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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리랑
겨울이 다가오는 어느 날,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룸메이트 모하메드와 나는 구운 오징어를 안주 삼아 맥주 몇 병을 함께 얼큰히 걸칠 기회가 있었다. 술기운이 흥건히 오르자 모하메드는
머리에 흰 수건을 말아쓰고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전통음악에 맞춰 아랍 춤사위를 보여주었고, 나는 그 답례로 SES나 핑클 같은 한국의 대중가요를
들려주었지만 이 아랍 사내는 너무나 미국노래 같은 이 노래들 대신 한국의 전통음악을 들려줄 것을 요구해왔다.
잠시 생각하다가
비틀비틀거리며 술취한 걸음으로 창고로 가서, 아직 풀지 않은 이사짐 속에서 작년에 한국 갔을때 친구 경호가 선물로 사준 슬기둥 CD 와 장사익의
{아리랑}을 틀어주었다.
아리랑
- 장사익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며는,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2. 헐버트의
아리랑
서기 1896년, 선교사 H.B.헐버트는 {Korea Repositry Korean Vocal
Music}를 통해 서구에 조선의 풍습을 전하면서 {아르렁, A-Ra-Rung}이란 조선의 민요 하나를 채보해 소개했는데, 그 노래는 (해주)
아리랑이었던 듯 싶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조선인들은 노래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새처럼 노래한다...이 노래는 조선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마치 쌀과 같다"
3. 나운규의 아리랑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유명한 아리랑은 {서울아리랑}, 혹은 {본조아리랑. 이 노래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사용되었다. 서기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을때의 기억을 이경손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단성사가 터질듯했다. 개봉 날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만원이었다. 바로 우리나라 흑백무성영화 시대의 획기적인 이 작품은 서울 장안을 설레게 했다. {아리랑}이야 말로 최초의 舊劇調를 脫皮한 첫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또 한 가지 長點은 관객의 심정을 만족할 만큼 捕捉한 점이다. 마치 어느 義烈團圓이 서울 한 구석에 爆彈을 던진 듯한 설레임을 느끼게 했다. 그것도 비밀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느끼게 했다.” 주:{신동아}·1964·12
서기 1937년 1월, 잡지 {三千里}와의 인터뷰에서 영화감독 나운규는
영화의 주제가 {아리랑}에 대해서 직접 이렇게 말한다.
문 : "...이 노래는 누가 지었어요? 한동안은 그것이 벌써 10년은 되었지만 그때 서울이든 시골이든 어데서든지 어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즐겨 부르던 ‘아리랑’의 이 주제가를 누가 지었어요?"
답 : "내가 지었소이다. 나는 국경 회령(會寧)이 내 고향인 것 만치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淸津)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 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래 소리가 들리면 거름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웨어 보았답니다. 그러다가 서울 올라와서 나는 이 ‘아리랑’ 노래를 찾았지요. 그때는 민요로는 겨우 강원도아리랑이 간혹 들릴 뿐으로 도무지 찾아들을 길이 없더군요. 기생들도 별로 아는 이 없고 명창들도 즐겨 부르지 않고,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하여 내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4. 김산의 아리랑
1920년대 중국에서 항일전선을 이끌다 33세로 요절한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의 구술을 바탕으로, 당시
중국혁명 과정을 취재하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즈는 1937년 {아리랑 : 어떤 조선혁명가의 삶, Song of Ariran : A Life
Story of A Korean Rebel}를 출판했다. 혁명가이던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지긋이 불러 주었던 아리랑도 바로 이
{서울아리랑}이었다.
모하메드는 이 노래들을 흥미롭게 듣고 있다가 그 중에서도 {아리랑}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이 노래의
가사를 내게 물어보았다. 나는 비록 술기운에 풀린 혀지만 김산이 100여년 전에 한 푸른 눈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즈에게 그러했을 것처럼,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한국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 호기심 많은 회회(回回)아비에게 정성껏 설명해주었다.
나는 '아리랑'의
어원과 노래의 기원에 대한 김산의 진술에는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김산의 설명이 세부적으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님
웨일즈에게 읊어주던 아리랑을 부를 때의 그의 뜨거운 심장을 느낄 수 있다.
님 웨일즈가 전하는 김산의 진술을
들어보자.
p.6
...그(김산)는 나(님 웨일즈)에게 조선의 민요 [아리랑]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In Korea we have a folksong, a beautiful ancient song which was created out of the living heart of a suffering people. It is sad, as all deep-felt beauty is sad. It is tragic, as Korea has for so long been tragic. Because it is beautiful and tragic it has been the favorite song of all Koreans for three hundred years.
"조선에는 민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 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지요.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이 슬픔을 담고 있듯이, 이 노래도 슬픈 노래입니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 또한 비극적이랍니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지요."
Near Seoul is a hill called the Hill of Ariran. During the oppressive Li Dynasty there was a giant solitary pine at the top of this hill, and this was the official place of execution for several hundred years. Tens of thousands of prisoners were hanged until dead on a gnarled branch of that ancient tree, their bodies suspended over a cliff at the side. Some were bandits. Some were common criminals. Some were dissident scholars. Some were political and family enemies of the emperor. Many were poor farmers who had raised their hands against oppression. Many were rebel youths who had struggled against tyranny and injustice.
"서울 근처에 아리랑 고개라는 고개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압정 동안, 이 언덕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고, 이 소나무?수 백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진 가지에서 목이 매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지요. 그 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습니다.
The story is that one of those young men composed a song during his imprisonment, and as he trudged slowly up the Hill of Ariran, he sang this song. The people learned it, and after that whenever a man was condemned to die he sang this in farewell to his joys or sorrows. Every Korean prison echoes with these haunting notes, and no one dares deny a man's death-right to sing it at the end.
이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 노래가 민중들에게 알려지자, 그 뒤부터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죽기 전 마지막 인사로 이 노래를 불렀고, 조선의 감옥에는 이 노래가 메아리 쳤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마져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The "Song of Ariran" has come to symbolize the tragedy of Korea. Its meaning is symbolic of constantly climbing over obstacles only to find death at the end. It is a song of death and not of life. But death is not defeat. Out of many deaths, victory may be born.
그 래서 아리랑은 이 나라 비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끊임없이 극복하려하나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죠. 그래서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는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수많은 죽음을 딛고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There are those of us who would write another verse for this ancient "Song of Ariran." That last verse is not yet written. We are many dead, and many more have "crossed the Yalu River" into exile. But our return will not be long in the future."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은 아직까지는 씌여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 떠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돌아갈 것입니다. 머지않아 꼭 돌아갈 것입니다."
Song of Arira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re are tweleve hills of Ariran
And now I m clossing the last hill.
many stars in the deep sky
Many crimes in the life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Ariran is he mountain of sorrow
And the path to Ariran has no returning.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Oh, twenty million countrymen. Where are you now?
Alive are only three thounds of mountains and rivers.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Now I am an exile crossing the Yalu River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of three thounsand
li are also lost.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 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 간다.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오는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오.
삼천리 강산만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운명의 선고를 기다리며
나 이제 생사 갈림길에 섰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마지막 고개로 넘어가련다.
아리랑 고개에 간이역 하나 짓고
집행인 기차를 기다려하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련다
동지여 동지여 나의 동지여
그대 열두 구비에 멈추지 마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열세 구비를 넘으련다.
5. 회회(回回)아비의 아리랑
모하메드는 한국인들이 이
노래에 맞추어 어떤 춤을 추는 지를 물어왔다. 나는 술김에 벌떡 일어나 일단 두 손을 옆으로 들어 학의 자세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어지는 전통
춤사위를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부끄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동이족의 특성을 "음주와 가무에
능하다"고 했지만, 오늘날 나를 포함한 젊은 세대는 음주에는 여전히 능할 지언정 우리의 춤과 노래는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나의 조상들이 부르던
노래와 춤사위 대신, 우리는 서쪽 땅끝, 혹은 바다 건너 동쪽에 사는 色目人들의 춤을 추고, 그들의 노래를 부를 뿐.
그래도 나는
두 팔을 덩실덩실 흔들면서 내 조상들이 추었을 법한 춤사위를 재현해 내고자 노력했고, 얼큰히 취해 소파에 비스듬이 누워 물담배를 빨며 내
춤사위를 바라보던 모하메드도 벌떡 일어나 나의 춤사위를 흉내냈다 .
서로의 고향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米利堅 印丹野 開花村의
아파트 거실을 비추는 20촉 보라색 조명 속에서, 아시아 동쪽 끝에서 온 한 東夷족 사내와, 아시아 서쪽 끝에서 온 한 알-하르비족
회회(回回)아비는 이렇게 함께 어설픈 춤사위를 놀리며 혀꼬인 발음으로 아리랑을 흥얼거린다.
그때 창 밖에는 겨울들어 첫 함박눈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고, 그 눈은 28년 인생에서 모하메드가 처음보는 눈이었다.
모하메드는 말했다. 고향의 모래언덕이 보고
싶다고.
6. 나의
아리랑
빙글빙글 돌다 어지러워 벌렁 바닥게 자빠져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넘어갈 고개는 어디쯤 있을까? 그
고개를 넘으면 어디가 나올까? 누군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모하메드는 나에게 '아리랑'의 의미를 물었지만, 이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 뜻은 몰라도
아리랑을 들을 때면 나는 눈물이
난다.
草人
P. S. 3개월의 짧은 치기어린 일탈 후 모함메드는 다시 충실한 무슬림으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