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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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국어사전에는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나온다.
2. 유래[편집]
제사의 기원은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신앙에 있다. 자연재해, 질병, 맹수들의 공격 같은 인간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재앙을 막기 위해 하늘이나 땅, 강이나 바다, 오래된 나무, 높은 산, 조상 등에 절차를 갖추어 빌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신성에 대하여 지내는 종교 의식은 '제사(祭祀)'로 통칭할 수 있다.
더불어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든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록을 보면 상족의 조상은 직계인 근조선공과 직계가 아닌 원조선공으로 나뉘는데, 상나라에서 제사는 직계 선조인 근조선공에게만 지냈다. 조갑은 왕의 어령에 반발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숭배하면 농사가 잘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재앙을 막아준다"는 등 만사가 다 잘 돌아간다고 퍼뜨렸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상 섬기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제사의 시초다.[1]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주나라는 위에서 조갑이 퍼뜨린 풍습을 따라 상나라의 제사방식을 이어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전 지도층을 제후로 임명해 상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다. 이것도 다른 가문의 제사를 끊기게 하면 그 사람에게 제사가 끊어진 조상 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상나라 제사 문화 띵호와" 하면서 재정비했다.[2] 공자는 유교의 대표이니 후대 유학자들이 공자를 떠받들며 제사문화가 쭉 이어지는 건 당연지사.
그러면서 이 제사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데, 지금까지 뿌리깊게 이어지고 있다.
일반명사로서 제사의 뜻은 이렇지만, 흔히 한국에서 '제사'라고 하면 유교의식에 기반을 둔 '조상 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3]
이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황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는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다.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딸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으나[4] 조선 중기 이후 소중화 의식이 강해지면서,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5]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이 나누고, 딸은 받지 못하는 인습이 1990년대까지 유지되기도 했다.
3. 차례와 제사[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하며# 두산백과에 따르면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 따라서 설날과 추석에 한해서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차례도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므로 설날이나 추석에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4. 한국의 제사[편집]
삼국 시대 초기: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선 동맹, 수신, 영고 등 우리 고유의 산과 강, 신과 하늘에게 지내는 의식 비슷한 제사가 진행됨. 이후 왕조의 형태가 잡히면서 주로 황실에서 시조에 대한 제사가 진행됨. 이때 고구려에서 시조의 조각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하는 제사는 고려에도 이어진다.[6]
삼국시대 중후반 ~ 남북국 시대: 불교와 도교의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절이 세워지고 불교식 제사가 자주 진행됨.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가 황실 위주로 이루어짐. 신라에선 도교식 제사인 초제[7]가 행해져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이후 유교의 수입도 이어져 신라에선 종묘와 사직단이 설치되어 황실에서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진다.
고려: 삼국의 제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성종대에 종묘와 환구단, 사직단 등을 설치해 황실에서 제사를 시행, 민중들은 팔관회, 연등회 등에 참가했다.
고려 말: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절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초기: 불교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의례는 사회전반에 보급되지 않음.
16세기 중반: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5. 의의[편집]
보통 미디어 등에서는 제사가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특히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초래되는 단절과 공동체 의식의 결핍을 보완하여 현대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사방으로 나뉘어 살아가는 현대 가족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가족애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리가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학계에서는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 아닌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다고 주장한다.[8] 유교의 전통문화라는 의의가 있다.
5.1. 반론[편집]
현실적으로 제사 때문에 싸움이 나는 케이스가 압도적으로 많다. 제사가 없었다면 헛수고나 헛돈이 들 일이 없으니, 얼굴 붉혀가며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명절이나 기일에 모여서 조상을 기리고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만 남겨 놓고, 제사라는 형식을 폐지하는 게 오히려 전통의 긍정적 의의를 살리는 길이다.
예컨대 명절을 이용해 가족들끼리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친목을 다질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기껏 쉬는 날 모여서 한다는 게 기름 냄새 맡으면서 음식 만들어 제사나 지내고 있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다. 제사 때문에 친척들 간에 얼굴을 붉힌다거나 고성이 오가는 케이스를 제외해도[9], 제사가 있으면 부부싸움이나 반찬투정이 반드시 생긴다. 이것을 화목을 다진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는 팍팍한 사회에서, 가정에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오죽하면 조상덕 못본 사람들이나 조상 모신답시고 상차리고 절하고 있고 조상덕 본 사람들은 그럴 시간에 해외여행 간다는 말이 나올까.
게다가 무엇보다 경제적 이유로 가족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제사 때문에 한 집에 모이는 일 자체가 줄어가고 있다. 친족 공동체가 모여 친목을 다지는 전통을 유지/계승하고 싶으면, 보다 친족들이 모이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모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제사는 모이고 싶지 않은 이유로 작용해 오히려 친족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기만 한다.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해마다 늘어나는 것을 떠올려 보자.
6. 논란[편집]
6.1. 상차림 논쟁[편집]
제사를 지내는 것은 주로 사랑하고 공경하면 그뿐인 것이다. 가난하면 집안 형편에 어울리게 하면 되고, 병이 났다면 몸의 형편을 헤아려 제사를 지내면 되는 것이다.
- 율곡 이이
보통 제사상 하면 떠올리는 상차림 대신 바나나, 피자 등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고인이 생전에 아주 싫어했던 음식은 빼는 경우가 있다.대표적으로 율곡 이이의 제사상에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데 이는 율곡 이이가 평생 동안 소고기엔 입도 안 대서다. 이에 대해서 밤, 대추, 곶감, 약과 등과 같은 전통 상차림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라면 올려도 상관 없다는 두 가지 의견이 충돌되고 있다.
본래 우리가 '전통' 상차림이라 부르는 형식도 1969년 3월 1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공포된 건전가정의례준칙과 80~90년대 언론 등에서 몇몇 가문의 제사상 차림을 종합하여 상차림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널리 퍼뜨린 표준 형식일 뿐, 한국의 전통 상차림이라 보긴 힘들다.
본래 유교에선 처음부터 제사 때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엄격한 상차림을 처음부터 지정하지 않았다. 가령 율곡 이이의 저서인 격몽요결에선 제례에 대해 설명하면서 '집안 형편이나 사람 수에 맞게 적절히 올리면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글 각종 예법이 보다 엄격해진 조선 후기에도 마찬가지로 특별히 이를 언급한 기록은 없다. 송시열의 송자대전에서 '어동육서'의 뜻에 대해 지나가듯이 언급한 정도가 고작이다.
전문가 견해도 "주식인 밥, 탕, 나물 등은 반드시 올려야 하지만 그 밖엔 피자나 치킨이나 바나나, 파인애플 같은 외래음식을 올려도 무방하다"는 의견이다.# 유림 전문가인 성균관 박광영 의례부장도 "과시욕, 허례허식 때문에 상차림이 과해졌다"고 말하며 "특히 명절 차례상은 오히려 간소하게 차리는 것이 더욱 예법에 맞는다"라고 설명하였다. 가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패스트푸드나 서양식 과자 등으로 차린 제사상의 사진들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형편과 사정에 따라선 이 역시 제사 형식에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대부분 제사 지내는 집들은 상술되었듯 유교 경전에 비춰보면 근거는 없지만 흔히 '정석'이라고 알려진 상차림을 고집하고 있고, 이를 차리기 위한 비용은 여전히 부담이 되는 규모이다. 물론 대가족이 대부분이라 수십 명의 제사상을 차려야하는 1980년대 이전에 비해 만들어야 하는 음식의 양이 조금 줄어들어 노동강도가 줄었다곤 하지만, 핵가족 기준으로 놓고 보면 여전히 음식의 양은 차고 넘친다. 1980년대만 해도 명절만 되면 모든 여자들이 분주하게 모여서 하루 한 끼 밥도 못 먹고 하루 2시간도 못 자며 정신 없이 음식을 장만하는 노동환경에서 지금은 꽤 줄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제사상은 무시할 만한 노동은 아니다.[10]
게다가 대가족이 보편적이었던 시절에는 만들어 놓고 먹기라도 하지, 지금은 그 많은 음식을 먹을 사람도 없다. 그리그 비용 문제는 전술된 가사노동의 강도 문제나 식생활의 기회비용 문제 뿐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적인 부담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한국인 1달 임금의 최빈값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6.2. 종교적 관점의 충돌[편집]
아래에도 나와 있지만 제사는 각 종교마다 다양한 방식의 제사법이 존재하며, 이 때문에 개인의 종교적 관점이 그 집안에서 내려져오던 전통과 충돌할 경우 제사를 거부하는 등의 충돌과 갈등이 발생할 우려가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종교적 관점의 충돌로 인한 제사 거부가 이혼 사유에 해당한다는 판결도 나왔다.#
조선 후기 청나라에서 여러 서양문물이 들어왔을 때 같이 들어온 천주교의 영향 때문에 생긴 제사 거부는, 천주교에서는 유일신인 하느님만 섬겨서 제사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여겨서 제사를 금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현재 천주교 에서는 각 나라의 고유한 전통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제사도 허용되고 있다. 물론 다른 전통 종교가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효를 한다는 관습 측면에서 허용되는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제사의 종교적 측면이 매우 희박하고 관습에 가까운 것 또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6.3.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편집]
무신론적 관점이나 과학적 회의주의의 관점에서는 사후세계, 영혼, 귀신 등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선 회의적이기에 '무신론자들은 제사를 해선 안 된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제사라는 건 정말 영혼의 존재를 믿어서 하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로써 그것을 기리는 행사기 때문에 꼭 영혼의 존재를 믿냐 안 믿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공자의 관점에서 제사를 정립해 보면 관습적으로, 피동적으로, 의무감으로, 체면 때문에 제사를 모셔서는 안 된다. 조상을 자신과 가족의 복을 비는 신으로 섬겨서도 안 된다. 자손이 함께 모여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조상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집안 어른께 인사하고 혈연의 정을 나누는 마음으로, 같은 동기끼리 우애를 나누는 마음으로 제사에 참여해야 한다.
- 《제사의 참 의미는?》, 오마이뉴스.
실제로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에 대해서 조사해본 기사#를 보면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제사를 유교에 도입하여 발전시킨 공자야 말로 오히려 영혼이나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적인 무신론자였다고 한다. 공자가 제사를 도입한 이유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서가 아닌 도덕국가 재건에 제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 무신론이라는 것이 서구의 자유사상 및 계몽주의 계통의 신무신론이 아닌, 거의 무교 내지는 동아시아적인 비신론(nontheism), 세속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11] 가장 크게는 현대의 제사 풍습이 종교색이 크지 않은, 친족단합을 도모하는 세시풍습에 가깝다는 데서 이유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과연 제사가 정말로 종교적 동기와는 "무관하다" 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예컨대 일부 어르신들 중에는 제사를 왜 드리냐고 물으면 "왜긴, 조상 덕 좀 봐야지!" 같은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된 오마이뉴스 기사 내용과 비교하면 조금은 씁쓸한 현실. 또한 제사 절차 중에 잠시 집 밖으로 몸을 피해서 누군가의 "식사" 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과정이나,[12] 제사를 마치고 제삿상의 음식을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고 부른다거나, 이러한 행동을 음덕(陰德)을 입는다고 표현하는 것 역시 '제사라는 행위가 초자연적인 섭리의 개입을 일부 전제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내지 기복적인 동기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보여 준다. 신주나 지방에 ''신'이 거하는 '위'치'라는 의미의 '신위(神位)'라고 쓰는 행위 역시 초자연적인 조상신의 존재에 대한 전제와 완전히 무관하다 하기 어렵다. 기독교에서 '기도빨'과 같이 기복신앙적 요소가 더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조상 덕 보기 위해 제사지낸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치되는 대사가 SNS상이나 온라인에서 종종 회자되곤 한다. "진짜 조상 덕 본 집들은 명절 때 해외여행 가고, 조상 덕 쥐뿔도 못 본 집들이 음식상에 절하느라 싸우고 가정불화 일으킨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골자는 다 같다.
6.4. 유전학과 족보의 관점[편집]
사실 우리나라는 족보 세탁이 심해서 유전자로 성씨를 분석하면 절대 다수가 남의 조상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감이 안 잡힌다면 양반가라 자칭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오히려 평민이었다는 사람을 더 찾기 힘들 정도. 참고로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당시 양반의 숫자는 정말 극소수였다. 그러니 일부 사람들처럼 너무 복잡하고 번거로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남의 조상을 필요 이상으로 성대하게 대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가끔 밝혀지는 것[13]들을 보면 생각보다 막장인데 진위 여부를 정밀하게 가리지 않았다면 남의 조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확인도 하기 전에 굳이 제사를 아주 잘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의견도 있다.[14]
6.5. 제주(祭主), 상차림 성차별 문제[편집]
제사를 모시는 제주(祭主)는 무조건 그 집안의 장남이 맡게끔 강제된다. 재수 없게 보통의 한국인 가정에서 첫 번째로 태어난 남성이라는 선천적인 요인만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인데, 이는 곧 선천적인 요소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에 맞지 않는, 반헌법적인 차별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당한 대우를 타고나는 특수계층을 만드는 반헌법적인 요소로, 인권유린으로 볼 소지가 다분하다. 제사옹호론 측 주장대로 제사가 정말 장점이 많은 문화라면 여성들 역시 제주를 맡을 수 있도록 하거나, 둘째 등도 제주를 맡을 수 있도록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부장제에 대해 거부감이 가장 강한 집단 중 하나인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는 거의 없다. 제사를 모시고 싶은 여성이 있더라도 아버지 제사인데 남자라는 이유로 조카가 제사를 주관하고, 정작 친딸들은 본인들이 직접 제사를 지내길 원했음에도 '어디서 여자가!'라는 이유로 집안 어른들에게 된통 혼난 후 사촌동생 뒤에서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는 식. 실화다. 성차별이 있음이 분명한데 지적받지 않는 대표적 영역의 하나.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며느리들의 제삿상 차리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강하게 한다. 남편 조상신 모시는 데 며느리만 일하면 억울하다는 것이다. 남편 집안의 행사인데, 왜 피 한 방울 안 섞인 며느리가 죽어라 일하고 그 집안 피를 이어받은 남편은 상차림에 있어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가? 물론 결혼으로 인해 그 집안 가족이 되었으니, 친지와의 행사에 있어 일을 분담해야 할 때 네 친지와의 자리니까 난 일을 하지 않겠다 라는 것도 이상하지만... 모두 같이 일을 한다면 모를까, 누구는 죽어라 음식 차리고 설거지하고 일하는데 동시에 누구는 다른 한편에서 먹고 놀고 떠들기만 하며 편히 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일하는 쪽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남성들이 벌초, 운전 등 힘든 일들을 맡으며 처가까지 운전하거나 처가의 벌초를 도와주긴 한다지만, 요즘은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하는 집이 갈 수록 늘고 있고, 운전도 부부가 번갈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남자가 처가는커녕 본가 제사에서도 하는 일은 없고, 여자들이 죽어라 음식 만들고 설거지 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서 먹고 놀기만 하니까 여성들이 보기에는 이마저도 남성이 누리는 특권 중 하나로 여겨진다.
다만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제사 음식의 경우도 갈수록 업체를 통해 사서 차리는 추세가 늘고 있다는 식으로 충분히 반론 할 수 있다. 제사라는 행위 자체가 점차
다수에게 있어 괴로운 일로 받아 들여지는 추세인데, 무조건 남자는 편하고, 여자만 힘들다는 시각 자체가 사회적으로 큰 공감을 살 수 있는 내용의 보편적인 서술이 결코 아니다. 기성세대와 비교적 젊은 여성들, 그리고 그 중간에 낀 남성들 등등 서로 간에 괴로운 부분들이 있는 것인데 어떤 측은 다른 측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 제사가 사회문제 시 된 핵심 원인이다. 따라서 서로 괴로운 상황이 자꾸 연출 되는 것.
6.6. 2017 제사폐지 청원 사건[편집]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제사를 법으로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와 온라인상에서 논란을 빚은 사건.청원 링크 관련기사 청원의 내용만을 보면 제사가 중국 고유의 관습이라거나, 제사의 폐지가 성평등과 여권향상에 기여한다 는 등을 들고 있는데 해당 내용의 신빙성도 의심되지만, 유교적 명분론을 따져서 여권향상, 성평등을 놓고보면 거꾸로 여성도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여권향상이라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청원의 내용 자체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제사무용론자들도 많다.
다만 이 사건의 의의는 일부 젊은 층이 현재의 제사를 분명한 적폐라고 여기고 있으며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7. 폐해[편집]
명절증후군, 결혼/과정과 갈등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2010년대인 현재에는 죽은 사람의 정성을 드린다는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 여자들이 명절을 싫어하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종가에서는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기일에도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종갓집 장남, 고명아들은 결혼 기피대상 1순위다. [15]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제사상을 차리는 몫은 전부 여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힘들게 제사상을 차려놓아도 누구 하나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트집을 잡아 잔소리와 면박까지 주고, 용돈을 건네주는 시누이나 동서들을 편애한다. 게다가 이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힘들게 일한 며느리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 애당초 옛날부터 '사위는 백년손님이나 며느리는 백년종'이라는 시대착오적이고 전근대적인 발언이 공공연히 나돌았고 아직도 이런 마인드로 며느리를 대하는 집안이 상당히 많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저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그런데 명절과 제사는 여자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은 그냥 쳐다도 못 보거나, 설령 남편이 나서서 도와주려고 해도, 집안이 보수적인 곳이면 "남자는 집안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못 하게 한다.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 입장에서도 명절과 제사 때는 위장에 구멍이 뚫리는 수준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2010년대 이후 젊은 층의 제사 문화에 대한 반감은 남녀 불문하고 정말 엄청난 수준이고, 사실 베이비붐 세대의 중장년층도 지내기 싫어하는 사람은 젊은 층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적지 않지만 바로 윗세대의 눈치나 반발도 있고, "어차피 기왕 해 온 거 내 대까지만 하고 끝내자"는 생각으로 그냥 지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즉 기성세대도 일부 젊은 층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사 지내고 싶어서 지내는 세대인 것은 아니다.
때문에 명절만 되면 스트레스 때문에 싸우면서 이혼까지 하는 일도 생긴다. 실제로 명절 연휴가 끝난 뒤 제사상 차리는 스트레스로 인해 이혼률이 증가한다는 내용이 해마다 명절 전후로 뉴스 기사가 되는 지경. 하늘에서 후손들을 위한다는 조상들이, 자신에게 상을 차려주기 위해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습들을 보면서까지 음식을 차려주는 것을 과연 원할까? 서로를 위하면서 서로가 덕담을 건네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종교나 가치관이 다른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제사 지내는 것을 강요하는 등 여러 폐해가 생기면서, 젊은 세대들의 반감이 매우 커지고 있다. 당장에 이 항목만 봐도 젊은 층의 제사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잘 드러나며, 아래 문단만 보더라도 음식이 낭비되는 일이기도 하다.
7.1. 문화 지체[편집]
바로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장남만이 제주를 떠맡는 것은, 선천적 요인으로 불이익을 받는 위헌적 요소까지 있는 전형적인 문화 지체이다. 조선시대에 장남이 제사를 모시니 유산도 많이 받는다는 원칙은 현대로 접어들면서 무너졌는데, 제사는 여전히 장남만 모셔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제도가 바뀌었는데 이에 연동 된 인식이 변하지 않는 전형적인 예시다. 성평등을 지향하는 시대에 남성만 제주를 맡을 수 있는 것 역시 성평등에 어긋나는 반헌법적인 문화 지체 현상이다.
옛날에는 제사가 집안의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라면 배려 해 줄 수도 있었겠으나, 이미 제사는 그러한 위치를 잃었다. 그런데도 제사를 지내는 행위 자체는 없어지지 않았다. 사실 많은 문제점이 제도권 내에서는 이미 제사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물리적 배려가 전무한데, 관습적으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무슨 죄 짓는 것처럼 몰아붙이며 제사 지낼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생긴다.
때문에 모 위키러는 실제로 출장 갔다가 중간에 밤에 돌아와서 제사 지내고 그날 밤에 다시 돌아간 적도 있다(...) 제사를 모셔야 하기 때문에 출장을 못 간다거나 하는 이유를 납득하는 상사가 있을까? 21세기에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현실적인 방법으로 같은 항렬 중에 그날 여유가 되는 사람이 대신 모신다든가, 주말로 날짜를 미루거나 당겨서 지내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방법이 기준으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집집마다 대처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애로사항으로 명절을 앞두고는 특히 여초 직장에서는 명절 전 며칠이라도 빨리 제사상차림거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엄청난 눈치와 신경전을 보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기름기 있는 음식이 드물었던 농경사회에서 대가족이 한 식구를 이루던 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제사 상차림이 적합 했을지도 모른다. 반찬 수도 많고, 양도 많은 데다, 대부분 기름으로 버무리고(나물, 떡), 굽고(생선), 지지고(전), 튀긴(튀김) 음식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현대인들은 이런 음식을 특별히 귀한 음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게다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들이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가족 수라도 많으면 억지로라도 먹어치우기라도 하겠지만, 많아야 4인가구를 넘기기 힘든 지금은 냉동실에 넣어뒀다가 때되면 버리는 쓰레기 정도 위상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제사 상차림은 핵가족을 넘어 탈가족화까지 거론되는 현대 한국사회와는 전혀 맞지 않는 형태다. 이 역시 바뀐 생활상을 문화가 받아들이지 못한 사례이다.
이미 수차례 언급된 제사 상차림의 경제적부담이나, 효용, 허례허식과 고강도 노동 문제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먹을 사람이 없다는 문제도 있다. 핵가족화는 이미 보편적 현상이라 아무리 큰집이라고 해도 많아봐야 구성원이 3~4명이 다수인 시대고, 제사 지내러 오는 사람들도 제사가 평일이면 절만 하고 당일에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다. '제사 때문에 내려가니까 내일 쉽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직장은 없다. 때문에 제주가 아니라면 굳이 제사를 지내러 찾아오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게다가 제사음식이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제사음식을 싸가는 문화마저도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16] 남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먹기는 싫은데, 돈은 많이 들었고 처치곤란이다. 비빔밥을 비비면 되니, 전찌개를 끓이면 되느니 어쩌니 tv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떠들지만, 그것도 어쩌다 한 번이지 제사 때마다 이렇게 먹으면 뭘 해도 질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예전에는 자식수가 많았기 때문에 제사비용을 1/n하면 부담이 적어질 수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자식 수 자체도 적기 때문에 분모 n값 자체가 크지 않다. 이뿐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현실적으로는 친척들도 제사음식을 싸가질 않거나, 제사 때 내려오질 않다보니 제사비를 내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먹지도 않을 건데 귀찮게 이동해야 하고, 돈까지 내야하니 적대감까지 생기는 경우도 잦다. 그냥 제사 지내러 안 가버리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문제는 그런 경우에도 제주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들의 부담은 오히려 옛날보다 지금이 더 심화된 것이 현실로, 제사의 경제적 부담은 그대로인데[17], 이를 분담 할 사람이 없다. 제사를 지내면 아무 효용도 없는 일에 거의 백만원 가까운 돈이 깨지는데 이를 혼자서 부담해야 하니 그야말로 미친짓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게다가 옛날에도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여러 인력들이 하루 2시간씩 자면서 밤을 새가면서 제사상을 차렸는데 그걸 소수 인원으로 차린다면?? 문화 지체 때문에 시대가 변하면서 예전처럼 제사를 지낼 수 없는 환경은 이미 조성되었는데, 제사는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더더욱 악습이 강화되어 버린 케이스다.
이런 문제를 1969년에 제정된 방식을 기본으로 집집마다 어레인지해서 사용하도록 느슨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로 보고, 법을 만들어서라도 제사를 없애거나, 최대한 간편하게 강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나오는 이유이다. 이런 정신문화는 가뜩이나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닌 데다, 효 문화가 지나치게 강해 제사가 나쁜 것이라는 소리조차 꺼낼 수 없는 국가[18]에서 자율적으로 바꿔서 적용하란 말은, 기본적으로는 그대로 하란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집안의 제사까지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비판은 현실과 유리된 이야기다.
법으로 제사를 강제로 간략하게 만들면 법을 핑계로 의견표출이 가능하게 되어 오히려 더 개인의 자유를 폭 넓게 인정해주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예로 김영란법 덕분에 청탁을 거절하기가 쉬워진 것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제사상이 얼마나 호화로운가로 효심이나 집안 자존심을 드러내어 제사를 지내다 집안이 파산하기도 했던 과거와 달리, 69년에 가정의례준칙이 정해지자 이런 폐해가 줄어들면서 삶의 질이 더 높아졌다. 그러나 지금은 69년에 간소화한 것조차 부담스럽기 때문에[19] 강제로 그보다 더 제한선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제사는 세대갈등을 빚는 대표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7.2. 허례허식[편집]
제사는 허례허식으로 과도한 낭비 등을 가져온다는 점이 지적되었다.[20] 그래서 1969년에 가정의례준칙 및 가정의례법이 제정되어 제사에서 4대 이상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적어지고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로 점차 국한되었다. 1999년 8월 31일에는 건전가정의례준칙이 공포되었다.[21][22]
그나마 가정의례준직으로 간소화 한다고 한 것마저도 과거 농경사회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던 시절에나 어울릴 법한 대량의 음식들이 필요한데, 핵가족화를 넘어서 탈가족화까지 이뤄지고 있는 현대사회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풍습이다. 제사가 있는 달은 살림살이에 크나큰 애로사항이 꽃 핀다. 돈이 많이 들면 만족도라도 있어야 하는데 메뉴 구성도 현대인의 입맛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다.
한마디로 비싼 돈 내고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만들어서, 돈 아까우니까 마지못해 물릴 때까지 깨작거리다가 쉬어서 버리게 되는, 즉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쓰레기를 강제로 만들어야만 하는 집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용성이 제로인 것이다. 특히 제사를 엄격히 지키는 집일수록 더한데, 한 위키러의 경우 1년에 4개월 가까이 제삿밥만 먹다보면 '나는 왜 사는가?',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고.
사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되지도 않는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공통적으로 밥, 탕, 국, 삼색나물, 전, 산적, 생선 정도가 올라가는데[23] 모든 음식이 그렇듯이 갓 만든 게 맛있는 법이다. 다양한 음식이 한 번에 올라가야 하고 어느 정도의 양이 또 필요한지라 조리 시간이 길어져 어쩔 수 없이 음식이 식는다. 제사 지내는 동안 또 식기 마련이고. 대개 먹을 때 되면 이미 식은 지 한참 된 음식들이다.
들인 돈은 많은데[24], 정작 먹을 때에는 죄다 식은 음식이 되어서 푸석푸석하거나 질겨지기 십상이다. 다시 가열하는 등의 방법도 있겠지만, 그래도 갓 한 음식만 못하기는 마찬가지. 음식물 쓰레기가 양산되는 게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25] 좀 노골적으로 말해서, 한 나라의 온 가구가 잔치를 벌이는 수준이라 낭비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게 우스운 일이다. 오히려 수요공급 이론에 따라 물가만 폭등해 서민들은 피해만 입는다.
현실적으로 부담이 크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가정에서도 의례를 크게 간소화해서 치르는 경우가 많다. 조상들의 제삿날을 아예 한 날짜에 몰아서 제사를 지내거나, 제사상 진설을 FM대로가 아니라 가짓수를 줄여 지내기도 한다.[26] 아무튼, 제사 간소화는 집안마다 가족마다 방법이 다 다르다.
7.3. 휴식 기회 낭비와 사회적 재생산능력의 약화[편집]
적당한 휴식은 인간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회복시키고, 생산능력과 능률을 증진 시킨다. 노동시간이 전 세계 1위인 대한민국에서 명절처럼 긴 기간 동안 출근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그런데 그 기회를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귀한 연휴를 재충전의 시간으로 활용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동, 노동, 친척 간 접촉 등으로 인해 육체적/신체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는다. 연휴 기간을 재충전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소모 당하는 시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명절이 아닌 제사를 놓고 보더라도 휴식을 방해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늦은 밤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피로를 가중시켜, 다음 날 작업능률을 저하시킨다. 제사 때문에 사회적으로 많지 않은 귀중한 휴식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구성원의 피로가 가중되고 있다.
심지어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명절을 겪느니 연속 당직을 해도 좋으니 차라리 출근을 하고 싶은 직장인들도 꽤 있는 편이다.
7.4. 제주(祭主) 문제와 가부장적 폐해[편집]
제사를 모시는 제주(祭主)는 무조건 그 집안의 장남이 맡게끔 강제된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매우 큰 경제적 부담을 지는 일인데, 재산분할 등에 장남이 갖는 이점이 없는 현대에 와서는 그냥 가부장제의 폐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부장제의 폐해 때문에 장남들은 결혼길도 좁아지고,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을 져야만 하는 등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 중 하나. 여성이 아닌 남성만 제주를 맡아야 하는 것 역시 평등권을 침해한 반헌법적인 가부장문화의 폐해다. 심지어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딸들 본인이 제사를 하겠다고 나섰는데도 친척들이 막고 오히려 크게 혼을 내 결국 남자 조카가 제주가 된 사례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가부장제의 폐해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측에서도 며느리들의 제삿상차림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는데, 제사가 가부장적 악습 그대로 장남에게 강제되는 것이 성차별적이라는 점은 강하게 문제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이곳처럼 가부장제에 가장 격렬히 저항하는 측에서조차 문제시 하지 못하는데, 기성세대들이 얼마나 제사를 당연시 여기는지는 말할 것도 없는 수준(...) 대다수 한국인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는 여성부조차 제사폐지에는 관심이 없다.[27] 고려시대처럼 여성도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해달라는 주장이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제사를 지내는 행위 자체를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기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5. 식문화와 식생활에 대한 악영향[편집]
과일등 농산품의 크고 좋아 보이는 고급품의 수요가 많으며 특히 각종 명절의 수요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문제는 명절과 과일의 제철간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시장왜곡이 발생하고 있으며 무리하게 명절 수요를 맞추기 위한 생장촉진제 등도 사용된다.
다만 지구 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실제 계절변화와 음력의 불일치는 명절 날짜 자체의 문제이다. 일본의 경우 음력을 폐지하면서 오봉등의 전통명절을 양력 날자로 지낸다. 그리고 명절의 농축수산품 수요가 제수용 수요도 일정 부분을 차지하나 그 외에 명절 선물용 수요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이는 유사한 문화이지만 제사는 없는 일본에서도 보이는 현상이다. 또한 농산품의 품질개량이 유통상의 편의를 위해서 맛을 희생하는 현상도 존재한다.
때문에 설사 제사가 사문화가 되었더라도 현재의 현상이 유의하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반면 제사와 명절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형태가 시너지를 일으켜 해당 현상을 심화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사실 명절의 농축수산품 수요에 대하여 제수용 수요와 명절 선물용 수요를 구분하는 통계도 없으며 김영란법 영향으로 선물용도 제수용으로 위장하는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라 대략적인 추론만 가능하며 양쪽 모두 가능성은 있는 상황이다.
제사음식이 양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억지로 한참을 먹어야 하는 것도 큰 문제다. 식사란 한 끼 대충 때우고 말면 되는 것이 아니다. 맛있는 식사가 주는 행복감은 무시 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제사음식이 입맛에 맞지않는 세대가 크게 늘면서 제사음식을 먹는 것이 고역이 된 것이다. 다 식은 음식을 데워 먹는 것이니 상식적으로도 갓 만든 음식에 비해 맛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너무 기름이 많이 들어갔다는 것도 문제다. 명절이나 제사 때문에 스트레스 잔뜩 받고 기름진 음식을 억지로 먹거나, 과식하게 되면 소화불량에 걸릴 위험성이 높다. 과거에는 제삿상이 호화롭게 먹을 수 있는 귀중한 식문화의 보고였는지 몰라도, 현대에는 건강한 식문화 확립에 악영향을 끼치는 요소 중 하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남은 제사 음식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중이다. 매년 공중파 등을 통해서 남은 명절음식 처리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는 상황이다.
8. 음복[편집]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와 제물을 나눠서 먹는 것. 집안에 따라 제상에 올린 나물과 밥을 함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28][29]
제물이 평소 먹던 음식보다 맛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음식이 식고 난 뒤에 먹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나 생선류는 한번 조리되고 나서 식으면 수조육류 특유의 냄새가 나고, 다시 데우면 오히려 냄새가 심해진다. 양념이 안 되다 보니, 양념이 들어갔을 때보다 냄새가 심하다. 음식에 간은 하지만 양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양념의 매운 맛이나 향이 영혼을 쫓아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무당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때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사용한다. 물론 무당 이야기 나온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근거 따위는 전혀 없다. 실제로 강한 양념을 하지 않는 것은, 양념을 강하게 하는 것이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강한 양념 자체가 제사 풍습이 확립된 다음에 들어왔기 때문[30]이지 축귀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다.
거기다가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냉장고의 냄새까지 밴다(...) 밀폐용기나 지퍼백에 넣어둔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지만, 대부분의 집이 비닐봉지에 대충 담아놓는 환경을 생각한다면 지못미.(...)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먹다 버린 것 같은 느낌이나 음식에 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음복 때에는 제사에 쓰인 술인 제주[31]를 제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민짜"들이 공개적으로(…) 술맛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 물론 이런 데 엄격한 집안에서는 이럴 때도 아이들에게 술을 못 마시게 한다.
그래도 어른들 입장에서 장점을 찾아보자면, 소위 "주도"를 훈육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첫 술은 이렇게 순한 술로, 어디 어두침침한 양아치 소굴 말고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환한 자리에서, 적당히 긴장 타면서 배우게 하는 것이 지극히 바람직하다. 처음 술버릇이 평생의 술버릇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지대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절에 차례나 성묘를 하고 제주로 음복을 하고는 음주운전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절날 큰 묘지 주변에선 낮시간에도 음주단속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술은 술인 만큼 운전할 사람은 제주를 마시지 말자. 단속 이전에 안전 문제다.
현대 이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명절, 잔치와 함께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가 음복이기도 하였다. 아래 내용의 '헛제삿밥'의 기원으로 이를 꼽기도 한다.
영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보니 어른들이 "남의 집 젯밥은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경우가 있다. 제물에는 귀신이 붙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무당들도, 제사를 지낸 음식은 귀신이 붙은 거라 먹게 되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9. 가문별, 지역별 특색[편집]
제주도에서는 제사를 식게라고 부른다. 균분상속의 전통이 남아있어 시집간 딸과 사위도 제사에 참석한다.[32] 자녀가 생기면 자녀도 동행하므로 외손자가 제사에 참석하는게 유별난 일이 아니다.[33] 뿐만 아니라 친구를 제사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제주도 사람이 제사에 초대한다면 혈족만큼 친밀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
제주도에서만 상에 올리는 음식들이 있다. 빵[34],
양애[35]전북 남서부지역도 양애를 올린다, 빙떡 등. 갱도 생선국[36]으로 올린다(주로 생선미역국). 지역특성상 어적도 빠지지 않고 올린다. 적갈 재료는 주로 상어, 오징어, 옥돔. 명절 때 차례상에 만두를 올리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또한 술 대신 음료를 쓰기도 한다고.경북 지방의 경우도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돔배기 같은 음식이 제사에 올라온다. 제사 음식들 중에서도 비중을 상당히 높게 치는 편. 집안에 따라서는 문어도 삶아서 올라온다.
안동시에는 헛제삿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안동의 제삿밥이 맛있기로 유명하자 그곳에 부임한 미식가 관리가 이를 원하였는데, 아랫 사람이 실제 제사에 쓰인 음식은 아니고 같은 재료로 똑같이 만들어 대접하자 관리가 이를 먹고서는 "향이 나지 않으니 진짜 젯밥이 아니구나(헛제삿밥)[37]"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숙주의 본관인 고령 신씨의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상에 숙주나물을 올리지 않는다.
이름의 유래를 생각해보면 당연하겠지일반적인 제수와 달리 종묘제례나 사직제례에 쓰이는 제수에는 익히지 않은 날 것과 양념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종종 산신제나 일부 종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산신제에서 이렇게 올리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다. 산신제에는 고기를 잘 쓰지 않으나, 이는 현재 대부분의 산신각이 절 안에 있는 것도 있고, 남자 산신에게만 고기를 올리는 곳도 있다. 강원도 영월군의 태백산 산신제에서는 쇠고기를 쓰는데, 이는 영월에서 사망한 단종(조선)을 태백산 산신으로 존대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개요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 이후 제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성, 특히 장남이 지내는 것으로 인식되나, 현대에는 평등 의식으로 인해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또한 노론 출신 문중에서는 처음부터 딸과 집안 며느리 또한 제사에 직접 참여시키는 경우가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문중에서는 칼로 고기나 무를 썰 때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외운다고 한다. 이발의 가문은 정여립의 난 때 정철의 주도로 철저하게 숙청당해서 정철에 대한 원한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의 제사상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이이가 생전에 소를 사람들이 부려먹으니 소고기를 먹을수 없다며 소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10.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음식[편집]
후술할 기사에도 언급되듯이 이것은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민간에서 내려오는 풍습이니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아집은 피하는 것이 좋다.
고춧가루, 마늘 등의 양념/향신료 - 고춧가루,마늘의 냄새가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제사음식에는 간만 해두지 일절 이러한 양념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음식의 맛이 심심하고 누리거나 비린냄새가 잡히지 않아서 맛이 없다. 어떤 곳은 소금도 안 넣는다 한다.
팥이 들어간 음식들 - 팥 역시 귀신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치' 자가 들어간 음식들 - '痴(어리석을 치)', '恥(부끄러울 치)' 와 같은 단어여서 부정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는 치 자가 들어간 생선을 올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치 자가 들어가는 생선들은 등급이 낮은 생선이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11. 제사와 관련된 단어[편집]
제사상에 음식을 놓는 방식을 쉽게 외우기 위한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은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등과 같은 유교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근거 없는 단어들이고, 80~90년대 언론들이 몇몇 가문들의 상차림을 참고하여 상은 이런 식으로 차려야 한다며 만들어 전파된 단어들이다.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신위를 북쪽으로 치고 하기에 동쪽은 신위를 마주보고 오른쪽을, 서쪽은 왼쪽을 말한다.
어동육서(魚東肉西):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두동미서(頭東尾西): 물고기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가게 놓는다.[39] 반대로 일부 집안에서는 서수동미를 쓰기도 한다.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그런데 과일이 꼭 붉고 흰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과일줄에 약과나 산자등 다른 디저트류도 올라가기 때문에 애매한 경우가 많다. 이럴때는 보통 진한색은 동쪽, 옅은색은 서쪽에 둔다.
조율이시(棗栗梨枾): 왼쪽부터 대추,밤,배, 감 순서로 놓는다. 다만 대추, 밤, 감, 배 순으로 놓는 조율시이(棗栗枾梨)도 혼용되고 있으며 이는 집안마다 다르다. 고로 남의 제사상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지 말자. 홍동백서를 쓰는 집안에서는 조율이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위에 말했듯 제사 예법이라는 게 집집마다 다 달라서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율이시를 쓰고 나머지를 홍동백서로 쓸 수도 있고. 제일 동쪽에 대추와 밤을 놓고 홍동백서를 따른후 마지막에 배와 감을 놓을 수도 있다.
좌포우혜(左脯右醯):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다.
반서갱동(飯西羹東): 반(밥)은 서쪽에, 갱(국)은 동쪽에 차린다.
생동숙서(生東熟西): 날것은 동쪽에, 익힌 것은 서쪽에 차린다.
건좌습우(乾左濕右): 건한 음식은 왼쪽에 습한 음식은 오른쪽에 놓는다.
적전중앙(炙奠中央): 적과 전은 중앙에 위치한다.
접동잔서(接東盞西):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12. 제사상 놓는 법 쉽게 기억하기[편집]
신주를 중심으로 첫 열에 밥, 2번째에 메인요리 (적), 3번째 열에 탕, 4번째 열에 반찬, 마지막 열에 디저트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가 평소 밥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 지내는 입장에서는 이걸 거꾸로 보니 (첫열에 디저트) 외우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사상 놓는 법이 아니다. 고인이 좋아하던 것으로 차릴 수도 있고 후손들, 특히 어린이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어린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도 무관하다.
13. 종교별 입장[편집]
13.1. 불교[편집]
불교식 제사 지내는 법
불교 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집에서 직접 일일이 준비하기보다는 절에 조상의 위패를 맡기고 제사를 하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일환으로 금지되었는데, 조선이 망한 현대에 들어서 다시 절에 제사를 맡기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5만 원만 내면 절에서 대신 차례를 지내준다고.
일본에서는 사후 일정기간(대략 수십 년) 동안 불교식으로 조상의 성불을 기원하는 법회를 연다. 이를 법사(法事), 법요(法要)라고 한다. 여담으로 일본인에게 조상 제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법사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다. 공연히 자세히 설명하려고 '제사(祭祀)'라고 써버리면 마츠리(祭)로 착각할 수도 있다.(…)
참고로 불교에서 부처님이나 보살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행사는 재(齋)라고 한다. 엄밀하게는 일반적인 제사는 제(祭)로 쓰고 둘을 구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작 절이나 불자들도 그다지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본래 재는 승려에게 식사를 공양하면서 이를 전후하여 간단한 예불 등의 불교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지만,[41]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49재/영산재, 수륙재, 생전예수재, 우란분재 등 기존 동북아의 민간신앙적 종교의식과 불교가 섞이면서 기존 민간신앙과 불교가 섞인 형태의 재가 나타났다.[42]
이런 현상은 이미 인도 본토에서도 초기 불교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 고대 인도에서 브라만교의 허례허식과 모순을 비판하면서 나온 게 불교를 비롯한 (당시 기준) 신흥 종교들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신도들이 원하는 종교행위에 대한 욕구와 그 효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 당장 현재까지도 인도 공화국에 남아 있는 자이나교를 봐도, 허례허식과 물욕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교리에도 불구하고 교조의 기념일에 거대한 창시자의 상에다 엄청난 양의 우유와 인도식 버터[43], 염료를 뿌리며 공양을 올린다.
13.2. 천주교[편집]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의 조상 제사는 민속적 관습일 뿐 가톨릭의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발언한 뒤 천주교에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제사가 허용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조선시대 때 들어온 서학(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중요 원인이 될 정도의 문제였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제사를 금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국시인 유교 자체를 뒤흔드는 중대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물론 천주교 박해의 실질적인 원인으로는 황사영 백서 사건 등등으로 (모든 천주교인들이 황사영 같은 과격파인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실제로 나라를 들어엎을 가능성이 있는 집단임이 드러난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겠지만, 천주교의 교리가 유교의 가르침과 심각하게 충돌한다는 점도 '윤지충 신주단지 소각 사건(진산 사건)'[44] 등으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당시의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유학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고 반박했다. 가령 아무리 효자라도 주무시고 계시는 부모님께는 음식을 드리지 않듯이, 돌아가신 것은 영혼이 주무시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제사로서 음식을 강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있다며 그 나름대로는 열심히 반론을 펼쳤다. 물론 이러한 의견들은 깨끗하게 묵살당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통해 허용된 천주교의 제사는 전통적인 제사 형식과 약간 차이가 있다. 우선 지방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45], 지방을 쓰더라도 지방에 신위(神位)란 말을 쓰지 않고 그냥 이름과 함께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라고 쓴다. 그리고 제문을 올리는 등 조상"신"에게 바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제례의식들은 죽은 이를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연도, 위령기도)로 대신한다. 물론 집안에 따라, 특히 다종교 가정(?)인 경우 다양한 차이가 있기도 하다. 어쨌건 핵심은 천주교에서 인정하는 제사는 어디까지나 조상에 대한 추모와 그들의 평안을 하느님께 비는 기도라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46][47]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러하지만 간혹 이 선을 넘는 경우도 있는 법이기 때문에 천주교식 제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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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천주교의 공식 미사통상문에서는 미사를 '제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말씀 전례 후 이어지는 성찬 전례의 시작이 '봉헌(헌금)'인데, 이 헌금을 마치고 이어지는 '예물 준비 기도'에서 신자들이 다음과 같은 합송을 한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후략)" 왜냐하면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구약 시대에 사제들이 양으로 속죄 제사를 바치던 게 신약 시대에 들어오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대체된 하나의 희생 제사로 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미사 중 성체성사에서 성체는 제삿밥과, 성혈은 음복주와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은 있다. 게다가 트리엔트 미사는 사제가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집전하니 정말로 동양식 제사가 연상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48]
요즘에는 명절에 제사를 지내거나 지내지 않거나 상관없이,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이 많다고 한다. 위령미사는 다른 말로 연미사나 죽은 이를 위한 미사라고 부르며, 죽어서 연옥에 간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천국에 하루속히 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봉헌하는 미사이다. 조상 제사를 드리더라도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위령기도를 바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어서 교회는 이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원하는 날로부터 20일 이전(또는 수일 전)에 본당 사무실에 비치된 예물봉투를 사용하여, 미사의 종류와 지향(고인의 이름 혹은 목적), 일시 등을 조정 기록한다. 예물 액수의 규정은 없으나, 차례 때의 제물 값을 고려할 때 성의껏 드려야 한다. 비신자를 위해서도 연미사를 봉헌할 수 있지만, 사제가 그 이름을 공지할 수 없다. 천주교 수원교구 최윤환 암브로시오 몬시뇰은 "미사 때 지향은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개방돼 있다"면서도 "다만 비신자를 위한 연미사를 공식화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사실 비신자가 일부러 미사를 봉헌하러 오는 일은 가뭄에 콩 나는 것보다 드문 일이긴 하다.
13.3. 정교회[편집]
정교회는 조상 제사를 드리지 않으며, 대신 추도식(追悼式, Μνήμη νεκρών)과 기도 그리고 특별히 성찬예배 때 그들을 위하여 봉헌물을 바치며 또한 그들의 영혼을 위한 자선 등으로 도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추도식은 세상을 떠난 지 3일, 9일, 40일, 1년 만에 할 수 있다(통상 관례와 가족의 합의에 따를 수도 있다). 오순절 전 토요일과 금육주일 전 토요일에는 돌아가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추도한다.
추도식 때는 꼴리바[49]라고 불리는 밀밥이나 쌀밥을 지어와서 성당 안에 준비된 작은 제단 위에 놓고 촛불을 밝히고 분향한다.
아울러 정교회에서는 개신교와 달리, 예수를 믿지 않은 이들의 제사나 장례식에 참석할 경우, 유교식 예의를 모두 갖추고 따라 하라고 한다.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처럼 장례식장이나 제사 자리에서 싸우지 말라는 의도이다. 동양식 제사를 금하는 것이 맞으나,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더 중요히 보는 것.
그러니 정교인끼리만 가족을 이룬 경우 차례상을 지내지 않는게 맞으며, 비그리스도인의 장례식장이나 차례식에 참석할 경우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절이나 분향, 음복 등의 행위는 흉내 차원에서 따라한다.
13.4. 성공회[편집]
제사를 굳이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천주교와 비슷하다. 종교적인 의미나 조상에 대한 숭배 행위로서 제사는 거부한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자손들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그 부모를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예배 행위로서의 제사만을 인정한다. 즉, 행위의 대상이 하느님이 되는 경우만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그 양식에 있어서는 종교적 의미를 가질 만한 것(대표적으로 '신주')을 제외한 부분만 인정한다.
13.5. 개신교[편집]
개신교는 종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종파에서 제사상에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죄악시하므로 제사 자체를 금지하는 편이다.[50] 그러나 한국의 상황상 절은 우상숭배니 결코 인정할 수 없고, 서서 추도나 묵념으로 갈음하는 것을 권장한다. 교회 다닌다며 절 안 하고 한쪽으로 빠져서 서 있는 사람들 하나쯤은 봤을 듯. 개신교에선 사람이 죽으면 구원을 받았으면 천국, 못 받았으면 지옥으로 보기에 제사상을 차려봤자 죽은 자가 와서 먹을래야 먹을 수 없다고 본다. 종교개혁시기 개신교의 가톨릭 비판 중의 하나가 죽은 자에 대한 미사였기에 애초에 교리상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에선 부부 간에 종교가 다를 때 가정불화의 한 요인이 되는데, 혼인이 파탄난 경우에 종교가 원인의 하나라면 재판상 이혼사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순전히 제사 거부만을 이유로 이혼사유가 되는 경우는 없다.
개신교에서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권장하고 있는데,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 교리에서는 영혼을 위한 기도(위령기도)를 인정하지 아니하므로, 조상에 대한 추도의식 또한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나마 존재하는 추도예배도 극단적 보수 성향의 교파나 목사에 따라서는 토착화요 상황화라고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추도예배조차 인정하지 않는 교파들은 명절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그냥 편하게 가족들끼리 모여서 먹고 즐기는 날로 지내라고 하는 편이다.[51] 물론 이렇게 까탈스러운 곳은 거의 드물긴 하다.
기독교계 복원주의(Restorationism) 운동의 대표적인 교단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에서는 가정과 가문을 중요시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제사를 금지하지 않고, 개신교의 대표적 진보성향의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도 융통성 있게 잘 지낼 수 있도록 권장하는 편이다.
13.6. 이슬람교[편집]
이슬람교에서는 신자의 다섯 기둥 중 샤하다라는 교리가 있는데, 말 그대로 '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뜻이다. 또한 이슬람에서 절은 오직 알라에게 예배할 때에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슬림들은 이에 따라 제사 자체를 우상 숭배로 보기 때문에 지내지 않는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소위 "쉬르크"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해주시지 않는 큰 죄악으로 간주된다.
FM대로 하면 이렇긴 하지만, 여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다(...) 특히 터키를 비롯한 튀르크 문화권에서는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여전히 조상을 기리는 풍습이 남아있기 때문에 비록 형식은 이슬람화 되어있지만 고인의 무덤을 방문해 성묘하고 제사 비슷한 의식을 하는 풍습이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장례식 후 첫 1년동안, 그리고 고인의 기일마다 때때로 무덤을 방문해 쿠란의 제1장인 개경장(El-Fatiha)을 낭독하거나, 고인에게 마치 살아있을때처럼 대화를 나누거나, 꽃과 음식을 봉헌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런 풍습들이 우상숭배라며 경계하는 보수적인 무슬림이라도 개경장 낭독만큼은 챙기는 편이다. 알레비파는 무덤을 방문할때마다 무덤 앞에다 동전이나 작은 돌을 쌓는다.
13.7. 천도교[편집]
천도교에서의 종교의례에서는 청수일기(淸水一器)리 하여 항상 맑은 물 한 그릇을 준비하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맑은 물 한 그릇만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식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낼 때도 있는데, 이때는 벽 쪽에 위패를 놓고 위패를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는 일반적인 제사법(향벽설위)이 아니라 "향아설위"라 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상을 차린다. 이는 만인에게 한울님이 깃들어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2대 교주 해월 최시형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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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아설위로 제사를 지내는 모습. 저 상태에서 청수를 모시고 둘러앉아 제사를 지낸다. 사진출처: 국제신문
14. 기타 이야깃거리[편집]
제사상의 동서남북은 실제 방위와 다를 수 있다. 같으면 좋겠지만 건물 구조상 불가능한 경우, 제사상의 방/신위가 있는 곳을 북쪽, 지내는 사람이 있는 곳을 남쪽, 동쪽은 지내는 사람의 오른쪽, 서쪽은 지내는 사람의 왼쪽으로 설정한다.
놀부는 제물 대신에 종이에 음식 이름을 써서 올렸다.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당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사당을 그린 그림을 대신 걸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놀부는 재력도 있으면서 구두쇠라 아끼려고. 그 다음 해에는 제기 위에 그냥 동전을 올리고, 그 다음 해에는 무려 신위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음식 앞에다가 신주를 들이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등장인물마다 다르게 묘사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제사는 지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조상님의 신주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날 밤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배불리 먹어 만족스럽다며 은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제사 날짜는 대부분 음력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에서는 양력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성균관 문묘에서 행하는 석전대제와 종묘 제례는 양력으로 계산해서 치루고 있다. 석전대제는 9월 28일(공자의 탄신일)과 5월 11일(공자의 기일), 종묘제례는 매년 5월의 첫째 주 일요일에 행한다.
2월 29일이 제삿날이면 4년에 한 번[52]씩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년에는 2월 28일이나 3월 1일로 땜빵하거나 음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음력으로 윤달이 제삿날이면 본달에 지내거나 양력으로 지내야 한다.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 여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만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차림(생활한복은 제외)이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현대 시중에서 파는 아동한복의 90% 이상이 두루마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냥 저고리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양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맨 뒤 블레이저를 입으며,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원칙이다. 즉,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만 장례식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과는 달리 제사나 차례에서는 지키지 않는 집안도 많다. 교복이 한복이 아닌 이상 교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도 양복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FM(?)을 중시하는 집안이 아닌 한, 단정한 차림이면 모두 허용하는 집도 많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이고 유교적인 제사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절이나 무당에게 땅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제사비용으로 주고 제사를 대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교적 제사문화가 강화되어 없어졌으나, 유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는 부활하여[53] 점점 성행하고 있는 중. 때문에 불교 집안이라도 자주 다니는 절에 제사를 맡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 혹은 명절법회라 하여, 명절마다 절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고려 말기에는 유밀과가 크게 유행했는데, 불교 국가인 고려의 특성상 살생을 터부시하다 보니 대충 동물 모양으로 유밀과를 올리던 게, 점점 과일대신 과일 모양 유밀과도 올리고, 모양도 점점 호화로워지니 보다못한 조정에서 유밀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전통 한과는 제조하는 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과 문서 참조.
천도교에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는 듯.
홀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수를 셀 수 있는 제물들(ex-과일, 송편, 포 등)은 절대 짝을 맞춰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물 준비를 할때 밤을 10개를 샀다 해서 10개를 다 놓느냐 하면 10개는 짝수기 때문에 1개는 남겨놓고 9개만 올리는 방법이다. 사실 이는 음양의 철학문제로, 땅에서 난 것은 음의 속성을 가졌으므로 홀수로 놓아 고인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난 것, 이를테면 새 종류는 원래 짝수를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홀수로 놓아야 한다'는 규칙만 살아남은 것.
현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유교적인 의식보다는 추모 행사에 가까운 것. 개인이 생전에 아끼던 반려 생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의학 및 생물학 연구를 위한 실험 과정에서 희생된 생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개막행사 때 진지하게 지낸다.
북한에서도 봉건적인 잔재라고 해서 없애려고 노력을 했고, 많은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고, 80년대 이후 당국의 허용으로 제사를 다시 지내는 가족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많은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해봐야 무덤에 가서 꽃을 바치고 묵념하는 정도이다. 제사를 할 경우 남한에서는 제사 때 2번 절하지만 북한에서는 3번 절한다.
남의 집 제사를 방해하면 제사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사방해에는 제사장소에서 떠들거나 제사상을 뒤엎거나 제사를 진행할 수 없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정말로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면 제사방해로 졸지에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악에는 3년 이하의 징역도 가능하다.#
무슬림은 샤하다[54]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삿상에 절하는 것을 이슬람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죄악시하기 때문.[55] 개신교의 경우는 워낙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교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제사를 금지한다.
사제(司祭)라는 직명을 직역하면 "제사를 맡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은 천주교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동양식 제사'와는 목적도 형식도 모두 다르다.
설날이나 추석 때 합동 차례를 지내는 군 부대도 있다. 대상은 설날이나 추석 때 휴가를 안 나가는 부대원 전체(...). 부대 분위기에 따라서는
병들은 명절 안 그립겠냐? 지휘(자)관이 모범 안 보일 거야?간부들(특히 지휘관, 참모, 주임원사)도 상당수가 명절 땐 휴가를 못가고 당직이 아님에도 부대에 출근해서 이 행사를 같이 치뤄야 한다. 특히, 차례상 차리는 거 감독해야 하므로 조리부사관들은 태생적으로 명절 당일 반일 정도는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한다. 축구대회 등 단결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높으신 분들은 명절 연휴 중 병들 무료하게 놔두면 고향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심심함을 못 이겨 사고 친다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카더라가 많이 퍼져있다. 다만 실제로는 사서 고생을 시킨다기보다는, 명절 때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이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휴가나 외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작정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보자.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의 경우에는 함정에서, 공군은 활주로 위에서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이 대인배인 경우는 종교별로 병들을 분류하여 각자의 종교에 따른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제사가 허용되지 않는 병들은 안 해도 된다.[56]
교도소에서도 설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를 "재소자 합동차례"라고 부른다. 물론 모범수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BC3000년경 갑골문을 해독해 보니 은나라의 왕이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에 있는 토착종교를 싸그리 배척하고 왕의 조상만 섬기게 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 일어날 불만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기 조상을 섬기면 날씨도 좋아지고 전쟁도 이기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또 믿었다. 그러다 은나라는 주나라에 멸망 당하는데 주나라가 자기 나라도 졔례의식을 잘 받아들이고 행해야 나라가 잘될 것이라고 생각해 은나라의 제사담당자를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주나라에도 조상숭배 문화가 퍼진 것이다. 그러다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등장으로 공자의 개인적 생각이 들어가면서 귀천에 상관없이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야 복 받는다고 공자 본인이 그렇게 정한것을 후대 유학자들이 그대로 떠받들며 자기 생각을 한숟갈씩 추가하여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유학에 매우 비판적인 김경은 교수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부분은 고려해서 판단하자.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였던 안영은 "유자(儒者)들은 복상(服喪)의 예를 중시하고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만약 그것을 백성들이 본받게 된다면 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문왕(周文王)은 이미 가셨고 왕실까지 쇠퇴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 유자들은 의례(儀禮)를 성대히 꾸미고 번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옛날의 예를 부활하려고 하더라도 헛수고에 끝날 것은 명백합니다."라고 하며 제사의 폐단을 지적했다.
15.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경우들[편집]
단순히 집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57]가 아닌, 말 그대로 특정 이유 때문에 제사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다.
개신교 신자 (여호와의 증인 포함), 무슬림: 이쪽은 제사 자체를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 숭배라며 금지시킨다.
성매매 여성: 현대에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전근대의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들은 부정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면 무례하다 하여 자발적으로, 혹은 집안에서 강제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심신이 청정해야 한다 하여 목욕제계를 한다거나, 음식도 비린 것을 먹지 않거나 하는 등 준비과정이 있었다. 제삿날에 남의 집에 문상을 갔거나 집안에 병자가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예법에서는 심지어 관리가 형벌에 관련된 문서를 처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제사를 앞두고 남에게 벌을 주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심신의 청정'을 깨트리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