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196문, 기도⑩. 24.3.10, 박홍섭 목사
제196문, 주기도문의 맺음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주기도문의 맺음말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피조물 안에 있는 어떤 가치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이유를 가지고 우리의 간구를 힘써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단 9:4, 7-9, 16-19). 또 하나님께만 영원한 주권과 전능하심과 영광스러운 위엄을 돌리는(대상 29:10-13) 찬양을 하면서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빌 4:6). 이런 주권과 전능하심과 위엄을 가진 하나님이 우리를 기꺼이 도우실 수 있고 또 돕고자 하시기 때문에(엡 3:20-21, 눅 11:13)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담대하게 간청할 수 있습니다(대하 20:6, 11).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이루어 주시기를 잠잠히 의지해야 합니다(대하 14:11).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확신임을 증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4:16, 계 22:20-21).
해설
1. 주기도문의 맺음말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는데 사본의 원문은 이 부분에 ‘왜냐하면’을 의미하는 ‘호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예전의 한글 성경에는 ‘대개’라고 번역했었죠.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맺음말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께 주기도문의 내용대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주기도문이 가르쳐주는 대로 기도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능력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히 있으며, 그렇게 기도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2.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들도 기도합니다. 어떤 때는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큰 간절함과 진심을 바쳐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간절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의 유일한 근거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피조물 안에 있는 어떤 가치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뿐입니다. 주기도문의 맺음말은 이 사실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다시 확인하고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조건을 걸고 거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 기도를 듣고 응답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나라가 있고, 하나님께 권세가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해 그 백성 된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죄용서의 은총과 시험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주기도문의 맺음말은 일종의 찬양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만 영원토록 있으며,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니 기도할 때마다 그 은혜를 찬송하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없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라 그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떼쓰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기도문의 맺음말은 가르쳐줍니다. 동시에 이 부분은 괄호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괄호가 되어 있는 구절은 대부분 사본의 차이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성경은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수많은 사본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본은 거의 일치하는데, 그중에 몇몇 사본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타나 실수 말고,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거나 아예 들어있지 않는 사본들이 있을 때 괄호 안에 넣어서 표시합니다. 주기도문의 맺음말도 그런 부분입니다. 초기의 고대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고 그것을 필사한 사본에만 있기에 괄호로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의 유익을 위해 비록 괄호 안이지만 성경 필사 과정에서 이 구절이 들어가도록 섭리하셨음을 믿고 이 송영을 주기도문에 넣어서 사용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든지, 결국은 나의 왕국과 나의 힘을 내려놓고 내가 취하려고 하는 영광도 내려놓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고백하고 찬송하면서 마무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소요리 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도 마지막 송영을 주기도문에 포함 시키면서 그 의미를 그렇게 가르칩니다.
4. 주기도문의 가르침대로 기도하고 그 맺음을 송영으로 하면 우리 삶의 초점이 반드시 하나님께 모아집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붙잡히고, 생각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이 ‘아멘’으로 끝이 납니다. ‘아멘’은 그 내용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기도한 나의 기도의 내용에 내가 객관적으로 동의하며 나아가 나의 주관적인 결단과 고백까지 포함된 뜻이 ‘아멘’이라는 고백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멘’ 안 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고, ‘아멘’ 잘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멘’은 그렇게 남발할 용어가 아닙니다. 그 의미를 잘 살펴서, 자기 삶을 걸고 동의할 때, 하는 겁니다. 그러니 기계적으로 너무 남발해도 문제고 너무 안 해도 고백과 결단이 없으니 문제입니다. ‘아멘’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동의와 고백과 결단을 담아서 ‘아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대요리 문답의 마지막 부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기도의 교과서인 주기도문의 맺음말 부분을 살피면서 우리는 타락한 종교성을 따라 막연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기도문이 가르쳐주는 기도의 원리와 질서와 방향과 내용을 따라 기도해야 함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러나 바른 기도를 강조하면서 아예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큰 시험입니다. 주기도문은 기도를 안 하려고 배운 것이 아니고 기도를 더 잘하려고 배운 것이므로 이 기도를 배운 사람은, 이제 더 바르게 더 깊이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종 좋은 것을 베푸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는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그냥저냥 잘 살아지니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별문제 없이 살아지기에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은 참된 생명의 삶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며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마음이 없고, 믿음이 없고, 은혜가 없어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경건의 능력을 경험할 수도 없고, 은혜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고,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우리의 모든 경건 활동에 생명을 공급하는 산소와 핏줄 같은 겁니다.
기도는 경건의 표지인 동시에 은혜의 방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늘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죄를 이길 수 없으며, 기도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으며 기도하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 살 수 없고 늘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기도문의 가르침대로 기도하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