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 진단
룽먼 석굴에 바위를 반원형으로 파내고 비석을 벽돌 사이에 붙여놓았다. 웅혼하고 힘이 넘치는 예서체 대련의 석각자가 보인다.
開張天岸馬
奇逸人中龍
(헌걸차구나! 천하를 달리는 좋은 망아지여!
기이하구나! 강호를 누비는 용과 같은 영웅호걸이여!
위대하구나 용문이여! 아름답기가 천리마같구나!
진단이란 인걸에 누가 필적하리오?
伟俊哉,驰骋天下之良驹!
奇逸哉,龙行江湖之英豪!字里隐意:
伟哉龙门,美如良骥!
陈抟人杰,何人能敌?)
비석은 명나라의 호사가가 북위의 왕원(王遠)이 쓴 <泰山羊祉開復石門銘>에서 집자하여 진단(陳搏)의 글씨와 시로 위조한 것이다. 10자의 대련 옆에는 북송의 시인이고 서법가이고 관료였던 석연년(石延年, 994~1041)의 시가 새겨져 있다.
“希夷先生人中龍, 天岸夢逐東王公,
酣睡忽醒骨靈通, 腕指忽忽來天風。
鸞舞廣漠鳳翔空, 俯視羲獻皆庸工,
投筆再拜稱伎窮 太華少華白雲封”
비석은 이 시를 줄여서 진박의 10자 대련 친필 시로 위작한 것이다.
'석문명(石門銘)'은 북위 선무제 영평 2년(509) 정월 왕원(王遠)이 글씨를 쓰고, 무아인武阿仁이 섬서성 포성현(褒城縣) 동북 포사곡(褒斜谷) 석문(石門)의 벼랑에 새긴 것이다. 캉유웨이(康有爲)는 “석문명石門銘”의 글씨를 “飛逸奇渾,翩翩欲仙,若瑤島散仙,驂鶴跨鸞” 이라고 하며 신품(神品)의 반열에 든다고 하였다.
진단(陳搏, 871-989)은 자가 도남(圖南), 자호(自號)가 부요자(扶搖子)이다. 중국도교사상가, 내단학가(內丹學家), 태극문화전인(太極文化傳人), 송대이학선사(宋代理學先師)이다.
어려서 경사백가의 책을 읽었고, 시서역예춘추에 통달하였다. 당희종 광계4년(888)에 부름을 받고 희종과 태연자약하게 대담하였는데, 그를 조정에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사양하여 청허처사(淸虛處士)의 호를 내렸다.
당 장흥(931)에 진사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유교에서 도교로 입문하였다. 무당산(武當山) 구석암(九石巖)에 은거하여 노자, 장자 등을 배우고 진晋 천복 정유 천복(天福) 정유(丁酉)년(937)에 서촉(西蜀) 공주(邛州) 천경관(天慶觀) 고도(高道) 하창일(何昌一)을 스승삼아 쇄비술(鎖鼻術: 胎息内養氣功)을 배우고, 동시에 마의도자(麻衣道者)를 스승 삼아서 역을 연구하였다. 천경관、학명산(鶴鹤山) 노군각(老君閣), 등지에서 활동했다.
진(晋) 말년(末年)(947),아미산에서 강학을 하여 호를 ‘아미진인(峨眉眞人)’이라고 하였다. 후주(後周) 현덕(顯德) 3년(956) 세종 황제의 부름을 받고, 간의대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때 ‘백운선생(白雲先生)’의 호를 하사받았다.
송 태조 원년(960)에 태조가 불러도 응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송 태종 태평흥국 2년(977)에 조칙을 받고 입궐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방책으로 ‘원근경중(遠近輕重)’을 헌의하였다. 원근경중이란 '원초현사(遠招賢士: 멀리서 어진 선비를 부른다.)', '근거영신(近拒佞臣: 주변의 아첨하는 신하를 물리친다.)', '경부만민(輕賦萬民: 만민의 세금을 가볍게 한다.)', '중상삼군(重賞三軍: 삼군에게 무거운 상을 내린다.)'이다.
태평흥국 9년(984)에 다시 입궐하여 종생불사의 뜻을 표했다. 송 태종 황제가 진박이 ‘유교와 도교에 학문을 혁혁하게 이루었고, 이록(利祿)을 구하지 않으며, 부귀를 탐하지 않으며, 세상과 다투지 않으며, 소리도 없고 빛도 없다.’ 하여 ‘희이선생(希夷先生)’이라고 호를 하사했다.
송 태종 단공 2년(989) 음력 7월 24일에 화산(華山) 장기곡(張超谷) 석실(石室)에서 선서(仙逝)하였는데 향년이 118세였다.
송 휘종 정화 5년(1115), 진박의 고향마을 제자인 흠진관(欽眞觀) 도사 사도연(謝道緣)이 화산으로 가서 진박 노조(老祖)의 묘혈(墓穴)을 찾아서 비밀리에 선시(仙尸)를 훔쳐서 보주성(普州城) 동남 3화리(三華里)의 운거산(雲居山)에 안장하였는데, 지금도 묘가 완존한다. 묘비에 ‘진희이선생’ 화상(畵像)과 자찬묘지명 전문이 새겨져 있다.
진단이 ‘태극도’, ‘선천방원도(先天方圓圖)’, ‘팔괘생변도(八卦生變圖)’ 등 일련의 <<역易>>에 관한 그림을 창안하고, <태극음양설>을 발표하였다. 그 이후에야 송대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장재(張載의 <태화론(太和論)>,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 정호와 정이, 주희 등의 <<역전(易傳)>>, 그에 따른 중국 독자의 태극문화 형태와 이론, 송대 이학가가 형성되고, 송대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장재는 진박의 ‘우주일기론(宇宙一氣論)’을 계승하여 ‘태허즉기론(太虛卽氣論)’을 내 놓았다. 양자는 송대 기론(氣論)의 근원이었다. 진박은 중국 태극문화(太極文化)와 송대 이학(理學)의 창시자라 해도 손색이 없다. (바이두)
우리나라 양촌 권근의 <천인심성합일도(天人心性合一圖)>,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과 퇴계의 <천명도(天命圖)>, 퇴계 <<성학십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원조가 희이선생 진박이다.
진단의 생애를 조사하다보니 갑자기 진세박(陳世搏)이라는 사람이 생각난다. 진박과 이름이 비슷한 진세박이라는 인물이 1700년에 입암28경을 찾아간 병와 이형상의 여행기 <입암유산록>에 등장한다. 그의 행동이 진박을 닮은 데가 있다.
*단摶과 박搏 바이두에서는 진박이라고 입력하면 자동으로 진단이 검색된다.
단은 간자체, 박은 번자체를 쓰고 있다. 바이두에서 영문자로 첸투안CHENTUAN이라고 하였으므로 우리나라 한자음으로는 '단摶'이 옳다.
룽먼의 위조 진단 글씨 비석에는 이름자가 박搏자와 흡사하지만 오른쪽 위에 점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단자로 인식하였다.
<<송사>> 권457 <은일열전> 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글자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유입암산록 전산 원문에는 陳世摶과 陳世搏의 이름이 나온다.
목판본에는 진세搏으로 통일되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