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04 01 옮김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4 ♧
대구는
풍수지리학 적으로 한반도를 호랑이에 비교했을 때 비슬산과 팔공산에 둘러싸여 움푹 들어간 아늑하고 따뜻한 자궁자리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물이 많이
탄생 했었고 (대통령이 무려 다섯 분) 내란, 외환, 우환이 적었으며 6.25 때도 마지노선을 지켰고 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다 국채보상운동 이라든지 각종 학생운동, IMF 때도 금 모으기 운동을 최초로 시작한 곳입니다.
또 미녀도 많은 도시죠.
물론,한민족이 아플 때 마다 어루만져 주다보니옛날부터 약령도시가 발달하였고 최근에는 세계적인 의료도시로서 각광받고 있지요.
이러한 특성은 옛날옛적부터
이 지역이 산과 물이 맑아 사람이 살기 좋은 터 였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대한민국 근대에는 부패한 여당과 맞서는 대단한 진보도시였기에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학생운동이 시작된 곳입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5 ♡
대구 모노레일 3호선을 타다보면 건들바위(대구입암)역이 있습니다.
건들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그 모양이 갓 쓴 노인같다고 해서 삿갓바위라고도 불리었습니다.
200년 전에는 이 바위 앞으로
맑고 깊은 신천이 흘러 많은 시인들이 이곳에서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던 경치 좋은 명소의 하나였으며,
서거정 선생이 노래한 대구 10경 중
입암조어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정조 때 시가지 일대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더이상 이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바위는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렸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많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현재는 바위 앞으로 도로가 설치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주변을 아름답게 꾸며 시민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특히 물이 흐르던 옛 모습을 재현해 두어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배려 하고 있습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6 ♧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선생이 마산 창신학교 교사 시절, 노산 이은상 선생과 교분을 쌓게 되었으며, 박태준 선생이 1911~1916년까지 계성학교에 다녔던 자신의 집(현 섬유회관 인근) 앞을 지나던 한 여고생을 잊지 못했던 짝사랑이 작곡의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동산은 그가 현재의 제일교회 옆
3·1운동 계단을 지나 등교하던 길이었다.
그 여학생은 한 송이 흰 백합 같은 절세의 미인이었지만 박태준 선생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으며, 그녀는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은상 선생이 이 사연을 듣고
‘노랫말을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라’고 박태준 선생에게 권유함으로 탄생한 것이 ‘동무생각’이다.
'동무생각'에 등장하는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쓰고 있는데, 이 ‘청라’가 지금도 푸른 담쟁이로 뒤덮은 동산병원 내 선교사 사택 일대의 언덕을 말한다고 한다.
‘동무생각’이 청년 박태준의 로맨스를 담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그 여고생이 당시의 신명여자학교 (현 신명고) 학생이냐, 대구공립여자보통학교(현 경북여고) 학생이냐 하는 논란도 한동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경북여고 교화가 백합이었고, 경북여고 개교는 1926년인데 비해 신명여고 개교는 1907년으로 ‘동무생각’ 작곡 시기(1922년)보다 빠르기 때문에 신명여자학교가 맞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박태준 선생의 집과
신명여자학교의 등굣길은 일치한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동무생각’ 3절에 나오는 가사
‘서리바람 부는 낙엽동산 속 꽃 진 연당에서…’의 연못은 동산에 물을 대주던 ‘선황당 못’이라는 것도 이번에 밝혀졌다. 이 연못은 1923년 서문시장 확장과 함께 메워졌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7 ♧
#서문시장
조선시대 3대 시장은평양시장, 강경시장, 서문시장입니다.
서문시장은 영남권 최대 전통시장으로서 옛이름인 '대구시장'은 원래 대구 북문 밖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3년 일제에 의해서
지금의 위치로 왔는데요.
본래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에는
'천황당'이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비산동, 내당동에 있던 88개의 고분을 헐어서 그 흙으로 못을 매립하여
지금의 서문시장이 서게 된 것입니다.
이 천황당 못에는 처녀귀신의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옛날, 천왕당못에는 선남선녀들이 즐겨 찾았고 봄 가을이면 근처의 여자들이 모여 놀이를 하곤 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처녀가
이곳의 남자에게 희롱을 당한 뒤
처녀는 비관하여 이 곳 '천황당 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뒤 이 못은 매립되고 서문시장이 들어 섰는데 그때 죽은 처녀귀신이
자신의 한서린 죽음을 기억하기 위하여 서문시장에 자주 불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장의 상인들은 잦은 화재가 처녀귀신의 억울한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혼을 달래주는 굿을 올려 주기도 했습니다.
~~~~~~~~~~~~~~~~~~~~^^~
2021 07 02 옮김
- 남산동(南山洞)
대구부 서상면(西上面)에 속해 있었는데 그 위치가 남산 아래라 하여
남산(南山)이라 하였다.
1914년 남산정(南山町)이 되었고 1946년에 남산동이 되었다.
- 대명동(大明洞)
대명동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과 관계가 깊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2차례나 명나라에서 왔다.
수군을 지휘하던 이 충무공과도 각별하게 지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를 한다.
귀화를 한 두사충을 조선 조정에서 땅을 하사하여(대구시내 경상감영 일대) 살게
해준다.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 대덕산:앞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하고
단을 쌓아올려 매월 초하루가 되면 천자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 반월당(半月堂)
이곳에 건평 61평의 2층 목조건물을 지어서 백화점 영업을 하였는데
그 백화점 이름을 반월당이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
처음 백화점 반월당을 세운 이는 약전골목에서 많은 돈을 모은 차병곤씨 였는데
취급품목은 수예품이 주류를 이루어 여학생이 주 고객이었다고 한다.
반월당의 경영은 차씨의 부인이 주로 하였는데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고
1943년 경영난으로 딴 사람에게 넘겨져 공신백화점으로 바뀌게 된다.
해방 이후 공신백화점도 문을 닫고 구 시대의 흔적을 안은 채 헐리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업종들이 바뀌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덕산동(德山洞)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 반월당(半月堂)이라고 전해오고
있던 것이다.
- 대봉동(大鳳洞)
1918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달성군 수성면의 봉덕동과 대명동의 일부가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두 동의 일부를 합쳐 대명과 봉덕의 머리글자를 따서 대봉정(町)으로 불리다가
대봉동이 되었다.
- 대신동(大新洞)
대신동은 서문시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량들이 즐겨 찾았던 천황당(天皇堂) 못을 메우고, 1920년 그 자리에 큰 장을
옮기게 된다.
못자리로 시장을 옮긴 후 서문시장(西門市場)으로 부르게 되었다.
서문시장은 큰 장으로 평양, 강경 장과 함께 전국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못이 있었던 주변에 새로운 동네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큰 장에서 큰 대(大)를
따고,새로 생긴 동네라 해서 신(新)을 따서 대신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4년에 신정(新町)으로 부르다가 1946년에 다시 대신동이 되었다.
- 동성로(東城路)
일제강점기때인 1906년10월부터 1907년4월까지 대구읍성의 동편을 헐어
도로로 사용한데서 유래하여 동성로라 하였다.
대구부 동상면 지역으로 1914년에 동성정(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에
동성로가 되었다.
- 봉산동(鳳山洞)
봉산이란 제일중학(구, 제일여중)이 자리하고 있는 자라바위가 있는 산을
말하는데 이 이름을 따서 봉산동이라 지었다.
조선 숙종 때부터 이 산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를 발사하였다.
일명 오포산이라고도 한다.
봉산의 다른 이름은 연구산(連龜山), 운구산(運龜山), 자래방우산(자라바위산)
이라 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제일중학 정원에는 돌거북이 있는데 머리는 남쪽인 앞산을 꼬리는 북쪽인
시내를 향하고 있다.
이는 비슬산에서 시작된 지맥이 약해지는 것을 보(補)하는 동시에 화기를 누르는
비보책인 것이다.
- 삼덕동(三德洞)
일제시대에는 삼립정(三笠町)으로 불리다가 천덕(天德), 인덕(人德), 지덕(地德)을
합하여 삼덕동이 되었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지역 통폐합에 따라 남성리, 신동의 일부를
합하여 삼립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에 덕산동의 일부를 합하여 삼덕동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포정동(布政洞)
이곳에 있던 경상감영의 선화당(宣化堂) 정문이 포정문(布政門)이었기 때문에
포정동이라 하였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정(上町)으로
불리다가 1946년 동명 변경에 따라 포정동으로 바뀌었다.
♣ 감사가 있는 곳, 즉 감영(監營)을 포정사(布政司)라고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자갈마당
이곳은 지금부터 대략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버려진 황무지였다.
그러나 6.25 이후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어 대구 북쪽의 관문구실을 하게
되고 교통의 중심지가 되니 자연 이 일대가 넓은 장터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넓은마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땔감과 구들장을 팔러나온 사람들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만 오면 땅이 질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 자갈을 많이 깔아놓게 되었다.
그후 사람들은 넓은마당 대신에 <자갈마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구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또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봉덕동(鳳德洞)
대구부 상수서면(上守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산동(鳳山洞)과 덕산동(德山洞)을 병합하여 봉덕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1918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었으며 일부를 떼어내어
대봉동에 넘겨주었다.
1929년 경에는 대구중학 근처에 대구지역 최초의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고
하며 그후 인근의 경산, 하양 등지로 재배면적을 넓혀갔다고 한다.
- 신천동(新川洞), 신암동(新岩洞)
1778년(정조 3년) 대구 부사 이서가 대구부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에
제방을 쌓아 현재의 신천이 흐르는 위치로 물줄기를 돌려 새로이 하천을 만들었다.
그 하천을 새로 만든 하천이라 하여 신천(新川)이라 하였고, 그 가장자리에 있던
마을을 신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천동 아래에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골이 깊은 계곡이라해서
대곡리(大谷里)로 불리어지며 한골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 마을로 신천이 흐르게 되면서 바위가 많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신암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 수성동
수성동은 옛날 하동(현재 수성1가동)과 배일촌(동구 신천동)사이의 들판으로서 전부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약 40여년 전부터 한집 두집 불어나기 시작하였으며 1948년 대구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동구 신천동에 속하였다가 1980년 4월 1일 동구에서 수성구로 분구될 때 시조례 제1213호(1979. 8. 28 공포)에 의해 당시 동구 신천3,4동의 일부가 수성구로 편입되면서 수성 1,2,3가에 이어 수성4가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성들판 한가운데 위치했으므로 그 당시 수성동은 자연부락이 존재하지 않았다.
- 만촌동(晩村洞)
본래의 이름은 '늦이'라 하였다. '늦이'의 '늦'은 늦다라는 뜻이며 '이'는 원래
인칭대명사이나 고어의 '리(里)'의 음차로 보아야 한다. 이 곳 주민들은 '늦이'를 한자로 지잉(遲芿)(遲=訓借, 芿=音借)으로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만촌(晩村)의 촌(村)은 '리(里)'와 같은 '마을'이란 뜻이다.
이와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예로부터 이곳은 달성하씨, 달성서씨 등이 문호를 차려놓고 강학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하는 반면 선비의 기질에 따라 생업에는 등한시하여 농사철이 되어도 항상 이웃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어져서 부근 주민들이 농사일에 늦은 곳이라는 뜻으로 불려온 것이 마을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 범어동(泛魚洞)
옛날 그 일대 산의 모습이 마치 붕어가 입을 벌리고 산 아래 흐르는 냇물(泛魚川)에
떠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마을의 이름을 뜰 범(泛), 고기 어(魚)를 합하여 범어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역을 설치하여 마을이름을 따서 범어역이라고 하였다.
1914년 범어동이라고 개칭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 범물동(凡勿洞)
옛날에는 이곳 뒷산에서 범이 많이 울었다고 범울이, 범물리 라고 불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전리(泥田里)와 가동(佳洞)을 병합하여
범물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 황금동(黃金洞)
원래 이 마을 주변 들판에는 곡식이 황금빛이고,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황청리
(黃靑里)라고 불렀다.
1914년 인근의 소지천동을 병합하여 황청동(黃靑洞)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는데 황청동을 황천동이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1980년 수성구를 신설하면서 황금동으로 동명을 개칭하게 되었다.
♣ 요사이는 잘 쓰지 않지만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인 황천은 黃泉이라고 쓴다.
- 지산동(池山洞)
이곳 뒷산의 모양이 곡식을 고르는 키처럼 생겼다 해서 이 산을 치산, 이 지역을
치산리 라고 불렀다.
1914년 비슷한 한자음을 붙여서 지산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노원동(魯院洞)
이곳은 원래 원대들로서 노곡(魯谷) 주민들의 농토로 이용되어 왔으나 마을이 형성된 후 원대동(院垈洞)으로 명명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서구에서 북구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노곡과
원대동의 머리글자를 따서 노원동이 되었다.
- 칠성동(七星洞)
칠성동은 칠성바위에서 유래한 듯 보여진다.
칠성바위라고 하는 지석묘는 탱석 또는 고인돌이라 부르는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한반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시민회관 앞에 놓여있는 칠성바위는 이같은 지석묘 중의 하나였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치성을 들이면 아기를 낳는다는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바뀌었다.
- 비산동(飛山洞)
아득한 옛날 달천(達川)에서 한 아낙네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한창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윽한 음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쪽으로부터 커다란 산이 음악소리와 함께 둥둥 떠서 날아오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혼비백산한 아낙네가 산이 날아온다!!! 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 소리에 그만 날아오던 산이 그 자리에 내려앉고 말았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그 산을 날아온 산이라 하여 날뫼(飛山)이라 불렀고
이에 연유하여 비산동이 되었다.
- 내당동(內唐洞)
마을 앞 동남산쪽 산 아래 오래된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당산목(堂山木)이라 하였다.
이 나무를 기준으로 당산나무 안쪽에 위치한 마을은 안땅골, 안당골, 내당곡(內唐谷
이라 불렀고, 반대편의 바깥쪽 마을은 바깥땅골(外唐谷)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내당동은 당산나무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 반고개
조선조 중엽부터 있어왔던 고개로 강창 및 다사지역 주민들이 성내로 들어오기
위한 주요 길목이었고, 조선말기에 물물교환이 성행할 때 호남지방에 거주하는
상인이 대신동 큰시장(현 서문시장)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고개를 넘어 다녔다 하며
반고개에 풀이 무성하여 상인들이 소(牛)의 봇짐을 내려놓고 먹이고 쉬어 다녔다
한다.
당시 이 지역 일대는 고개가 가파르고 높아 바람이 세찼다 하여 『바람고개』 라고
불리어 왔으며 조선말기부터 일제시대까지는 대구로 장보러 들어오는 강창 및
다사 주민들과 호남상인들이 고개를 넘는 도중 떼강도가 빈발하여 고개를 넘을
때는 100명 정도가 모여야 넘었다고 하며, 밤에는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밤에는 넘지 못하는 고개라 하여 『밤고개』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당시 고개 주위에서는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고 산림이 무성하였으며 50년대 이후
고개가 확정되고 70년초 재 확장하여 현재의 면모를 이루고 있다.
- 감삼동(甘三洞)
감삼동의 지명유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1)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 고을 현감이 이 곳을 지나다 감이 탐스럽게 열린 걸
보고 매우 감탄하였다.
인사차 나온 마을의 대표가 감을 대접하면서 마을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현감이 감을 먹었는데 매우 달고 맛이 있어 세 개나 먹었다 해서 감삼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2) 이 지역의 땅 모양을 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낮은 산줄기가 길게 뻗어 마을
한가운데서 끝나는데 바로 이곳의 땅 모양이 세 장군이 태어날 형상이었다.
이 말이 퍼지게 되면 도리어 마을 사람들이 해를 입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이
이야기를 숨기기 위해 그 부군에 샘이 세 곳에서 솟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이야기가 있은지 얼마 안되어 실제로 이 마을에 샘이 세 곳에 생겨서 여름
가뭄에도 샘물이 마르지 않았다 하여 감삼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 본리동(本里洞)
이 일대 농가에 있는 뜸뒤주(쑥대나 싸리, 뜸 따위를 새끼로 엮어 땅위에 둥글게
치고 그 안에 곡식이나 감자 따위 곡물을 채워 쌓은 더미 위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고 해서 작촌(鵲村)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달성군 성서면 본리리가 되었다가 대구에 편입되어
본리동이 되었다.
- 성당동(聖堂洞)
1)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 불렀는데 그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오고 있다.
성당못을 중심으로 한 산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으로 길지로서
인명의 피해가 없는 좋은 땅이란 뜻으로 성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2) 이곳에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곳 성당이 대구지역 독립운동 장소로 발각되어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철거, 폐쇄되었으나, 성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성당동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1910년부터 성당동으로 불렀다고 하니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 죽전동(竹田洞)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아주 가난하게 살았었다.
그래서 근처에 많이 나는 대나무로 갈퀴를 만들어 서문시장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판매하였다.
대나무 갈퀴를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 하여 죽박골, 죽전(竹田)으로 불리게 되었다.
- 장기동(長基洞)
이 지역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는데
1) 예로부터 구씨와 장씨가 터를 가꾸고 이루어 구씨, 장씨의 터라고 구장터라고
하였다.
그후 구씨가 패망하고 장씨가 마을을 이끌어왔다고 하여 장씨터라는 뜻으로
장기(長基)라고 불렀다.
2) 이 지역에 옛 장터가 있던 지역으로서 구장터 또는 장기(場基)라 하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1914년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가 대구시로 편입되었다.
- 두류산(頭流山), 두류공원(頭流公園)
1) 옛날 산이 날아다니던 시절, 평지 일대에 산의 밑동이 내려앉아 비산동이 되었고
산의 머리부분은 계속 날아가 두류공원 일대에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산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진 곳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2) 두류산 일대의 산의 형상이 사람의 머리와 머리를 땋아 내린 모양을 하고 있어서
두류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산이 둥글게 펼쳐 있다고 하여 두리산으로 부르던 것을
1930년에 원산(圓山)이라고 표기하다가 나중에 두류산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여기 내가 살고있는 동네가 없으면 연구 ㅎ~~~^^
~~~~%%%%%~~^~--♡♡♡
♧ 재밌는 대구 이야기 1 ♧ 박주달
대구의 옛 지명은 '달구벌' 입니다.
여기서 '달구'란 '닭'의 경상도 방언으로서
예전 부족국가 시대에는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사상에 의해
옛 대구의 조상들께서는
'닭'을 숭상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신라의 김알지 왕이 닭의 알에서 태어난
탄생 설화처럼.
여기의 닭을 요즘의 식용닭으로
생각해서는 큰 오산입니다.
옛 우리 조상들이 숭상하는
전설 속의 동물 중에
'봉황' 이란 조류가 있습니다.
'봉'은 수컷을 '황'은 암컷을 이릅니다.
꼬리가 오색으로 길다랗게 늘어져 있고
벼슬이 왕관처럼 거만하게 서 있는 모습.
그 모습을 상상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봉황의 나래를 기대합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2 ♡
경주의 옛 지명 서라벌이
어원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서울'로 된 것은 모두 알고 계시지요. (서라벌>셔블>서울)
서울에 가면 서라벌고등학교가 있잖아요.
그런데 서기 689년, 신문왕 9년에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에서
대구로 천도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진골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는데요.
[삼국사기]를 보면
'경주 서쪽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그 곳에 가보니 금궤짝과 흰닭이 울고 있더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금궤짝 안의 알에서
김알지 왕이 탄생했습니다.
정확한 사료는 없으나
그 서쪽이 요즘 대구와 경산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래서 대구의 옛 지명 '달구벌'이나
경산 지방의 옛 소국가인 '압독' '압량'이
모두 닭과 연관된 지명들입니다.
대구의 달성토성과
서라벌 경주의 월성토성이 거의 흡사합니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과
대구 비산동 제37호 고분군에서
발견된 금동관이 出자 모양으로
거의 흡사합니다.
옛날 원시국가를 거쳐 부족국가 시대에는
서라벌 보다도 달구벌이 더 큰
도시였을 것입니다.
그 증거 사료는 제 3편에서...~~~^^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3 ♧
대구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으로 둘러싸여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살기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구석기시대부터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특히,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고인돌)와
고대 부족국가시대의 고분군이 많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옛날부터 존재한
이 지역의 상당히 큰 정치세력들과
생활상을 알려줍니다.
현존하는 전 세계 고인돌 6만 여기 중,
82.5%인 4만 9510기가
한반도에 치중해서 있고(대구는 숫자에서 제외)
대구에도 약 3,000여 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정원석과
근대개발에 의해서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100여 기 정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모두 현존한다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전남 고창과 화순지방 보다도 더욱 유명한
거석문화의 도시, 고인돌의 도시였을 것입니다.
또 구암동, 대명동(교대, 영남이공대), 비산동, 내당동,
두산동, 앞산정상, 불로동 등이
토착지배세력의 고분군 지역이거나
고분이 현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 고분군 역시
일제강점기부터 근대 개발사에서 거의 사라지고
불로동 지역에만 수백기가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일제의 수탈을 피하고
자연 친화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면
대구는
스톤헨지와 로마가 부럽지 않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멋진 역사문화 도시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4 ♧
대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한반도를 호랑이에 비교했을 때
비슬산과 팔공산에 둘러싸여
움푹 들어간 아늑하고 따뜻한
자궁자리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물이 많이 탄생 했었고
(대통령이 무려 다섯 분)
내란, 외환, 우환이 적었으며
6.25 때도 마지노선을 지켰고
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다
국채보상운동이라든지 각종 학생운동,
IMF 때도 금 모으기 운동을
최초로 시작한 곳입니다.
또 미녀도 많은 도시죠.
물론,
한민족이 아플 때 마다 어루만져 주다보니
옛날부터 약령도시가 발달하였고
최근에는 세계적인 의료도시로서
각광받고 있지요.
이러한 특성은 옛날옛적부터
이 지역이 산과 물이 맑아
사람이 살기 좋은 터 였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대한민국 근대에는
부패한 여당과 맞서는
대단한 진보도시였기에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학생운동이 시작된 곳입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5 ♡
대구 모노레일 3호선을 타다보면 건들바위(대구입암)역이 있습니다.
건들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그 모양이 갓 쓴 노인같다고 해서
삿갓바위라고도 불리었습니다.
200년 전에는 이 바위 앞으로
맑고 깊은 신천이 흘러
많은 시인들이 이곳에서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던 경치 좋은 명소의 하나였으며,
서거정 선생이 노래한 대구 10경 중
입암조어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정조 때 시가지 일대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더이상 이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바위는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렸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많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현재는 바위 앞으로 도로가 설치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주변을 아름답게 꾸며 시민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특히 물이 흐르던 옛 모습을 재현해 두어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배려 하고 있습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6 ♧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선생이
마산 창신학교 교사 시절,
노산 이은상 선생과 교분을 쌓게 되었으며,
박태준 선생이 1911~1916년까지
계성학교에 다녔던
자신의 집(현 섬유회관 인근) 앞을 지나던
한 여고생을 잊지 못했던 짝사랑이
작곡의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동산은 그가 현재의 제일교회 옆
3·1운동 계단을 지나 등교하던 길이었다.
그 여학생은 한 송이 흰 백합 같은
절세의 미인이었지만
박태준 선생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으며,
그녀는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은상 선생이 이 사연을 듣고
‘노랫말을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라’고
박태준 선생에게 권유함으로 탄생한 것이 ‘동무생각’이다.
'동무생각'에 등장하는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쓰고 있는데,
이 ‘청라’가 지금도 푸른 담쟁이로 뒤덮은
동산병원 내 선교사 사택 일대의
언덕을 말한다고 한다.
‘동무생각’이 청년 박태준의 로맨스를 담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그 여고생이 당시의 신명여자학교(현 신명고) 학생이냐, 대구공립여자보통학교(현 경북여고) 학생이냐 하는 논란도 한동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경북여고 교화가 백합이었고, 경북여고 개교는 1926년인데 비해 신명여고 개교는 1907년으로 ‘동무생각’ 작곡 시기(1922년)보다 빠르기 때문에 신명여자학교가 맞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박태준 선생의 집과
신명여자학교의 등굣길은 일치한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동무생각’ 3절에 나오는 가사
‘서리바람 부는 낙엽동산 속 꽃 진 연당에서…’의 연못은 동산에 물을 대주던 ‘선황당 못’이라는 것도 이번에 밝혀졌다. 이 연못은 1923년 서문시장 확장과 함께 메워졌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7 ♧
#서문시장
조선시대 3대 시장은
평양시장, 강경시장, 서문시장입니다.
서문시장은 영남권 최대 전통시장으로서
옛이름인 '대구시장'은
원래 대구 북문 밖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3년 일제에 의해서
지금의 위치로 왔는데요.
본래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에는
'천황당'이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비산동, 내당동에 있던
88개의 고분을 헐어서
그 흙으로 못을 매립하여
지금의 서문시장이 서게 된 것입니다.
이 천황당 못에는
처녀귀신의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옛날, 천왕당못에는 선남선녀들이 즐겨 찾았고
봄 가을이면 근처의 여자들이 모여
놀이를 하곤 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처녀가
이곳의 남자에게 희롱을 당한 뒤
처녀는 비관하여 이 곳 '천황당 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뒤 이 못은 매립되고 서문시장이 들어 섰는데
그때 죽은 처녀귀신이
자신의 한서린 죽음을 기억하기 위하여
서문시장에 자주 불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장의 상인들은
잦은 화재가 처녀귀신의
억울한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혼을 달래주는 굿을 올려 주기도 했습니다.
♡ 대구의 재밌는 이야기 8 ♡
#왕건과 관련된 대구의 지명유래1
신라 경애왕 때
당시 신라의 땅이던 팔공산에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 옵니다.
당시 힘이 없던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이에 왕건과 견훤은 팔공산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왕건은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되고
왕건과 외모와 체격이 비슷한
신숭겸 장군의 지략으로
장군이 대신 죽음을 맞이하면서
왕건은 무사히 동쪽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팔공산전투에서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고하여
깨질 파破, 군사 군軍
'파군재'라는 지명이 유래 되었습니다.
당시 '공산'으로 불리던 팔공산도
왕건의 여덟 장수를 잃었다고 하여
'팔공산'으로 유래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파군재 삼거리에는
목 없는 시체로 돌아온 신숭겸 장군의
동상과 가묘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신숭겸 장군의 진짜 묘는
춘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려 태조 왕건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명당 묘자리로 봐둔 춘천 땅에
목 없는 시체로 돌아온
신숭겸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황금으로 두상을 만들어서
이곳 묘자리를 하사하게 됩니다.
지금 춘천 신숭겸 장군의 묘는
황금두상의 도난을 우려해
가짜 봉분 두 개를 포함해서
총 세 개의 봉분을 갖추고 있으며
평산 신씨 후손들이 계속해서
관리해 오고 있습니다.
[출처] 재밌는 대구 이야기|작성자 천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