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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서 만난 불교공부
최종석
나의 불교와 인연은 외가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 겨울방학이 오면 거의 매년 방학의 절반은 외할아버지 댁에서 보냈다. 나머지 절반은 친할아버지 댁에서 보냈다. 외가는 대대로 커다란 ‘미음(ㅁ)’자 한옥에 살면서 풍족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모두 신학문을 익힌 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활쏘기와 사냥을 취미로 하셨다. 특히 겨울이면 꿩 사냥을 자주 나가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잡아오신 꿩으로 외숙모들은 꿩만두를 만들었다. 어린 나는 꿩만두가 맛있는 것인지 먹기 어려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저녁상에서 그날의 사냥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외가댁에서의 방학생활은 정신없이 빨리 지나가곤 했다.
외할아버지네 과수원 맞은 편 100미터쯤 떨어진 산자락에는 커다란 화살 과녁판이 세워져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겨울철에 사냥을 나가지 않으실 땐 활을 쏘셨다. 어린 눈으로 화살을 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편 신기하고 멋져보였다. 나보다 세 살 위의 외사촌과 나는 쏜 화살을 주워오는 화살보이(?)로 용돈을 벌었다. 먼저 외사촌이 과녁판 뒤에 숨어서 외할아버지가 쏜 화살이 적중했는지 위로 날라 갔는지 우측인지 좌측인지 큰소리로 외쳤다. “일시에 관중이요.” “이시에 좌측이요.” 라면서. 그러면 할아버지는 매번 조그마한 수첩에 기록하였다.
나는 키가 작아서 뭐라고 적었는지 볼 수 없었다. 과녁판 뒤에 숨어서 외사촌이 소리 지른 내용을 작은 목소리로 반복했다. “일시에 관중이래요, 할아버지” 하면, 외할아버지께서는 “응, 그래” 하면서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외사촌은 할아버지께서 쏜 화살 5개를 주워 달려오고, 반대로 나는 과녁판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서로 임무교대를 하는 것이다. 과녁판 뒤에서 쉬익 소리를 내면서 날라 오는 화살에 내가 맞으면 어쩌나 하는 무서움을 느꼈다. 과녁판에 큰소리를 내면서 “꽝” 화살이 꽂이면 나는 과녁판 뒤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삼시에 관중이요오-.” 신나게 외쳤다. 그때가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기억된다. 나는 일시, 이시, 삼시, 관중, 좌측, 우측 등의 평상시 쓰지 않던 말들이나 화살의 각 부분에 관한 것들을 뜻도 모르면서 하나씩 익히게 되었다.
그렇게 한바탕 활쏘기를 2시간 가량 하고 집에 돌아오면 외할아버지는 화살 손질에 들어가신다. 팽팽했던 시위가 풀리고 활은 소중히 닦여서 천으로 된 주머니 속으로 모셔진다. 이제 다시 사냥총 손질이 시작된다. 그때 외삼촌은 옆에서 총알 만드는 작업을 거든다. 화약을 저울에 달고 두꺼운 종이를 펀치로 뚫어 놋쇠총알 구멍만큼 크기로 만든다. 다음에는 철로 된 작은 구슬을 총알에 붓는 일들이다. 위험하다고 나를 자꾸 물러나라고 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 외가댁의 사냥총은 두 자루였다. 하나는 훌치기 오연발이고 다른 하나는 총구가 나란히 두 개 달린 것이었다.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난다. 하나는 윈스턴이라고 했던 것 같다. 총구 두 개 달린 것은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었던 것 같다.
개구쟁이 꼬마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기하고 관심(?)이 가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보수적이고 완고한 분위기의 친할아버지 댁보다 외갓집에 가는 것이 더 신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루가 재미있고 신나게 지나갔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면 메밀묵이나 인절미에 동치미 같은 밤참을 먹게 된다. 밤참을 먹은 날이면 영락없이 한밤중에 뒷간에 가야 했다. 나 혼자 가는 것이 무서워서 화살보이 선배인 외사촌 형을 늘 깨웠다. 형은 볼멘소리를 하면서 따라나섰다. 뒷간 앞에 서서 “야, 끝났어? 추워죽겠다. 빨리 끝내, 달걀귀신 나오기 전에.” 이렇게 겨울밤은 깊어갔다.
매일 이른 새벽이면 향 타는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외할머니의 천수경 치시는 소리가 비몽사몽간에 아른하게 들려왔다.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정구업진언….” 나는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면서 자장가 삼아 새벽잠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가끔 언뜻 눈을 뜨는 경우엔 외할머니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동백기름을 발라 반질반질 윤기 나는 뒤통수가 생각난다.
그때 나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기도하시는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저렇게 일찍 일어나서 무슨 기도를 정성스럽게 하는 걸까?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잠에 들곤 하였다. 외할머니는 독실한 신심의 불자였음에 틀림없다. 외갓집 안방의 벽장을 열면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당시 보통 여염집에서 불상을 얼마나 모시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없다. 크기가 그리 작지 않은 불상을 모시고 매일 천수경을 치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할 뿐만 아니라 뇌리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 꿩이나 토끼를 잡아오면 외할머니는 매번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쯧쯧 혀를 차면서 “이렇게 살생을 하는 것은 악업을 짓는 거예요” 하면서 사냥에 늘 반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할머니가 하신 “악업”이란 말을 무서운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죽인 꿩이나 토끼로 태어나는 것인가 하고 나름대로 상상도 했던 기억이 난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의 꾸지람에 늘 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하셨다. 외할아버지께서도 집안 대대로 내려온 불교신앙에 거슬리는 일을 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할아버지는 날씨가 우중충한 날이면 고이 모셔두었던 빅터 유성기(그라마폰)을 꺼냈다. 태엽을 감고 바늘을 갈아 끼우고 구성진 시조나 창을 틀었다. 매번 노래를 따라 부르시면서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때 자주 들으신 것이 회심곡이었다. 회심곡을 들으시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아마도 회심곡의 이런 구절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나 아닌가? “ … 주야장천 놀고 노는 타 시주님들 노지 마시고 염불하시오. 염불이란 따로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 착한 마음이 염불이오. 순하신 마음이 염불인데 주야장천 놀고 노는 시주님들 악한 일을 마시어 어진 선현 선남자를 이루자. …”
방학숙제는 개학 3~4일전부터 하는 것이 늘 초등학교 시절의 버릇이었다. 일기숙제도 3~4일 만에 한 달 치를 다 쓰려니 대단한 기억력과 상상력이 필요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글을 쓰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니 피식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나머지 방학의 절반은 늘 친할아버지 댁에서 보냈다. 친할아버지 댁은 천주교를 믿었는데 할아버지는 말년에 서당 훈장을 하셨다고 한다. 동네에서 태어나는 거의 모든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시던 분이었다.
외할아버지 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절제하고 법도를 따지는 유교의 유습을 그대로 지켰다. 그야말로 말만 천주교이지 전통 유교의 격식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누구든 집안에서 큰 소리를 못 냈다. 밥 먹을 때 입을 다물고 소리 내지 않으며 씹어야 했다. 식사 중에는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밥상의 반찬도 집어다 놨다 하다간 대번 불호령이 떨어졌다. 왜 그랬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밥 먹다가 도중에 숟갈을 놓고 벌을 서기도 했다. 친할아버지 댁에 가는 것은 어린 나에겐 벌을 받으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댁에 도착한 날부터 언제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오시나 날짜를 세곤 하였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 더 어려웠던 일은 바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천주교식 기도였다. 아침에 하는 기도를 조과라고 하고 저녁에 하는 기도는 만과라고 한다. 이 기도들은 대략 30분씩 소요되었다. 저녁기도인 만과 후에는 다시 묵주기도를 30분가량 더 해야 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지 15분이 지나면 발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자연 자세가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이리저리 꿈지럭거리면 대번에 꼬집히거나 꿀밤이 날라 온다. 어린 나에겐 정말 고역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신공책으로 기억되는 두꺼운 책을 따라 읽는 것이었다. 여러 서양이름의 성인을 부르면서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하는 기도였다. 모기가 왱왱거리며 주위를 맴돌면서 물어대는 여름 저녁의 만과시간은 기도시간이라기 보다는 모기와 전쟁을 하는 시간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짝, 짝” 팔, 다리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모기물린 곳을 긁어대랴 속도에 맞추어 기도문을 읽어대랴, 어린 나는 간절하게 이런 기도를 했었다. “모기를 멀리 멀리 쫓아내소서.”
기골이 장대하였던 할아버지를 무서운 사람으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기회가 생겼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께서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생전 울음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할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더 크게 울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무언가 안도감을 느끼고 그리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름방학 끝 무렵이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쯤일 것이다. 대청마루에서 배를 깔고 급히 방학숙제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으로는 영어가 필요한 시대가 올 것이니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리곤 바지춤에서 사탕을 꺼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당신의 미래관을 완곡하게 표현하시고 당부하신 것으로 느껴진다. 당시의 나에겐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의 당부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아프게 느껴진다. 구한말의 지식인으로서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선비의 고뇌를 티내지 않으며 살아오신 할아버지의 속내를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가족사에서 가슴이 쓰리게 대비되는 것이 있다. 외가의 삼촌들은 모두 일본 유학생들이었고 친가의 삼촌들은 모두 국내파들이었다. 외가의 삼촌들이 일본에서 유학할 때, 나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친가의 삼촌들은 고국을 떠나 만주에서 활동하였다고 들었다. 정확하게 만주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알기로 그 중 한 사람이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친가와 외가의 사람들이 서로 정 반대의 입장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양쪽 집안은 시대의 아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사춘기를 보내고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시기에 나는 불교와 천주교의 사이에서 아찔한 정신적 방황을 하였다. 성당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에서 부처님을 보았고, 법당의 불상에서는 예수님이 보였다. 거의 정신 분열에 가까운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하고 혼자 꿍꿍 앓았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을 포기하였다. 결석이나 지각 한번 하지 않았던 모범생이 3박4일의 수학여행을 빠지겠다고 하니 담임선생님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핑계를 대고 용케 수학여행에서 빠졌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나는 그 수학여행비를 가지고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책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다른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은 유난히도 눈부시도록 하늘이 맑은 가을날이었다. 나는 불량청소년의 심정으로 비밀스럽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수원 팔달문 근처의 서점으로 달려갔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책은 현암사에서 나온 동양의 명저였다. 그것은 채근담, 법구경, 당시, 사기열전, 장자로 구성된 5권짜리 시리즈였다. 지금도 그 책들이 나의 서가에 꽂혀있다. 이 책들이 나의 고교시절부터 정신적 나침판 역할을 하였다. 특히 법구경과 채근담이 나를 애늙은이로 만들어 갔다. 김달진 선생의 유려한 번역문은 외기도 좋았다. 법구경, 도행품의 이런 구절을 좋아했다.
“떨쳐 일어날 때에 일어나지 않고 젊음을 믿어 힘쓰지 않으며, 마음이 약하고 인형처럼 게을리 하면, 그는 언제나 어둠 속을 헤매리.”
천성이 부지런하지 못한 나 자신을 이 말씀으로 스스로 경책하려 했을 것이다. 「현철품」의,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다루며, 물대는 사람은 물을 끌고, 목수장이는 나무를 다루고,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를 다룬다.”
와 같은 구절을 암송하였다. 벽에다 조그맣게 까만 점을 그려놓고 앉거나 누워서 꼼짝하지 않으면서 그 점을 노려보던 기억이 새롭다. 나 스스로 수행 법호도 정허(靜虛)라고 만들었다. 수행이 무언지 제대로 모르면서 혼자서 흉내 내던 귀여운 모습이 떠오른다.
나를 흔들어 놓은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일본 불교학자인 무사고지 사네아츠(武者小路實篤)가 장엄한 부처님의 일대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조용한 폭풍(지금은 붓다로 제목이 바뀌었다)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처님을 향한 존경과 흠모에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법구경과 조용한 폭풍을 읽으면서 나는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외삼촌이 구독하셨던 신문인 「대한불교」가 그 당시 나에겐 정말 재미있었다. 나에겐 모두 흥미진진한 읽을 거리였다. 불교 전반에 걸쳐 다양한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다. 외삼촌은 나를 위하여 읽으신 후에 모아 놓으셨고 나는 두 달에 한 번씩 신문을 가지러 외삼촌댁에 갔었다. 외삼촌댁에 갈 때마다 불교에 대하여 외삼촌에게 질문하였다. 외삼촌은 친절하게 답해주셨고 때론 숙제도 내주셨다. 간혹 당돌하게 대드는 나와 토론을 벌리기도 하셨다. 그러나 불상에서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상에서 부처님을 보았다는 나의 허황된(?) 경험을 그 당시 발설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 부끄럽고 외삼촌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교에 대한 사랑과 삶의 태도는 이때부터 자라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정신적 방황의 시기에 멘토가 되어주셨던 외삼촌들은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의 보금자리였던 외갓집은 용인 민속촌으로 옮겨졌다. 외사촌들과의 교류도 뜸해진 상태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외가댁에서 경험했던 불교적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나의 정신적 뿌리가 되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친할아버지 댁에서 경험한 천주교 신앙 분위기 등은 내가 비교종교학을 연구하게 되고 응용불교학에 관심을 갖게 한 배경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에서 처음부터 나는 불교학을 전공으로 정하지 못하고 국문학과와 사학과에서 서성이면서 학교를 옮겨 다녔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최후의 정착지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괴테의 “노력하는 자는 방황한다. 그러나 방황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쯤에서 밝히고 싶은 비밀(?) 하나가 있다. 내가 불교학과로 옮긴 것을 부모님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졸업할 때 아시게 되었지만 크게 역정을 내시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불교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참으로 먼 길을 돌고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하근기 중생이 어렵게 만난 불법을 이제부터라도 더 열심히 신봉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머리로만 하는 불교가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불교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부끄럽고 시시한 신변잡기를 접기로 한다.
최종석 1979년 졸업.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 석, 박사 학위를 받고, 동 대학 연구원 및 전임강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금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및 대학원장 직을 맡고 있다. 저서로 붓다와 예수의 웃음, 과학시대의 과학격의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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