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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기도와 십자가(Ⅰ) - 이렇게 기도하라
본문 / 마 6:9
내용 /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매번 예배 때 주문을 외듯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며 명하신 주기도가 사실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죽어 있습니다. 이유는 주기도의 영성과 나의 영성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조율하여 주기도가 주는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설교 /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오늘 마태복음 말씀으로 함께 합니다. 잠간 양해의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가 지난 주에 일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 말씀의 잔치를 제 나름대로 준비해서 3월 30일까지 마치고 오늘부터는 다시 구약 에스겔서로 돌아가겠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주말에 기도하고 하는 동안에 그냥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양해하시고 정말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서 주기도, 주기도문을 십자가로 드리는, 십자가로 주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생활화하자 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허락하는 시간까지 주기도와 십자가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함께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시간 주기도와 십자가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 나눌 때에 마태복음 6장 9절 말씀 한절만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오늘은 주기도문의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나 자신이 기도를 얼마나 생활화하고 있느냐 라는 여부를 떠나서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호흡이라고 얘기하지요. 호흡이라는 게 끊어지면 죽는 거 아닙니까? 바로 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기도를 통하여 그 말씀을 계기로 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되는데 그렇게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얻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고 말씀을 듣는 순간에 감동을 하고 많은 은혜를 경험했어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시간과 이 세상사에 다 묻혀버리고 말아요. 기도가 없으면 모든 은혜가 다 한번도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기도는 모든 허락하시는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진짜 돈을 벌려고 애쓰실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려고 애쓰셔야 돼요.
그런데 그 기도를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도 그리고 또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뭐라그러시냐하면 내가 기도문을 가르쳐줄 테니까 그냥 너희가 참조해라 이러지 않으시고 이렇게 기도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다른 여지가 없어요. 리처드 포스터가 지은 몇 백 페이지짜리 기도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책 읽어가지곤 기도 못합니다. 기도에 대한 세미나를 참석할 수 있고 세미나의 강사로 될 수는 있을 수 있지는 모르지마는 실제로 생활 속에서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너무 많은 책들이 있는데 그대로 기도 못해요. 아니 왜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으면 이렇게 기도하면 되지요.
저는요 목회를 하면서 이 주기도문 강해를 참 여러 차례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그러시겠지요. 근데 매번 바뀌게 돼요. 왜그러냐 하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마는 이 주기도문에 포함되어져 있는 주님의 영성과 내 영성이 맞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자꾸 주기도문 강해를 새롭게 하게 됩니다.
새롭게 하게 되는 이유는 주기도문으로 기도가 잘 안 돼요. 안 되는데 이렇게 기도하라는 이 말씀을 믿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그러셨으니까 기도 중에 최고의 기도가 주기도다 생각해서 믿고 하는데 잘 안 되기 때문에 매번 주기도문 강해의 내용이 바뀌게 됩니다. 새롭게 깨닫는 거예요.
잘 안 된다. 그런데 왜 하냐?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으니까. 이렇게 기도하라는 걸 믿고 붙잡고 기도하다 보면 자꾸 내용이 주기도에 대한 이해가 바뀌어요.
이게 여러분 제가 워낙 신앙적인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깊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당연해요 그거는. 그런데 주기도가 너무 깊어요.
자,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기도를 언제 합니까? 언제 해야 옳은 겁니까? 예배 끝날 때? 예배 시작할 때? 구역예배 드릴 때? 축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목사님이 안 계실 때? 그때 주기도로 예배를 마치는 겁니까? 기도가 안 될 때 주기도문은 주문 외듯이 반복해서 외는 겁니까?
도대체 이렇게 기도하라! 왜 우리는 이 주기도를 가지고 생활 속에서 기도하는 게 잘 안 될까요?
첫 번째 언뜻 보면 이유가 구체적이질 않아요. 나 개인의 사정이 수백 가지 수천가지 매일 매일 달라지지 않습니까? 근데 그때마다 주기도가 그 개인적인 사정에 맞아 떨어지는 구체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당장 은행 대출을 받아서 부도를 막아야 될 사장님 입장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할 수가 없어요. 기껏 좀 구체성이 있다는 구절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는데 일용할 양식 정도는 우리나라 수준에서는 마음에 계기가 되질 않아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되지 않아요. 그걸 여러 가지로 풀이합니다. 그러나 그 풀이를 기억합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것은 어떤 뜻이다 라고 하지만 그게 잘 기억이 안 되니까 일용할 양식이야 라면 먹어도 되는 거고, 애들 말로 쌀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지 왜 이북은 굶고 있냐? 이렇게 말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충분한 동기부여가 안 됩니다. 그리고 또 캥겨요. 뭐가 캥기느냐?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듯이 나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라는 구절에서 캥겨가기고 되질 않아요. 그러니까 구체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이 두 구절은 영 동기부여도 안 되고 마음이 자꾸 캥겨서 입으로 외우고 싶지도 않고 아무개가 생각나니까, 못돼 먹은 시누이가 생각나니까. 그리고 건강을 위해야 되고, 형통을 위해야 되고, 당장 대출을 받아야 되고, 당장 입시 시험을 봐야 되는 아들을 둔 엄마 입장에서 주기도를 한가하게 외우고 뜻을 풀이해가면서 우리에게 소개하는 그런 해석서들을 보면 기도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구체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럼 왜 주님께서는 경제 관련 기도, 딱 부러지게 건강에 관련된 기도, 형통과 관련된 기도, 결혼이면 결혼, 입시면 입시 이렇게 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가르쳐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형편을 다 언급할 수 없었으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이 기도문은 너희가 참조로 하고 너희에게 주어지는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아버지께 이 주기도의 뜻에 준해서 기도해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기도해라 말씀하셨어요.
이 상황을 거꾸로 뒤집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내가 대출을 받아야 되고 내가 지금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건강이 필요하고 아이는 입학시험을 봐야 되고 하는 이런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주님이 이런 현실을 모르실 리가 없는데 주기도 하나로 끝내 버리셨습니다. 구체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뜻을 거꾸로 얘기하면 개별적인 사건 사건의 연결되는 구체성이 안 보인다는 것은 인생에서 다가오는 모든 천 가지 만 가지 모든 상황에 대해서 이 주기도가 다 해답이 된다 이겁니다. 다 해답이 되니까 이거 한 가지 가르쳐 주신 거예요.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아시고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몸을 입으셨어요. 몸을 입으시면서 인간들과 같이 생활을 하시는 중에 가르쳐 주신 기도예요.
그러니까 몸을 입고 있는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주님이 몸소 느끼시고 체험하시면서 물론 그렇게 안 하셔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하실 리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우리가 그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몸소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몸으로 느끼시고 체험하시면서 몸을 중심으로 사는 우리 인간의 삶에 어떤 문제들이 나타날 것인가를 다 아시는 가운데 이 기도를 제시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 말고는 사실은 다른 기도를 할 필요가 없어요. 꼭 필요하다면 성령님께서 또 우리에게 이런 기도를 해라 저런 기도를 해라 어떤 증거를 주시겠지요.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지시가 없는 한 이 주기도를 가지고 끝장을 내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왜 그러면 이 주기도가 실제로 실생활에서 활용을 해보면 이렇게 기도하라 이게 잘 안 돼요. 의미를 목사님들이 해설해 주셨잖아요. 그렇죠? 의미를 해설해주셔서 그 의미를 마음 속에 기억하면서 기도를 하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좀 기도하다 보면 당장 생활에 급한 문제들로 기도가 넘어가 버려요.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보면 끝까지 유지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모든 지금에 당면한 문제가 훨씬 더 강렬한 요청을 가지고 내 마음 속에 다가와서 주기도의 맥을 끊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너무 현실과 무관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거 같애요. 동떨어진 기도 그러니까 마음에서 주기도를 붙들 힘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여러분 주기도에 포함되어 있는 영성이 지금 현재 나의 영성과 맞아 떨어지질 않고 있기 때문이에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그 주님의 영성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단지 우리의 입장을 고려해서만 기도하신 게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인간이 되셔서 하늘에 계신 보이지 아니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하시는 그것이 영성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영성이 종합적으로 표현되어지면서 그 당신의 영성의 자리에 우리를 초청해주시는 것이 주기도의 의미라는 거예요.
당신이 우리 아버지요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 우리 속에 지금 듣고 있는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고 여러분이나 제가 포함되어 있어서 하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와 너의 관계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위치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영성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영성이 표현되는 종합 예술가 같아요. 우리가 영화 하면 종합 예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시나리오부터 문학적 요소로 해갖고 미술적 요소, 음악적 요소, 조명이다 과학적 요소 모든 게 다 동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그래요. 기도가 바로 신앙의 종합 예술입니다. 영성이 가장 적확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 기도라서 기도를 들어보면 그 사람의 영성이 어떤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여러분? 기도가 예를 들어서, 하나님 지금 내게 주어져 있는 이 시누이와의 관계는 이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고 저렇고 저렇게 이렇고 해갖고 이 상황을 고쳐주세요 라는 이 기도 속에 이미 내가 선악을 판단하고 있고 옳고 그름을 나 스스로가 판단하는 경영자의 위치에 있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고 있으면서 드리는 기도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영성은 아직도 십자가를 받아들였다지만 십자가 이전에 아담이 지은 원죄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입장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되어 버립니다.
돈이 안 벌리는 상황이 주어졌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돈이 안 벌립니다. 이거는 객관적인 fact입니다. 객관적인 fact가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가운데 돈이 안 벌리는 상황이 주어졌으니까 이 fact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걸 내가 해버립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여성의 상태는 어떤 상태냐? 아버지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모반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기도를 하는거라 이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 속에 주님의 영성이 들어 있는데 이 주의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영성과 영성이 서로 갈등을 빚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영성 여러분 어떤 거예요? 영성이라는 게 그랬어요. 여자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모성이라는 게 마음 속에 없습니다. 엄마로서의 성질이 없어요. 근데 아이를 낳으면서 엄마로서의 성질을 갖게 돼요. 모성을 갖게 돼요. 관계에서 생겨나는 성질 이게 바로 性이에요. 근데 예를들어 엄마가 자식이 이제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되면서 남편하고도 떨어져 있고 또 자기가 이 대한민국 땅에서 누리고 있던 모든 친구관계 동창관계 교회 교유들 관계 다 떠나버리고 외국으로 아이를 데리고 유학을 떠났다 그러면 그 여자가 남편에 대해서 갖는 아내의 성이 있잖아요. 이런 말은 없습니다마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여러분? 아내성도 포기하는 거고 교회와 동창과 사회 모든 친정 이런 사회성도 포기해버리는 겁니다. 모성이 아내성과 사회성과 그 다음에 무슨 이 한국에서 취미생활하고 싶은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떠날 만큼 모성이 모든 인격을 지배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성이 바로 이런 거 였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서 오셨고 아버지가 지시하는 십자가로 가고 계시고 순간순간 아버지와 교통하시면서 아버지가 내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고 사시면서 그 당신의 일 때문에 어떤 장면까지 연출이 될 정도냐 하면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주님의 예고의 말씀을 듣고 스승님 안 되십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고 인간적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류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성격이 이상하신 거 같아요. 그 장면만 보면 성격이 전혀 원만하신 것 같지가 않아요. 편벽되고 외골수고 고집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그런 정도로 영성이 제자와의 관계도 다 지배해버릴 정도로 영성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를 우리가 평소에 생활 속에서 따라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따라할 수 없는 기도를 주님의 영성의 자리에 서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기도를 왜 가르쳐 주셨을까요?
주님이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기도를 산상수훈 속에서 말씀하셨는데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을 십자가를 통과해서 보지 않는 모든 해석은 저는 다 오류라고 봅니다.
왜냐? 주님이 지금 공생애 서두에서 산상수훈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 공생애의 시작점에서 주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가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처음 출발하는 서울역에서 부산이라고 쓰여져 있는 팻말의 기차를 타야 됩니다. 부산이라는 것이 마음에 없으면 부산 가는 기차를 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기차가 있어도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탈 때 부산이라는 마음이 지배하는 것처럼 주님이 공생애를 출발하실 때 십자가라고 하는 종착역에 마음으로 가득히 지배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은 아무도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생애 중간에 베드로는 십자가 소리만 들려도 경기를 일으키면서 만류를 할 정도입니다. 아무도 이해를 못합니다. 주님이 주기도를 가르치시고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너희가 이제 내가 이루어야 될 십자가 복음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지난 뒤에는 이런 산상수훈의 사건이 일어나고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채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 중의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주기도문을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서 주기도문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런 난센스가 없다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통과해야 비로소 주님의 영성을 맛이라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성을 맛이라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주의 기도가 살아서 의미있게 내게 전달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경험적으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습니까? 날마다 죽는다는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에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진다는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 하는 삶이 되면 저절로 주기도문으로 기도가 연결이 됩니다. 제가 이렇게 따로 기도를 강조하지 않아도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되면 주기도문 말고는 다른 기도가 나올 수가 없어요. 저절로 연결이 된다 이겁니다. 주기도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있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되면 기도생활이 주기도 말고는 다른 기도를 드릴래야 드릴 수 없게 되더라 이겁니다. 이게 자동적으로 연결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십자가의 의미를 가지고 들여다 보고 해석하면서 그 해석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어서 순서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면 십자가로 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가 무슨 의미일까?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게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 무슨 의미일까? 이것이 상호 자동적으로 마음에서 이해가 되고 연결이 되면서 우리의 기도가 자동적으로 주기도의 구절을 따라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를 자꾸 하다 보면 구절 구절이 응용이 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가지고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하루 종일도 좋고 일 년 삼백육십오일도 좋고 계속해서 평생동안 주기돕만 갖고 기도를 하게 되는 거예요.
어떤 목사님 설교 중에 이런 말씀하세요. 기도가 잘 안 될 때 방언기도를 해라. 그 방언이 비록 우리가 그 뜻을 알지는 못하지마는 방언기도를 하면 오랫동안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들어갈 수 있다... 맞습니다. 방언기도가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오래 하다 보면 마음에 걱정과 근심들이 사라져 버리고 또 새로운 관점이 생기기도 하고 깊은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이점이 있어요. 그런데 의미도 알면서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더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 아예 은혜의 바다 속에서 수영하면서 살 수 있는 기도가 있다고 그러면 주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주기도는 막힐 수도 없어요. 주님께서 구절 구절을 말씀해놓으셨기 때문에 막히지도 않아요. 한 구절 당 삼십분씩 할 수도 있고 한 구절 당 한 시간씩 할 수도 있고 한 구절 당 하루종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한 구절 당 오 분 할 수도 있어요. 일 분 할 수도 있고 삼십 초 할 수도 있고 늘 주기도로 기도하는 겁니다.
이 주기도가 죽이는 기도예요. 끝내주는 기도예요. 십자가와 연결이 되면서 폭발적인 은혜의 역사를 자아낼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주기도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고 주기도가 갖는 특징은 십자가와 연결되면서 내 신앙생활이 지금 어떤 영성의 상태에 있는가? 바르게 가고 있는가, 그릇되게 가고 있는가를 판가름해줄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주의 기도를 가지고 기도가 잘 안 되면 내 영성이 지금 잘못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이 어떤 기도냐? 몇 년 전에 우리 한참 그런 말이 있었잖아요. 고지론과 미답지론. 기독교가 과연 내 재질과 가능성과 내 성품을 개발하고 발달시켜 나갈 때 어디를 향해야 되느냐? 고지론이냐, 미답지론이냐..
고지론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높은 자리 권한이 있는 자리로 들어 올라가서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영향력을 행사해야 된다는 것이고, 미답지론은 말 그대로 사람이 밟지 않은 땅을 새로 개발해내서 그 곳에서 신앙의 영역을 확산시켜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답지론이든 고지론이든 다 똑같아요.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는 것은 이 현실 땅에서의 삶이 좀더 보람되고 좀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 아닙니까? 이 영성 갖고는 이 땅에서 좀더 나아질 수 있고 좀더 발달될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목표인 이러한 영성인 상태에서는 주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이 영성 가지고는 예배 때 예배 끝날 때 외우는 거 말고는 아름답게 주기도문송으로 노래하는 거 말고는 주기도를 생활화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 안 돼요.
십자가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래서 단박에 우리가 내일 살펴보겠습니다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 하늘에 계신 분이시여! 갑자기 땅에서 이 땅의 문제로 나는 지금 돈이 급하고 건강이 급하고 난리가 났는데 갑자기 주님은 땅에서 이륙을 시키십니다. 수직으로 위로 하늘로 올라가버리게 합니다. 땅을 떠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주기도의 시작서부터 과격한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단절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단절에서부터 위로 올라가서 위에서부터 내려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이 땅에서 땅에서 높은 곳 향상된 곳 발달된 곳 발전된 상황으로 올라가려는 기도예요. 완전히 영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거예요.
여러분,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얘기 하나 하지요. 십자가 복음을 제로 원이라고 하는 영과 일이라고 하는 이 시대의 컴퓨터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디지털 기호를 통해서 상징화하면서부터 주변에서 이런 저런 사람들에 의해서 자꾸 그런 건의를 듣습니다. 무슨 수련 과정을 하나 만들면 어떻겠느냐? 그런데 수련 과정이라고 하는 게 그렇잖아요? 그 수련 과정을 거치고 나면 뭔가 수련을 시키는 입장에서 수련을 주체하는 입장에서 그 과정이 끝나면 어느 지점에 도달해야 된다고 하는 구체적인 모양이 있아야 되고 구체적인 이미지나 구체적인 상태가 있어야 되고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어떤 단계적인 발전 과정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명확하지를 않아요. 분명히 십자가 제로 원의 원리가 생활에 적용돼야 된다는 건 알겠는데 현실적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그럼 이 사람이 제로 원의 원리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 뭘 어떻게 해야 되느냐 라는 것이 그저 기도할 때 문제가 주어질 때 제로가 되라 이런 말은 했지만 딱 잡히질 않아요. 그런데 이제 마음에 잡힙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주셔서 제자 삼아서 가르쳐야 될 것이 있다고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런 수련 과정 영성 프로그램을 진행을 해야 된다는 상황이 된다고 그러면 이젠 구체적으로 십지가로 주기도를 하라, 주기도를 십자가로 드려라 라는 타이틀의 수련과정을 하면 된다는 마음에 확신이 오는 겁니다.
십자가로 드리는 주의 기도 죽이는 기도입니다. 끝내는 기도고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하나님이 지금도 끝없이 끝없이 내려보내시는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서 넘실거리며 살 수 있는 길이에요.
여러분, 후쿠시마 일본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나서 지금 난리가 났어요. 뉴스는 난리가 덜 난 것 처럼 보이지마는 그 나라 내부 사정에서는 보통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근데 피폭되었다고 그러잖아요. 방사능에 피폭됐다. 십자가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은혜에 피폭될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며칠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예고를 안 하겠어요. 예고해봐야 제가 자꾸 그 다음 날 집에 가서 기도하다 보면 자꾸 마음이 바뀌니까 예고를 안 하겠는데 며칠할 지는 모르겠지마는 하여간 이 주기도를 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통해 주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삶을 내 삶으로 만듦으로서 여러분이 하나님이 내려보내시는 이 은혜에 방사능에 피폭되듯이 완전히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에 피폭되는 삶을 사실 수 있게 되기를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 이보다 더 좋은 길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돈 잘 버는 방법, 건강하게 사는 법, 형통하고 성공하는 법, 이것에 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를 옴팡 뒤집어쓰는 법 십자가로 주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함께 주의 기도를 살펴보며 은혜 받는 과정을 통하여 온전히 하늘의 은혜에 피폭되어지는 하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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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문을 두드렸습니다...
무진장 반갑고~감사합니다!!!!
다시 뵙게 되어 정말로 반갑습니다. 역시 또 수고해 주시는군요!!!
와! 다시 오셨군요. 반갑고 또 감사합니다. 그동안 빈 자리에 많이 허전했습니다.
indeedpapa님 동안도 주안에서 평안하셨나요^^ 님때문에 행복해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 가득이며 은혜위에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허전하고 궁금했는데 ... 이렇게 함께 함이 안도의 숨이 쉬어집니다. 서로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우린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한 솥 밥을 먹는 제로원의 가족, 귀한 말씀을 통하여 함께 성장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까지 주님의 십자가 붙잡으시고 하나님을 살아 내십시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