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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2024수필미학 봄 세미나 발제문
민 혜
1.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물음을 놓고, 몇몇 작가들의 견해와 제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참고로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발표 제목을 잡고 보니 이게 너무 기본적이고 흔한 물음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에게 그 답을 말 할 수 있어야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한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겠다 싶어 새삼스런 화두를 던져보게 됐습니다. 왜 글을 쓰는가, 하고 되물음으로서 현재 자신이 쓰는 글과 작가적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겁니다. 상투적인 질문 같으나 그 질문은 저 자신을 비롯한 우리 작가님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물음이 아니겠는지요. 물론 그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을 수도 있고 몇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기도 할 것입니다.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생계 때문에 글을 쓰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 동기들은 작가마다 차이가 있고 한 작가의 경우에도 시기별로나 시대 분위기별로나 그 정도가 다를 것이지만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순전한 이기심. 즉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뒤에도 기억되고 싶은 욕망.
둘째, 심미적 열정. 외부세계의 아름다움이나 언어자체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은 욕망.
셋째,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에 보존해두려는 욕망.
넷째, 정치적 목적.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밀고 나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망.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광범위한 의미로 쓰였고,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다'라면서 오웰은 정치적 목적의 글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롤랑 바르트는 쓰기 행위를 사랑받고 인정받고 잊지 않으려는 욕망이자 이상 자아를 향한 행위로 보았습니다. 쓰기 행위는 타인들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는데, 이는 타인을 유혹하는 글쓰기나 가치를 내보이는 글쓰기로 귀결되며 인간에게 욕망이 당연한 것처럼 읽음에서 쾌락을 느낀 이가 이런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지요.
제 생각엔 다수의 수필가들이 오웰이 열거한 이 네 가지 중 첫째와 둘째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지만 동기야 어떠하든 결국은 작가들의 자기표현욕구로 수렴될 것 같습니다. 이밖에도 글이란 때론 인간이 처한 고통을 분출하기 위하여 쓸 것입니다.
이오덕 선생은 글을 짓지 말고 삶 속에서 글을 낳게 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쓰는 글도 짓는 글과 낳는 글로 나뉘는 것 같고 절실한 글들은 짓는 것이 아니고 절로 낳아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2.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은 저로서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도 같았습니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무조건적인 본능에 의해서 삶을 유지해나가듯, 말하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능이며 인간의 실존 조건입니다. 우리 몸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언어활동은 우리의 생활을 이어가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호흡입니다.
한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를 조합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즉 언어를 위해 이야기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언어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실존 조건이므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음성 언어란 말을 함과 동시 휘발하듯 사라져버리니까 이것을 유지시키기 위한 문자가 나오게 되었고 우리는 그 문자 덕으로 현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1992년도에 등단해서 지금까지 글을 써오는 동안 숱하게 ‘너는 왜 글을 쓰느냐?’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야기 하는 인간'의 본능적 문제를 넘어선 것으로서, 안락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던 등단 무렵의 저에게 던지는 절실하고도 현실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등단 전의 저는 잡지에 글이 실리면 적은 금액이라도 당연히 원고료가 지불되는 줄만 알고 용돈 벌이는 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아무튼 30 여년 넘게 수필동네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한 출판사의 요청으로 작년에 출간했던 <글쓰기, 당신의 초능력 잠금 해제>라는 제 책의 첫머리에서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책은 팔리지 않는다는데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증가하고 있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물질 만능의 세상에서 돈푼도 되지 않는 글쓰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현상을 놓고 이따금 의문을 품곤 했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지만 대체 우리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나 내 경우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존재의 허망함을 보상받고자 쓰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편으론 삶이 고단하고 힘들수록 인간에겐 문학이라는 퀘렌시아가 필요하다는 방증인 것 같기도 했다. 사회가 황폐하고 척박할수록 문학이란 글쓰기로 숨어들어 거친 숨을 고르며 미래를 살아갈 힘과 지혜를 도출하기 위해 쓰는 거라면, 글이란 우리가 쓰는 게 아니라 내재되어 있던 각자의 언어들이 우리를 빌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제가 ‘글이란 각자의 언어들이 우리를 빌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라는 말을 했던 게 저의 친정어머니 경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1962년 1월1일부터 시작해서 53년간 일기를 쓰셨는데 그건 어머니가 여유가 있고 마음이 편안해서 쓴 글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의 아버지는 명동에서 전화상회를 하면서 두 집 살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 큰 빚을 지고 첩과 함께 행방을 감추셨습니다. 때문에 저희 집에는 늘 빚쟁이들이 들끓었고, 하다못해 쌀자루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때로는 하루하루 밥 먹기도 힘든 지경이었지요. 남편은 증발돼 버리고 자식들은 어리고 서른 중반의 젊은 엄마는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고 하니까 바작바작 타들어가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그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을 일기에 대고 토해냈던 겁니다. 첫날의 일기를 이렇게 쓰셨습니다.
1962년 1월 1일
1962년의 새해는 밝아왔다. 남편이 집 나간지도 어언 석 달. 슬픔과 근심을 해결하지 못하는 아침. 막둥이로 태어난 열이는 아침 밥상을 보더니 “엄마, 오늘은 떡국 먹는 날인데…” 하며 떡국 달라고 졸랐다. 나는 슬픔과 근심을 가슴에 서려두고 웃는 낯으로 애들을 마음으로라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는데 나에게 돈 주고 사달라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열이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영진이네 개가 떡국 먹는 것을 보고 부러운 듯 달려와 “엄마, 영진이네 개는 떡국을 많이 먹어”하는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큰 애들 보고 열이만 떡국을 한 그릇 사주자고 말하고 데리고 나가서 사먹이었다.
자비하신 성모님 진정으로 원하오니 고통을 거두어주소서 아멘.
(원문에서 철자 틀린 것만 손봤음)
가톨릭 신자인 저의 어머니는 일기에다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당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과 성모님에게 애절하게 하소연도 하고 때론 사납게 대들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고통을 주느냐, 그런다고 내가 당신을 저버릴 줄 아느냐, 천만에, 당신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두고 보자…. 뭐 이런 식입니다.
앞서 말했듯 어머니는 이런 경위로 글을 쓰게 되셨지만, 제 경우엔 등단 전에 들이닥쳤던 가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곡진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 것이 작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1988년도에 제 남편이 처음 승용차를 구입하여 시운전을 나갔다가 그만 대형 사고가 났습니다. 우리 차는 그날로 폐차 되었고 남편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구속 되었으며 2대 독자 아들을 잃은 피해자 가족은 1억을 주어야 합의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일억이란 돈을 서민인 제가 그 당시에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생활비는 바닥나고 변호사 비용도 지불해야하고 하루하루가 불길 속에 사는 지옥 같은 삶이었지요.
우선은 합의를 해야만 남편이 풀려날 수 있다는데 ‘멘붕’이 된 피해자 부모는 제 전화를 받질 않고 친척을 통해 합의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기에 대화를 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박한 심정으로 피해자 부모와 변호사에게 각각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내용은 고인에 대한 저의 참담한 마음과 애도를 담아 저희 형편으론 도저히 일억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헤아려주길 바라는 심정을 절절하게 적어내린 거였지요.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깎아달라고 전화하는 것도 입이 떨어지질 않아 편지 글로 보냈습니다.
며칠 후 놀랍게도 제 편지를 읽은 피해자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아버지는 몇 마디하고는 저에게 어쩌면 그렇게 편지를 잘 썼느냐 하더군요. 그리곤 억만금을 줘도 합의하지 않으려 했지만 합의를 해줄 테니 명목상으로 백만 원만 보내라는 거였습니다. 이어서 변호사에게도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변호비용이 200만원이었는데 변호사는 100만원만 받겠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억 200만원이 나갈 것이 200만원으로 해결되어 저는 일억을 번 셈이 되었지요. 그래서 글쓰기 책 프로필에 나는 글쓰기로 일억을 벌어 본 사람이다. 라는 내용을 한 줄 넣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지하 공간에 숨어 살며 자기 삶의 기록을 남겼던 안네 프랑크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에게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속마음의 비밀들을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발 내 마음의 지주가 되어주세요.”
저의 어머니나 저의 경우도 그랬지만 안네 프랑크도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적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안네 프랑크는 일기장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고 적었는데 홀로코스트 문학을 일생의 테마로 연구했던 일본의 작가 ‘오가와 요오꼬’는 안네의 일기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난관이나 괴로움도 언어의 형태로 배출하면 머리 위를 짓누르던 부담이 발밑으로 이동하여 자신의 토대로 변한다. 슬픔과 괴로움은 결코 없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놓는 위치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언어란 고독한 개체인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과 타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줍니다. 고독을 해소하고 연대감을 가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문학이란 그런 언어를 최상으로 세련되고 의미 있게 구사하는 수단이 되겠지요.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조지 오웰도 말했듯 개인마다 결이 다를 겁니다. 그렇더라도 이들의 심저에 공통적으로 깃들어 있는 것은 개인적 욕구와 더불어 자기 삶의 의미 찾기요, 홀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누군가와 닿기를 희망하며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원하는 것에서 비롯된 말 걸기라는 공통분모는 있다고 봅니다.
3.
문학 장르 중에서 우리는 수필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2부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이라는 주제로 자유 발표를 한다니까 잠깐 수필에 대한 것을 정리해보며 1부 발표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지난 1월 에세이스트 서울지회 회원들은 신재기 교수님의 <수필학 강의> 책을 가지고 6주간 공부를 했습니다. 첫 수업을 제가 맡아 1, 2강을 하였는데 우선 수필에 대한 정의와 수필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동안 수필이 서자의 문학이니 잡문이니 하는 말도 들어왔으나 저는 ‘수필은 문학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했습니다.
제 강의가 있기 전 에세이스트 서울지회 초청으로 진행된 특강에서 신재기 교수님은 수필은 문학과 비문학에 걸쳐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발표되는 수필 중엔 문학적인 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글도 있습니다만 그날 저는 ‘수필은 문학이다’라고 밀어붙였습니다. 이 말은 모든 수필에 문학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 속엔 제 염원에 대한 선언이 담겨 있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문학의 범주가 과거의 시, 소설, 희곡 등의 협의에서 이제는 언어로 하는 모든 창작 행위를 문학 범주에 넣는 추세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란 세계를 읽고 글로써 자기화하는 행위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언어로 하는 모든 창조적 활동이라는 것이지요. 문학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라고 되어 있는데 언어 예술이면 모두 문학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창작이란 예술 작품을 독창적으로 짓거나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만듦을 의미합니다. 한데 인간은 모두가 독자적인 존재이기에 같은 사건이나 사물을 보아도 기술방법이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만 해도 똑같이 예수라는 동일 인물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술했음에도 복음서마다 차이를 보이지요. 본질을 그르치거나 왜곡한 건 아니지만 이는 저자가 다르기에 저자 나름의 신학적 관점과 창작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오 복음은 유대인을 상대로 썼기 때문에 첫머리에 이스라엘 선조들의 족보부터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면서 예수와 이스라엘 역사 간의 연관 짓기를 서술합니다. 반면 안티오키아에 살았던 그리스인 의사 루카가 썼다는 루카(누가)복음의 서두는 존경하는 데오 필로에게 보낸다는 서간체로 시작하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들어나 있고 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비와 기적을 많이 수록하였습니다.
노벨문학상의 경우, 기자 출신의 작가로 전쟁과 현대사의 비극이 빚은 비인간성을 논픽션(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으로 고발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가 2015년도에 수상을 했고 2016년엔 대중가수인 밥 딜런이 받았는데, 밥 딜런의 저서로는 드로잉과 회화를 담은 그림책 외 2010년에 출간된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밥딜런은 음악가이고 음악은 청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입니다만 밥 딜런의 음악 가사에 새로운 시적 표현이 보였고 그가 인권이나 환경, 인도주의 등으로 문학계에 공헌을 끼친 것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은 문학상이긴 하지만 가수나 철학자 등에게도 수여할 수 있다고 하며 그보다 더 이전 시대를 살다 간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도 괴테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작가가 ‘문학이다 과학이다 심리학이다 이름을 붙여 장르를 가르는 잣대는 인식의 작위적 방편일 뿐 우리의 정신은 칸막이 없는 우주를 닮아 있을 것이다.’ 라는 글을 썼는데 저는 수필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칸막이를 치는 작업 역시도 인식의 작위적 방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예전에 성악 하는 사람은 예술가로 대접하고 대중가요 부르는 사람은 ‘딴따라’라고 경시하던 것과 닮았다고나 할까요. 하기에 거두절미하고 수필은 문학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언어라는 수단을 가지고 저마다의 시선으로 창작을 하는 작가들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광의의 문학은 ‘문학’이라 하고 협의의 문학은 ‘문예’라고 하며, 문학은 돌보지 않고 문예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잘못이라는 반론을 폈다고 합니다.
작가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며 글쓰기는 애쓰기입니다. 어제보다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필력의 폐활량을 늘리는 과정이지요.
4.
우리나라 문협에 가입한 수필가는 3,743명(작년 통계)이고 미등록 인원까지 합하면 이보다 훨씬 많으며 앞으로도 수필가는 계속 양산될 것입니다. 수필전문지도 30여종이 넘는다는데 일반 독자들은 우리가 쓴 수필을 거의 읽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독서인구가 줄었다고는 하나 수필이 일반 독자층을 견인하지 못하는 건 우리의 수필이 대부분 기존의 프레임에 갇혀 교복을 입은 듯한 글쓰기를 해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문예 수필에 대한 수필작가들의 편향성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등단 초기에 문우 몇 명과 공저 수필집을 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 두 명의 일반 독자로부터, 수필에서 보이는 겉멋(?)과 개인사적 고백에서 오는 지루함에 대한 평을 들으며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우리의 글이 너무 자기 내면으로만 쏠렸거나 수필의 제재를 의미화 과정에서 미학적이란 명분으로 화장발 짙은 글을 써왔던 건 아니었나 하는 점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지금껏 써온 수필에서 벗어나 글 자체가 지닌 힘이 있어야 하며 문체보다 관점이나 내용으로 독자와 보편적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글을 지향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져보기도 했지만 수필동네에서 굳어진 체형을 바꾸는 건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하여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에서 이제 ‘수필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려보고도 싶습니다.
잡다한 생각이 가지를 치며 복잡해지지만 저는 이제까지 들었던 이유들 말고도 아직은 제가 문학에 대해 원하는 만큼 닿지 못했다는 그 미진함과 아득함에서 오는 허기 때문에 다시 도전하며 글을 쓰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문학이 죽어간다고들 합니다만 일본의 니체라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는 다르게 진단했습니다. 그는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과 곧이어 들이닥친 거대한 쓰나미 이후 문학의 무력함을 말하는 담론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학, 언어, 예술이 있고 그 바깥에 삶이 있다는 이분법을 그만두자고. 그 무엇도 애초에 힘이 있지 않았으며 그 무력함이야말로 현실이라고.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문학이나 사상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과학이나 지식도 애초엔 모든 것이 무력했다고. 책을 쓴다고 쓰나미로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문학은 무력하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며 죽은 지 300년이 다 되어가는 괴테의 입에서도 “문학은 끝났다”는 말이 나왔었지만 그러나 문학은 끝나지 않았다, 면서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한편 롤랑 바르트는 인간에게 욕망이 당연한 것처럼, 읽음에서 쾌락을 느낀 이가 글쓰기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하면서 계속 독자로 남아 있으며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애무만을 계속 받는 사람이며, 능동적인 쾌락을 위해 절정을 느끼기를 시도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글들을 읽을 때면 엑스터시가 느껴집니다. 이게 글의 위력이겠고 그래서 저는 글을 읽고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이 질문은 글을 쓰는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며 대답해야할 물음일 것입니다./ - 민 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