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드래건은 77년도 중앙대학교에서 조직된 스쿨밴드이다.
처음 시작한 이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회상'을 부른 김성호이며 밴드 다섯손가락에 영향을 준 인물이다.
70년대 말 해변가요제에서 '내 단하나의 소원'으로 상을 받았으며 그 이후 가요제에 출전했고 87년 겨울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받는데 이 노래가 '객석'이다.
밴드의 노래 치고는 고음이 아니며 가요제를 목적으로 만든 노래라 생각되며 그 다음 가요계에서 활동을 염두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건반을 두대로 해서 뭔가 꽉찬 연주를 선보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이 노래의 작사 작곡자는 부활의 1집에 참여했던 하태환 김병찬 두 사람이 확실하며 특히 김병찬은 기타주자로 활동하다 베이스로 전향한 인물로 김태원과 같이 연주를 했었고 프로로 활동을 했었다.
당시 가요제의 예선은 나오는 팀들이 다양했고 실력이 대단했으며 심사가 짧고 참가자들도 많아 중간에 탈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요제를 통하지 않고 바로 갈고 닦은 실력으로 판을 내고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계속 가요제에 나와 입상을 해도 그 기회를 놓치거나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냥 내 추측인데 노래를 만든 이들은 블루드레건의 구성원들과 다른 가요제나 무대에서 만나 알고 있었을 수 있고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를 하며 알고 지낸 사이로 곡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대학진학의 목적이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 가기 위해서? 라는 당시의 흐름도 있었고 고등학교 학생시절 부터 이름을 알린 연주자들끼리 알고 있다가 함께 밴드를 하고 스쿨 밴드지만 외부에서 실력있는 연주자가 참여하여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가요제를 하면 독창이나 중창의 경우 관현악단이 편곡을 하여 현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밴드보다 꽉차있어 유리했었다.
4인조나 5인조 많으면 6인조로 편성하여 나간 밴드는 자신들의 콘서트가 아니며 단 한방에 분위기를 띄워 대회를 뒤집어야 했는데 쉬운 게 아니었고 결국 분위기를 주로 담당하는 건반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넣어 연주에 힘을 더하는 경우가 있었다.
실제 밴드가 공연을 할 때 코러스도 추가로 부르고 기타나 건반을 더 불러 공연을 알차게 하는 경우가 지금도 있지만 당시에도 있었다.
당시 블루드래건에는 80년대 후반 부터 90년대 초중반 가수로 이름을 날린 '이규석'이 노래 보다는 전자기타를 들고 나와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선다.
그냥 리듬만 담당한 것이 아닌 간주와 함께 마무리를 멋지게 하는데 자세히 들어 보면 노래를 하는 후배의 소리를 더 돋보이게 하고 화음 또한 하루 이틀 한 솜씨가 아니다.
당시 이규석은 군대를 다녀오거나 휴학을 했던 복학생 한마디로 고학번이었는데 후배들과 함께 연습을 하여 예선을 통과 본선에 이르렀다.
그는 졸업 후 진짜 프로 가수가 되어 88년 기차와 소나무를 발표한다. 그리고 가요계에 이름을 널리 알린다.
전국의 내노라하는 사람들 틈에서 철저히 준비하고 연습하여 무대에 서는 과정을 알았을 것이고 함께 통과하여 결선에서 유일한 밴드로 남아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렸다고 본다.
보통 밴드로 대회에 나오는 팀들은 자체편곡을 하고 함께 연습을 하는 기간이 길며 학교의 연습실에서 선후배들의 여러 도움을 받는다.
연주를 잘하기 전 구성원과의 조화와 노력이 있어야 이겨낼 수 있다.
때문에 혼자 나오는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취업 때문에 자신의 몸값을 올리고 공부에 열정을 불태우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통해 본인의 개성을 살리면서 함께 하는 모습도 좋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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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87대학가요제 동상 '객석'
f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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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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