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언(是無言),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 이용도 목사
Victor Wellington Peters/박종수 역
제 1 장 아버지와 가족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교회를 가려고 한다 이거지? 내가 바보인줄 아나? 내가 다 봤다고. 여기서 다 봤어. 망나니! 망할 놈! 멍청이! 날 망하게 하려고 모두 짰어!"
이러한 욕설과 함께 몽둥이가 왔다 갔다 했고 깨진 접시 조각이 사방에 흩어졌다. 아이들은 이것을 피하기 위해 뛰어다녔고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만은 뜻밖이었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연약한 여인이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펄럭이는 치마 자락에 매달리는 아이 세 명을 데리고 이웃집으로 피난하는 이 가련한 모습을 보며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날 일요일 아침은 모든 것이 원활하게 진행됐다. 날씨는 쾌청했고 무엇보다도 그날은 아버지가 멀리 신촌에 있는 시장으로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는 걸어서 세 시간 거리를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떠났다. 따라서 식구는 교회 갈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두 번 드리기 이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올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에 식구들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날이 온 것이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에는 교회를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럴 때, 그가 눈치채지 않게 예배보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의 절대적인 말을 거역하고 교회를 갔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엄청난 난장판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어머니는 끝까지 아버지를 교화시킬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이들은 모친을 통해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이덕흥(李德興)은 "소 거간꾼"이었다. 즉 그는 동사무소의 허가를 받고 우시장에서 거래를 조정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직함을 보여주는 빨간 띠를 왼쪽 소매에 매고 다녔다.
가구 수가 200 안팎이고 인구도 약 천명이지만, 장촌(Marketville)에는 그 마을에서 두 번째로 큰 우시장이 있었다. 그 시장은 면적이 몇 천 평에 다다르는 매우 거대한 것이었다. 우시장은 11월부터 3월까지 장이 열릴 때마다 소 200∼300 마리, 때로는 약 천 마리의 소가 거래되는 장소였다. 맥풀린 소 떼 사이에는 몇 년의 경험으로 숙달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동물을 싸게 사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 우선 팔뚝에 빨간 천을 두른 사람에게 살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그러면 거간꾼은 내세운 조건에 알맞은 동물은 있으나 주인이 내세운 가격이 너무 높다고 말한다. 그렇게 훌륭한 동물을 주인이 싸게 팔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거간꾼은 최선을 다해 가격을 흥정해보겠지만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기고는 떠난다.
주인을 설득하기 위해, 거간꾼은 길을 나선다. 그렇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이제 그 동물은 더 이상 그 "훌륭한 소"가 아니라 "쓸모 없는 소"가 된다. 거간꾼은 그 소를 깎아 내리기 바쁘다. "어떤 멍청이가 이런 늙고 볼품없는 소를 사려고 백원이나 내겠어?" 거간꾼은 이런 식으로 계속 주인을 설득하다가 포기하는 듯이 뒷걸음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좋다고. 거기서 그렇게 원숭이처럼 떠들고 있으라고. 그러다간 팔기도 전에 소가 죽어버릴걸. 그때 나한테 매달려도 소용없어."
"잠깐만요!" 그제야 기다렸던 반응이 나온다. "오늘 이걸 꼭 팔아야 해요. 다른 일도 있는데, ..."
"그럼, 말을 좀 들으라고." 거간꾼은 멈춘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렇게 차갑게 말한다.
이제부터는 흥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마지막에 순진하기만 한 양쪽이 도장을 찍고 소가 새로운 주인을 따라갈 때까지 거간꾼은 원하는 데로 일을 이끌어간다.
매 거래시 백원당 삼원은 거간꾼에 의해 동사무소로 넘겨진다. 그리고 동사무소는 그 중 일원을 거간꾼에게 준다. 그렇지만 5일에 단 한번 장이 열릴 뿐만 아니라 그것도 일년에 다섯 달밖에 우시장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거간꾼은 농사를 짓거나 물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시무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큰 장이 열리기 이전에 아버지는 작은 동네 장터로 걸어가서 물품을 싸게 산 뒤 다시 팔아서 이익을 남겼다. 장촌은 약 20∼30 마일까지 뻗어 가는 곡창지대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버지는 평화산(Peace Mountain), 평탄고개(Flat Valley), 신천(新川), 그리고 그 주변을 돌아다녔다. 약 30 마일의 거리를 걷고 돌아올 때는 소까지 끌고 오다보니 한번 나가면 왔다갔다하는데 이삼일 걸렸다. 그리고 다음 장날까지는 적어도 소 세 마리는 있어야 본전을 뽑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 술버릇만 버릴 수 있었더라면 그의 가족을 잘 부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영생을 얻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너희를 그렇게도 모으려 했건만, 너희는 그렇지 않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듯이 인간의 괴팍한 성격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유혹과 싸워가면서도 그 유혹으로부터의 구원 또한 거부했다.
공교롭게도 일요일에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 아버지가 집에 있게 되었다. 결국 그런 날은 가족이 교회에 갈 수 없는 날이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번 장날이 일요일이 되었을 때에는 비가 와서 취소되었고, 그 다음주에는 아버지가 집 근처에서 쟁기를 수리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 다음 주일에는 아버지가 감기로 누워있었고 그 후에는 명절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경사스러운 일요일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신천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 날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는지 다행스럽게도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가족 모두는 지금쯤이면 그가 집에서 상당히 멀리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자녀가 맨 첫 번째 찬송가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찬송가 한 곡도 놓치기 아까웠다.
옷장에서 아이들의 가장 좋은 바지를 꺼내면서 양마리아(Yang Maria) 또는 서구식으로는 이씨네 부인(Mrs. Lee)은 하나님의 보살핌에 감사하고 놀고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장남인 용채(Using Diversity)는 만으로는 열 살, 한국 나이로는 열 한 살이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곱 살인 용웅(Hero)도 혼자서 옷을 입었다. 그러나 방금 네 살이 된 용도(Admit-the-Truth)는 옷입는 데 실증이 났는지 발가벗은 채로 다시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아직 한 살나기 아기인 용구(Live Forever)는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근완(Near Perfect)이와 막내이며 외동딸인 순례(Obedience)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시무언으로 자칭하게된 용도는 이미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아 그들이 항상 교회에 갈 수 있도록 아버지를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다.
삼 십 분 후에 이들은 스페인의 함대처럼 당당하게 집을 나왔다. 그들은 잿빛 빨강, 노랑, 그리고 하얀 옷을 입고 푸른 들판을 가로질렀다. 어머니와 네 명의 아이들은 들 뜬 분위기로 지금 교회로 가는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었다. 팔월의 찜통 더위 사이로 차가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교회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적어도 여자 쪽은 꽉 차 있었다. 남아 있는 좌석이 별로 없었다. 여덟 칸 방 중앙을 가로지르는 하얀 커튼의 반대편에는 남자들이 앉아있었다. 찬송가를 부를 때 흘러나오는 약간 어울리지는 않지만 힘찬 남성적인 목소리를 통해서 남자의 숫자를 짐작할 뿐이다. 목사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양쪽을 다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아버지는 결코 교회를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에게 남자 쪽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알려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장남이 어머니 곁을 떠나 남자 쪽에 앉을 때까지는 아직 일년이나 남아 있었다.
이번 예배는 양마리아와 자녀에게 감회가 큰 것이었다. 교인이 알고있는 찬송가는 "예수 날 사랑하심"과 다른 것, 두 곡밖에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설교도 딱 적당했다고 느꼈다.
이제 그들은 부닥칠 고난은 상상도 못한 채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신천으로 가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속인 것이다. 그는 나가는 것처럼 꾸민 다음에 가족이 그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곳에 몸을 숨겼다.
아버지는 가족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기독교를 믿는 것을 고집하는 것을 보아 자신을 거역하고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는 그들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는 다시 한번 교회에 가면 죽이겠다고 그들 얼굴에 칼을 들이댔다.
따라서 십대 이전에 죽은 용웅(Hero)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은 어머니의 신앙교육과 아버지의 협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특별히 세 번째 아들은 어머니의 기쁨이었다. 그의 눈물과 기도는 열 살된 아들이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말했을 때 보상되었다. 학교 선생이 예수를 믿는 모든 아동은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고, 다른 교회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더 이상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유독 용도만 혼자 그 맹세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 일로 퇴학당했다. 그는 집에서 5일 또는 6일을 보냈다. 그러자 그 무식한 선생은 용도의 고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시 학교로 불러들였다. 그는 자신이 정한 규칙을 고수하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특별히 예외를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 작은 초가집으로 된 교회는 뾰족한 종탑이 있는 널찍한 벽돌집으로 바뀌었다. 이제 이용도는 교회 선생이었고 멀리 있는 도시의 기독교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그는 대단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유명한 맹인 목사인 길선주 목사가 그 교회의 학생을 위해 부흥회를 개최한 것이다. 기도는 시무언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그는 교회에서 한밤을 기도하며 세웠다. 교회 학교가 시작하기에 전에 그는 항상 교회에 일찍 도착했다. 그리고 종탑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한 시간 이상 기도를 한 다음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내려왔다. 오랫동안 그의 동료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냈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지는 못했다. 실수 한 적도 없지는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학비를 스스로 보충해야 했다. 아침에는 공부를 하고 학교 관련 제분소에서 방과 후 일을 했다. 그렇지만 교회 일을 너무 많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는 저녁 일을 부탁했지만 조정될 수 없었다.
의혹과 불안정이 학생 세대의 특징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기독교보다는 공산주의가 그들의 요구에 부합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나머지는 완전히 혹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의 인생관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용도는 명석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 역시 이런 분위기에 완전히 동떨어져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어머니의 하나님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사건이 터졌다. 그는 진심으로 열심히 일을 했지만 기숙사비를 낼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배고픔의 아픔은 이 학생에게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