳤지... 쳐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한여름 홍사암(紅砂岩)의 띠에 붉은 햇빛이 반사되어 마치 붉은 빛을 내뿜으며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을 닮아 이름이 화염산(火焰山)이 되었다고 한다.
14. 황량한 벌판의 고창고성(高昌故城)
투루판 동쪽 40km 지점 황량한 불모의 땅에 있는 고창고성(高昌故城)은 기원후 5세기 회족(回族)이 세운 고창국(高昌國)의 수도로,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내성만 있다.
성안은 엄청나게 넓어서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중간쯤 갔다가 돌아오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붉은 흙벽돌로 지은 성벽과 건물들은 건조한 날씨 탓에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옛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남아있다. 천축(天竺-印度)으로 가던 현장(玄奘三藏)법사 일행이 이 고창국(高昌國)에 들렀는데 고창왕이 불교에 심취하여 현장법사(玄奘法師) 일행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설법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고창고성(高昌故城) 유적 / 교하고성(交河故城) 유적
유적 중에는 설법을 듣기 위해 특별히 지었다는 건물도 있는데 신하들이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이면 왕이 엎드려 현장법사가 왕의 등을 밟고 연단에 오르게 하였다는 방과 설법대(說法臺)도 보인다. 현장법사는 이곳에 1년여 머무르며 설법을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꼭 다시 들러 불경도 나누어주고 설법도 들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고창왕은 천축국까지 가는 동안 지나치는 모든 나라의 왕들에게 통행증을 써주어 현장(玄奘) 일행은 무사히 천축(天竺-印度)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 한혈준마(汗血駿馬)와 고창국의 멸망
이 지역에서 기르는 말은 달려도 지치지 않는 명마로 달릴 때 핏빛 땀을 흘려서 한혈준마(汗血駿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말(馬)을 탐낸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사신을 보내 많은 돈을 줄 터이니 말을 보내달라고 하자 고창왕은 당나라가 그 말을 타고 쳐들어올까 걱정되어 사신을 죽여 버렸다고 한다. 격노한 당태종은 군사를 보내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켰고, 천축(天竺/인도)에서 불경을 싣고 돌아오던 현장 일행은 고창국이 멸망하였다는 말을 듣고 다른 길로 돌아서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현장(玄奘 혹은 三藏) 법사의 16년간 5만여 리의 구도(求道) 여행을 손오공(孫悟空), 저팔계(豬八戒), 사오정(沙悟淨)을 등장시켜 소설화한 것이 서유기(西遊記)인데 실제 현장법사의 여행은 7세기 당나라 때 이야기이고, 소설로 쓴 사람은 16세기 명나라 시대(明代)의 작가 오승은(吳承恩)으로 소설(小說)이다.
삼장법사가 자신의 여행을 직접 기록한 것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인데 이것은 실제 여행기인 셈이다.
고창국 유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스타나(阿斯塔那) 지하묘도 있는데 3~7세기(世紀)에 축조된 고분군(古墳群) 유적이다. 이 유적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수많은 미라와 유물이 나온 것으로 유명하며 지하 묘실(墓室)에는 채색벽화도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15. 강안(江岸)의 요새 도시 교하고성(交河故城)
투루판 남쪽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교하고성(交河故城)은 두 강줄기가 만나는 곳의 중간 지점에 있는 천혜의 요새(要塞)로 축조된 성(城)이자 도시인데 고대 교하국(交河國/2세기)의 수도였다고 한다.
강의 양안(兩岸)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 버들잎 모양의 3km 정도 기다랗게 형성된, 요새 형상인 교하고성(交河故城)은 지하 3층까지 굴을 뚫어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고창고성과 비슷한 형태로 붉은 흙벽돌로 지은 건축물들은 훼손이 심한 편이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건물들의 안내문도 잘 설치되어 있다. 더운 사막 지역이다 보니 지하도시가 훨씬 시원했을 것이고, 절벽 아래 강에서 물을 끌어 올려 저장하였던 시설도 보인다.
16. 투루판(吐魯番)과 2천 년 역사의 지하수로(地下水路)
투루판은 위구르족의 고향으로 불리는데 분지(盆地)로 무척 덥고, 포도와 석류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마침 우리가 갔던 8월 27일이 포도축제일이어서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저녁에 투루판(吐魯番)의 제일호텔(第一賓館)에서 잤는데 이름만큼 시설이 좋지는 않았다. 저녁 식사는 양고기 통 바비큐였는데 먹을만했고,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위구르 남녀무희의 멋진 공연도 있었는데 팁 1달러를 주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빵 굽는 화덕 / 위구르족 무용수
다음 날은 인근에 있는 지하수로(地下水路)를 둘러보았는데 천산(天山)의 만년설이 녹은 물을 사막 가운데로 끌어다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한 시설로 그 역사는 실로 2천 년이 넘는다고 한다. 투루판지구에만 천여 개의 수로(水路)가 있는데 짧은 것은 3km 정도에서 긴 것은 30km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한다.
이 수로를 파내느라 흙을 퍼내기 위하여 하나의 수로에 수백 개의 우물 형태의 수직 땅굴을 수로까지 파내려갔는데 깊은 것은 거의 100m에 이른다고 하니 실로 놀랍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 대운하와 함께 이 지하수로를 중국 3대 고대 건축물로 꼽는다고 한다. 수로 관광은 공개된 수로(水路)만 들어갈 수 있는데 사전에 소지품에 독극물이나 오염물질이 있는지 철저히 검사한다. 굴 안에는 당시 사람들이 측량, 굴착(掘鑿)하고 또 물을 길어가거나 휴식을 취하는 모습 등의 조형물을 만들어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내부가 바깥보다 매우 시원하다.
수로를 측량하는 조형물 / 우루무치 민속 공연단
다음으로 회교사원과 포도 농장도 방문했는데 이 지역 토착민인 위구르인들의 종교생활, 포도의 종류와 건조시설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위구르인들은 집에 손님이 방문하면 안주인이 환영의 의미로 춘다는 서너 개의 접시를 포개어 머리에 이고 추는 춤을 보여주었는데 음악과 춤사위가 매우 이국적이었다.
17. 누란(樓蘭)의 미녀
선선(鄯善)은 기원전 19세기경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옛 선선국(鄯善國 혹은 樓蘭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인근에서 ‘누란의 미녀’로 불리는 미라(Mummy)가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누란의 미녀(美女) 미라는 현재 우루무치(烏魯木齊)의 위구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우루무치 위구르 박물관은 그 규모는 물론, 전시품의 질과 양에서 국내외의 이목을 끄는데, 그중 가장 세인(世人)들의 관심과 눈길을 끄는 것이 3,800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누란(樓蘭)의 미녀’로, 40대 초반 여성의 완벽하게 보존된 미라(Mummy)이다.
누란의 미녀 / 소하묘(小河墓) / 스벤 헤딘
중국의 옛 문헌(文獻) 속에는 기원전 1,900년 무렵 중앙아시아의 사막 가운데 로프노르(Lop Nor) 호수를 끼고 누란(樓蘭)이라는 아름다운 왕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호수로 흘러들던 강물이 흐름을 바꿔 호수가 말라버리면서 도시는 사막화되어 모래 속에 묻혀 왕국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고고학자와 역사 학자들 초미(焦眉)의 관심을 끌었던 누란왕국의 위치와 유적은 20세기 초반까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27년,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1863~1952)이 문헌 속에 나오는 신비의 고대국가 누란왕국을 찾으러 이곳으로 오는데 기막힌 행운으로 1,500년을 주기로 흐름이 바뀌어 제자리로 돌아오는 하천(河川)이 최근 그 흐름이 제자리로 바뀐 것을 발견하고 모래 속에서 고대유적을 찾아낸다. 사막 가운데 작은 하천 옆에서 도시와 묘지(墓地) 유적을 찾아내는데 이 묘지가 작은 하천 옆에 있다 하여 ‘소하묘(小河墓)’라고 명명했고, 이 유적이 문헌 속의 바로 그 누란왕국(樓蘭王國)이었다. 전설처럼 문헌상에서 존재하여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4,000년 전에 화려한 문화와 번영을 누린 누란(樓蘭) 왕국이 베일을 벗고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냈는데 수많은 유물 중에서도 완벽한 형태로 발굴된 한 여인의 미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자그마한 키(155cm), 작은 머리에 오똑한 콧날, 치렁치렁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칼, 화려한 옷과 장식물로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의 미라는 건조한 사막의 모래 속에서 3,800년 동안 완벽하게 보존되어 오늘 우리에게 옛 누란왕국의 영화와 번영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 미라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일명 ‘죽은 모나리자’, 또는 ‘누란의 미녀(美女)’라 불리게 되었다. 이 미라의 주인공은 누란왕국의 왕비거나 고위직 부인으로 보이는 45세 정도의 여인으로 골격과 체형이 백인으로 보이며 그것도 서유럽 인종의 백인에 가까워 보인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동쪽 끝인 이곳까지 서(西)유럽인들이 진출하였다는 사실의 증명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전시된 유물들은 촬영이 금지되어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이 위구르 박물관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발굴된 엄청난 양의 미라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나는 다른 것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이 ‘누란의 미녀’를 본 순간 이상한 감동에 사로잡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근처를 수차례 배회하며 설레는 가슴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1960년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 靖)가, 2019년에는 우리나라의 작가 백시종(白始宗)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픽션(Fiction)으로 엮어 ‘누란의 미녀’라는 제목으로 책을 집필하여 크게 히트하기도 하였다. 특히 위구르족 여인들은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렇게 위구르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실크로드 7박 8일의 패키지여행을 끝내고 일행은 서울로 돌아간 후 나는 홀로 곧바로 사천성(四川省) 청두(成都)로 날아가 한 달간의 중국 배낭여행을 다시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