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가 정치적의미와 종교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법흥왕이 재위 이후에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불교를 받아들여서 고대 국가로 나아가고 있는데 신라는 아직 그러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고뇌하게 된다. 이차돈은 그 자신이 모시는 상전 법흥왕의 고뇌를 알고 순교의 마음을 결심하고 법흥왕과 신략을 도모하게 된다. 당시 육부 귀족들이 법흥왕의 통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고, 부족 국가의 반열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한 신라였기에 이제 법흥왕은 고구려 백제와 같이 고대 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선진 문명을 상징하는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고대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이차돈은 고뇌를 알고 <비상한 사람이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다>는 말을 통해서 법흥왕을 설득한다. <성소 천경림에 나무를 베고 절을 지을 테니 대왕께서는 모른다고만 하십시오 모든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한다. 법흥왕은 자신의 근신이자 조카인 이차돈의 죽음을 가슴 아파했지만 그의 순교에 대한 열정을 반대할 수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육부 귀족들은 성소 천경림 나무를 베고 절을 짓는 공사를 멈추게 하면서 이차돈과 법흥왕을 대질케 한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이차돈은 대왕의 명을 참칭한 사실을 얘기했고 법흥왕은 모르는 사실이라는 얘기를 통해서 결국 이차돈은 순교를 맞이하게 된다.
이차돈 순교를 통해서 정치적으로는신라는 왕권을 공고히 하게 되고 육부 귀족들은 더 이상 동렬의 반열에 있지 않게 되고, 왕과 그래서 '차칠왕'이라고 하는, 비명에 나온 것처럼 일곱 왕 중에 절대 왕으로서 법흥왕은 자리하면서 나머지 육부왕을 지배하는 초월적 왕으로 등장하게 된다. 종교적으로는이차돈의 순교 이후에 법흥왕의 불교 공인을 통해서 과거 칠처가람 지허, 과거 전불시의 일곱 부처님이 머물렀던 사찰의 터에 절을 짓게 된다는 예언을 한 것처럼, 과거 비바시, 시기, 비사부, 구류손, 구나함모니, 가섭불, 석가모니불까지가 이미 이 신라에서 설법하던 곳이라고 하는 이 설화를 통해서 신라의 고유 성소인 금교 천경림에 흥륜사를, 삼천기에 영흥사를, 용궁 남에 황룡사를, 용궁 북에 분황사를, 사천미에 영묘사를, 신유림에 천왕사를, 서청전에 담엄사를 짓게 된다. 법흥왕부터 문무왕까지 한 160여 년에서 170여 년 사이 이 7처 가람 지허로 예견됐던 신라의 성소는 모두 절로 탈바꿈되고, 천신, 산신, 무속 신앙의 성소가 법흥왕에서 문무왕에 거치면서 모두 불교 사찰로 대체가 되고 불교는 고유 신앙으로서 천신, 산신, 무속신앙을 밀어내면서 다시 신앙의 구심으로 자리하면서 토착화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된다. 즉 신라 불교는 천신, 산신, 무속신앙이 강한 토양을 이차돈 순교 사건을 통해서 극복하고 공인함으로써 주체적인 불교로 나아가고 그 결과 법흥왕 이래 문무왕까지 전불시 칠처가람 지허에 167년에 걸쳐서 일곱 사찰이 지어지고 고유 신앙을 통섭해서 융화하고 교화한 불교가 이제 민족 불교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