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선을 넘어
창 47:27-31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7장 27절에서 31절까지 말씀 ‘사선을 넘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사선을 넘는다 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할 때면 대부분 어떨 때 사용합니까?
원치 않는 곳에서 또 정말 삶의 의미가 없거나 삶의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살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것을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멕시코 국경에서 좀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아메리카 드림을 마음에 꿈꾸며 국경을 밀입국하는 경우에 이 국경 수비대가 지키지 않습니까? 상당히 위험하게 됩니다. 걸려서 멈추지 않으면 발포를 하기도 하기 때문에 사선을 넘어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하여 미국을 향해 밀입국하는 사람들 사선을 넘는다고 얘기합니다.
또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탈북자되는 우리 동포들이 사선을 넘어옵니다. 그 탈북자들의 사선을 넘어오는 이야기들의 많은 수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주에 하나 인상 깉은 거 제가 한번 적어보았거든요?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선을 넘은 한 탈북자의 수기 중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고향에서 산나물에 목숨을 걸기보다는 죽어도 중국에 가서 이밥 한 그릇이라도 실컷 먹어보며 살고 싶었다. 국경지역 무산 땅에서 며칠 밤을 노리던 끝에 어둠이 머뭇거리는 이른 새벽에 남동생의 손목을 잡고 두만강에 뛰어 들었다. 속살까지 얼어드는 11월의 찬 물길을 헤치며 죽자 살자 중국 땅 쪽으로 향했다. 북풍에 굽이치는 강물이 우리를 삼킬 것만 같았다.”
11월 말 이북 두만강이면 벌써 추울 때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새벽 어두움이 가장 짙게 드리워질 그 때에 중국을 향해서 가는데 산나물에 목숨을 맡기고 연명하며 죽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죽을 땐 죽더라도 두만강을 넘어서 중국에 가서 쌀밥 한 그릇 먹다가 죽으면 좋겠다. 그러 염원을 가지고 사선을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야곱이 이처럼 사선을 넘어가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죽을 것을 예상하면서 막벨라 동굴,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서 샀던 그 막벨라 동굴, 묘지를 머리에 기억하면서 요셉에게 유언을 합니다. 두 번이나 간곡하게 맹세할 것을 강권합니다.
내가 죽으면 막벨라 동굴에 묻어라. 내가 죽으면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리브가와 그리고 자기의 첫 번째 부인 레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라반 삼촌에게 속아서 얻게 된 첫 번째 아내 레아가 묻혀 있는 그 곳에 나를 묻어달라는 이야기를 두 번이나 그것도 가장 진지한 맹세의 어떤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이 사타구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맹세하게끔 하는 일을 두 번이나 반복하게 됩니다.
그냥 한번 총리 요셉이 그 성실한 청년이 아버지가 얘기하면 막벨라 동굴에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는 일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고 안 할까봐 두 번이나 이렇게 간곡하게 맹세하기를 강권하느냐? 이 야곱의 마음 상태를 지금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47세에 죽게 되는데 사실 야곱이 147세에 죽는다는 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고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180세까지 산 것을 생각하면 너무 일찍 죽는 겁니다.
이제 48장에서 147세로 야곱이 병이 들어서 생애를 마친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전에 죽음을 에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 밖에 없는 겁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산 나이를 생각하면 147세면 아직도 30-40년은 더 살 수가 있는 그런 상황인데 미리 죽음을 마음 속 깊이 깊이 생각하면서 막벨라 동굴 조상들의 무덤에 그 곳에 자기를 묻어달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걸까요?
지금 야곱의 마음이 사선을 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막벨라 동굴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무덤에 집착을 하면서 요셉에게 두 번이나 맹세할 것을 강청하고 있는 이 야곱의 마음 상태가 어떤 상태일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여러분, 지금 야곱은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축복의 현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그런 부활한 아들인 것 같은 느낌에 황홀해하며 그 요셉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었던 그 대제국 애굽을 다스려가는 정말 눈부신 괄목할 만한 그 정치력과 활동상황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민을 칠 년 대기근 속에서 구원해가고 있는 그런 나라 살림과 그 근동지역 전체 주민을 살려가는 눈부신 활약을 보면서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이 뿌듯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야곱의 식솔 칠십 명이 이제 애굽에 내려가서 고센 지역의 라암셋이라고 하는 성에 머물게 되는데 가장 비옥한 땅이라고 합니다. 그 곳에서 이제 자손들이 가축을 치면서 번성해가기 시작을 합니다.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가장 완벽한 축복의 현실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대부분 우리가 인지상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이런 부귀와 영화가 있을 때 진시황 같은 경우 죽지 않겠다고 삼천동자를 불로초를 구하러 보내지 않습니까?
또 목회하면서 많이 봅니다. 너무나 잘 살고 너무나 훌륭한 그런 환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죽게 되었을 경우 많은 경우에 내가 왜 지금 죽어야 돼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리 앞서서 죽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벨라 동굴을 생각하면서 요셉에게 두 번이나 조급한 마음으로 불안한 마음으로 자기를 거기다 묻어줄 것을 맹세하고 있는 이 야곱의 마음 속에 생긴 변화가 어떤 것이냐?
이제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향해서 쫓고 쫓기고 속이고 속고 그리고 그 복을 쫓아가느라고 수없이 많은 환란을 겪고 겪었던 이 야곱이 이제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복을 다 가진 이 상태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졌던 거와 같은 그런 사랑이 이제 생기면서 오직 하나님과 관계된 것 이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 의미를 찾지 못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여러분, 먼 얘기하지 말고 제 얘기해보지요.
제가 연애할 때 한 9년 연애를 했습니다. 나중에 결혼하고 봤더니 집사람이 요만한 상자를 갖고 있어요. 그 상자 속을 보니까 색깔이 누렇게 된 편지들이 있습니다. 그게 다 옛날에 가끔 제가 저희 집사람이 열 번 편지를 보내면 한 번 정도 보낼까 그저 전부 통틀어서 9년 연애하는 동안에 대여섯 번 보냈을까 어느 구간 동안에는 저희 집사람은 매일 쓰다시피 했었는데 군대 가 있을 때는 매일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도 글 쓰는 재주가 없어서 글 쓰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하여간 편지가 누렇게 변해 있는 것을 갖고 있는 걸 봤어요. 그래서 제가 그야말로 간청해서 그 편지를 찢어버리라고 얘기를 해서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뭐, 그런 것에 그렇게 의미를 두고 있겠습니까? 다 지난 얘긴데... 한때 그저 마음이 뜨거웠을 때 썼던 편지 그 내용이 그렇게 굉장한 내용이 있겠습니까? 명필이겠습니까, 명문이겠습니까?
다 버리라고 해서 다 버린 걸로 알고 있는데 10년이 넘도록 편지가 누렇게 되도록 그것을 갖고 있는 그 마음이 사랑이지요.
막벨라 동굴에 대해서 두 번씩이나 맹세를 강요하고 있는, 한 번 지나가면서 아니면 식사하면서 요셉에게 네 증조할아버지와 네 할아버지가 묻힌 그 막벨라 동굴에 나도 거기다 묻어라 이렇게 말을 했어도 요셉이 하지 않을 사람이 아닐 것인데 두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가장 영화로운 자리에 있으면서 바짝바짝 땅이 말라져가고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동굴에 갖다가 묻으라고 하는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하나님과 가까이 연관되어 있는 사물과 대상과 사람 그 누구라도 야곱이 이제 지금 눈에 보이는 어떤 영화보다도 더 귀중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가장 영화로운 상태에서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 죽음을 넘어설 것을 마음 속에 생각하고 막벨라 동굴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땅 가나안 지금은 쩍쩍 갈라지고 기근이 있는 그 땅에 왜 비옥한 라암셋 그 곳을 떠나서 바로 그 막벨라 동굴 척박한 땅에 나를 묻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왕보다도 누구보다도 아브라함이 귀한 분으로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며 살았던 그 할아버지 곁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모든 사선을 넘는 행동이 여러분, 안 좋은 곳에서 목숨이 위태한 곳에서 살아야 될 의미가 없는 곳에서 더 좋은 곳을 향하여 삶의 의미가 있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려 할 때에 생기는 그런 행위입니다.
지금 야곱은 가장 좋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가장 더 많이 만끽하고 더 길게 만끽하고 장수를 해야 될 그럴 때입니다.
지금 왜 죽음을 생각하면서 막벨라 동굴 더군다나 그 험악한 곳에 자기를 묻어 달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까?
하나님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자, 이제 보세요 여러분.
사선을 넘는다는 것 죽음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감수해버린다는 것 이것은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상대적으로 안 좋은 곳에서 좋은 곳을 향합니다.
고센 땅 비옥한 곳, 요셉의 눈부신 활약, 쉽게 말해서 자식 덕 보는 거지요. 총리의 아버지가 된 거에요. 서울대 수석 입학한 자의 아버지 되는 것보다 그 당시에 더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총리의 아버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야곱이 숨이 막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로 가고 싶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끼기 시작하자 이 땅에서 그토록 좋은 모든 현실이 사선을 넘어서 무덤을 넘어서 죽음을 넘어서 가고 싶고 빠져나오고 싶은 현실이 되어버리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야곱이 침상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한번 해보세요. 형을 속이고 팥죽 한 그릇으로 그리고 어머니와 짜서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따내고 라반 삼촌과 경쟁을 하면서 라반 삼촌에게 속이고 속고 양을 자기 나름대로 계략을 써서 얼룩진 양들을 만들어내겠다고 마음을 먹고 뛰어갔던 이 야곱.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라반 삼촌에게 돌아올 때 세겜에 머물면서 정주하다가 피바람을 일으켰던 이 야곱이 그렇게 복을 향하여 질주해가고 다아나믹하게 역동적으로 살았던 야곱이 침상머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을 보세요.
복을 향해 쫓아가던 야곱이 하나님을 향해 쫓아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쫓아가는 모습은 침상머리에 앉아, 침상이란 뭡니까?
행동이 끊어진 것입니다. 행동이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해 경배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맛을 느끼고 하나님이 그리워지자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절절에 다다른 이 행복의 경지가 사선을 넘어서 빠져 나가고 싶은 상황으로 바뀌어버리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일날 주기도문의 둘째 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다른 것이다,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걸 우리 생활 속에 적용하자면 윤리적이고 성스럽고 이러한 좀 거리감이 있는 그런 뜻이라기 보다는 지금 보다는 구분이 될 정도로 더 좋은 상태가 거룩이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또 구분이 되고 차이가 날 정도로 좋은 상태가 거룩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 라는 얘기는 하나님이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가장 좋은 상태이시라는 것을 말한다. 내가 그 분을 만났을 때 가장 좋은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베드로가 하나님되신 예수님을 변화산에서 보았을 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삽시다 라는 말을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끼고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좋음,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모아놔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그 마음의 좋음을 감당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중국에 넘어가서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과 이북에서 썩어져 가는 산나물에 목숨을 의지하고 연명하는 그 상태를 비교해볼 때 요셉의 총리 활동의 그늘 아래서 고센 땅의 기름진 곳을 차지하고 자손이 번성해가며 총리의 아들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이 이북에서 산나물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비교하면 하나님을 갖는 것에 비교하면 그 고센 땅에서의 애굽 총리의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그 복된 현장이라고 해봐야 결국은 산나물에 죽음 죽음 죽음을 앞보면서 연명해가는 이북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아봐야 그건 이북생활에 불과한 것이고 아무리 좋은 것을 다 모아봐야 중국에 넘어가서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과 같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고 야곱은 두만강과 같은 사선을 넘어 막벨라 동굴에 직행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안다고 했습니까?
막벨라 동굴에 묻어달라는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합니다. 단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지혜자의 모습이었다면 막벨라 동굴일 필요가 없어요. 그게 뭐가 대단합니까? 아무데나 묻히면 되는 거지요. 사실은 그게 더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지혜자의 달인의 모습이지요. 이 썩어질 육신 아무 것도 아닌 거 어디다 묻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막벨라 동굴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땅이라는데 의미를 두고 있는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그 땅에 의미를 두고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고 싶어서 이 좋은 현실을 뒤로 하고 사선을 넘어갈 것을 자기가 자처하고 있으면서 그 바램을 따라 147세, 아브라함과 이삭에 비해서 삼사십년이나 빠르게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야곱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내가 죽은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선을 넘는 것이에요. 그런데 왜 사선을 넘는 것입니까?
이 땅에 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쌓여도 이북의 삶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비하면 하나님을 갖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서 이 땅에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합니다, 자식들이 다 좋은 대학에 좋은 직장에 좋은 며느리 좋은 사위를 얻어서 훌륭한 손자 손녀를 낳고 자손이 번성합니다. 너무나 너무나 좋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들 다 모아도 이북에서 나물에 목숨을 의지하고 사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의 맛을 본 자 하나님을 마음에 느껴본 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모든 것들을 다 모아놔도 그것이 이북의 삶인 것처럼 느끼면서 아버지께로 가고 싶어서 그렇다고 자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려고 이 땅에 대해 제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을 등져버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좋다는 모든 것을 다 뒤로 해버리고 사선을 넘어서 하나님 아버지가 좋아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껴안고 싶어 십자가 길로 나가는 것이고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지금도 내가 사선을 넘어갈 수 있는 막벨라 동굴 아닙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좋은 것 다 모아 놔봐야 우리 아버지 계시는 천국에 비하면 이북 생활에 불과한 이런 생활을 떠나고 싶어하지도 않고 떠날 수도 없었을 텐데 주님의 십자가 허락하셔서 오늘도 우리 마음이 이 땅에서 모든 좋은 것들 다 마음에 버리고 사선을 넘어 더 좋은 우리 아버지를 향할 수 있게 해주시고 더 좋은 우리 아버지를 실제로 만날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장 좋은 분 그래서 거룩하다 일컫는 우리 아버지를 마음에 모시고 가장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 허락하는 동안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