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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 788-1021
제5장 비판주의 운동 Le mouvement criticiste 843-861
광대한 형이상학적 체계의 좌절은, 현명한 실증주의와 종교사상의 발전과 더불어, 반대급부로서 칸트주의의 본래적 비판 태도라는 회귀로 나타난다.
제1절 샤를 르누비에 Charles Renouvier 843
비판주의 운동은 흐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와 더불어 서막이 오른다. 르누비에는 꽁트(Comte, 1798-1857)처럼 몽펠리에에서 태어났으며, 1831년(16살)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생시몽주의자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가 1834년(19살)에 들어간 에꼴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에서, 꽁트가 그의 복습교사였다. 그 대학에서 그는 또한 르끼에(Lequier, 1814-1862)를 만났다. 그의 첫 작품은 고대철학 지침서(Manuel de philosophie ancienne, 1842)이고 다음으로 근대철학지침서 Manuel de philosophie moderne, 1844이며, 그리고 르루(P. Leroux)의 백과사전에 「철학」항목을 썼다. 1848년 혁명은 공화국의 지침서Manuel républicain)과 공화국의 지방과 중앙 조직론(Organisation communale et centrale de la République, 1851)를 쓰게 했으며, 또한 인민지(Feuille du Peuple)에 많은 기사를 썼다. 쿠테타 이후에는 그는 전적으로 사색에 전념하였다. 그의 비판주의는 4가지 시론 비판 일반론(Essais de critique générale(4권, 1854-1864) 속에 전개되었다. 제1 시론은 인식의 일반분석(Aanalyse générale de la Connaissance, 1851)이며, 제2 시론은 인간( L'homme, 1858)이 주제이며, 제3시론은 자연의 원리들(Les principes de la nature, 1864)이며, 제 4시론은 분석적 역사철학의 입문(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analytique de l'histoire 1864)이다. 이와 동일한 시기에 철학적 소설인 무시대성(Uchronie: Utopie dans l'Histoire, 1857)(2e édition revue et augmentée, 1876)과 도덕과학(Science de la morale, 1869)도 나왔다. 1872년에서 1889년 사이에, 그는 철학비평(Critique philosophique)에 많은 논문들을 썼다. 그리고 이 잡지는 1878에서 1885년까지에 종교비평(Critique religieuse)과 결합하였다. 이 후자 잡지에 철학 학설들의 체계적 분류의 개요(Esquisse d'une classification systématique des doctrines philosophiques, 1885-86)의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1891년부터는 철학비평이 필롱(François Thomas Pillon s.d.)에 의해 발간된 철학년보(Année philosophique)로 대체되었다. 그의 후기 작품들로는 역사의 분석철학(Philosophie analytique de l'histoire (1896-97)(2권), 신단자론(Nouvelle Monadologie, 1898)(avec Louis Prat), 순수형이상학의 딜레마(Les Dilemmes de la métaphysique pure, 1901), 인격주의(Le personalisme, 1903) 등이 있다. 그는 세크레땅(Secrétan, 1815-1895)과 우정 관계를 맺었다. 그들의 1868에서 1891년 사이에 있었던 서신교환은 1910년에 세크레땅 과 편지교환(Correspondance avec Ch. Secrétan, 1910)으로 출간된다.
흐누비에의 학설은 19세기 초에 꽃피려고 시작했던 꽃잎들로 이루어진 주요한 체계들과 단절을 보인다. 르누비에는, 어떤 제목을 지녔든 간에, 인간의 도덕적 삶을 보편적 법칙(또는 보편적 실재성)의 필연적이며 이행적인 선언으로서 간주했던 모든 학설들에게 적대적이었다. 과학적 결정론, 역사적 숙명론, 신비주의, 유물론, 진화론, 이 모든 학설은 그에게 있어서 이런 관점에서 모두 하나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학설들은 개인을 흡수하고 무화하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하나의 분출(un jet)로 나온 것이 아니듯이, 세계에 대한 그의 직관도 마찬가지로 아니다. 세 가지의 평행하는 주제들이 있다. 이 주제들은 가끔은 협력하지만, 기원과 본성은 매우 구별되어 있다. 그 첫째 주제는 수의 법칙이며, 에꼴 폴리테크니끄에서 수학 연구를 하는 처음부터 시작했던 무한 계산(미분계산)의 성찰에서부터 나왔다. 수학자들, 예를 들어, 꼬쉬(Cauchy 1789-1857)는 추상 속에서는 무한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수의 법칙이 진술한 바로는, 이 불가능 덕분에, 실재적인 집합들은 유한한 집합들이어야 한다고 한다.
둘째 주제는 자유의 주제이다. 그의 친구인 르끼에의 논증에 대한 성찰이 그에게 제시해준 것이다. 자유의지(le libre arbitre)는 도덕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 삶에도 뿌리를 두고 있으며, 어떠한 확실함도 자유의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주제는 관념적 상대주의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칸트와 꽁트에서 찾았다. 단지 현상들만이 현존하고, 현상 전체도 상대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 이 현상을 몇몇 다른 사물에 비추어서, 마치 능동 구성하는(composant)으로서 또는 수동 구성되는(composé)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주제 사이에 어떤 본질적 연결은 없다. 유한주의(le finitisme)는 자유의지의 부정과 완전히 일치할 수 있다. 틀림없이 수의 법칙은, 현상들의 계열을 후퇴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이 계열에 최초의 시작(un premier commencement)이 있었다는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최초의 시작이 자유의지라는 것을 요청하지는 않는다. 이 시초는 순수 아자르(un pur hasard)였을 것이다. 유한주의는 상대주의와 아직 덜 연결되어 있다. 칸트는 정신의 법칙이 현상들 속에서 무한정한 퇴행을 요구한다고 생각했고, 꽁트는 이것을 문제 삼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고대적 형식 아래서,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 세계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과 같은 두 형식 하에서, 유한주의를 생각한다면, 그러면 실재론자의 절대주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자유의지의 부정과 완전하게 비교가능하다. 칸트에서처럼 꽁트에서도 상대주의는 현상들에 대한 엄격한 결정론을 가정한다. 만일 자유 작용(l'acte libre)이, 선행(앞선 것)과 관계없이, 절대적 시초이라면, 그것(상대주의)은 심지어는 아마도 자기주장과도 양립할 수 없다. [상대주의는 자기주장과 양립할 수 없다는 말은 각 주장이 자기 결정론이라면 서로 간에는 같은 차원에서는 창과 방패처럼 양립할 수 없다.(46OKH)]
그의 학설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출발점들이 독립되어 있다는 것과, 르누비에 자체에서 유한주의와 상대주의 사에 연관들이 어렵다는 것을 특히 강조해야만 한다. 유한주의는 일반적으로 실재성의 효과적인 결정론을 가정한다. 여기서 효과적이란 세계라는 큰 것을 향하거나 원자라는 작은 것을 향하거나 간에 결정론에 이른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그리고 적어도 가능적 결정론을 가정한다. 그러나 실증과학들은 명증하게 제시하기를, 사람들이 전체로서 간주된 세계의 관념으로부터는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해체할 수 없는 최후의 요소로부터도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념론적 상대주의는, 모든 실재성을 연관으로 환원시키면서 그것들의 이유를 부여한다. 르누비에는 유한론자로 동시에 상대론자로 남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전체적 종합이 적어도 그자체로 사실의 어떤 것과 완성된 것의 어떤 것으로 인정되나(유한주의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종합은 인식에 접근할 수 없고(상대주의이니까) 다시 말하면, 비록 세계의 부피, 세계의 지속, 세계의 요수들의 수가 그 자체로 규정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수에 관해서도, 그 부피에 관해서도, 그 지속에 관해서도 표명할 수 없다. 이 인식은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평가에 의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우주적 다양한 양들에서 최대의 법치과 최소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면 완수 될 수 있을 있으리라. 그러나 법칙은 [현재로는] 없다. 이와 유비적 논증들은 증명하기를, 가장 높은 종들에서 가장 낮은 종들에까지 위계적 전체 등급표, 우주적 생성의 관념 일절, 인과적 계열의 초기 원인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종합, 목적들에 맞는 질서의 종합 등이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우리의 제한된 의식으로부터 전체적 의식으로 또는 모든 현상을 감싸는 의식의 총체성으로 이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르누비에는 유한주의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도 스콜라철학자들의 세계도 원하지 않았고, 근본적 기원에까지 가서 우주적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이들의 우주발생론도 원하지 않는다. 거기에 외적 부분에서(a parte foris) 즉 관점으로 보여 진 실재성이 있고, 우리는 내적 부분에서(a parte intus) 그 실재성을 파악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근본적 세 가지 주제를 매우 잘 파악한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철학자의 정신 안에서는 이 세 가지의 연결을 아주 잘못 파악한다.
게다가 이 주제들의 각각은 분명한 증거의 동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수의 법칙의 증거는 모순율 안에 있다. 수의 법칙은 모순율의 형식일 뿐이다. 수는 세는 행위에서만 현존할 뿐이다. 무한 수의 현존(존재)는 그 수가 현존하기 때문에 완성된 종합이자 동시에 그 수가 무한하기 때문에 미완성이다.
자유의 증거는 전적으로 르끼에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것의 직접적인 경험도 없고 선천적(a priori) 증거도 없으며, 게다가 그 반대인 결정론도 없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진영이라기보다 다른 진영에 가담하게 하는 지적 동기들이 없을 지라도, 사람들은 자유와 결정론 중에서 선택할 필연성을 느낀다. 그래도 채택하는 필연성의 동기들에 관해 반성할 것이 여전히 남아있다. 만일 내가 필연성을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진실이거나 거짓이다. 만일 그 주장이 진실이라면 내가 거기에 대해 갖는 확실함은 필연적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확실함은, 선택할 수단이 없다 할지라도, 똑 같이 필연성이다. 왜냐하면 두 확신은 똑같이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로서는 의심으로 귀착되었다. 만일 주장이 거짓이라면, 나는 그 주장을 함으로써 오류에 빠지며, 더욱더 의심(le doute) 속에 남게 된다. 만일 내가 자유를 주장한다면, 이 주장도 똑같이 질실 또는 거짓이다. 그런데 만일 그 주장이 거짓이라면, 나는 틀림없이 오류에 빠지지만, 그러나 나는 거기서 많은 실천적 이점들을, 즉 도덕적 책임성을 믿는 것, 부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을 미래를 믿는 것 등을 얻는다. 결국 그 주장이 진실이라면, 그 진리는 동일한 측면에서 실천적 이점이다. 따라서 나는 합리적 동기들에 의하여 진실하고 자유로운 인격들이 있는,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반성에 의해 결단할 수 있는 인격들이 있는, 세계를 위하여 채택하도록 움직였다.
르누비에의 셋째 주제인 상대주의에서, 사람들은 개별적 증거를 지적해 낼 수 없다. 상대주의는 실증주의와 칸트주의가 유지해왔던 공통적 정신의 상태로서, 실증적 여러 과학들에서 결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주제들 사이의 연결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오로지, 도덕적 숙명에 관한 어떤 신념에서, 즉 합리적 동기들과 지지점들로부터서 찾는 신념에서이며, 동시에 이것들을 주장하고 이것들의 진실한 토대를 만드는 신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신념은 이것들 모두를 주장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수의 법칙을 주장한다. 결국 모순율에 의해 수의 원리의 증거는 확신을 거의 끌어내지 못했다. 르누비에 자신은 자기 학업의 초기에 근대철학 지침서(Manuel de philosophie moderne, 1842)를 쓸 때, 그는 수학자인 한에서 무한 수의 불가능성에 가담자 였고, 동시에 철학자인 한에서 무한주의에 가담하며 모순적인 것들에 대한 헤겔식의 동일성 주제에 한편이었다. 수의 법칙에서 문제거리인 것은 수의 추상형식 하에서는 모순율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가 실재적인 것에 적용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정신에서, 이 원리의 실재성의 주제는 명증성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념과 견해의 대상이다. 연구 경력이 쌓이면서 쓴 역사의 분석철학(Philosophie analytique de l'histoire 1864)(4권 434-435)에서, 그는 바람직하고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설명한다. 근대철학 지침서의 헤겔주의 이후에 어떻게 모순들의 동일성에 대한 헤겔의 원리와 제한없는 모순율의 적용 사이에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또 그가 후자를 선택했는지를 설명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신비적 형이상학에 대하여, 그 형이상학이 이탈적(excentrique)일 수 있다하더라도, “어떤 방어막”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서는 1850년경에 수많은 이심율들(excentricités)에 대해 고려해야함 했다.) 따라서 나[브레이어]로서는 르누비에의 최근 두 해석들의 주제를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유한주의는 그의 수학적 사색들과 동시에 그의 도덕적 신념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한다
자유의 주제에서 사람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그가 동일한 신념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것이 현상주의적 상대주의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르누비에에 있어서, 경험 가능성의 원리에 따른 범주들을 증명하는 칸트에게 있는 선험적 연역에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 있어서 범주들이란 단순 한 사실로부터, 즉 일반적 사실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르누비에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 사실들이란 “실재성의 본질적 형식들의 자격으로 신념에 제시된 것”이라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반대는 절대주의이며, 물자체의 믿는 신념(la croyance)이며 실체를 믿는 신념이다. 이것은 우리의 도덕적 신념들과는 대립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범신론으로 이끌며, 다시 말하면, 자유롭고 책임있는 인격의 부정으로 이끈다.
이리하여 유한주의는 한편으로 자유와 상대주의로서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신념으로서, 르누비에 사유의 전형자체를 이루는 일종의 순환덕분에 상호 지지들 얻는다. 유한주의 상대주의는, 칸트가 쓰는 용어의 의미에서 도덕적 요청들은(les postulats)도, 도덕적 필연성으로 유일한 가치를 끌어냈던 이론적 이성이 접근할 수 없는 주장들도, 분명히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도덕적으로 고려한는 것과 독립적으로 완전히 합리적인 주제들 자체들이이다. 그러나 이 주제들이 전적으로 확실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이 주제들이, 가능한 도덕적 삶이 있는 우주[세상]의 통찰(la vision d'un univers)에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르누비에게서 약간 애매한 개념어(la notion), 즉 합리적 신념이란 개념이 생겨난다. 이 개념은 이성과 신념이 상호간에 수용하는 지지로 이루어진다. 그는 이런 추론적이고 반성적인 신념(la croyence resonnée et réfléchie)은 자발적 신앙들(les croyances pontanées)은 매우 다르다. 이 후자의 것들은 “정신적 현기증, 비반성적이고 주관적인 충동”에 기인하며, “이 충동에 의해 임의적으로 상상된 어떤 관계가 실재적인 것처럼 확고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예언들과 기적들을 믿는 신상의 경우, 환각(l'hallucination)의 경우 또는 몽유병의 경우와 같다.
흐누비에는 세계를 이중적 성격을 제시한다. 이중적 성격은 세계를 과학에도 신념에도 동일하게 호의적이게 한다. 표상과 현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과학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과학들은 현상들 사이에서 기능(함수)들로 표현할 수 있는 항구적인 관계 또는 법칙을 탐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가장 일반적인 관계들 즉 범주들을 탐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비판”으로서 과학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과학에 관하여 르누비에는 꽁트의 견해를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편, 표상작용은 자체 속에 표상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칸트 용어로는 주체와 객체)을 상관 용어들로서 자신 속에 포함한다. 이 두 상관 용어의 종합이 의식 또는 인격이다. 따라서 세계는 의식들의 세계이다. 인격성의 범주는, 즉 자아와 비자아의 종합은, 다른 범주들의 총합이다. 우선은 세계의 항구적 구조를 정의하는 범주들: 지위, 계속, 성질 등이 있고, 그리고 변화의 일반적 법칙들을 서술하는 범주들: 생성, 인과성, 목적성 등이 있다.
이론과 실천의 상호 침투가 끝내는 르누비에를 두 개의 부류로 알려진 철학의 체계들로부터 다시 출발하게 한다. 두 부류중의 첫째는 이론 이성을 만족시킨다는 구실로 도덕적 삶을 불가능하게 하고, 둘째는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한편으로 철학은 무한, 필연, 실체, 물자체, 역사적 숙명론, 범신론을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유한, 자유, 현상, 유신론을 주장한다. 이 두 학설 사이에서 어떠한 화해도 불가능하다. 이 두 학설은 선택해야할 딜레마의 두 가지이다. “순수 지성인 한에서” 이성, 즉 비인격적 이성은 이 선택을 할 수 없다. “주지주의는 철학이 취한 거짓 길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신앙[신념]과 뗄 수 없는 고등한 의미에서 이성이 필요하다”
흐누비에의 선택을 지배하는 본질적인 신념[신앙]이 있다. 그것은 인격의 도덕적 t숙명을 믿는 신념이다. “그 철학자는 죽음을 믿지 않는다.”는 말년의 대화들(Les derniers entretiens, 1904)의 이 사유는 근본적이다. 르누비에의 우주 속에서 모든 것은 오귀스트 꽁트에서처럼 인류의 것이 아니라, 개인의 숙명 주변에서 구축되었다. 그가 1948년에 썼던 공화시민들의 지침서(Manuel du républicains, 1848)(원제: 인간과 시민의 공화 지침서(Manuel républicain de l'homme et du citoyen, 1848))란 도덕적 개인주의에 관한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도덕적 삶의 발전에서 필수불가결한 경제적 상황을 각 시민에게 요구했다. 개인을 인류에게 희생시키는 숙명적이고 무한정한 진보의 주제를 있는 힘을 다해 거부한 것도 그이다.
이로부터 그의 신학이 나온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실체 또는 절대가 아니라 현존하는 도덕적 질서이며, 우주 속에 정의의 법칙이 있다는 보증이다. 이 정의는 각각에게 의무의 완수를 요청한다. 르누비에는 신이 현상적 세계와 연관해서와 달리 생각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신에게서 도덕적 완전성과 다른 무한성을, 즉 부분들의 구성이 아닌 무한성을 인지했다. 그는 학문을 시작하는 처음에서부터, 그의 친구 루이 메나르(Louis Ménard, 1822-1901)의 영향아래 다신론에 매우 기울어져 있었다. 메나르는 한 신비적 이교도의 시들과 몽상들(Poèmes et Rèveries d'un païen mistique, 1895)를 쓴 작가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유일신앙처럼 민족적이고 배타적인 유일신앙보다 다신론이 도덕적 우월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의의 용어는 충분히 정확하고 잘 정의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수학처럼 개념과 더불어 절차를 밟아서 도덕과학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순수 도덕은 이성의 규칙으로 정의 된 것이고, 자유도덕의 행위자는, 따로 떨어져 홀로 있든 다른 사람들과 단체를 이루든, 그 이성의 규칙을 자신의 정념들(des passions)에 부과해야 한다. 정의의 순수한 규칙은 다수의 행위자들에게 공통인 선을 내포하고 있다. 그 선의 실현은 노동으로부터 나오며, 노동은 행위자들의 각각에게 의무처럼 부과되어 있다. 이 규칙은, 각각이 공통 노동에서 취하는 행위에서 크고 작은 몫의 부분에 따라서, 행위자들 사이에 빚과 신용의 관계를 창조한다. 진다. 정의(正義)에 의해 정의(定意)된 이상사회는 “평화 사회”이다. 이 사회에는 신용과 빚의 항구적인 균형이, 즉 각자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기다려야하고 또 부담하는 노동의 평등이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상태의 지속을 보장한다.
그러나 이런 순수한 도덕에는, 어떻게 이상적 규준이 인간과 사회의 사실적 상태(l'état de fait)에 적용되는 지를 제시하는, 응용 도덕이 첨가되어야 한다. 르누비에는 이 상태를 “전쟁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이것은 혼돈의 상태이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사회들 간의 상호 불신이라는 특징이 있다. 전쟁의 상태는 방어의 권리를 정당화한다. 이 방어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들 중의 하나는 전쟁 상태에서도 합법적인 소유(la propriété)이다. 공산주의는 보편적 예속상태일 뿐이다. 재산의 남용은 점진적인 세금정책의 확립에 의해 단지 제한되어야만 한다. 르누비에는 1848년에 분명하게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졌기에, 이제는 프랑스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정강이 될 정강을 제시한다.
전쟁의 상태인 사실적 상태는 실천문제의 분명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악(le mal)의 문제이다. 사실적 상태는 정상적 상태가 아니다. 그 상태는 모든 도덕적 행위자들에게 내재하는 악행(un vice) 속에 자기 근원을 갖는다. 이 행위자들에게서는 이기주의적 정념들이 이성을 지배한다. 모든 것은 마치 인간이 타락된 상태에서 태어난 것처럼 이루어진다. 타락 상태는 신학자들이 원죄(la chute)라고 불렀던 것으로부터 나온다. 결국 이 상태는 세계의 제일 원인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칸트가 근본적 죄라고 불렀던 자유로운 의지(la volonté libre)의 결단에 기인한다.
자유재량(le libre arbire)의 잘못과 원죄를 설명하는 이 변신론은 르누비에를 인류에 기원, 역사, 종말에 관한 가설들로 귀착한다. 이 가설들은 크리스트교 신앙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비록 그가 개관적인 정확성에 목표를 두기보다 더 많은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숙명에 대한 진실한 목록을, 즉 도덕적 신념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목록을, 상상작용에 제시한다. 그는 원시적이고 완전하며 정당한 인간의 사회를 상상하고, 본성 자체로부터 자연의 의지에 예속되는 자연(une nature, 본성) 속에서 사는 사회를 상상한다. 원죄(la chute, 타락)가 가능했던 것은 인간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원죄는 이기주의적 정념들의 우세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인간 자신의 자유재량으로 행하고자 원했던 경험으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이런 결과로 인간의 신체적 능력들이 더욱 커진 만큼 더욱 더 폭력적인 거대한 전쟁의 상태가 있어왔다. 원시적 세계의 파괴는 성운의 형성과 현 태양계의 체계의 형성에 이르렀다. 따라서 역사적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원시적 세계의 폐허 위에서이며, 힘들이 서로 서로 대립되어 분해된 세계 위에서 이다. 그러나 인류는 원시세계의 타락을 일으켰던 인간들 자체로(des personnes mêmes) 구성되었다. 이 인간(la personne)이 이런 삶보다 먼저 있었듯이 이 인간은 이런 삶에서 잔존할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르누비에는 이 인간 또는 모나드가 해체할 수 없음을 믿는다. 이 모나드는 물질적 생식질(le germe matériel)에 연결되어 있으며, 조건들이 알맞을 수 있을 때, 이 생식질로부터 새로운 유기체가 유래할 수 있다. 르누비에의 단자론은 무한주의보다는 덜하지만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학설로 방향 잡혀가게 되었다. 그 학설은 실체를 실체 상태들의 연속적 법칙에, 그리고 의식에 유사한 존재(un être)에 환원되며, 예정조화를 이용하여 타동적 인과성을 부정했다. 인간적 자유재량이 원죄(타락)를 일으키는 것과 똑같이, 그것은 미래에 인류성 회복의 주인이자, 정의가 원시적 상태로 되돌아올 자연에서 지배할 목적들의 규칙의 주인이 될 것이다. 종말론을 19세기 한 가운데서 친숙한 유토피아와 구별하는 것, 그것은 종말론이 물리적, 도덕적, 사회적 변환들의 거대한 시기에 태양계로부터 성운상태로 회귀를 가정하는 “천문학적”이라는 것이다. 이 변화에 대해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각도 가질 수 없다. 그러한 것이 인격론(le Personnalisme) 학설의 일반적 특징이다. 인격론에서 자연(본성)은 개인 인격에 상대적으로만 현존한다. 또 거기서 개인 인격은 실재성의 실체적 요소이다. 또한 인격론에서는 위험이 있고, 창발적이지만, 인류 진화의 필연적 법칙에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인격론에 대하여 르누비에는 말년의 대화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격론이 오늘 내일의 철학자들에게서 호기심의 대상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만을 지적한다. 진보(le progrès)라는 유토피아는 모든 지성들에게 눈가리개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못을 보지 못하고, 부정의를 느끼지 못한다.)(p.7)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불가항력의 진보를 믿는 신앙은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르누비에가 보내는 커다란 경고이다. 1857년에는 그는 역사 철학에 대해 “무시대(無時代, une Uchronie)”를 대립시켰는데, 이 무시대란 유럽사회의 발전의 역사적 소묘이며, 그 발전이 있지 않았던 것처럼, 있을 수 없었던 것처럼 묘사이다. 또 그 발전에서 그는 크리스트교의 예언은 좌초했다고 상상한다. 이러한 것은 그의 사유 속에서 중세의 경제학을 만들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물리학적 세계의 진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 스펜서의 진화론적 자연주의에 분명하게 응답하게 된다.
1870년에서 거의 1900년에 이르기까지, 르누비에의 사상은 대단한 영향을 행사했다.
필롱(François Thomas Pillon, 1830-1914)은 르누비에 사상의 선전가가 되었다. 프라(Louis Prat, 1861-1942)는 신단자론(Nouvelle Monadologie, 1898)을 르누비에와 같이 썼는데, 그는 실체의 개념: 역사적 비판적 탐구들(La notion de substance: recherches historiques et critiques, 1905)를 썼다. 이 작품은 체계의 뼈대가 되는 관점들의 하나에 관해서 쓴 것이다. 브로샤르(Victor Brochard, 1848-1907)는 고대철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역사가들 중의 한사람이 되기에 이전에 르누비에의 영감을 받아서 오류에 대하여(De l'Erreur, 1879)(학위논문)를 썼다. 이 주제의 본질은 오류란 근본적으로 진리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진리란 확정된 가설이와 아무것도 아니다. 오류는 오직 반박된 가설일 뿐이다.” 검증(la vérification)의 활동은 의지적 활동이며, 결국에는 진리와 오류를 정의한다. 리오넬 도리악(Lionel Dauriac 1847-1923)은 신념과 실재성(Croyance et réalité, 1889)에서 인식 비평이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이나 감정과 의지의 비평이라 하게 될 일반 비평에 대하여 정의하고자 시도했다. 스위스 제노바 시의 철학자인 장-자끄 구르(Jean-Jacques Gourd, 1850-1909)는 르누비에의 현상주의에 집착하여 현상(Le phénomène, 1883과 세 가지 변증법(Les trois dialectiques, 1897)을 썼다. 현상자체는 환원할 수 없는 이원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인과성과 안정성 덕분에 현상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또한 과학적 인식을 회피하는 차이나고 불안정하고 절대적인 요소가 있다. 즉 법칙이외에 창조가 있고, 정의의 규칙 이외에 희생이 있고, 미의 배열이외에 숭고함이 있다. 이 “법칙 바깥들”(les hors la loi)은 르누비에의 비판이 현상 속에 도입한 불연속성들에 대응한다. 구르에 따르면 이 “바깥들”은 사물들에 대한 종교적 통찰에 연관있다.
마찬가지로, 브로샤르는 합리적 명증들의 한계들에 관하여, 그리고 판단에서 의지의 부분에 관하여 강조했다. 철학자이자 고등교육 행정가 였던 리아르(Louis Liard, 1846-1917)는 실증과학과 형이상학(La Science positive et la Métaphysique, 1879)에서 자연주의가 하는 것처럼, 실증과학을 형이상학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함으로서, 실재적인 것에 관한 주장들이 문제가 될 때 도덕적 신앙의 몫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온절대(l'Absolu)는 도덕적 삶이 그 조건으로써 예감하게 하는 선과 완전이다. 리아르의 학설 속에는 칸트의 방법으로부터 나온 실천이성의 많은 요청들이 있다.
프랑스와 이블랑(François Evellin, 1835-1910)의 유한주의는 먼저 무한과 양: 철학에서 과학들 속에서 무한 개념에 관한 연구(Infini et quantité, étude sur le concept de l'infini en philosophie et dans les sciences, 1880)(학위논문)에서 그리고 순수이성과 안티노미들: 칸트 철학에 관한 비판적 시론(La raison pure et les antinomies, essai critique sur la philosophie kantienne, 1907)에서 르누비에의 유한주의처럼 신념에 종속되지 않았다. 유한과 무한 사이에 진실한 딜레마는 없다. 왜냐하면 유한주의는 오직 증명가능 하며, 칸트의 안티노미에서 무한의 반명제들은 이성에서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수학자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양의 무한은 상상에 의해 생겨난 착각(une illusion)일 뿐이다. 이 주장된 연속이라는 것들, 심지어 실재적 공간과 시간은 불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한주의는 유심론에 연결되어 있다. 연속이라는 것은 무한정하게 분할가능한 것이기에 모든 안정된 존재의 소거 (l'évanouissement)를 함축한다. 단지 유한주의는 자발성을 부여받은 준재들, 즉 지성적인 것과 자유로운 존재들에 대해 가능하게 한다. (46RKF)
II. 독일의 신칸트주의 Le neokantisme allemand 853-855
1865년에 오토 리프만(Otto Liebmann, 1840–1912)은 칸트와 아류들(Kant und die Epigonen, 1865)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각 장의 마지막에는 반복 후렴구처럼, “따라서 칸트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이 칸트로 회귀에서, 후기 칸트학파들의 사변적 철학에 반대하는 반작용임과 동시에, 그에게는 상대주의의 취향이 지배적인 것 같다. 이 취향은 인간인식의 조건들에 비추어서 대상의 의존을 돋보이게 한다. 인간적 사상들, 인간적 표상들, 인식의 조건들과 시각적 이미지들의 조건들의 비교, 물 자체에 관한 완전한 불가지론 등, 이런 것들이 리프만 자신의 작품들(현실성의 분석(Zur Analysis der Wirklichkeit, 1876), 사상들과 사실들(Gedanken und Tatsachen, 1882-1904, 2권))의 중요한 특징들이다. 칸트주의 중의 하나는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리학적 시각의 교범(Handbuch der physiologischen Optik 1856-1866)을 쓴 독일의 유명한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쯔(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를 독일에서 신칸트학파의 선구자로 만들려는 것은 어떤 폐습일 것이다. 그는 물론 이렇게 썼다. “어떤 변형없이도 표상된 것의 본성을 만들 것이라는 표상작용을, 또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할 것이라고 여기는 표상작용을 요구하는 것, 그것은 대상에서 생겨났던 어떤 결과가 대상의 본성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표상작용들과 어떤 지성적 존재의 모든 표상작용들은 대상들의 이미지들로부터 나올 것이고, 본질적으로 이들을 표상하는 의식의 본성과 독립적일 것이다.” 그러나 아주 일상적인 이 상대주의는 칸트의 생각을 거의 표상하지 못하며, 이 상대주의는 우리의 표상작용들로써 상징들과 기호들을 만든다. 우리는 한편으로 이것들을 우리행동을 인도하기 위해 사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관성의 법칙을 수단으로 해서 외적 대상들이 현존한다는 결론을 얻는데 사용한다.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헬름홀쯔는 비유크리트 기하학에 관한 그의 작업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공간과 다른 공간의 가능성을 주장하기에 이르고, 선험적 감성론의 선천주의(l'apriorisme)에는 매우 싫어하게 된다. 그가 쓰기를 “기하학적 공리들의 선천적 기원에 대한 칸트의 증명은 이 공리들과는 다른 공간적 관계의 어떤 것도 직관 속에서 표상될 수 없다는 것에 기호하고 있어서, 그 증명은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주어진 이성이 부정확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사실상, 헬름홀쯔는 칸트의 체계를 이 불합리한 귀결로부터 해방시킬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적 정신의 잔재로서 간주된 공리들의 선천적(a priori) 기원을 부정하고, 그리고 기하학으로 자연과학들 중의 제일과학으로 만들려 한다.
모든 우리 인식을 현상들로 환원, 형식과 범주들의 주관성, 모든 형이상학의 불가능성, 영혼에 이르는 내적 관찰의 무능, 이러한 것들은 독일 철학자 랑게(Friedrich-Albert Lange, 1828-1875)가 칸트주의에서 빌려온 특성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델과는 멀리 떨어진 이에 대한 해석들을 내놓는다. 헬름홀쯔처럼 그는 감각들의 생리학에서 칸트주의의 정당화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는 범주들에게 감성들의 형식들과 동일한 주관성을 부여하고, 그리고 또 그는 이 형식들을 우리들의 심리-물리적 조직화의 형식에 부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초월적 연역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는 형이상학의 필연적 도달을 유물론 속에서 과학처럼 본다. 왜냐하면 [과학으로써] 이 체계는 가장 덜 가능한 것을 실재적인 것 그 위에 올리면서, 이성의 통일성에 이르는 경향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참조 유물론의 역사와 현재 그 의미에서 비판(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 1866)) 또한 그는 칸트가 행한 사물 자체의 용법에 대해 비판한다. 그것의 현존[사물의 존재]은 전혀 증명되지 않았다. 우리 정신은 단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우리 정신은 현상들의 원인처럼 문제거리인 항목의 개념으로 이끌려 간다. 또한 랑게에 있어서는 칸트의 실천이성에 해당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실천이성에 의해 요청되는 지적 세계 대신에 그는 종교와 형이상학의 창조 작업들을 대체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종교와 형이상학의 가치로부터 온 정신적 고양에서 이들의 창조적 가치를 본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알로이스 릴(Alois Adolf Riehl, 1844-1924)은 가장 정열적으로 지지했던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즉 철학은 인식이론으로 환원되어야 하고 모든 형이상학은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조: 철학적 칸트주의와 실증과학을 위한 그 의미: 역사와 체계(Der philosophische Kritizismus und seine Bedeutung für die positive Wissenschaft. Geschichte und System. 1876-79-87)(3권)에서) 그의 칸트주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그친다. 그는 몇가지 뉘앙스를 가지고서 칸트의 선천주의(l'apriorisme)을 인정한다. 이 아포리즘는 경험의 가능성 위에 원리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새로운 특성을 보탰다. 그는 선천(l'a priori)성에 사회적인 것을 접근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외적 세계의 실재성이 우리에 감각에 의해 무매개적으로 주어진다면, 그 보다 훨씬 중요한 증거는 사회적 증거이다. 즉 우리와 우리 동포들 사이에서 경험 공동체로부터 끌어낸 사회적 증거이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의 형성과정 속에서, 감각에 작용하는 선천적 개념의 작업을 통해서, 더 이상 개인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을 본다. 이러한 사회적 고찰방식들은 칸트의 선천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며, 이것을 뒤르깽(Emile Durkheim, 1858-1917)에서 사람들은 재발견할 것이다. (46RKH)
III. 영국 관념론 L'idéalisme anglais 855-
스터링(J.H. Stirling, 1820–1909)은 헤겔의 비밀(The Secret of Hegel, 1865)을 써서 영국에 헤겔의 철학을 도입한 사람이다. 그는 영국에서 1850년에서 1880년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항거하는데 전적으로 부합하는 인물이다. 자연주의, 경제적 개인주의, 사회적 유물론 이것들이 적들이다. 그는 헤겔의 구체적 보편을 가지고 이것들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한다. 그는 헤겔이 이것들의 모든 학설에서 실재성의 열세인 정도들을 보게 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로부터 영감을 받아, 영미 관념론의 학설을 구축한 것은 토마스 힐 그린(Thomas Hill Green, 1836-1882) 이였다. 그리고 이 관념론은 오늘날[20세기 전반]까지 브래들리(Francis Herbert Bradley, 1846-1924), 보산케트(Bernard Bosanquet 1848-1923), 로이스(Josiah Royce, 1855-1916), 맥타거트(John McTaggart, 1866-1925) 등과 더불어 이어지고 있다.
그린의 관념론은 칸트의 관념론에서 몇 가지를 빌려온 것이라 할지라도, 정신에서도 의도에서도 칸트의 것과 아주 다르다. 비판의 문제가 그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는 비판적 사유와 실증적 과학들의 연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의 신칸트주의는 독일과 프랑스의 신칸트주의 후신으로서 다른 성질의 것이었으며, 원리의 시작에서부터 경험론, 무신론, 쾌락주의의 반박으로 향해 있었다. 그 관념론은 정신을 인식 속으로, 신을 우주 속으로 도덕성을 품행 속으로 다시 도입하는 학설이다. 그러한 것은 유일한 원리 덕분이다.
흄이 모델에서 근거하여 그린이 생각했던 경험주의는, 정신을 의식 상태의 먼지로 축소 축소하면서, 인식의 작업에서 정신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요소들 사이를 연결하는 듯한 개념들(les notions), 실체와 인과성같은 개념들은 비합법적 허구들 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식의 이상은 그 개념들 없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선언 하는 것에 귀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없는 인식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건들의 계속 이어짐을 넘어서, 칸트가 원했던 대로, 완전히 안정되고 유일한 통일성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 이 통일성 원리가 대상을 구축하고, 유기적 단위(l'unité 통일성) 속에 감각들을 들어가게 한다.
자의식의 통일성의 원리로부터, 그린은 유심론, 유신론, 도덕론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우선 유심론부터 보자. 정신은 진화론의 학설이 그렇게 말하듯이, 비지성적 메카니즘의 결과물일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것을 생산하기는커녕, 정신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은 인식에서,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그 위에 있는 비물질적이고 변질하지 않는 자아에서만 실재적이다. 다음으로 유신론을 보자. 따로 떨어진 감각들에 대한 경험주의자의 주제는 인식 불가능한 온절대(l'Absolu)에 대한 스펜스와 해밀턴의 주제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다른 것들과 전제적 연관으로부터 감각을 잘라낸다. 마치 사람들은 절대를 모든 관계로부터 잘라내듯이. 이 두 주제들은 똑 같이 거짓이다. 그리고 둘째의 것은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편으로부터 도출한 것 같다) 만일 첫째 주제가 비난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감각이 다른 것과 관계속에 있기 때문이다. 첫째 주제는 그 자체적으로 부분적이고 불충분하다. 따라서 그 주제는 모든 감각들을 감싸는 총체적 인식에 의거한다. 아무것도 체계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또 밖에 있지도 않다. 실재성 또는(즉) 진리란, 바로 모든 부분들이 가정하는 이런 구체적 보편자이다. 그러나 이 보편자는 보편적 의식 또는(즉) 신에 의해 현존한다. 이리하여 신은 모든 인식의 요청(un postulat)이게 된다. 따라서 신은 인간에게서 하나의 대상도 하나의 사물도 그에게 외부에 있는 다른 하나도 아니다. 인간 의식은 자신의 근저에서 신의 의식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유한 요소는 유기체이다. 이 유기체는 영원한 의식의 수레(le véhicule)와 같다.
결국 도덕도 동일한 원리로부터 유래한다. 우리의 자아는 보편적 자아에 참여한다. 도덕적 삶은 보편적 원리와 더불어 우리들 자신의 정체성을 향하여 진보하는데 있다. 이 마지막은 어떠한 개별적 욕망의 만족에 의해서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우리의 본성 일체에 관여하는 만족이 필요하다. 보편자로 향하는 이러한 진보에서, 개인(l‘individu)은 도움을 구하며, 사회적 제도 속에서 저항하지 않는다. 그린의 관념론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 경향을 갖는다. 개인의 확장을 넘어서는 그의 사유의 확장을 통하여, 모든 권위적 형식은 결과적으로 신적이 된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개인적 선을 제도에 대립시킬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 매우 번창했던 개인주의에 대한 혐오는 아마도 그의 학설 전체에 비밀스런 동인일 것이다. (46RLD)
IV. 꾸르노 Cournot 857-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는 공교육의 총장학관이었다. 그는 과학들의 근본적 개념들을 비판적 방식으로 연구하는 초기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칸트와 꽁트로부터 인식 상대성의 주제와 사물의 본질에 결코 도달하는데 불가능성을 이어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첫 작품은 경우와 개연성의 이론의 제시(Exposition de la théorie de chances et des probabilités, 1843)인데, 기 이론에서 인식의 확실성은 개연성의 여러 정도들이 배열되어 있는 연관들에 의한 한계로서 나타난다고 한다. 인식에 관한 꾸르노 학설의 고유함은 개연성을 상대성과 동일시했다는 데 있다. 참조: 인식의 토대와 철학적 비판의 특징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fondements de nos connaissances et sur les caratères de la critique philosophique, 1851)(2권). 하나의 가설이 물리학에서 인정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행성의 관찰된 위치들 모두를 이해하는 타원궤도처럼, 그 가설은 관찰된 사실들을 합리적으로 이어 놓기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론들은, 그것이 이런 조건에서 더욱더 단순하게 만족되는 만큼 더 그럴듯하다. 그리고 직접적 지각이 확정한다. 금은 노랗지만, 물리학자의 인식이 노란 색깔 속에서 어떤 결합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노랗다. 그 결합이란 금의 고유한 색깔과 그것의 표면위에 빛의 반사의 효과 사이에 결합을 의미한다. 만일 표면의 효과가 금의 시각적 성질들을 금의 분자적 구성에 연결시킬 수 있다면, 그 표면의 효과는 금의 고유한 색깔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적 실재성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우리들의 힘의 정도에 따라서, 현상적이고 상대적인 실쟁성의 질서로부터 상위의 실재성의 질서로 올라가며, 또 현상들의 실재성의 밑바닥으로부터 이렇게 점진적으로 지성 속에 침투한다.”
이러한 동화작용을 통하여, 꾸르노의 개연주의는 칸트의 상대주의와 아주 다른 것이 된다. 개념들은 칸트의 상대주의와 아주 다른 의미를 취한다. 꾸르노에서 “상대적인 것”(le relatif)란 결국에는 정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류인력의 법칙과 같은 법칙이 있다하자. 그는 그것을 사물의 어떤 다른 본질보다 더 가까운 법칙으로 생각한다(참조: 함수이론과 무한소 개산의 개론(Traité élémentaire de la théorie des fonctions et du calcul infinitésimal, 1841), 186쪽). 칸트주의는 상대성 속에 어떤 차이도 인정할 수 없을 터인데, 왜냐하면 그 상대성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 직관의 감성적 특성을 포함하여 우리의 인식전체에서 획일적인 원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꾸르노는 자신의 개연성(확률론)에서 끌어낸 논증을 수단으로 공간과 시간의 주관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만일 이개념들이 주관적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떤 경이로운 우연(hasard)에 의하여 인식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들이, 시간과 공간의 개관적 현존을 내포하는 단순한 법칙들을 뒤따라서, 서로 연결되어 이어지는가? 예들 들어 천문현상을 아주 잘 합당하게 하는 뉴턴의 법칙은, 인간 정신 밖에서, 시간, 공간, 그리고 기하학적 관계들의 현존을 포함한다.”(참조; 인식의 토대와 철학적 비판의 특징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fondements de nos connaissances et sur les caratères de la critique philosophique, 1851), 142항목)
또한 여기서부터 범주들의 이론이 나온다. 이 이론은 칸트의 범주론과 나란히 가나 아주 다른 정신의 이론이 나온다. 이 이론은 과학들과 역사 속에서 근본 관념들의 연쇄론(Traité de l'enchaînement des idées fondamentales dans les sciences et dans l'histoire, 1861)(1911년 재판)의 목적이다. 이 책에 현대에서 관념과 사건의 진행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a marche des idées et des événements dans les temps modernes (1872)(1934년 재판)과 또한 유물론, 생기론, 합리론(Matérialisme, vitalisme, rationalisme: Etude sur l'emploi des données de la science en philosophie, 1875)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과학들과 역사 속에서 근본 관념들의 연쇄론(1861)의 목적은 대상은 인식의 토대와 철학적 비판의 특징에 관한 시론(1851)(124항목)에서 정확하게 지적되어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자연의 현상들이 줄지어 있는 다양한 범주들 사이에서, 즉 각 범주의 설명에 부합되는 과학적 이론들 사이에서, 어떤 종속배열의 관념을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한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 이행에서, 연속성의 해결책들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 해결책은 단지 우리 인식들과 우리 방법들의 현실적 불완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이어오는 설명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원리들의 필연적 개입에 기인한다. (친근성(affinité) 개념의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화학적 현상들이 기계적 원리들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 과학들이 과거의 과학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발전을 해온 지금, 초기의 개념화작업들 또는 관념들이 어떤 것일지라도, 후천적으로(a posteriori) 또 관찰자체에 의해 결정할 경우가 있다. 우리는 지성을 위하여 또 자연적 현상들의 설명을 위하여 이 관념들과 개념작업들에게 항상 도움을 청한다. 이로부터 이 관념들과 개념작업은 사물들의 본성자체에 의해 또는 우리의 지적 구성에 내속하는(inhérentes) 조건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부과된다.”
꾸르노가 과학들과 역사 속에서 근본 관념들의 연쇄론, 1861에서 근본적 관념(l'idée fondamentale)라고 부르기를 선호했던 범주는 일종의 내생적(intrinsèque)인 덕목에 의해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구별되고 독립적인 다수의 근원들에 의해 정당화 된다. 즉 [다수의 근원들이란] 경험, 새로운 개념을 보다 단순한 개념들에로 이끌려지는 환원적 연역, 상상의 필연성들(예를 들어 원자론의 기원 같은 것), 개념이 지배하는 사실들 사이에서 또 개념과 이웃하는 과학들의 근본적 개념들 사이에서 그 개념에 의해 도입된 조화. “근본적 관념은 그 작품들에 의해, 다시 말하면, 관념이 우리의 인식 체계 속에 둔 질서와 연결에 의해, 또는 개념이 그체계 속에 뿌려 놓은 혼란과 그 개념이 불러일으킨 충돌에 의해, 판단되기를 총체적으로 요구한다.”(참조 인식의 토대와 철학적 비판의 특징에 관한 시론, 1851)(135항목)). 예를 들어 실체의 개념을 보자. 이 개념은 우리 인격의 고유한 정체성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이 개념은, 화학적 분해에서 무게(중량)의 영속성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실험 덕분에, 무게를 잴 수 있는 현상들에게 유용하게 적용될 것이다. (유동성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꾸르노에 따르면) 이 개념은 빛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없는 현상들의 해석에는 어떤한 유용성도 없다.
그는 자신의 방법론에서, 수학과 역학 사이에, 우주론과 물리학 사이에, 물리학과 생명학 사이에, 생명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 확연한 구별을 짓는 경계 구분에서 그 개념을 매우 유효하게 사용 한다. 이러한 것은 해당하는 본질에 대한 실재성의 인식 덕분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정도들의 각각에 새로운 근본적 관념들을 도입하는 필연성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 대한 그의 태도는, 과학들 사이에 서로 환원불가능성을 주장 했던 꽁뜨의 태도에 유사한 것이라 할지라도, 꽁뜨와는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그의 태도는 독단론의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각 경우를 분리하여 연구하는 개연주의자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시론, 1851), 152항목에서 기계학적 원리, 즉 생생한 힘들의 보존의 원리와 같은 역학의 원리를 물리학 전체에 확장하는 것은 유용할 것이리라. 반대로 시론 156항목에서 원자론적 가설이 많은 실험들에 그리고 우리의 정신적 습관에 응답을 한다고 할지라도, 까르노에 따르면, 그 가설은 사물들의 바탕을 표현하는데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 가설은 알려진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이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꾸르노는 한 개념이 다른 개념으로 환원 불가능하다고 하기에 이른다.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연역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연역이 지닐지 모를 복잡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론 128항목에서 응용 역학은 중심힘들의 역학인 천체 역학에 근거할 수 있을 것이나, 단지 매우 복잡한 가설에 의해서 이다. 그는 이 가설을 한꺼번에 새로운 범주에, 즉 끌기(traction)와 노동(travail)의 범주에 더 잘 도입하기를 바랐다.
만일 사람들이 이제 수학에서부터 생명과학들을 관통해서 사회과학들에 이르기까지 근본적 관념들의 연쇄를 고려한다면, 사람들은 이 관념들이 하나의“대칭 극성(極性)”을 따라 무리지어 진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중앙지역, 즉 생명의 영역은 모호한 영역이다. 그 영역에서 직관의 수단들 또는 표상의 수단들은 우리를 벗어난다. 반면에, 두 극단의 지역에서는 한편으로 수학에서 다른 한편으로 보다 진보된 사회 상태에서, 질서와 형식의 분명한 관념들이 나타난다. 그 진보된 사회 상태에서 사람들은 문명을 보게 된다. 문명은 “살아있는 유기체 대신에 계산되거나 계산할 수 있는 매카니즘으로, 본능 대신에 이성으로, 생명의 운동 대신에 산술적이고 논리적인 조합방식들의 고정으로 대체하는”(과학들과 역사 속에서 근본 관념들의 연쇄론, 1861) 212항목에서) 것이다. 관념들의 고리는 수학에서 생명적인 방향으로 계속하는 대신에, 수학을 향한 길로 거슬러 간다. 사회는 원시적 단계에서는 생명성에, 예를 들면 종족에, 의존한다. 그리고 사회는 시간과 공간에 독립적인 합리적 규범들에 따라서 고착된다. 인간 개인에서 대비도, 생명에서 지성으로 원인과 결과의 연관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사유의 조건들에서 생물학으로 극한의 복잡성과 사유가 파악하는 법칙들에서 극한의 단순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상상 또는 정념들은 생명(la vie 삶) 없이는 설명할 수 없고, 반면에 “논리학은 최소한의 생리학적 전제개념들(prolégomènes)도 갖지 않는다.” “진보하는 문명은 물질에 관한 정신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유기체의 에너지와 고유한 성질들에 관한 사물들의 합리적이고 일반적 원리들의 승리이다. 이것은 많은 장점이외에 많은 불편함이 있다”(연쇄론, 1861) 330항목). 역사에서 가십거리(한담거리)로 축소되는 로마제국과 (꾸르노가 생각했던 대로의) 중국은 인류의 최종 국면을 예상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더 많은 영웅들, 성자들의 삶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개체성은 드러나지 않으며, 그래도 지속하는 역사의 확실한 매카니즘은 있다.
꾸르노의 개연성론(probabilisme 확률론) 덕분에, 과학의 근본적 관념들이 실재적인 것을 다 길어 올린다는 것을 가정하는 하지 않는다. 거기서 그의 초합리주의(le transrationalisme)이 나온다. 인간은 보편적 질서에서만 철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인격적 숙명을 지니고 있는데, 종교가 숙명을 자신에게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이 숙명은 질서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보편 유비로부터(ex analogia universi)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 삶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그의 초합리주의에서 보면, 꾸르노는 자기 학설의 정신에 충실한 채 남아있다. 다른 사람을 전형(le type)에 따라서 생각해야만 하는 그런 전형이 될 권리를 어느 “근본적 관념”도 요구할 수 없다. 이성에 의해 생각된 온자연(la Nature)은 인간의 종교적 감정에 의해 요구된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할 수 없다. (46RLF) (57UMG)
# 참고문헌
Lionel Dauriac(1847-1923), 우연과 합리주의(Contingence et rationalisme, 1925).
I.
Ch. Renouvier(1815-1903), 비판 일반론 Essais de critique générale(4권, 1854-1864); 순수형이상학의 딜레마(Les Dilemmes de la métaphysique pure, 1901); 형이상학의 문제들의 역사와 해결(Histoire et solution des problèmes métaphysiques, 1901); 인격주의(Le personalisme, 1903); 도덕 과학(Science de la morale, 1869); 세크레땅 과 편지교환(Correspondance avec Ch. Secrétan, 1910); 말년의 대화(Les derniers entretiens (1904)(L. Prat 편집 1930).
O. Hamelin(1856-1907), 르누비에의 체계(Le Système de Renouvier, 1927),
G. Milhaud(1858-1918), 르누비에의 철학(La philosophie de Charles Renouvier, 1927
R. Verneaux(1906-1997), 르누비에의 관념론(L'idéalisme de Renouvier, 1945); 르누비에 제자와 칸트의 비판(Renouvier disciple et critique de Kant 1945)
IV.
A. Cournot(1801-1877), 인식의 토대와 철학적 비판의 특징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fondements de nos connaissances et sur les caratères de la critique philosophique, 1851), 과학들과 역사 속에서 근본 관념들의 연쇄론(Traité de l'enchaînement des idées fondamentales dans les sciences et dans l'histoire, 1861), 현대에서 관념과 사건의 진행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a marche des idées et des événements dans les temps modernes (1872), 유물론, 생기론, 합리론(Matérialisme, vitalisme, rationalisme, 1875); 철학적 비판(Critique philosophique, 1958)(C.Khodoss에 의해 선택된 텍스트)
R. Lévêque(s.d.), 꾸르노에 따른 인간적 인식에서 “역사적 요소”(L'"Elément historique" dans la connaissance humaine d'après Cournot, 1938[Strasbourg 1938, 박사학위]
G. Milhaud(1858-1918), 꾸르노에 관한 연구들(Etudes sur Cournot 1927)
R. Ruyer(1902-1987), 꾸르노에 따른 미래의 인류(L'humanité de l'avenir d'après Cournot, 1930. (46RLF) (14:36, 57T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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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 프랑스 경제학자, 수학자, 철학자이다. 인식의 토대와 철학적 비판의 특징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fondements de nos connaissances et sur les caratères de la critique philosophique, 1851), 과학들과 역사 속에서 근본 관념들의 연쇄론(Traité de l'enchaînement des idées fondamentales dans les sciences et dans l'histoire, 1861), 현대에서 관념과 사건의 진행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a marche des idées et des événements dans les temps modernes (1872), 유물론, 생기론, 합리론(Matérialisme, vitalisme, rationalisme, 1875); 철학적 비판(Critique philosophique, 1958)(C. Khodoss에 의해 선택된 텍스트)
1815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 프랑스 철학자. 에꼴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에서 꽁트가 그의 복습교사였다. 그 대학에서 르끼에(Lequier, 1814-1862)를 만났다. 르누비에가 발간한 철학년보(Année philosophique). 근대철학 지침서(Manuel de philosophie moderne, 1842), 고대철학지침서(Manuel de philosophie ancienne (1844, 2 vol.),
1847 도리악(Lionel Dauriac 1847-1923),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의 제자. 신념과 실재성(Croyance et réalité, 1889), 프랑스 오페라의 심리학(Psychologie de l’Opéra français (Auber, Rossini, Meyerbeer), 1897
1856 아믈랑(Octave Hamelin, 1856-1907) 프랑스 철학자. 표상의 중요 요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éléments principaux de la représentation, 1907, 르누비에의 체계(Le Système de Renouvier, 1927)(publié par Paul Mouy)
1858 밀로(Gaston Milhaud, 1858-1918) 프랑스 과학사가, 철학자. 소르본에 처음으로 과학사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으로 레(Abel Rey) 그리고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이어갈 것이다. 르누비에의 철학(La philosophie de Charles Renouvier, 1927, 꾸르노에 관한 연구들(Etudes sur Cournot 1927)
1902 뤼이에(Raymond Ruyer, 1902-1987) 프랑스 철학자. ENS 출신. 꾸르노에 따른 미래의 인류(L'humanité de l'avenir d'après Cournot, 1930. La cybernétique et l'origine de l'information 1954, La genèse des formes vivantes, 1956
1906 베르노(Roger Verneaux, 1906-1997), 프랑스 카톨릭 신부, 칸트 전문가. 르누비에의 관념론(L'idéalisme de Renouvier, 1945); 르누비에 제자와 칸트의 비판(Renouvier disciple et critique de Kant 1945)
19?? 코도스C. Khodoss, (19..-1979), 철학적 비판(Critique philosophique, 1958)(C. Khodoss에 의해 선택된 텍스트)
?-? 레베끄(Raphaël Lévêque, s.d.), 구글을 다 뒤졌는데, 깡(Caen)대학 교수, 1923 스피노자에 관한 저술이 있고 1938년에 꾸르노로 학위를 했다(?) 동명이인이 있거나? 라파엘의 철자가 틀리거나... (57UMF) (15:34, 57UMG)
{책브레이2409철7권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