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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파주 목사(坡州牧使) 풍암(楓菴) 문위세(文緯世)의 묘갈명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통정대부 파주 목사(坡州牧使) 문공(文公)의 묘갈명 전라도 장흥(長興) 출신/ 갈암 유배중 찬 |
공의 휘는 위세(緯世)이고, 자는 숙장(叔章)이며, 성은 문씨(文氏)이고,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시조 다성(多省)이 신라 때에 현달하여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렀고, 고려 때에 휘 공유(公裕)가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냈고, 시호는 경정(敬靖)이다. 휘 극겸(克謙)이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지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대대로 성대한 덕이 이어져서 훌륭한 명성이 끊이지 않았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화(和)가 가선대부(嘉善大夫) 도승지(都承旨)를 지냈으니, 이분이 공의 7대조이다. 증조는 휘가 창(昌)인데, 해미 현령(海美縣令)을 지냈고, 조부는 휘가 현(賢)인데,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를 지냈고, 고는 휘가 량(亮)인데, 성균관 생원이었다. 모는 해남(海南) 윤씨(尹氏)인데, 초은처사(樵隱處士) 휘 효정(孝貞)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조금 자라서는 경전(經傳)을 몹시 좋아하여 그 뜻을 깊이 연구하였고, 아울러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여 그 지취(志趣)를 넓혀서 문장으로 발휘하니, 옛 대가(大家)의 기상이 있었다. 성품이 고고하여 속류(俗流)와 상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교유한 사람은 모두 당세의 명인(名人)과 거유(鉅儒)들이었다. 일찍이 자서(姊壻) 박공 광전(朴公光前)을 따라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을 배알하였다. 몇 년 뒤에 내제(內弟) 윤강중(尹剛中) 형제와 함께 선생께 나아가 배웠는데, 모친이 늙었기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 명종22)에 모친의 명으로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장원하였으나 진사시에는 낙방하였다. 그 뒤에 연이어 낙방하자 마침내 벼슬에 뜻을 버리고 모친을 봉양하고 자제를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 모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상제를 마치고 나서 백형(伯兄), 중형(仲兄)과 한마을에 살면서 왕래하며 매우 화락하게 지냈다. 작은 서재(書齋)를 열어 학생을 받아 독려하고 가르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또 일찍이 가지산(加智山)에 집을 지었는데,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며 물과 돌이 매우 빼어났다. 매화와 대를 심고 벽에 가득 도서를 꽂아 놓고서 완미하며 즐거워하였고, 털끝만큼도 세속의 부귀영화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25)에 일본이 병란을 일으켜 몇 달 안에 삼경(三京)이 함락되고 어가(御駕)가 파천(播遷)하여 온 나라가 무너졌다. 공은 나라의 일을 비통해하며 강개한 마음으로 눈물을 뿌리고서 박공 광전을 찾아가 말하기를, “지금 영남과 호서가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고, 호남만 겨우 보전하고 있으니, 이것이면 뒷날 국가가 부흥할 기반이 될 것입니다. 지금 양 절도(節度)의 군대가 모두 진을 떠나 멀리 갔고, 의병장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의 군대는 불행히 전군이 옥쇄하였으니, 적이 필시 승세를 타서 치성하여 불을 지르고 도륙을 자행하여 못하는 짓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일찍 계책을 세워 군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요해지(要害地)에 나누어 주둔하지 않는다면 일이 모두 때늦어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숨어서 구차히 살려다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적을 토벌하다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박공이 몹시 반가워하며 말하기를, “나도 전부터 이 뜻을 품고 있었지만 함께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그대가 이렇게 말하니 내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고, 그 자리에서 편지를 써서 임공 계영(任公啓英)에게 고하니, 임공이 듣자마자 즉시 달려와 공의 손을 잡고 감탄하기를, “우리가 평소에 공에 대해 깊이 은거하여 세상을 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런 큰 논의를 앞장서서 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고 마침내 함께 계책을 정하였다. 이때 능성 현령(綾城縣令) 김익복(金益福) 역시 본현으로부터 오니, 이에 연명으로 열읍(列邑)에 격문(檄文)을 보냈다. 공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다른 고을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것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도 각자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倡義)해야 한다.” 하고, 마침내 기일을 약속하고 떠나서 주(州)의 경내에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또 강진(康津), 해남(海南), 영암(靈巖) 등지에 자제를 나누어 보내 충의(忠義)로 격려하고 이해(利害)로 일깨워서 용사(勇士) 200여 명을 얻었고, 임공과 박공도 200인을 이끌고 약속한 날에 모였다. 공이 말하기를, “지금 응모한 장사(將士)가 거의 500명에 이르니 통령(統領)과 기강이 없어서는 안 된다. 우두머리를 세우려고 한다면 누가 적임자인가?” 하니, 박공이 말하기를, “임공이 젊은 나이에 등과(登科)하였고, 또 재능과 기운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으니, 이 직임을 맡을 만하다.” 하여 대중들이 마침내 임공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공이 박공과 함께 기무(機務)를 함께 결정하였다. 이에 군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면서 연로에서 군병을 거두어 또 1000여 명을 얻었다. 이때부터 군대의 성세(聲勢)가 점점 날리고 사기가 더욱 올랐다. 어느 날 의병장이 공에게 말하기를, “군대를 일으킬 때에는 군량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 군대에 남아 있는 군량이 없어 병사들이 주린 기색이 있으니, 만약 미리 마련하지 않는다면 중도에 흩어질 염려가 있다. 공이 주선해서 마련하여 부족하지 않게 한다면 그 공이 적장을 베고 적기를 빼앗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니, 공이 개연히 수락하고 그날로 길을 나서서 수재(守宰)나 부유한 백성을 만나 지성으로 알아듣도록 타일렀는데, 말하는 뜻이 강개하여 듣는 자들이 감읍(感泣)하고 날짜를 약속하여 운반해서 계속 잇대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모집에 응하여 의병이 된 자들이 모두들 배불리 먹고 건장해서 장수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여러 도의 의병과 합세(合勢)해서 금산(錦山)과 무주(茂朱)의 적을 격파하여 개령(開寧)에서 먼 길을 쳐들어온 적의 예봉(銳鋒)을 막고 성산(星山)에서 웅거하는 형세를 퇴각시켰다. 이해 겨울에 임공이 종사관(從事官) 정사제(鄭思悌)로 하여금 상소하여 창의(倡義)해서 적을 토벌한 공을 진달하게 하면서 공의 이름을 으뜸으로 들었다. 계사년(1593) 여름에 본도의 순찰사(巡察使) 권공 율(權公慄)이 의병의 공장(功狀)을 올리면서 또한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이해에 적이 물러나 울산(蔚山)에 웅거하고 거가(車駕)가 환도(還都)하여 여러 도의 의병을 해산하라고 명하니, 이에 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을미년(1595)에 조신(朝紳)이 공을 재능과 학식이 있다고 천거하니 상이 특명으로 품계를 올려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제수하였다. 공이 연로하고 병이 많아 벼슬하고 싶지 않았으나 나라의 근심이 한창 심하기 때문에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용담현은 적이 지나는 요충지인 데다 토지는 황폐하고 백성은 흩어져 공사 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공이 청렴하게 봉직(奉職)하여 공평하고 관대하게 하니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고 공경하였고, 사는 곳을 편안히 여기고 생업을 즐거워하며 부지런히 일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다시 기승을 부려 남쪽 지방이 크게 소란스러워지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대부분 가솔을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적을 피하였는데, 공은 홀로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군법에 따라 편성해서 요충지를 지킴으로써 적이 난입하는 형세를 막고 또 자제를 시켜 고을 안의 결사대 수십 명을 이끌고 요격(邀擊)하고 길을 끊어서 적을 참획(斬獲)한 수효가 매우 많았으니, 온 경내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그 고을을 지나면서 감탄하기를, “호서와 영남이 적의 병화를 당하여 무너지고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 고을만은 예전처럼 안도하고 있으니, 태수의 어짊이 아니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무술년(1598) 가을에 왜적이 비로소 철수하여 돌아가니, 이에 공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고을 백성들이 울면서 머물러 주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다시는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책 보는 것을 좋아하여 심한 병이 걸린 때가 아니면 하루도 책을 놓지 않았다. 경자년(1600, 선조33) 봄에 선조대왕이 공이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공로가 있음을 생각해서 특진시켜 파주 목사에 제수하였으나 공이 이미 병이 들어 숙배하지 못하고, 3월 모일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67세였다. 그해 모월 모일에 장흥부(長興府) 늑룡동(勒龍洞) 건향(乾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이씨(李氏)는 참봉(參奉) 경춘(景春)의 따님인데,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름이 원개(元凱)인데 주부(主簿)를 지냈고, 다음은 영개(英凱)인데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출계하여 중부(仲父)의 후사가 되었다. 다음은 형개(亨凱)인데 음관(蔭官)으로 직장(直長)을 지냈고, 다음은 홍개(弘凱)인데 역시 음관을 지냈고, 막내는 여개(汝凱)이다. 딸은 사인(士人) 백민수(白民秀)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아홉인데, 이름이 주욱(周郁), 재욱(再郁), 취휘(就暉), 취욱(就郁), 사욱(斯郁), 현감 익준(益晙), 치욱(致郁), 치목(致睦), 만욱(晩郁)이다. 손녀가 셋인데, 사인 유기한(柳起漢), 이방형(李邦衡), 정공망(鄭公望)의 아내가 되었다. 증손은 남녀 37명이고, 현손은 남녀 50명이고, 내손은 남녀 34명이다.
공은 충의(忠義)의 성품을 하늘에서 타고났고, 여기에 학문의 힘을 더하여 처음에는 산림에서 고고히 지내면서 당세(當世)에 뜻이 없는 것 같았으나 왕실이 난에 처하자 비로소 나와서 일신을 돌보지 않은 채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일을 겪으면서 의병을 일으키고 군대의 모략을 도와 마침내 호남을 보전하여 국가가 부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 공로와 근면함을 헤아려 본다면 누구와 우열을 가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변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공의 현손 천두(天斗)가 지평(持平) 나만성(羅晩成)이 쓴 행장을 가지고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와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고왕부의 덕행과 업적이 이와 같이 혁혁한데도 자손이 궁벽한 시골에서 살고 있는 까닭에 비문을 부탁할 곳이 없어 지금까지 비문을 받아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감히 집사께 부탁합니다.” 하였다. 내가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청이 더욱 간곡하기에 그 행장에 의거하여 사적을 뽑아서 서(序)를 쓰고, 다음과 같이 명을 잇는다.
공이 처음에는 뜻을 숭상하여 / 公始尙志
속세를 떠나 은둔하여 고고하게 지냈네 / 遯世高蹈
천리 길 도산을 찾아 / 千里陶山
스승에게 도를 배웠네 / 從師講道
배운 것이 무엇이던가 / 所講伊何
천성과 이륜일세 / 天性彝倫
임천에 은거하여 / 卷懷林泉
이 청수하고 참된 맛을 즐기다가 / 樂此淸眞
망극한 때를 만나 / 遭時罔極
눈물을 흘리며 나라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네 / 感泣思效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 投袂而起
이에 뜻을 펼치니 / 時哉展布
생선과 곰 발바닥 / 若魚熊掌
어느 것이 더 중한가 / 孰爲重輕
능히 취사를 판단하여 / 能判取舍
의심 없이 행하였네 / 不疑其行
위로 설득하고 아래로 가르쳐 / 上說下敎
부지런히 하고 애썼네 / 惟勤惟劇
요충을 장악하니 / 控扼要衝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네 / 賊不敢咋
군량 수송 끊이지 않으니 / 轉輸不絶
군대에는 군량이 남아돌았네 / 軍有餘資
오직 이 호남이 / 惟玆湖服
국가를 중흥할 기반이라 / 克復之基
오는 적을 차단하니 / 蔽遮沮遏
자취가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같네 / 擬跡張許
누가 그 가려진 덕업을 천명하여 / 孰闡其幽
칭송하고 드러내리 / 以譔以著
늑룡산 언덕에 / 勒龍之原
우뚝 솟은 묘가 있으니 / 宰如其阡
내 그 비석에 명을 새겨 / 我銘其石
천만년토록 전하리라 / 於千萬年
通政大夫坡州牧使文公墓碣銘 |
公諱緯世。字叔章。姓文氏。南平人。其上祖多省。顯新羅世。官至宰相。高麗時。有諱公裕。集賢殿太學士。諡敬靖。有諱克謙。同平章事。諡忠肅。奕世重光。華問不絶。入本朝。有諱和。嘉善大夫都承旨。於公間七世。
曾祖諱昌。海美縣令。祖諱賢。司贍奉事。考諱亮。成均生員。母海南尹氏。樵隱處士諱孝貞之女。公幼聰明警悟。容止異凡兒。少長。酷好經傳。潛究其義。兼通百家書。以博其趣。發爲文辭。有古作者氣。性簡亢。不喜與俗流相從。所與交皆當世名人碩士。嘗從姊壻朴公光前。謁退溪李先生于陶山。後數年。又與內弟尹剛中兄弟。同就學焉。以母老。未得卒業而歸。隆慶丁卯。以尊人之命。赴鄕試居魁。擧進士不第。後連不得志於有司。遂絶意進取。惟以養親訓子弟爲務。某年。丁母憂。服闋。與伯仲兩兄鼎足而居。杖屨往來。怡愉
湛翕。闢小齋以接來學者。勸飭指諭。孜孜不倦。又嘗結廬于加智山。洞壑幽邃。水石殊勝。蒔梅種竹。滿壁圖書。玩而樂之。不以一毫世累經心。萬曆壬辰。日本兵作。數月之內。三京失守。乘輿播遷。八路橫潰。公痛念國事。慷慨揮淚。往見朴公光前曰。方今嶺南湖西盡爲賊藪。惟湖南僅能自保。此足爲國家異日興復之資。而今兩節度之兵。皆離陣遠去。義兵將趙憲,高敬命之師。不幸全軍陷沒。賊必乘勢鴟張。屠燒賊殺。將無所不至。若不早爲之計。募兵積糧。分屯要害。則事皆後時。無可爲者。且與其竄伏偸生而終不免。
無寧討賊而死於國事乎。朴公大喜曰。吾固有此意。獨恨無可與計事者。今君言至此。吾事濟矣。卽於坐爲書告任公啓英。任公聞卽馳至。握公手歎曰。吾平日謂公遯世深藏。果於忘世者。不意今日首發此大論也。遂與之定計。會綾城縣令金益福亦從縣往。於是聯名傳檄于列邑。公曰。今日之事。不可徒恃他鄕募義之徒。吾輩亦宜各自召募。以爲之倡。遂約日而去。曉諭州境。又分遣子弟。往康津,海南,靈巖等處。激以忠義。諭以利害。得勇士二百餘人。任,朴二公亦以二百人來會如約。公曰。今將士應募者。幾至半千。不
可無統領綱紀。若欲立長。誰可適用者。朴公曰。任公少年登第。且其才氣過人。可以當此任。衆遂推爲義兵將。公與朴公參決機務。於是引兵而東。沿路收兵。又得千餘人。自是軍聲漸振。士氣益張。一日義將謂公曰。軍興之際。足食爲先。今軍無見糧。士有飢色。若不預爲調度。恐有中道潰散之虞。公能料理策應。不至闕乏。其功可與斬將搴旗者等耳。公慨然領諾。卽日啓行。凡遇守宰若富民。至誠曉諭。辭情慷慨。聞者爲之感泣。約日搬運。絡繹不絶。凡招募爲兵者。莫不飽健思用命。卒能合勢諸道義兵。摧破錦山,茂朱之
賊。捍禦開寧遠鬪之鋒。退却星山盤據之勢。是年冬。任公使從事官鄭思悌疏陳倡義討賊之功。首擧公名。癸巳夏。本道巡察使權公慄上義兵功狀。亦以公爲首。是歲。賊退據蔚山。車駕還都。命罷諸道義兵。公於是歸臥故山。放閒自適。乙未。朝紳薦公才學。上特命進階。拜龍潭縣令。公年老多病。不樂從仕。以國憂方殷。義不可辭。遂黽勉赴任。縣當賊路要衝。土荒民流。公私赤立。公洗手奉職。公廉平恕。民愛戴如父母。安居樂業。趨事赴功。丁酉。賊復肆蠆毒。南土震擾。諸邑守宰。率多挈家累。入深山以避賊。公獨招收
散民。勒以軍法。據守要害。以防賊攔入之勢。又使子弟率邑中敢死者數十人。邀擊遮截。頗有斬獲。一境賴以全安。天兵嘗過其境。歎曰。湖嶺之間。遭罹兵火。糜爛蕩析。獨此邑按堵如故。非太守之賢。何以及此。戊戌秋。賊始撤還。公於是投紱而歸。邑民號泣請留而不可得。爲立石頌其德。公自是不復留意世事。惟喜觀書籍。非甚病。未嘗一日去手。庚子春。宣祖大王念公忠勤有勞績。超授坡州牧使。公已病。不得拜命。以三月某日。疾終于家。春秋六十七。以其年某月某日。葬于長興府勒龍洞乾向之原。夫人李氏。
參奉景春之女。有子男五人女一人。男長元凱主簿。次英凱武科宣傳官。出爲仲父後。次亨凱蔭官直長。次弘凱亦蔭官。季汝凱。女適士人白民秀。孫男九人。曰周郁,曰再郁,曰就暉,曰就郁,曰斯郁,曰益晙縣監,曰致郁,曰致睦,曰晩郁。女三人爲士人柳起漢,李邦衡,鄭公望妻。曾孫男女三十七人。玄孫男女五十人。來孫男女三十四人。公忠義之性。得之於天。繼之以學問之力。始若高蹈山林。無意於當世。及王室在難。乃始出捐軀命。冒危難涉險阻。倡起義兵。協贊軍謀。卒能保障湖南。爲國家興復之基。校績度勤。孰與優
劣。必有能辨之者。迺者公之玄孫天斗以羅持平晩成之狀。不遠千里來。授余曰。高王父德行業治。章章如是。而子孫沈淪遐陬。未有所屬筆。至于今墓碑不刻無文。敢以累執事。玄逸謝非其人。其請愈懇。乃據其狀最其跡。序而銘之曰。
公始尙志。遯世高蹈。千里陶山。從師講道。所講伊何。天性彝倫。卷懷林泉。樂此淸眞。遭時罔極。感泣思效。投袂而起。時哉展布。若魚熊掌。孰爲重輕。能判取舍。不疑其行。上說下敎。惟勤惟劇。控扼要衝。賊不敢咋。轉輸不絶。軍有餘資。惟茲湖服。克復之基。蔽遮沮遏。
擬跡張許。孰闡其幽。以譔以著。勒龍之原。宰如其阡。我銘其石。於千萬年。
[주D-001]생선과 …… 중한가 : 맹자가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생선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지만 둘을 다 얻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곰 발바닥 요리를 취하겠다. 사는 것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둘을 함께 얻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사는 것을 버리고 의를 택하겠다.”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孟子 告子上》 여기에서는 임천에 은거하여 자신의 뜻을 즐기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떨치고 일어남을 비유하였다.
[주D-002]자취가 …… 같네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데, 장순(張巡), 요은(姚誾), 남제운(南霽雲), 허원(許遠) 등이 수양(睢陽)을 굳게 지켜 2년 동안이나 버텼으나 성이 고립되고 식량이 떨어져 함락되고 말았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下》 여기에서는 문위세(文緯世)가 호남의 길목을 막아 왜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한 일을 가리킨다.
통정대부 파주 목사(坡州牧使) 문공(文公)의 묘갈명 전라도 장흥(長興) 출신/ 갈암 유배중 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