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순국비는 한국전망대에서 약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에 홀로 서있다.
이 비가 여기 서있는 이유는 박재상이 죽었던 장소인 목도(木島)가 대마도가 확실하고, 『일본서기』에서는 대마도의 ‘사우미(組海)’의 ‘미나토(水門:湊)’라고 상세히 그 장소를 밝히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순국비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비는 대마도의 향토사가 ‘나가도메 히사에’씨와 우리나라 황수영 교수의 노력으로 1988년에 세운 것이다.
대마도의 영봉(靈峰) ‘미다케(御岳)’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인 대한해협으로 뱀처럼 흐르는 ‘사호천(佐護川)’의 유역에는 ‘미야마(深山)’, ‘에고(惠古)’, ‘이구찌(井口)’, ‘도모야(友谷)’, 미나토(湊)‘로 이어지는 마을들이 있는데, 이 지역을 통칭하여 ’사호‘라고 한다. 이 곳은 대마도에서는 그 예가 없을 만큼 사호천 덕택으로 벼농사를 일찍부터 많이 지었으며, 우리 조상들의 유적이 특히 많이 발굴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마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도 사호지역에 있는데, 평야라 해봤자 우리나라 농촌 마을의 마을 앞에 있는 텃밭 정도로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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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은 신라 파사왕의 5대 손으로 눌지왕 시대의 충신이다. 그의 아들은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 박문량(朴文良)이다. 백결이란 "현순백결(懸鯤百結, 가난하여 입은 옷이 갈기갈기 찢어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실성왕 원년 신라는 왜국과 강화를 하였는데, 왜왕은 전왕인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실성왕은 일찍이 형님인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을 풀려고 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왜국으로 보냈다. 또한 그는 고구려에서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보내 버렸다.
그 후 눌지왕이 즉위했다. 눌지왕은 박제상을 불러 고구려에 가있는 동생을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박제상은 즉시 고구려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의 허락을 받고 복호와 함께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러자 눌지왕이 또 부탁했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 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박제상은 이번에도 기꺼이 응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고 어리석으나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사오니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도 어진 임금이어서 신의 말이 통했으나 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꾀로써 그들을 속여 왕자를 돌아오도록 하겠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신이 왜국으로 가면 곧 신이 나라를 배반하고 간 것처럼 말을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아내도 보지 않고 떠났다. 그는 율포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사실을 알고 급히 포구에 나가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오시오"
박제상이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 마오."
박제상은 왜국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배반하고 온 것처럼 말했다. 왜왕은 처음엔 박제상을 의심하였으나 먼저 왜국으로 들어온 백제 사람이,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왜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수비를 강화했다. 이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수비병을 사로잡아 죽이니 왜왕은 백제 사람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를 가뒀다는 소문도 들려 왜왕은 박제상이 신라를 배반하고 온 것이라 믿었다.
왜왕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습격하려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군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여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렀다. 이 섬을 일본서기에서 산도(山島)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對馬島이다. 이때 왜장들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모의했다.
"신라를 멸망시킨 뒤에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몽땅 우리나라로 데려오자." 박제상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했다. 왜인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신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사흔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박제상은 두 사람이 함께 탈출하면 실패할 염려가 있다고 하며 미사흔을 재촉했다. 미사흔은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이별을 하고 귀국하였다.
박제상은 다음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그러자 왜인들이 늦게 일어난 이유를 물었다. 박제상은 어제 뱃놀이를 너무해서 피곤해서였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왜인들이 미사흔의 탈출을 알았다. 그들은 박제상을 포박하여 미사흔의 배를 추적했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놓치고 말았다. 미사흔을 놓친 왜인들은 박제상을 왜왕에게 보냈다. 왜왕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회유하려 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 수 없다"고 하여 왜왕을 분노케 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니며 굴복시키려했으나, 그는 "나는 계림의 신하다" 하며 굴복하지 않았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눌지왕은 박제상이 참혹한 고통 속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은혜를 갚게 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경주와 울산의 경계선이 되는 고개)에 올라 일본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되어 날아가 은을암(국수봉에 자리 잡고 있는 절)에 숨었다고 전한다. 그 후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사당자리에 치산서원을 세워 박제상을 모시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