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같이 길을 가는데 구멍 비슷한 걸 보면 거길 꿰간다.
"너 쥐새끼냐? 아빤 쥐새끼 싫어."
"쥐새끼도 새끼는 이쁘잖아."
맞다. 새끼들 때는 다 그렇지.
어른 쥐새끼가 문제.
체념적 순응
연말 분위기도 아니고 겨울 특유의 을씨년스러움도 없고.
이 시대를 사는 아이들 모습과도 같다.
열망도 열정도 없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으니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는 아이들.
아이들만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 삶의 모습이 그렇다.
체념적 순응은 타성보다 위험하다.
사람이 사람다울 때는 굳센 의지를 보여줄 때이다.
아호
아이가 종알댄다.
"내 별명은 소닭이야. 소심한 닭이래."
닭띠니까 그렇다 치고.
소심하다고?
슬쩍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매사에 조심스런 성격을 그렇게 받아들였으리라 여긴다.
자라면서 대소(대단한 소)가 되어 성실함을 보여주기를 기도한다.
소는 참 충직하고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군사독재 시절 여당의 심볼이었다.
어버이 엄마 어르신 등 좋은 단어가 씨레기 집단들의 전유물이 된 세태와 닮았다.
기분전환 삼아 마누라 아호도 하나 짓기로 했다.
이삐.
잉글리시로 EB (ever beauty).
픽 웃고 만다.
겉사람은 후패해 가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듯.
그렇게 내면의 아름다움 가꾸길 바라는 마음.
나눔 베풂 섬김
새해엔 가짐과 누림과 움킴에만 골몰하던 자들이 나눔과 베풂과 섬김을 배워가길 소망한다.
교회들, 특히 대형교회들과 그 지도자들 및 신도들이 앞장서길 바란다.
근거없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혔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혹세무민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현세의 사리사욕를 탐닉하던 중세말의 캐톨릭.
지금 우리 교회는, 사회는 개혁이 필요하다.
예수님처럼은 못 해도 후스나 위클리프처럼 목숨 건 외침이 있어야 한다.
나눔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어야 할 정당한 몫을 되돌려주는 것이고.
베풂은 내 것을 꺼내 필요한 사람들에게 건네는 것이고.
섬김은 나눔과 베풂에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우러르는 것을 말한다.
나부터 제대로 실천해 볼 덕목들이다.
세월호는 진행형
아픔과 슬픔 아직 진행형이다.
아주 눈 감아 아이 곁에 갈 때까지.
아빠 눈에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피눈물이다.
아이 키워 본 사람들, 아이 키우는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잊으라 한들 잊어질 수 없는 기억들.
맺히고 또 맺힌 그 응어리를.
우리가 생각없이 그들에게 던진 말 때문에 그들은 더욱 힘들다는 것을.
쪽 팔리는 고향
DJ시절.
광주일고를 나온 기관장이 점심자리에서 한 말.
"당신 어디 나왔어?"
"광주고입니다."
"광주5고 나왔군."
"네?"
"난 광주6고야."
"? ?"
"목포상고가 광주1고, 목포문태고가 광주2고,
목포고가 광주3고, 광주4고는 전주고,
그리고 당신 학교에 내가 나온 학교지."
요즘 정치판을 보며 그 대화를 떠올린다.
난 광주고다.
그냥 보성 출신이다.
덕 좀 보겠다고 환장한 사람들 참 보기 딱하다.
호남만이 아니다.
다들 더 미쳐간다.
경제위기래
경제위기란다.
IMF 때보다 더 심각하단다.
위기의 항구화는 현대 국가의 특징 아니던가.
나같은 수저들이야 항상 위기이고 하루하루가 전쟁이지.
금모으기 또 하면 되지 뭐.
몇몇은 세상 뜨고 몇몇은 가정을 뜨고...
그러다 보면 또 호황오겠지.
뭘까.
가진 자들은 항상 저렇게 부산(그 동네 사람들처럼)을 떨어 더 잘 사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