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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왕검의 탄생
한동안 제국의 변경을 넘나들며 소란을 떨던 부여족들이 패퇴하여 흥안령의 서쪽에 머물며 자리를 잡자 오래간만에 전쟁이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이때 웅녀황비는 커붉단 한웅의 황손을 잉태하는 경사를 맞아 나라의 안팎이 즐거움으로 충만하였다.
산월(産月)이 다가오자 웅녀황비는 차가운 날씨의 신시 아사달을 떠나 친정어머니가 계신 백두산 아래 감족의 땅으로 돌아갔다.
백두산(白頭山)은 예로부터 우리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산의 정상 양달에는 하늘 못인 천지(天池)가 있고 산중 깊숙이 응달에는 천지(하늘 못)와 감지(지상 못)의 걸침 역할을 하는 작은 하늘못(小天池)이 있다.
성산(白頭山)의 아랫녘 친정에 자리 잡은 황비는 매일같이 소천지에 들어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못에 올라 뱃속의 황손을 위한 축원(祝願)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드디어 산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신시 아사달의 커붉단 한웅은 잠시 정무를 접어두고 황비의 측근(側近)에 행궁(行宮)을 마련한 후 황비의 축원행사에 동참한다.
개천(開天) 1528년 (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 : 오전 3~5시), 웅녀황비는 백두산의 소천지옆 신단수(神檀樹)아래에서 한민족의 시조로 추앙받게 되는 단군성조(檀君聖祖)를 생산하였다. 단군은 커붉단한웅의 셋째 아들이고 웅녀황비의 첫 아들이다.
아기 단군이 무사히 첫돌을 맞았을 때 아버지인 커붉단 한웅과 어머니 웅녀황비는 아기단군을 데리고 백두성산의 하늘못(天池)에 올라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의 백성인 하늘민족(天孫族)을 이끌어줄 단군을 내려주심에 감사함을 고(告)하였다.
단군의 성장
나라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부여족들의 뛰어난 전투력에 위협을 느낀 커붉단 한웅은 황태자 지명문제보다 감족과 쥬신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시켜 나라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상황은 단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커붉단 한웅의 제 1,2 황자들은 태자의 자리에 앉지 못하였고, 후에 이복 동생인 단군에게 배달한국 천황위를 내주어야 했다.
어떻게 제 3황자였던 단군이 혈통을 중시하는 배달한국의 풍습을 거스르고 천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 그 이유는 어머니 웅녀황비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배달한국과 동시대에 있던 다른 나라의 통치자 선발제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그 나라의 최강자나 최강 세력가문 출신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하지만 배달한국은타국과는 달리 나라 최고의 통치자에게 수준 높은 학식을 요구하는 특이한 점을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단군제도(檀君制度)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支柱) 단군은, 단군에 오르는 순간 천자(天子)로 신분이 격상되면서 인신(人神)으로 대접 받게 된다. 단군에게는 국난에 대처하여 자유롭게 병력을 운영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국가의 명운(命運)이 걸린 사안에 대한 결정도 중신들의 동의없이 내릴수 있다.
단군에게는 그에게 주어진 무소불위의 권력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과 임무도 따르게 된다. 단군은 하늘과 지상을 잇는 천자로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손수 축문(祝文)을 짓고 하늘에 올리는 천제(天祭)를 주관하는 일에서부터, 전란이나 역병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연재해(自然災害)까지 막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중대한 임무를 지닌 단군에 오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와 함께 상당한 무예와 학식이 필요했고, 이러한 것들이 배달한국의 독특한 통치자 선발제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현명한 웅녀황비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거기다 중신들의 지지를 받는 단군의 이복형제인 제 1,2황자와 경쟁해야 하는 불리한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상황이 불리한 만큼 이에 대처하는 웅녀황비의 움직임도 재빠르고 주도면밀 했다. 그녀는 심복들을 부여족의 땅으로 보내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신종 전투 장비들을 구입해 들였다. 특히 청동 화살촉과 살상력이 높은 날이 굽은 장단검(長短劒), 그리고 치명적인 투창(投槍), 가볍고 효과적인 방패(防牌) 등은 모두 전투를 수행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있어서 이러한 무기를 사용하게 될 앞으로의 전쟁은 대량 살상을 피할 수 없음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웅녀황비는 어린단군에게 이러한 전투용 신장비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도록 하였고, 웅녀황비의 노력에 힘입어 어린 단군의 무예실력은 갈수록 일취월장 했다.
소년 단군이 13세에 이르자 소년답지 않은 건장한 체격을 과시했고, 그동안에 갈고 닦은 무예실력을 천하에 뽐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그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던 두 황자들은 긴장하게 되었다. 그동안 은인자중하며 무예와 학업 정진에만 몰두했던 소년 단군은 이제 세상이 잊고 있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백성들의 민심을 자신에게 모아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때 소년단군은 몇 가지 돌출행동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데 그중의 한 가지를 살펴보면 신시의 백악산에 혼자 들어가 3일 밤낮을 잠복한 끝에 그 동안 산에 오른 약초꾼들을 공격했던 악명 높은 곰을 잡아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소년단군이 14세가 되던 해 웅녀황비는 단군을 친정으로 보내 감국(熊國)의 부왕(副王) 직무를 맡도록 하였다. 웅녀황비가 이와 같은 결단을 한 이유는 단군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두 황자측에서 어린 단군에게 해를 입힐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소년단군을 안전하게 피신시킨다는 의미와 함께 감족의 부왕으로서 실무 경험도 쌓도록 한다는 절묘한 수순이기도 했다.
소년 단군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홀로 감국(熊國)의 수도가 있는 백두산 아사달(阿斯達)로 떠나갔다. 그곳은 소년 단군이 태어난 고향땅이기도 했다.
한민족의 어머니 웅녀황비
한민족의 어머니 웅녀황비 (출처 - 다물넷) 웅녀황비와 어린 단군
단군조선[檀君朝鮮] 1세 단군 왕검 재위 93년
단군(檀君) :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에 '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규원사화
고기에 말하기를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오 어머니는 웅씨(熊氏)의 왕녀이다.
신묘(辛卯)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밑에서 태어났다.
나이 14살에 웅씨의 왕이 그 신성함을 듣고 뽑아 올려 비왕(裨王)을 삼고 대읍(大邑)의 국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개천(開天 - 戊辰 4865(BC 2333년)) 1565년 10월 3일에 이르러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00명을 거느리고 단목(檀木)있는 곳에 왔다.
천제의 화신으로 제(帝)라 하니 이분이 단군 왕검 (檀君王儉)이다.
신시(神市)의 옛 법을 다시 회복하며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단군이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지방의 일 등을 주관하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해설)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 래이(萊夷), 회이(淮夷)·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 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검성(壬儉城)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50년(丁巳)에 홍수가 범람하여 백성들이 쉴 수가 없으므로 임금은 풍백(風伯) 팽우에게 치수를 명하여 큰 산과 물을 안정시키니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하였다.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51년에 임금이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강화도)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제천단을 마리산(摩離山)에 쌓게 하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이것이다. 67년 임금은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우사공(虞司空)과 도산(塗山)에서 만나게 하였다. 태자로 하여금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전하게 하였으며, 나라의 경계를 정하게 하였는데 유주(幽州)·영주(營州) 두 고을을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회대(淮垈)의 제후를 정하여 분조(分朝)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천하의 땅을 구획(區劃)하여 삼한(三韓)과 더불어 땅을 나누어 다스렸는데 진한(辰韓)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렸다.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이었다. 이 해 3월 15일에 임금이 봉정(蓬亭)에서 세상을 뜨니 교외 10리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
태자 부루(扶婁)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은지 24년, 임금의 자리에 있은지 93년이니 수는 130세이다.
단군을 중심으로 볼 때 웅녀의 존재는 곰〔熊〕의 자손이라는 사상이 중심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지역과 연결시켜 고려할 때 고아시아족(paleo asiatic)의 존재를 주목하게 된다.
고아시아족의 시조신화가 곰숭배사상을 지니고 있고 그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고아시아족은 곰숭배와 함께 샤머니즘이라는 종교적 요소를 보유하고 있는데, 최고의 샤먼을 지칭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과의 관련성 및 그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系木)관념이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고 있어, 단군신화의 내용을 고아시아족과 연결시켜 파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첫해(辛丑 - 4958)에 임금이 군사를 내어 유주(幽州)·영주(營州) 고을을 치고 그 우두머리를 쫓아버리고 동무(東武)·도라(道羅)등의 공로를 표하였다.
2년 임금이 소련(少連)·대련(大連)을 불러 나라 다스리는 도를 물었다.
3년 9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은 머리를 땋아 머리를 덮으며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10년 4월 구정(邱井)을 정리하여 밭의 대장을 만들어 세금을 내게 하여 스스로 사사로운 이익이 없게 하였다.
12년 신지(神誌)의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58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이날 일식이 있었고, 만백성은 몹시 슬퍼하였다. 태자 가륵이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기해 원년(BC 2182) 5월,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셨다.
을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신(神)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료출처 한류열풍과 미래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자 하는이도 역시 아름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일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3 , 7 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뭉쳐서 깊고 묘한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는 것이라. 이를 커발한이라 하며 구한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 같이 되었다.
경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글은 다음과 같았다.
신축 3년 신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 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의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후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년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