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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형태의 노동조합주의와 단절하자.
1. 자본주의 국가 속으로 통합된 노동조합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 기구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노동계급 안에서 노동자를 통제하는 자본주의 국가 기구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본질의 변화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을 제국주의 전쟁에 밀어 넣기 위해 계급 전쟁 중단을 선언했을 때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그 후, 모든 나라에서, 평화와 전쟁 속에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을 통제하고 위기를 관리하는 부르주아 계획의 핵심이었다. 노동조합이 국가에 통합되는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모든 나라에서 (국가에 통합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내부에서 방해하면서 지배계급에 가장 효과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2. 자본주의 위기관리에 참여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때는 자신들의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서인데, 이때 투쟁을 회피하는 노동조합은 일반적으로 “희생은 없다.”라고 선언하고 나서, 곧 말을 바꾼다. 그들에게 문제는 결코 “희생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언제나 “어떻게 희생을 도입하고 조직 하는가?”였다. 그리고 이 대본의 마지막 행동은, 수백 번 연기했던 것으로 언제나 똑같았다. 자본의 이윤을 위한 노동자들의 새로운 희생이 그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승리를 외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 없었더라면 더욱 나빴을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공식 대표자인 노동조합 관료는 공식적으로 노동법(반(反)노동계급적인 법)을 협상하고, 자본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에 희생을 강요하는 공식적인 문서에 서명한다. 노동조합 관료는 자본과 국가 경제의 편에서 사고한다. 그들은 지배적인 경제 체계의 논리 속에 자신의 행동을 자리매김한다. 자본의 논리가 희생을 더 크게 요구할 때, 그들은 경제 위기를 일종의 ‘자연적 대재앙’(지진이나 갑작스러운 한파)으로, 자본주의를 영원히 주어진 본성으로 여기는 소위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임무를 갖는다.
1980년대에 프랑스 노동조합은 처음엔 우파 정부와 그리고 다음엔 좌파 정부와 체계적으로 실업 급여를 비롯한 많은 수당을 줄이겠다는 협상에 서명했는데, 그때 이러한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노동조합이 직·간접적으로 노동계급을 배신하며 행한 모든 정치·경제적인 수단의 정교화는 언제나 이 ‘현실주의’에 대한 방어였다. 독일에서 정부는 독일 노동조합과 협조하여 가족 수당을 줄였다. 스페인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정부가 연금을 삭감한 것도 스페인 노동조합과 함께였다. 영국의 보수당 정부가 공공 부문에서 50만의 일자리 감축을 준비한 것도 노동조합의 ‘전문가들’과 함께였다. 이탈리아의 ‘중도 좌파’ 정부가 임금 차등제(물가나 이윤의 변동에 따라 변하는 노동 임금 기준)를 파기한 것도 노동조합과 함께였다. 벨기에 정부가 실업 급여의 10% 감축한 것도 벨기에 사회주의 노동조합(FGTB)과 함께였다. 2005년 5월, 영국 공영 방송(BBC)의 직원들이 대규모 일자리 감축에 직면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모든 강제적인 정리해고에 저항할 것이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우리는 현장에서 감축의 규모와 정도에 반대하기 위해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공공 영역에서는 (TV) 사용료 납부자, 정치인, 그리고 여론 형성자와 함께, 영국 방송 중에서 BBC가 투자한 돈에 가장 훌륭한 가치를 제공한다는 사례를 만들기 위해 일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과는(?) 계획대로 일자리가 줄었다. 노동조합은 현재도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다.
3. 투쟁의 방해
유럽의 노동조합과 관료들이 ‘프롤레타리아를 선동’하는 모든 표현을 막고, 프롤레타리아를 막다른 길로 내몰기 위해 파업을 방해하고, 민족주의적 자극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지난 몇십 년간 사용한 수천 개의 책략을 다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투쟁의 내용을 민족주의적인 막다른 길로 돌리는 것
- 투쟁을 국가나 지역에 고립시키는 것
- 단결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
- 전투력을 쓸모없고 사기를 꺾는 행동으로 돌리는 것
- 계급연대 실천의 토대를 침식시키는 것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도 넘쳐난다.
- 1979년 프랑스에서 노동조합 기구들은 철강노동자의 전투력을 (독일산 철광석을 열차에 싣는 것에 반대하며) ‘프랑스 제품을 생산하자!’라는 민족주의적 행동으로 바꿔버렸다.
- 영국에서 노동조합은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른 부문에 반대하는 (이기적인) 한 부문의 투쟁으로 표현하며 그들을 고립시켰다. 광산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NUM은 자신을 급진적인 언어로 포장하여 노동조합의 ‘노동계급성’에 신뢰를 얻으려 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공식적인 노동조합들(그들의 노동계급성)은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를 거부했다.
- 1984년 미국에서 노동조합 집행부는 로레인의 철강노동자들에게 지역 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도록 하여 그들을 고립시켰다. 그로 인해 그들은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로부터도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 고립되기까지 했다.
- 독일 서부에서는 노동계급의 전투적인 투쟁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주 35시간 노동 합법화를 위한 거대한 캠페인을 ‘조직’했다. 파업은 노동조합이 신중하게 통제하고 지도했다. 어떠한 통제되지 않는 투쟁력의 축적도 막기 위해 마을과 마을, 지역과 지역을 시시각각 ‘순회’시켰다.
- 이탈리아에서는 노동계급의 분노를 기차를 막는 것에서부터 약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아 도시의 거리를 우울하게 돌아다녔던 ‘로마 행진’(84년 3월)을 조직하는 것까지 극적이고 절망적인 행동으로 이끌었다. (한국의 대규모 집회와 행진도 ‘노동계급의 분노를 절망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같다. - 편집자 주)
- 영국의 광산노동자 파업 동안 노동조합은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적극적인 연대’를 재정 모금과 ‘그것을 위한 판매’ 등으로 대체함으로써 노동계급 안에서 발전하는 계급적 연대 운동을 왜곡시켰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방해한 가장 강력한 사례는 1980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대대적 파업이다. 초기에, 파업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본질을 재확인했다. 하나의 공장에서 단일 파업으로 시작하여, 1980년 7월 수많은 파업이 산발적으로 발전한 뒤, 8월에는 대대적 운동으로 폭발했다. 파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공장 간 위원회를 통해 연결되었다.
“파업 위원회는 그때 400명의 구성원과 공장마다 두 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약 800명에서 1000명이 선출되었다. 대표들은 공장과 중앙 파업 위원회를 오갔고, 가끔 카세트를 사용해 토론을 녹음했다. 각 공장의 파업 위원회는 어떤 특정한 요구를 처리하고, 전체는 중앙 파업 위원회에서 조정했다.” << 국제 평론 23호. “1980년 폴란드의 대대적 파업 : 프롤레타리아트는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대적 파업의 배후에서 ‘자유’ 노동조합의 옹호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노동자들이 민주적이고 독립적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환상에 기대어, 그들은 운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들은 먼저 ‘노동조합 연대’를 창안하여 투쟁을 막다른 길로 내몰았고, 그 후에는 노동조합을 국가 부문(기구)으로 밀어 넣었다.
“노동조합이 없었을 때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강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은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위원회가 투쟁을 운영하고, 선출하고, 통제하고, 그리고 필요하다면, 운동의 중앙 집중화된 기관에 선출된 대표를 파견하고, 그들을 언제나 소환할 수 있는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때부터, 연대(노조)의 창설과 발전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1980년 여름 파업을 일으켰던 때보다 훨씬 더한 생활수준의 악화가 있음에도 노동자의 반응은 훨씬 약하고 더 분산되었다. 오래된 노동조합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연대(노조)가 해낸 것이다.: 주간 근무일의 연장(‘자유로운 토요일’의 포기), 빵 가격의 3배 인상, 다른 기본적인 생필품들의 엄청난 가격 인상, 그리고 심각한 결핍을 노동자들에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폴란드 노동자들을 (자본주의적) 자주관리의 교착상태로 밀어놓고, 작년(1980)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서는, - 그것이 이 착취의 책임을 져야 할 여당 관점과 양립할 수 있는 한 - ‘옳은’ 선택을 했다고 한 것이 바로 연대(노조)이다. 연대는 너무 많은 투쟁을 해체시킴으로써, 검열과 탄압의 문제에 대한 당국의 현재 공격에 근거를 마련했다.” << 국제 평론 27호, “폴란드 노동자들의 투쟁의 1년”>>
1981년 12월, 야루젤스키 장군은 쿠데타로 폴란드 정권을 잡았고, 연대의 레흐 바웬사와 같은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폴란드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의 노동계급 동지들로부터 고립되었는데, 특히 서유럽에서 고립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투쟁이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진정한’ 폴란드를 원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유럽 민주주의의 자유와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위해 ‘코뮤니즘(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뒤늦은 교훈 덕분에 부르주아지는 전(前) 교황에게 영향을 받는 그의 복사(服事)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가 ‘코뮤니즘(공산주의)’을 종식하는 과정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4. 노동조합의 급진화와 평조합원주의의 함정
부르주아 정치와 노동조합주의 세력은, 특히 선진 산업 국가에서 엄청나게 많은 경험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과 노동자 투쟁 방해를 반복하는 것이 노동자들, 특히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역사적 목적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들에게 불신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조합 지도부에 대한 이러한 불신을 노동자들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라거나 ‘너무 개량주의적’이라거나 ‘너무 관료적’인 것에 관한 관심으로 돌리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좋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급진화’라는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보다 ‘좌익’ 지도부를 선출하고, 큰 임금 인상이나 정부 정책의 변화 등 급진적인 요구를 추진하는 것이다. 1995년 프랑스 파업에서 노동조합은 정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까지 보였다. 영국에서 신노동당이 자리 잡으면서, 노동조합과 정부 사이의 의도적인 거리 두기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수많은 노동조합이 당에 재정적 지원을 줄이거나 심지어 다 함께 중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것은 또한 ‘비판적’, ‘반(反)지도부’ 또는 ‘반(反)노동조합’의 경향을 보일 수도 있다. 이들은 다양한 형식과 이름을 갖고 있다. - ‘기초 노동조합주의,’ ‘평조합원(주의)’, ‘코디네이션’ 등. - 그러나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노동조합을 넘어선 급진적 계급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협에 충실한 기본적인 노동조합의 형식(질서)을 방어하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조합 자기방어의 가장 해로운 형식이다.
70년대에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했던 다양한 정치적 위장술의 일반적인 경향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정부의 좌익’(영국의 노동당, 미국의 민주당, 서독의 사회민주당)으로 자리 잡게 하거나, 적어도 그 ‘좌익’ 세력의 정책들을 위해 정부에 참여하도록(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적 타협’, 프랑스의 공산당과 사회당의 ‘공통의 강령’) 했다. 노동자들의 ‘공식적인’ 대표자들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동자들에 ‘일시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관점으로 정부에 참여했다. 이러한 정부 안에서 ‘노동자 조직’의 존재 이유는 희생의 과실이 노동계급에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거짓’을 진실인양 보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일은 오지 않았고, 경제 위기와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이 약화하기는커녕 더욱 악화하였다. 78~80년 투쟁의 물결은 부르주아지에 정부 내의 좌익 세력 참여(또는 연합)를 계속하는 것이 - 노동조합의 지지와 함께 -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는 지연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안에서 경찰 임무를 수행할 능력도 감소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노동자들이 직면한 상황에 대한 무거운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80년대에는 주요 선진국들에서 부르주아지가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노동자’ 정당들(영국, 독일, 또는 미국 같은 나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당, ‘라틴’지역의 공산당들)은 다시 반대로 돌아섰다. 노동자 투쟁 파괴자로서의 자신들의 기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급진적인’, ‘비타협적인’, 심지어 ‘혁명적인’이라는 언사도 사용했다.
프랑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부의 좌익’을 나중에 경험했다. 하지만, 단기간에 같은 현실이 부과되었다 : 3년간 PCF(프랑스 공산당)가 정부에 참여한 후, CGT(일반 노동조합 - 역사적으로 공산당에 가까움)의 신뢰 상실은 가속되었고, CGT는 투쟁에 대한 통제권을 모두 잃을까 봐 야당으로 돌아서기 위해 정부에서 나왔다.
우리는 이 ‘언어의 급진화’가 모든 노동조합에 일반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단일 노동조합에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모든 나라에서 노동조합의 구조는 ‘급진화된’ 노동조합과 ‘현실적인’ 노동조합이 존재하며, 각각의 노동조합 안에는 ‘전투적인’ 경향과 좀 더 ‘신중한’ 경향이 역할을 나누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들은 노동조합 집게(펜치)의 상호보완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 영국의 광산노동자 파업은 광산 노동조합과 지도자인 스카길(Scargill)의 ‘급진주의’가 한쪽에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전체 노동조합 조직의 ‘현실주의’로 나누어졌다.
- 84년 독일 노동자들의 투쟁은, IG 금속의 ‘급진주의’와 DGB 기구의 ‘온건주의’로 나누어졌다.
- 84년 초 프랑스 탈보트(Talbot) 노동자들의 파업은 CFDT의 ‘급진주의’와 CGT의 ‘신중함’사이에 있었다.
- 84년 초 벨기에 노동자들의 반발은 FGTB의 ‘용감한’ 경향과 CSC(기독교)의 ‘회유하는’ 경향 사이에 있었다.
노동조합 간의 이러한 역할분담은 공식적인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안팎의 다양한 ‘비판적인’ 노동조합 경향들 사이에서 또 다른 분업을 수반했다. 1989년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조합 지도부의 틀을 깨려고 했을 때, 프롤레타리아트를 거슬러서 체계적으로 따라왔던 것이 이러한 경향이다. 공식적인 노동조합의 직접 통제를 느슨하게 만드는 투쟁이 성공하면 할수록, 이러한 ‘부끄러운 노동조합주의’에 반대하는 흐름이 올라왔다. 이 극적이고 장황한 행동의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조합의 이미지를 빛내려 하는 것 이외엔 아무 기능도 없는, 과거에 속한 무력한 형태의 조직일 뿐이다. 평조합원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조합을 ‘변형’하고 ‘재건’할 가능성을 좀 더 잘 방어하기 위해 관료화된 노동조합의 조직 질서를 무너뜨리는 투쟁을 하지 않고, 오직 ‘지도부’만을 비판하고, 그 안에서 싸운다. 그것은 ‘순수한’ 노동조합의 사상을 방어하기 위해 오직 공식적인 노동조합만을 비판한다.
좋은 노동조합주의는 우리 시대에 불가능하다. 이것은 노동조합 지도부가 부패했고, 오늘날 노동자들의 전투 속에서 더는 차지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주요한 경제법 개정 투쟁을 주장하는 노동조합주의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비효과적이고,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쇠퇴기의 노동자 투쟁은 자본주의 국가에 흡수되어 가는 노동조합을 넘어서야 하며, 그것은 계급투쟁에 적합한 조직 형태인 파업위원회와 노동자총회로, 궁극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전면적이고 공공연한 투쟁을 벌여나갈 노동자평의회를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량화, 어용화 된 노동조합은 크든 작든,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에 흡수된다. ‘(좋은) 계급적 노동조합주의’의 가능성을 방어하는 모든 경향은, 주창자의 원래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노동자 투쟁이 유일하게 발전할 가능성(대대적 파업, 급진적, 정치적, 그리고 자기 조직적인 발전)을 막는다. 우리는 비록 그것이 경제적 조건의 개선을 위한 것일지라도 노동조합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계급투쟁을 지지한다. 이러한 경제 투쟁조차 노동자들을 의식적으로 만들고 세계를 변화시킬 단결과 연대의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뮤니스트의 역할은 이러한 투쟁에 대한 잘못된 환상이 퍼지지 않도록 근본적이고 혁명적 전망을 제시하는 일이다. 노동자 투쟁에서 노동조합과 그 조직질서들이 어떻게 투쟁을 이탈시키고 통제하는가를 지적하고, 단호하게 비판하며, 노동조합(질서)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투쟁을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의 끊임없는 시도와 자발적인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결합해 노동자들의 진정한 계급조직인 노동자평의회를 현실에서 앞당길 것이다.
계급적 노동조합주의 방어 경향은 노동자 투쟁의 발전을 막는 ‘노동조합(주의)’라는 요새로부터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깨뜨려야 할 마지막 성벽이다.
<참고문헌>
“노동계급에 맞서는 노동조합”, 영어판 서문, 2005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