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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산책]『신심명』⑦ 작은 견해에 집착하면 대도를 잃는다 대도는 체가 넓어서 쉽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것이 없다.(大道體寬 無易無難)
이번에는 방거사 부인이 “쉽구나 쉽구나 정말 쉽구나, 침상에서 내려와 땅을 밟는 것처럼.”
이를 듣고 딸, 영조가 말했다.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백가지 초목의 맨 끝머리, 조사의 뜻이다.”
대도는 ‘체관’이고 지도는 ‘무난’이다. 어려운 것은 다만 자아의 소견이다. 소견에서 ‘호의’가 생기고, 도를 구하고자 하면 도는 더욱 멀리 가버려 도착이 늦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호의는 『수능엄경』에 의하면 여우는 용심이 깊어 언 강물을 건널 때, 얼음 아래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얼음의 두께를 알고 건넌다고 해서 분별이 소심한 자를 뜻할 때 사용한다.
대도는 그 체가 관대해서 쉽게 가든 어렵게 가든 상관도 없고 관심이 없는 것. 다만 가는 자의 소견에 따라 더디고 늦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지도무난 유혐간택’의 선의 논리에서 이번에는 선의 심리를 말한다.
(執之失度 必入邪路) (放之自然 體無去住)
그래서 집지이면 소견이고 방지이면 대도이다. 대도는 본래면목이며 자연이다. 그래서 일본의 친란선사는 ‘아미타불은 자연의 모습을 알게 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라고 했다. 일체법은 자연인데 소견의 중생이 분별을 일으키어 스스로 혼침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한 것이다.
또한 곽암의 십우도에 ‘기우귀가(騎牛歸家)’하여 ‘망우존인(忘牛存人)’을 뜻하는 듯 하다. 귀가는 현실의 자아가 본래의 자아를 찾은 것, 무심의 목동이 무심의 소에 올라타 사람과 소가 일여하여 무사한인(無事閑人)의 자연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당대 천황도오 스님은 ‘성(性)에 맡겨 소요(무심의 작용)하고 연(緣)에 따라 방광한다.’고 했다.
‘본성(불성 즉 자성청정)에 맡겨 대도와 일치’되었을 때, 유마의 ‘유희삼매’의 경계에 있음을 말한다. 거기에는 혼침이 있을 수 없으면 바로 평화롭고 편안한 ‘소요’하고 있는 ‘한인(閑人)’이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혜원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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