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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7일 월요일
[김용호] [오전 7:19] 설 명절이 끼어 있는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설을 잘 활용하는 멋진 한 주간을 보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최선을 다 합시다. 화이팅!!!!!
[연동흠] [오전 8:16] 예. 활기찬 한 주입니다!
[김용호] [오후 12:5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개인의 삶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삶을 쿨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
우리가 항상 나누는 이야기와 내용상 동일한 것이지만 제자들에게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면서 당신을 따르기를 요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표현을 처음으로 해보았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군요.
물론 자신의 삶을 초월한다 해도 쿨하게 활용하는 것이니 삶의 모양까지 비장해지는 금욕주의와는 다르지요. 그러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면은 금욕주의보다 더 명확하게 검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 충실한 것이 진리인가 아니면 초월하는 것이 진리인가라는 관념상의 진리 논쟁과 성경해석상의 진리 논쟁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과연 어느 쪽이 현실적으로 충실한 삶을 보장하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입증이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개인의 삶은 생존과 번영의 희구에 얽매인 삶인 바,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재물욕과 명예욕으로 표출된다는 것이 불교의 탁월한 통찰입니다. 그 둘 중에서 개인의 현실적 삶의 핵심적 요소를 하나만 꼽는다면 아리스토테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간파했듯이 인간관계라 하겠습니다.
이 인간관계를 문제시하며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이 바로 동양 사상, 특히 불교이고 그리고 성경입니다 (물론 서구 기독교는 해당 사항 없습니다.^^)
부처는 인간관계를 연기설을 기반으로 변화하는 인연에 불과한 허상이라고 규정하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진리의 중요한 기반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모와 처자를 미워해야 당신을 따를 수 있다고 하셨지만 동시에 버리면 백배를 얻는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심으로써 당연히 불교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인간관계를 초월할 때(버릴 때) 진리에 기반한 진정한 인간관계가 재정립된다는 진리입니다. 기존의 인간관계에 묶여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당짓기를 하게 되고 그 당짓기야말로 수렁이니 그 인간관계에서 해방된 사람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을 백배로 얻는다고 표현하신 것이지요. 백배 뿐이겠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냐, 칼을 주러 왔다 등등의 말씀도 모두 같은 흐름입니다.
이제 과제는 인간들 앞에 던져졌습니다. 기존의 인간관계를 인간이 과연 초월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지요. “초월할 수 없다”가 정답입니다. 본능이기 때문이지요. “인간관계로 요약되는 개인적인 삶을 포기할 수도 없고 초월할 수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한 회개와 간구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 조직신학의 역할입니다.
다음 순서는 성령의 영역입니다. 체험의 영역이고 실제로 초월이 일어나는 현장이지요.
체험으로 초월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다시 조직신학으로 피드백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진행되고 있는 일이 과연 성경의 계시와 치밀하게 일치하는가를 검증하는 일이지요. 그 검증까지 끝나면 첫 번째 방에 들어섰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첫 번째 방에 들어선 이 사람은 가족을 포함한 이웃을 성경적으로 사랑하며 충성스럽게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이 사람은 두 번째 방문 앞에 서게 되고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첫 번째 방에 들어갈 때와 동일한 과정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이 사람 앞에 몇 개의 방이 더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다음 방에 들어설 때마다 무한의 감격과 감사가 넘친다는 것, 그리고 좀 더 깊은 차원의 진리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첫 번째 방에 들어설 때 공포와 몸부림이 가장 극심하다는 것입니다. 그 방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의 감격과 감사, 그리고 새로운 진리의 삶을 맛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두 번째 방문 앞부터는 첫 번째와는 달리 마음 설레는 기대가 두려움과 더불어 일어나게 됩니다.
방문 앞에 선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며 소망하는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 개인적인 삶을 초월하게 만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읍시다. 화이팅!!!!
뒷문이 이미 닫혔다는 것을 확인하는 은혜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정과 욕심이 뒤범벅된 그 징글징글하고 느끼한 인간관계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합니다. 느끼하다는 문제만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인간관계는 곧 허무하게 끝난다는 것까지 우리는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최해준] [오후 5:14] 어제 회개 기도는 in Christ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과연 내가 in Christ가 되어 보았나 하는 의문이 드네요. 물론 기도야 하고 있지만... 방금도 화가 나는 일이 있어 세면장으로 가서 기도를 하긴 했지만 방금 말씀드린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물론 ‘화가 난 이 상태는 in Christ 상태가 아니야’ 하면서 in Christ 상태를 간구하는 기도만 해도 화가 가라앉긴 하네요. 그러나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았다고 그게 in Christ 상태냐? 그게 의문이란 말이지요.
[김용호] [오후 5:28] 지난 토요일에 제자들의 수다 주제였던 판단과 대응에서 제가 “권사님이 뜨끔해하실 질문을 드립니다”라고 하면서 권사님이 정확한 판단과 대응을 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었습니다. 오늘은 권사님이 스스로 먼저 동일한 언급을 하시네요. 그래서 지금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권사님을 향한, 그리고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때라는 생각입니다.
조직신학(깨달음)의 다음 과정이 체험이고 그 다음이 피드백과 검증입니다. 우리가 조식신학적 이론은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갔으므로 이제는 우리의 체험을 검증할 단계에 우리가 와 있습니다.
이론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방에 들어섰다는 유혹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게 되는 유혹이지요. 특히 방 안에 있는 존재란 들락날락하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유혹은 더 큽니다. 방안에 있다고 해서 완벽한 존재가 아니니 검증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됩니다.
여러 가지 검증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지금은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일단 방 안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이 out of Christ 상태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in Christ 상태가 낯설지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기가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실제적인 자기 거처인 것이지요.
수련회에 가서 숙소 방을 배정받았어도 들어가 짐을 풀지 않은 사람은 그 방의 모습을 모르지만 들어가 짐도 풀고 샤워도 하고 하루 밤을 잔 사람은 그 방이 이미 익숙한 자신의 방인 것과 같습니다. 지금 잠시 밖에 나왔다 하더라도요.
동양 문화가 워낙 깨달음을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긴 “유레카!”라는 외침처럼 서양 문화도 본질적으로 다르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서양 철학은 관념론과 경험론의 오랜 충돌의 역사가 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충돌도 그것이니 역사가 길지요. 우리는 구한말에 가서야 실학이 대두되었구요. (잠시 머리 식히기 위한 멘트였습니다.)
[최해준] [오후 5:57] ^^ 너무 조심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김용호] [오후 6:00] 검증은 내가 현재 있는 방, 또는 내가 지금은 나와 있지만 조금 전까지 있던 방이 어떤 방인지 조직신학적으로 검증하는 것입니다. 이론에 의한 현실의 검증입니다. 그 방이 내 방이냐 아니면 내 방이라고 들었느냐를 검증하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과일 맛을 비유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방을 사과, 두 번째 방을 딸기라고 해보지요. 사과를 처음 먹은 사람은 사과 맛을 설명한 설명서를 근거로 그것이 사과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이제 사과 맛을 알게 되었고 다음엔 사과를 먹자마자 설명서로 확인하지 않아도 사과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사과가 먹고 싶으면 정확히 사과를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서만 본 사람은 사과 맛에 대해 실제적인 검증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에 항상 사과 맛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되지요.
(권사님이 총대를 메셨네요.^^ 언제쯤 제가 이런 말을 모든 분들에게 할 수 있게 될까 궁금했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형제자매님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가 대단히 두렵습니다. 예전 김칼이라는 별명을 다고 살 때에는 없던 두려움이지요. 그땐 내가 상대방을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것이니 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그건 그 사람 책임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젠 두렵습니다.)
사과 맛을 본 사람은 사과 맛을 일게 되었다고 자랑스러워할 틈이 없습니다. 딸기 맛을 아직 모르니까요. 세상에 있는 모든 과일 맛을 보았어도 자랑스러워 할 자격은 없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과일이 천지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과 맛을 먼저 본 사람이라고 해서 지체들에게 사과를 직접 가져다 줄 수는 없지만 다른 지체가 사과 맛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는 판단해줄 수 있고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양육의 중요한 항목이지요.
[최해준] [오후 6:42] 인지 아닌지에 연연하고 있다면 아직 아닌 것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긴지는 잘 모르겠다는...^^;;
[김용호] [오후 6:44] 내가 아닌 낯선 나를 내 안에서 분명하게 보는 순간이 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개선된 옛사람이 아니고 재창조된 자이므로 자신에게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즉시 그 낯선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맞는가를 성령의 열매 등을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개선된 존재인지 재창조된 존재인지는 본인이 잘 압니다. 그리고 앞선 자가 압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 저 사람 좀 변했네” 하는 정도로 인식할 뿐입니다.
[예레미야] [오후 6:52] 저 같은 경우는 전도사님의 설교 음성화일을 들으면서 느끼게 됩니다. 처음 카페를 알게 되어 그 당시에 들었던 설교 음성화일이 2011년 설교와 2012년 설교였는데 그 당시에는 이론과 지식으로 이해를 했었습니다. 바른 지식으로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바른 지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설교들을 다시 듣기 시작해서 현재 2012년 중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제가 요즘 느끼는 점은 지식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넘어서 조금 전 말씀하신 다른 방의 처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와~ 전도사님께서 말씀하긴 부분이 이런 부분을 알고 말씀하신 것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마다 놀라게 됩니다. 이론으로 믿어지고 수긍되어지는 것을 넘어서서 두려움 반 소망 반, 그리고 이론으로 들렸던 그 말씀들을 전하시던 전도사님이 어디까지 진도가 나가셨나에 대한 궁금증...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알고 있는 이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 알고 있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제 궁금증은 전도사님의 분명한 이론보다 체화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부분을 요즘 희미하게나마 느끼면서 드는 호기심입니다...ㅎㅎ
[김용호] [오후 6:59] 겨우 몇 발짝 앞입니다.^^
탄탄한 이론을 증거와 함께 제시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체험으로 검증된 이론을 전하는 것, 또는 이론으로 검증된 체험을 전하는 것이지요.
[예레미야] [오후 7:02] 체험적인 측면도 매우 큰 것 같습니다. 로마서 말씀 중 앞선 자의 모든 일을 좇아오는 자가 알 수 없다는,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확 다가오더라구요. 제 과거의 신앙의 모습에서 현재의 저를 돌아보니 그렇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지금에서는 이해가 되어지는... 물론 이것이 전부라 할 수는 없겠지만요.
[김용호] [오후 7:25] 예레미야님이 재창조되어가는 모습도 하나씩 하나씩 확인하시게 될 겁니다. 김용호의 이야기에서 예레미야의 이야기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전환되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틀 안에서 진행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동일한 이야기인지, 그리고 정확하게 예수님이 선포하신 틀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를 우리는 항상 면도칼과 같은 조직신학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