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필가의 무덤을 찾아 詩를 읊은 詩人/ 임병식
5월12일 한국수필작가회에서는 조금은 각별하고 특별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충남 금산을 다녀왔는데, 그곳에는 작가회 소속으로 그야말로 열정적인 문학활동을 하다가 아깝게도 작고한 유희남선생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분의 부군이 정성들여 아담하게 지어놓은 당신의 문학관이 있다.
그 곳을 목적 삼아 작가회에서는 기행을 떠난 것이다.
작가회에서는 도착즉시 묘소를 참배하고 문학관에 들려 유필 편지낭독과 추모의 글 낭독, 그리고 방문 기념필적을 남기는 의미있는 행사를 가졌다. 아마도 참석한 회원은 물론, 고히 잠들고 있는 고인도 무척 반가워하고 기뻐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한데, 묘소를 참배하던 중에는 예기치 못한 감격스런 광경도 연출되었다.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윤행원 수필가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쓴 시를 유희남선생 무덤 앞에서 애절한 마음으로 낭송을 한 것이다.
유희남 선생님,
나는 그대를 모릅니다
文友들은 가슴시린 이야기를 합니다
그대는 한 떨기 불꽃이었다지요
삶을 목숨처럼 사랑했다면서요
어진 情은 강물처럼 넘쳤고요
文友들은 눈물을 글썽입니다
고운 자태, 섬세한 감성
화사한 오월 같았다는 女人이여
사는 것이 밀물처럼 고맙고 아름다워
속으로만 흘린 눈물은 얼마였을까요
무심한 세월이 하도 서러워서
千金처럼 하루를 아꼈다지요
인생살이는 언제나 안타깝고
슬픈 고통입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 속에
아름다운 꿈은 흔적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집니다
유희남 선생님,
티끌 같은 세상, 이슬 같은 인생
미련은 저 만치 거두고
하느님과 영생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찬란한 당신의 삶을 간절히 祈禱합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분위기는 이 일로 하여 일순간에 숙연해 졌다.
얼마 만인가. 선생이 작고한지 어언 10년 만에 이루어진 작가회 첫 방문한 행사에서, 이런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다니... 너무나 일찍 떠난 바람에 얼굴도 모르는 동인이 소문으로만 들은 고인을 찾아와 추모를 한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문득, 400여 년 전에 있었던 한 일화가 떠올렸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하는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읊조린 유명한 詩.
그 시를 남긴 백호(白湖) 임제(林悌)선생을 생각해 본 것이다. 풍류남아 임제는 평안도 감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묘를 찾아가서 이 시조를 읊은 것이다. 윤행원 수필가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을 찾아 추모시를 올렸으니 정황은 달랐다 해도 어찌 같은 마음이 아니랴.
당일 행사를 추측하건대 아마도 그 날의 행사분위기는 윤 수필가가 있어서 한층 빛이 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그는 타고난 친화력과 순발력을 지닌 분으로 언제 어디서나 산소 같은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수행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참석한 자리가 엄숙하고 딱딱해도 타령 한 곡조와 팝송 한 곡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금방 바꿔 놓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을 했지만, 많은 문인들과 교유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는 천부적인 성격에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낙천적 성격이 뒷받침 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일면은 글쓰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뛰어난 의마지재(倚馬之才)의 글재주를 자랑한다. 시면 시, 칼럼이면 칼럼, 수필이면 수필을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런 필력으로 지방지의 고정칼럼을 쓰는 한편으로 실버신문의 기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원동력을 짐작케 하는 글을 그는 '나의 창작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나에겐 글 쓰는 일이 즐거움이다. 어디에 있더라도, 어디에 가더라도, 어떤 경우를 맞아하더라도 내재(內在)된 문학적 감성은 든든한 친구가 옆에 있는 느낌을 준다. 아직도 호기심은 왕성하고 인생을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산다. 늙을 틈이 없다.'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외모로 보기엔 하나도 늙지 않고 동안(童顔)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의 수필은 전반적으로 '삶의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해학'과 '유머'를 많이 구사하는 편이다. 그런 만큼 여유를 지니고 인생을 관조하며 긍정적으로 살아간다. 그가 삶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살아왔는가는 '나이 따라 사는 재미' 수필집 서문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나의 인생 제일막은 식구들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 경제에 치중하고 살았다'에도 나타나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잠깐 그 일면을 보자. '남자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거와 같다. 남자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우선 가족을 부양해야하고 개인적인 탁월한 능력으로 우뚝 서야 한다. 그리고 묵묵히 꾸준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누구나 젊을 땐 인생이 화려해 보이고 즐겁기만 하겠지만, 인생을 너무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글에서 보듯이 이글을 본인의 평소 삶의 철학으로 대비시킨다면 그가 자기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성찰적인 삶을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다.
한편, 그는 작품에서 특장으로 하는 해학과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나름의 철학과 금도(襟度)를 지키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즉. '무릇 유머란 단순한 재치나 순발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즘과 상대에 대한 호감, 선의, 솔직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 하고, '유머리스트의 최소한의 예의는, 남을 깎아 내리는 말장난은 삼가야한다. 상대방의 수치심과 불쾌감을 유발하는 표현은 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무튼 윤행원 수필가는 그가 언급한 소위 인생 제 1막을 마감하고 뒤늦게 뛰어든 제 2막의 문학 인생에서 창작의 심지에 한껏 불을 붙이고 있다. 각종 모임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은 물론, 분위기 메이커로써 약방에 감초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의 눈길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통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견지해온 모습을 계속 보여주기를 바란다. 문학이 자꾸 위축되어가는 시대에 분위기를 이끌고 멋을 알고 실천하는 자세는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
한국수필(2007년7월호 '화제의 작가 윤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