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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17) - 2023. 12. 14(목) |
추운 겨울철에는 원거리 성지 순례가 어렵다, 낮이 짧고 밤이 빨리 오는데다가 더욱이 도로에 눈이라도 붙어 얼면 더 힘이 든다. 그래서 12월과 1월은 각각 한 번만 가기로 했다. 그리고 순례지도 가까운 곳이거나 아니면 멀더라도 철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면 어렵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12월은 대구 시내 성지 7-8곳을 당일 순례하는 데까지 하기로 했다.
먼저 대구대교구청 안에 있는 성모당과 유스티노 신학대학, 그리고 성직자 묘지를 먼저 순례하고 다음에는 관덕정 기념관, 점심을 먹고 계산 주교좌 성당과 경상 감영과 옥터 순서대로 순례를 하고 시간이 나면 비산 성당이나 복자 성당을 가기로 했다.
8시에 출발을 하여 경산 휴게소에 가서 늘 하듯이 우동 한 그릇씩 먹고 대구 시내에 접어들어 시내를 이동하다 보니 대구 대교구청 도착 시각이 10시가 훌쩍 넘었다.
대구대교구청
대구대교구청 주소는 대구시 중구 남산로4길 112. 휴대폰 길 안내에 따라 제1주차장을 찍어 정문에 도착했더니 후문 쪽으로 돌아가란다.
다시 교구청 담벽을 돌아가다가 차단기가 있는 주차장이 보이길래 들어가려 했더니 관리원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여기는 주차장 출구라서 들어갈 수가 없다면서 입구는 다른 곳에 있다고 가르쳐 준다.
다행히 제3주차장에서 주차 공간이 있어 주차하고 교구 경내에 들어오니 까페 까리따스(cafe CARITAS)가 나온다. 그리고 성모당과 성직자 묘지에 가는 안내판이 서 있다. 서로 반대 방향이었다. 성직자 묘지는 60m, 성모당은 160m라고 되어 있어 먼저 가까운 곳 성직자 묘지부터 가기로 했다. 교육원 다동과 꾸르실료 교육관을 거쳐 바로 앞에 성직자 묘지 입구가 나온다.
성직자 묘지 - 1911년 이후 선종한 성직자 100여명이 잠든 곳 |
성직자 묘지는 1915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안세화) 주교가 교구 내 프랑스 선교사들을 위한 묘지로 쓰기 위해 부지를 매입하여 조성한 곳으로, 1911년 이래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사목활동을 하다 선종한 성직자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 수는 초대 교구장 드망즈 등 7명의 주교, 이기수 등 6명의 몬시뇰, 63명의 신부, 차부제(次副祭, 미사를 돕는 부제) 2명이다. 원래 수녀도 33명 묻혔었으나 공간 부족으로 군위묘원과 수녀원 묘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성직자묘지 입구 양 기둥에는 라틴어로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라고 적혀있다. 곧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으로, 오늘 이 곳에 묻힌 성직자들의 죽음이 내일 바로 우리에게도 찾아온다는 의미이다. 이는 집회서(38장 22절)의 “그의 운명을 돌이켜보면 네 운명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라는 말에서 따온 말이다. 그렇다. 차례만 다를 뿐이지 본질은 같다. 따라서 우리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므로, 평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묘지 안쪽 중앙에 있는 큰 십자가 아래에는 "TUNC PAREBIT SIGNUM FILII HOMINIS IN COELO"라는 라틴어 글귀가 있는데, 마태오복음 24장 30절의 말씀,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 다음에는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는 복음 내용이 이어진다. 그 때가 되면 이 곳의 영혼들도 주님을 따라 부활하리라는 믿음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묘지의 중심 대형십자가.
가장 안쪽 대형 십자가 가까운 곳에는 주교들의 묘역이다. 초대 교구장 드망즈(안세화) 주교, 2대 교구장 뮈세 주교, 3대 교구장 하야사카(早坂久兵衛) 주교, 7대 교구장 서정길(요한) 대주교, 9대 교구장 최영수(요한) 대주교 등이다. 특히 일본인 하야사카(早坂久兵衛) 교구장은 일제 말기 교회가 일본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기류를 보이자 신학교 등을 폐교하고 외국인 사제 대신 일본인 사제가 임명된 경우가 된다.
그 앞에 신부의 묘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구본당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 김수환 추기경님의 친형인 김동한(까를로) 신부, 매일신문사 사장 전달출 신부, 중국 선교 중 선종한 촉망 받은 윤임규 신부, 성건본당을 세운 박도식 신부, 서인석 신부 등 63명이다. 각 묘비에는 사제의 이름, 본명, 사진과 함께 출생, 서품, 사망일시가 적혀있다.
담벽에는 군위 묘원에 묻힌 20여명의 사제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맨 앞에 8대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가 나온다.
성직자묘지를 나와서 성모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ㄱ자 기와집이 나타난다. 입간판을 보니 안익사(安益舍)라는 건물이다. 옆에 해설판이 있다. 해설판에 의하면 1931년 초대 교구장 드망즈(안세화) 주교가 성직자를 위해 지은 병원 두 동 중의 하나이다.
원래의 이름은 프랑스어로 Annexe(별장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물론 당시의 집은 소실되었다. 1980년 당시 산격동에 사는 신자 정월생 아녜스의 문중 소유였던 가옥이 공산댐 공사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교구에 기증을 했다. 그 집을 병원 자리에 다시 세우고 그 이름을 본래의 이름 Annexe와 비슷하게 안익사(安益舍)라고 했다. ‘편하게 쉬는 집’이라는 뜻도 살린 것이다.
가까이 고목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밑에 해설판이 서 있다. 이 나무는 유스티노 신학교 교장을 역임 중 선종한 프랑스 신부 다케(1873-1952)가 1908년 제주도 한라산에서 발견한 왕벚나무로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우리나라임을 말해주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이밖에도 다케 신부는 한라 부추 등 20여 종의 식물을 발견하여 학명으로 그의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그는 1898년 한국에 와서 54년간이나 선교활동을 하신 분이다.
얼마 가지 않아 성모당이 보인다. 부근에 고백소가 있고 바로 성모당 안내판이 나온다.
성모당 -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3대 허원으로 건립되다 |
대구대교구는 1911년 조선교구에서 분리한 두 번째 교구인데 당시 이름은 대구대목구였다. 관할 지역도 우리나라 남쪽 지방 전체, 곧 영남은 물론 호남과 제주도도 포함이 되었다. 첫 대목구 교구장 이었던 드망즈 주교가 부임하여 보니 시설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대목구로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기본 시설로는 세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 업무를 보는 주교관이었고, 두 번째로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였고, 세 번째로 작고 부실한 주교좌 성당의 증축이었다. 허울만 대목구였지 가진 것이라곤 가난뿐인 신설 대목구 처지에서 이를 실현하는 일은 퍽 난감했다 그는 성모님께, 이 기본 시설들을 이루도록 도와주신다면 고국 프랑스의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같은 성모당을 지어 봉헌하여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다.
드망즈 주교가 허원을 드린 지 2년 만인 1913년 12월 4일 대구본당(지금의 계산 주교좌성당)의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등의 협력으로 주교관을 완공했고, 1914년 10월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계산 주교좌성당 증축은 이루어지기 어려워 성모당 건립도 자연히 늦어질 듯했다. 그러던 중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Joseph Sacet)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렀다. 드망즈 주교는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보인 성모님께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 1918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에 축성했다. 참고로 소세 신부는 몇 년 뒤 전주교구 나바위 성당의 주임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병을 얻어 1921년에 선종하였으며 신부의 유언에 따라 나바위 성지 경내의 화산에 묻혔다.
성모당이 지금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와 새 단장을 한 것은 1997년 2월이었다. 그후 2009년 3월 27일 성모당은 교황청의 교령에 따라 로마의 성모 대성전과 영적인 유대를 맺은 성모 성지가 되었고, 이곳을 순례하는 신자들에게 전대사의 은혜가 주어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구대교구는 2010년 2월 5일 처음으로 성모당 담담사제를 임명하여 평일 오전 11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성모당 상설 고해소와 안내판을 보며 나지막한 정문을 통해 성모당 마당에 들어가니 많은 신자들이 11시 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성모당이 로마 성모대성전과 영적 유대관계를 맺은 뜻 깊은 곳이라는 사실을 전대사 시기와 함께 안내하고 있는데 좀 특이한 점은 교회가 인정하지 않은 신심은 전파할 수 없다고 한 점이다. 아마도 한때 나주 성모 발현 등과 관련해서 교회가 인정하지 않은 신심행위가 유포된 현상을 경계한 것 같다.
성모 동굴의 외관은 화강석 기초 위에 흑색 벽돌로 각 모서리의 버팀벽과 수평띠를 구성하고 나머지 벽면에는 붉은 벽돌로 쌓았다. 그 안에 동굴을 조성하고 아치문을 낸 형태다. 가운데 밑면에 큰 굴이 있고 벽면에 작은 굴이 몇 개가 있다. 성모상은 오른쪽 벽 작은 굴에 모셨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성모동굴은 프랑스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 가브(Gave) 강가에 있는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크기는 물론 바위 모양까지 똑같다. 그리고 교구청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좋은 이 곳에 앞으로 넓은 잔디마당을 두고 북향으로 배치됐다. 그리고 외관 장방형의 기본적인 형태는 교황 레오 13세 때 바티칸 정원에 조성한 루르드의 성모 기념동굴을 본떴다.
성모동굴 외관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해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이라는 뜻이다.
성모상은 1858년 2월 이후 14살 소녀 베르나데트(Mary-Bernadette Soubirous, 벨라뎃다)에게 18번이나 발현했던 원죄 없이 태어나신 성모님 그 모습이다.
합장한 채 발끝까지 내려온 하얀 드레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었으며, 팔에는 묵주를 두르고 두 발 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핀 모습을 한 성모님.....이 성모상은 당시 대구교구 프랑스인 사제와 한국인 사제들의 헌금으로 마련됐다고 한다.
지금도 프랑스의 루르드 샘물은 기적의 샘물로 불리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고취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발현 이후, 난치병을 앓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자신들의 치유를 갈망하며 그 물을 마시거나 몸을 씻고 있다. 지금까지 기적의 치유를 보인 사례가 7,000여건이라고 하나 교회에서 인정한 것은 70건이라고 한다.
성모동굴 앞에는 촛불 봉헌대가 있어 봉헌하는 사람들로 행렬을 이루기도 한다.
경내에는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6대 최덕홍 주교와 7대 서정길 주교의 흉상이 있다.
1990년 12월 15일 대구 성모당은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부터 5월 성모성월이면 대구 시내 각 본당별로 교구청 성모당에서 열리고 있는 ‘성모의 밤’ 행사에 참여했으며,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성모신심 운동이라는 새로운 기도양식에 불을 붙인 계기가 되었다.
치유의 기적을 많이 보인 루르드의 샘물과 같이 대구 성모당 역시 간절히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알려져 있다. 예컨대 식민지 시절, 학병으로 끌려간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도 이 성모당에서 아들 김수환 신학생의 생환을 간절히 기도드렸고 그 결과 김 추기경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현재 성모당은 신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거룩한 땅일 뿐 아니라 각종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적지로 외교인들도 큰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구의 명소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역대 교황사절에 대한 환영식과 교구적인 경축행사의 식장은 의례 성모당이 되어 왔었다. 1984년 5월 5일 선교 200주년 대구 행사를 위하여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직접 이 루르드의 성모동굴에서 교구 내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성모님께 기도를 바치고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에 쫒겨 미사 참례를 못하고 유스티노 신학대학을 찾아 간다. 봉사자들이 가르쳐 준대로 십자가의 길을 따라 본관 건물 아래로 내려간다.
부근에 2011년에 세운 서상돈 선생 흉상이 있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으로 유명한 서상돈 선생은 자선 사업가이자 민족운동가의 면모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로서 지역 복음화에 헌신했다. 특히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성당)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교구 설정 당시 1만여 평의 부지(현 대구시 남산동 대구대교구청 일대)를 기증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아울러 막대한 재산을 털어 구휼사업과 교육사업에 앞장섰으나 스스로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던 ‘실천적 신앙인’으로 오늘날 평신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당 앞 계단을 다 내려가는 지점에 김대건 안드레아 상이 우뚝 솟아 있다. 그 앞 오른쪽에 교구청 별관 건물이 있고 왼편엔 체육관인 김대건 기념관이 있다. 교구청 별관 앞에 잔디광장이 있고, 그 위쪽에 유스티노 신학교가 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 드망즈 초대 교구장의 허원에 의해 설립되다 |
유스티노 신학교의 설립
주소는 대구시 중구 남산 3동 219 도로명 주소는 대구시 중구 명륜로12길 47
1911년 4월 8일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대구에 부임하여 세 가지 사업 곧, 주교관 건립, 신학교 설립, 주교좌 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프랑스 루르드와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허원(許願)하였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이 사업은 그해 7월 5일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이 주교관과 수녀원 부지를 기증함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신학교 건립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하였고, 그 결과 1912년 11월에는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부를 받기도 하였다.
성 유스티노(Justinus)
성 유스티노는 100~110년 사이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사마리아 지방에 세워진 로마제국의 도시인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의 한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꾸준히 탐구하는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그리고 플라톤 철학에 연이어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사레아(Caesarea)의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후 그는 구도자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 길을 바꾸어 한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순회 교사로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다가 로마에 도착해서 그곳에 머물며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성 유스티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황제와 집정관에게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護敎論)”을 썼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 신자로 체포되어 이교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수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요 철학자이자 교부였다. 그의 축일은 6월 1일이다.
1912년 드망즈 신부는 서울 명동 성당의 건축에 참여하였던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朴道行) 신부를 초청하여 신학대학 건립 계획을 세워 1913년 9월 4일 신학교와 부속 성당의 기초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가 진행 중인 1914년 5월 3일 드망즈 주교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페셀(Peschel, 白鶴老) 신부를 신학교 교수로 임명하였다.
프와넬(朴道行, Poisnel, Victor Louis, 1855~1925) 신부
프와넬 신부는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에서 태어났다.1881년 8월 3일 한국으로 떠났으나 곧장 한국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기착하였다. 그는 때마침 한국에서 추방당한 리델(Ridel) 주교를 만나 그의 병 간호를 하다가 나중에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따라 한국에 잠입하였다.
첫 포교지도 황해도와 평안도를 맡게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뮈텔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후임으로 조선교구의 경리 일을 맡아보게 되면서부터 장차 교회 발전에 대비하기 위해, 기회를 포착하여 토지를 매입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그의 이러한 선견지명과 끈질긴 추진력으로 오늘의 명동 대성당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는 종현 성당(오늘의 명동 성당) 주임 신부로 있을 때 종현(鐘峴) 성당의 건축을 맡고 있던 코스트(Coste) 신부가 선종하자, 그 뒤를 이어 오늘날 누구나 감탄하는 명동 성당을 완공시켰다. 그 후 30년 동안 전국의 서양식 성당을 지을 때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1917년부터 부주교를 겸임하였고, 1925년 12월 26일 70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완공된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ㄷ자형으로, 중앙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마주보는 대칭 건물이 있었으며, 1층 전면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던 연속 아치가 있어서 툇간 역할을 하였다. 건물이 완공되자(실제 왼쪽 날개만 짓고 오른쪽 날개는 1919년도에 완성) 1914년 10월 3일 기부자의 요청대로 교명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개교했다. 당시 신학교로는 1887년 부엉골에서 이전(移轉)된 서울 용산의 성심신학교가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현대식 신학교로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이고 지방에 설립된 것은 유스티노 신학교가 처음이었다.
첫 신입생으로는 당시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대구대목구 소속 주재용 등 17명의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이었다. 유스티노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과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와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다.
유스티노 신학교의 발전 과정 및 폐교 과정
개교 당시 여건이 되지 못해 해마다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하고 3년마다 50명 내외의 인원을 선발하였다. 첫 번째 사제로는 1918년 2월 23일에 서품된 주재용 신부였다.
유스티노 신학교는 민족의식에 따른 일제와의 갈등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도 있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성 유스티노 신학생들은 3월 7일 교내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으며, 3월 9일에는 김구정(金九鼎, 이냐시오)과 서정도가 주동이 되어 미국의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독립 선언문 복사 및 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사실이 교장 신부에게 알려짐으로써 시위 계획은 무위로 끝났고, 그 결과 방학이 5월 1일로 앞당겨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일제의 주목과 감시가 따랐다.
3·1 운동의 여파가 가라앉으면서 그해 6월 13일 신학교 확장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 드망즈 주교는, 1920년 1월 바티칸 포교성성에서 2명의 신학생을 로마로 파견하라는 지시에 따라 송강정(宋康正, 안토니오)과 전 아우구스티노를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또한 1922년 9월에는 소신학과 입학을 준비하는 ‘예비반’을 신설하였으며, 이듬해 10월에는 달성군 성당동에 신학교 별장인 ‘성 니콜라오 별장’을 개설하여 신부와 신학생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1930년대 들어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대 · 소신학과의 분리라는 학제상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 · 소신학과의 분리는 신학생들에게 일반교양 과목을 가르침으로써 신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1928년 말 서울 용산 신학교에서 먼저 도입하였다. 그 결과 용산의 소신학생들은 1929년 9월부터 남대문상업학교(동성상업학교의 전신) 을조(乙組)로 편입되었고, 대구의 소신학생들도 1930년 12월 16일 드망즈 주교가 뮈텔 주교와 연합 소신학교 구성을 협의함에 따라 1931년부터 혜화동의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게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바로 이 경우였다. 곧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를 졸업하고 동성상업학교 을조(乙條)에 진학했는데 갑조는 일반학급이고 을조는 사제가 되는 학급이었다.
이처럼 사제 양성 교육 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대목구가 있었던 서울 · 대구 · 덕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 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2년 2월 16일 폐교되었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폐교의 위협 속에 있다가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67명의 사제를 배출하고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신학과 학생 7명은 덕원 신학교로 전학하였고, 철학과 학생들은 1945년 2월 23일 ‘경성 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가 인가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공부하였으며, 부제품을 받은 4명은 대구교구 사제 휴양소에서 최민순(崔玟順, 요한) 신부의 지도로 수업을 받다가 1945년 12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경찰학교, 미군부대가 차례로 진주했다. 6·25전쟁 때는 육군병원으로도 쓰였다.
재개교 후 ‘유스티노 100주년 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나다
194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이후,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82년 47년 만에 선목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하여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아 사제 양성의 요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1985년 선목신학대학은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4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는 효성 캠퍼스(일반 단과대학, 경산 하양), 루카 캠퍼스(의과대학, 간호대학, 남구 대명동), 유스티노 캠퍼스(신학대학, 중구 남산동)로 나뉘어져 있다.
원래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유럽 중세시대에 유행한 로마네스트 양식 벽돌 건축물로서 본관 앞에 좌우로 마주보는 건물로 배치된 ㄷ자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1969년 대건중・고등학교 건물이 들어서면서 우측 부분(현 학부동 자리)이 철거되고, 1990년 대구가톨릭대학교가 이전해 오면서 좌측부분도 철거돼 현재 모습만 남게 됐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대구의 첫 서양식 건물로 그 건축학적, 역사적 의의를 근거로 하여 1990년 12월 15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20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개교 100주년을 맞아 재정비를 단행하여 용도를 바꾸었다. 대학 기능을 마감하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전환한 것이다. 194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후, 1982년 재개교하여 당시까지 배출된 사제는 534명이었다. 그리하여 기념관 1층은 경당(기념관 성당)・유스티노홀(건축관)・옴니아홀(100주년 기념관), 2층은 드망즈홀(설립자관)・앗숨홀(문서관)로 구성되었다.
성모당에서 걸어 내려와 성 유스티노 기념관에 도착했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성 유스티노 기념관 옆에는 교구청 별관이 있고 앞으로는 넓은 잔디 운동장이 펼쳐져 있다. 원래 건립 당시에는 좌우에 마주보는 건물이 있어 ㄷ자 모양이었으나 1991년 양쪽 날개에 해당되는 부분은 철거되고 대신 커다란 신학교 새 건물이 들어서서 마주 보게 있어 크기는 맞지 않으나 ㄷ자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건물 앞에는 성모상이 있다.
기념관 경당
기념관 1층 경당은 착 유스티노 신학교 설립 당시의 성당 그 모습이다. 특이한 것은 제대가 신자석과 좌우로 마주보고 있는 트리엔트식 그대로다. 제대 좌우 높은 벽면에 성모상과 성 요셉 부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좌우 창문에는 옛 신학교 경당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따라 새롭게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여 성령의 강한 이끄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한 100년 역사를 유리화에 담았다.
한쪽에는 ‘섭리의 빛’ 다른 한쪽은 ‘은총의 빛’이다. ‘섭리의 빛’에는 1914년부터 1945년 강제 폐교 전까지 배출한 사제의 수 ‘67’과, ‘은총의 빛’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나이 ‘33’을 구멍으로 표현했다. 합해서 100, 곧 100주년이다.
유스티노홀(건축관)
유스티노 홀은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건축관으로 유스티노 신학교 건축 시초로부터 건축과 관련된 모든 자료와 현재의 모습으로 변모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드망즈홀(설립자관)
유스티토 신학교의 실립자는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 주교이다. 드망즈 홀에서는 설립자 드망즈 주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전시했다.
초대 대구교구장인 플로리앙 드망즈 주교는 1875년 4월25일 프랑스 알사스 주 로렌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가톨릭대학과 파리국립대학을 수학한 후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1898년 사제품을 받고 조선교구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같은 해 10월8일 한국에 입국해 한국어와 풍습을 익힌 후 1899년 5월부터 부산본당 신부로 한국에서의 첫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11년 4월8일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로 개칭되고 충청도 일부와 경상·전라 지역을 관할하는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드망즈 신부는 교황 베네딕도 15세로부터 초대 대구대목구장으로 임명돼 36세의 젊은 나이에 아드라스 명의주교로 주교품을 받았다. 이후 드망즈 주교는 1938년 2월9일 선종때까지 선교사로서 40년, 초대 대구교구장으로 27년을 재임하면서 대구교구의 기초를 확립하고, 한국인 성직자들이 독립된 교구를 운영하도록 하는데 큰 힘을 쏟았다.
드망즈 주교의 업적은 크게 △한국인 사제 양성 △한국인 교구 설정 △교육계몽사업 등을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는 한국인 사제양성을 위해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했고,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로마 우르바노 신학교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양질의 사제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기성 성직자들의 재교육을 위해 주일 강론집 등을 발간했다. 또 교구장 부임 때부터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독립된 교구를 맡길 것을 결심하고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를 설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효성보통학교를 세워 한국인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경향신문' '경향잡지' '천주교회보'등 창간, 교회와 사회운동을 선도했다.
앗숨홀(문서관)
앗숨홀은 성 유스티노 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관련된 모든 기록문서,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옴니아홀(100주년관)
옴니아홀(100주년관)은 성 유스티노신학교 개교 이후 선목 신학대학 재개교 과정 등100주년에 이르기까지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100주년 기념관을 마지막으로 성 유스티노 100주년 기념관 관람을 마쳤다. 이제 관덕정으로 갈 순서다 기념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처음 도착했던 교구청 제3주차장으로 가서 후문으로 나왔다.
11시 50분 관덕정으로 출발했다. 조수석에 앉은 베드로 형제의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운행을 하는데 10분, 20분을 달려도 도착되지 않는다. 그런데 주변을 보더라도 왠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목적지 관덕정을 한번 더 확인했더니 분명히 가는 방향을 가란다. 조금 더 가니 느닷없이 나타난 것은 앞산 공원이 아닌가? 언뜻 동명 목적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서 관덕정 아닌 관덕정 순교기념관을 찍었더니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라는 것이다. 분명히 또 하나의 관덕정이 앞산공원에 있다는 말이다. 다시 20분을 소요하여 되돌아 왔다. 걸어서 10분 남짓하면 갈 길을 결국 한 시간도 더 걸려 도착했다.
아무리 50년 시간이 흘러 도시 환경이 바뀌었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 7년을 살았던 도시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 실제 경험을 제쳐두고 휴대폰만 전폭적으로 믿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옛날 중국 정나라의 한 사람이 신발을 사러 시장에 갔다. 그런데 신발 가게에 가서 보니 신발 치수 잰 것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가서 그것을 가지고 왔으나 시장은 이미 파하고 말았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어찌하여 발로 직접 신어 보지 않았느냐고 묻자, 잰 것을 믿지 어찌 발을 믿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기의 경험을 믿지 않고 네비게이션에만 의존한 것은 자신의 발을 믿지 못하고 신발의 칫수 잰 것을 더 믿은 정나라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본말과 주객,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