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3. 양주 장액 대불사, 마제사 석굴군
수많은 고승 배출한 ‘양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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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제사 석굴> |
사진설명: 장액 남쪽 60km 지점에 위치한 마제사 석굴은 서진 아래 개착되고 확장됐다. 복사(사진 왼쪽) 남사(사진 오른쪽 끝)로 구분되며 모두 27개의 석굴이 거대한 석벽에 남아 있다. |
문수산 석굴을 보고 주천에 들러 곽거병 장군을 회상한 뒤, 장액(감주)으로 출발했다. 장액은 하서회랑 일대에서 알아주는 큰 도시. 장액에 대해, 이탈리아 베니스 태생의 세계적 여행가 마르코 폴로(1254~1324. 1260~1295년 동방여행)는 그의 저서〈동방견문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깐프주(감주)도 탄구트 대주(大州) 내의 도시인데, 대주의 수도이고 통치의 중심인 만큼 규모도 크고 아주 훌륭한 도시이다. 주민은 불교 이외에 약간의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 교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도는 성내에 훌륭한 예배당 3개소를 가지고 있다.”
13세기 후반 장액을 지나갔던 마르코 폴로의 기록처럼 장액은 현대에도 여전히 모든 것이 풍부한 대 도시다. 주천에서 장액까지 거리는 300km. 감신공로(甘新公路)를 타고 장액에 도착하니 오후 6시 48분. 장액빈관 209호에 짐을 풀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장액을 대표하는 특산물은 야광배(夜光杯). 잔에 술을 붇고 멀리서 보면 빛난다는 야광배다. 거리의 상점엔 야광배가 가득했다. 호기심에 야광배 하나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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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장액 대불사 전경. |
다음날(2002년 9월30일). 장액빈관 뒤편에 위치한 대불사로 갔다. 대불사를 대표하는 보물이 누워 있는 부처님 와불(臥佛)이다. 마르코 폴로도 와불을 보았다.〈동방견문록〉엔 이렇게 나온다. “불교 사원과 승원도 많으며, 거기에는 하나같이 무수한 상이 안치돼 있다. 이들 상(像) 중에는 실제로 10페이스나 되는 거대한 것도 있고, 소재도 나무 진흙 암석 등 다양한데 한결같이 도금돼 있다. 솜씨도 매우 훌륭하다. 거상은 옆으로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고, 주위에는 공손하게 이를 모시고 있는 숱한 소상이 에워싸고 있다.”
원형의 산문을 지나 대불사에 들어가니 거대한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와불이 계신 전각이다. 전각에 들어가 와불을 보니 과연 대단했다. 마르코 폴로가 보고 놀랄만한 크기였다. 누운 길이 35m, 어깨너비 8m에 이르는 중국 최대의 와불이다. 와불이 조성된 시기는 1098년. 서하(西夏) 영안 원년이다. 서하와 이어진 원나라 등 한(漢)민족 이외 민족이 하서주랑을 지배한 시기에도 불교는 여전히 번성했던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와불을 본 것은 대불이 만들어지고 나서 약 200년 후 였다.
와불사 참배를 끝내고 마제사(馬蹄寺) 석굴로 출발했다. 장액 남쪽 60km 지점에 위치한 마제사 석굴은 기련산 기슭에 위치한, 7개의 석굴들로 이뤄진 석굴군이다. 이곳은 본래 서진(西晉. 265~316)의 명사 곽우(郭瑀)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곳이었지만 후대 석굴로 확장됐다. 지금은 숙남현(肅南縣)에 속한다.
대불사의 거대한 와불… 길이 3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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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마제사 석굴 앞에서 만난 티벳스님. |
마제사 석굴은 남 북 두 곳으로 나뉜다. 북사(北寺) 석굴들은 6층에 모두 21굴로, 속칭 ‘삼십삼천’이다. 중심 탑주 굴이 하나 있고, 정벽 및 좌우벽에 각각 7개의 감실이 개착돼 있다. 개착 시기는 북주-우문호(宇文護)가 세운 중국 북조(北朝)의 왕조(557~581). 나머지 석굴들은 서하, 원, 명대에 조성된 것이다. 남사(南寺)에는 6개의 굴이 있으며, 풍화 마멸돼 정확한 조성시기를 모른다. 마제사 석굴에 도착하니 11시. 마제사 석굴은 명불허전이었다. 거대한 절벽에 튀어나온 전각들이 인상적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제비집 같았다. 서서히 석굴 쪽으로 나아갔다. 석굴 바로 밑에 도착해 절벽을 바라보며 양주 불교를 생각했다.
지금의 감숙성 중서부를 옛날에는 양주(凉州)라 불렀다. 이곳은 본래 흉노족의 활동지역이었다. 흉노를 물리친 뒤인 한나라 평제 원시 3년(기원후 3년) 하서5군(무위 장액 주천 돈황 금성)과 옹주(雍州) 일부분을 합하여 양주를 만들었다. 전한 및 삼국시대에 구역이 분할돼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301년, 양주의 장궤(張軌)가 서진으로부터 양주자사에 봉해졌다. 서진이 멸망한 후에도 장씨는 대대로 양주에 살며 고장(姑藏. 무위)을 중심으로 76년간 통치했다. 345년 장준(張駿)은 양왕(凉王)을 자칭했는데, 이 나라가 376년 전진(前秦) 부견왕에 멸망당한 전량(前凉). 하서주랑 장씨 왕조의 선조인 장궤는 효성이 지극하고 유학을 배웠다. 서진의 ‘팔왕의 난’이후 모든 지역이 황폐했으나 오직 양주만이 비교적 평안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팔왕의 난’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진 황족(皇族:司馬氏) 8명의 왕이 관여했기 때문에 팔왕의 난이라 부르는데, 290년 서진 무제(武帝) 사마염(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 중달의 손자)이 죽고 연소한 혜제(惠帝)가 즉위했다. 그러자 무제의 황후 양씨(楊氏)는 선황의 유조(遺詔)라며 그녀의 아버지 양준(楊駿)을 재상으로 앉히고 국정을 전단하기 시작했다. 혜제의 황후 가씨(賈氏)는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과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를 당시 수도 낙양으로 불러 양씨 일족을 죽이게 한 후, 구실을 만들어서 사마양·사마위를 죽이고, 스스로 국정을 맡았다. 자연스레 가씨 일족이 국정을 농단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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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마제사 석굴 계곡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 |
그러자 301년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이 가씨 일당을 포살하고 혜제를 폐한 후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제왕(齊王) 사마경과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도 가만 있지 않고 공격, 사마륜은 자살하고 혜제가 복위됐다. 이후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하간왕(河間王) 사마옹도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다투었다. 낙양은 전란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사마월이 영과 옹을 죽이고, 혜제가 죽자 회제(懷帝)를 즉위시켜 정권은 월에게 돌아오고(306), 16년에 걸친 내란도 일단 끝이 났다. 그러나 여러 왕이 병력보급을 위해 끌어들인 흉노(匈奴)·선비(鮮卑) 등 북방민족은 그 후 화북(華北) 각지에 증식,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의 주원인이 됐다.
한편 장씨는 대대로 현사들을 존경하고 학문을 애호했다. 당연히 문화가 발전했다. 팔왕의 난을 피해 중원지역의 문인학사들이 양주로 이주했고, 사람들은 양주지역을 “장씨가 자리 잡은 이래 양주는 중화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말했다. 그러던 장씨의 전량(301~376)이 망한 후 티벳 계열인 저족의 여광(呂光)이 18년간 양주를 통치했는데, 이 시기를 후량(後凉. 386~403)으로 부른다. 이후 흉노족 출신의 저거몽손(沮渠蒙遜)이 412년 고장(무위)을 점령하고 ‘하서왕’이라 칭했는데, 439년 북위에 멸망당한다.
가파른 절벽에 제비집 같은 마제사 석굴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양주지역은 장씨 이래 대대로 불교를 신봉해 왔다.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엔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축법호(321~308)·도안스님(312~385) 등 고승들이 양주에 은둔했다. 축법호스님과 도안스님은 초기 중국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관음신앙이 축법호스님 때문에 중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대월지국(大月氏國) 출신인 축법호스님의 범어 이름은 다르마라크사(Darmaraksa). 8세에 출가해 외국의 사문고좌(沙門高座)들을 스승으로 섬겼고, 여러 나라를 편력하여 36개 국어에 능통했다. 서진(西晉) 시대 범어로 된 불전을 가지고 장안과 낙양에 도착, 266~308년 한역(漢譯)에 몰두하는 한편 교화(敎化)에도 힘을 기울였다.
〈반야경〉〈법화경〉〈유마경〉〈무량수경〉등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비롯한 많은 경전을 번역했으며, 경전이 중국에 널리 보급된 데는 스님의 힘이 컸다. 생존 당시 돈황보살(敦煌菩薩)·월지보살(月氏菩薩)이라는 존칭을 들었으며, 중국에 관음보살의 이름이 알려지고 영험설화와 신앙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스님이〈정법화경(正法華經)〉을 번역한 이후의 일이었다. 도안스님 역시 양주 불교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님. 흔히 석(釋)도안으로 불리는 스님은 하북성(河北省) 출생. 초기 중국 불교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학승(學僧)이다. 12세에 출가해 서역(西域)에서 온 불도징(佛圖澄)스님에게 사사하고, 스승의 사후엔 문하생을 지도했다. 전란을 피해 하북(河北)·산서(山西)·하남(河南) 지방을 유랑했으며, 혜원(慧遠)스님을 비롯한 40명의 문하생과 양양(襄陽)에 단계사(檀溪寺)를 짓고 교단을 조직했다. 왕과 귀족들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받았던 스님은 379년 전진(前秦) 부견왕의 초청을 받고 장안(長安)으로 가 왕의 고문이 됐다.
축법호·도안·담무참 스님 등 활약
인도와 서역에서 온 역경승(譯經僧)들의 경전 번역을 돕는 한편, 도안스님은 당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결함에 착안, 이역경(異譯經)과의 비교연구를 통해서 진의(眞義)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 최초의 경전목록인〈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지었다. 또 스님들의 의식이나 행규(行規)를 정하고, 출가자는 모두 석(釋)을 성(姓)으로 할 것을 제창, 중국적인 불교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중국 전통사상을 매개로 불교를 해석하는 종래의 불교연구를 반성·비판, 경전을 직접 연구하는 방법을 수립하는 등 큰 공적을 남겼다. 경전을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의 3분과로 나누는 전통 역시 도안스님이 세운 것이다.
하서주랑(양주) 불교를 이야기 할 때 역시 빠트려서는 안되는 스님이 바로 담무참(曇無讖)스님이다. 출가 후 달마야사(達摩耶舍)스님의 제자가 돼 소승을 배웠던 담무참스님은 뒤에 백두선사(白頭禪師)로부터〈열반경〉을 얻고 대승으로 바꾸었다. 카슈미르·쿠차·돈황을 거쳐 412년 고장(무위)에 들어와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의 도움을 받아〈대집경(大集經)〉〈대운경(大雲經)〉〈금광명경(金光明經)〉〈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불소행찬(佛所行讚)〉및〈열반경〉초분 10권과 중분 등을 한역했다.
왕의 정치고문이 돼 ‘북량(北凉)의 지보’로 추앙받았으나, 433년〈열반경〉후분을 구하려고 카슈미르로 가던 중, 담무참 스님이 다른 나라로 가면 북량이 망하게 될 것으로 오판한 저거몽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세연(世緣)을 마감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담무참스님이 번역한 경전들은 중국 불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열반학파(涅槃學派) 흥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 호에 계속)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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