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으로 선보러 나온 씨앗들 덩치도 제각각이요, 얼굴 생김도 제멋대로다 어느 안 마당, 채마밭에 터 잡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오늘 선택받지 못한다고 울며 보채봐야 소용없다는 건 잘 안다 마른 땅이면 어떻고 젖은 땅이면 어떤가 발부리 닿는 자리가 그냥 내 집이거늘 누군가 한 걸음 더 관심 보인다면 햇살이며 비바람, 눈비 맞아가면서 뿌리내리고 기둥 세울 자신 있다고 하리라 시절 좋으면 잎사귀 사이로 꽃대 올리며 실한 열매도 품을 수 있다고 말하리라 주인에게 한 목숨 바치는 건, 기본이라고 펄쩍 뛰어 매달려 볼 참이다 종묘 상회 앞 길가에 민춘란 몇 촉, 씨앗들 재잘거림 한 귀로 들어 흘리면서 때 이른 봄비에 으슬으슬 떨고 있다
이병화 시인의 최근작 <종묘 상회>는 시장 모퉁이의 작은 종묘상을 배경으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씨앗'들의 목소리를 빌려 삶의 생명력과 숙명적인 낙관을 노래하고 있다. 전반적인 감상을 세 가지 핵심 갈래로 정리해 보았다. 1. 존재의 개별성과 무한한 가능성 시의 도입부에서 씨앗들은 "덩치도 제각각이요, 얼굴 생김도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규격화된 세상의 잣대 밖에서 각자의 고유한 생명력을 품고 있는 존재들을 상징한다. 아직 어느 마당, 어느 채마밭에 뿌리내릴지 모르는 불확실한 운명 앞에 서 있지만, 시인은 이를 불안이 아닌 '기다림'의 정서로 풀어냈다. 선택받지 못한다고 해서 울며 보채지 않는 씨앗의 태도에서, 자신의 때를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생의 자세가 느껴진다.
2. '발부리 닿는 자리'의 철학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발부리 닿는 자리가 그냥 내 집 이거늘"이라는 구절이다. 마른 땅이든 젖은 땅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곳을 곧장 삶의 터전으로 수용하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인다. 이는 단순히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햇살과 비바람, 눈비를 고스란히 맞아가며 기둥을 세우고 꽃대를 올리겠다는 능동적인 생존의 서사로 이어진다. 시인은 씨앗의 입을 통해, 어떤 척박한 현실에서도 뿌리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 강인한 생명 의지를 시각화하고 있다.
3. 대비를 통한 서정적 여운 시의 후반부에서 분위기는 씨앗의 당찬 포부에서 종묘 상회 앞 길가에 놓인 '민춘란'으로 옮겨간다. 씨앗들: 미래의 희망을 재잘거리며 열매를 꿈꾸는 역동적 존재 민춘란: 이른 봄비에 으슬으슬 떨며 현재를 견뎌내고 있는 실존적 존재 씨앗들의 희망찬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추위에 떨고 있는 민춘란의 모습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미묘한 온도 차를 보여준다. 봄은 왔으나 여전히 춥고, 희망은 있으나 당장의 시련은 엄연한 법이다. 이러한 대비는 시의 깊이를 더하며, 생명이란 단순히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결과뿐만 아니라 '추위 속에서 견디는 과정' 그 자체임을 역설한다.
마치며 이병화 시인의 <종묘 상회>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씨앗 하나하나에 우주적인 생명력을 부여한 수작이다. "주인에게 한 목숨 바치는 건 기본"이라며 펄쩍 뛰어 매달리겠다는 씨앗의 귀여운 허풍 속에 숨겨진, 삶을 향한 지독한 성실함이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신다.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