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텐트/정영숙 모던 명수필] 푸른 텐트푸른텐트
정영숙
가을비다. 흩날려 쌓인 낙엽이 젖는다. 마땅히 갈 곳 없는 주말은 흐린 날이 한결 좋다. 나지막한 창 밖의 풍경이 일상의 거품을 잠재우고, 여러 날 무엇엔가 씌어 살다가 비로소 땅 위에 정착한 것 같은 날이 비 오는 날이다. 아이들조차 방에서 기척이 없으니 집안이 절간 같다.
뒤꼍 창고에서 한참을 부스럭대던 남편이 잡다한 기물들을 한 아름 가져다 거실에 늘어놓는다 에어매트에 바람을 채워보고 녹슨 버너며 텐트 막대 따위에 마른걸레질을 한다. 묵은 세간에 거풍 겸 잔손질을 해둘 모양이다. 그가 무슨 생각에서 어떤 일을 하려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래 익숙한 행동반경의 한계랄까, 가령 비가 오는 이런날, 양푼에다 밀반죽을 시작하면 아내가 멸치국물에 칼국수를 말아 주겠거니 여길 뿐 애써 묻지 않는다. 익히 식성을 알고 , 궃은날 생각나는 음식에 대한 일치된 습성들이 은연중 말의 무용 상태로 발전한다. 그러나 굳이 발전이랄 수는 없는게 있다. 이 같은 우리를 보고 자주 방문하던 친구가 어느날 “ 니들 부부 싸웠니 ? “ 그랬다. 한데 아무리 오래도록 지켜봐도 늘상 그타령임을 알자 이즈음엔 ,” 너네 부부 적막해서 어떻게 사냐 ? “ 며 다시 걱정이다. 싸운 게 결코 아니었다 해명은 수월했는데 무슨 말로 “ 적막하지 않다는 “ 는 규명 하기란 어렵다. 남에게 그리 비쳐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왜 불편하거나 적막하지 않은지 나는 모른다.
치댄 밀반죽을 밀폐용기에 담아놓고 며칠째 읽던 [ 국화의 칼 ](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 ) 의 나머지를 읽는다. 역자가 소개한 저자의 촌평 한 구절이 이 별난 제목의 책을 붙들게 한다. 부제는 “ 일본문화의 틀 “ 이다. 한데 정작 작가 본인은 일본 땅을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 부분적 체험이나 답사는 전체를 이해하는 방법을 오히려 흐려놓기 십상이다 “ 라고 말한다. 국외자인 한 여인이 가본 적도 없는 한 나라, 한 종족의 속성을 어찌 이렇게도 확실하고 신랄한 필치로 그려낼 수 있는지 , 인간 지성이 어떤 묘기를 즐기는 기분으로 활자 속에 빠져든다.
두어 시간 누워 책을 읽다 거실로 나갔다. 비는 줄곧 내리고 집안도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 사이 누워 빈둥거린 잠깐 사이 , 거실에는 해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1인용 하늘색 텐트가 거실 한켠에 세워져 있는데,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다가가 텐트 속을 들여다보고선 맙소사 ! 그 안에 남편이 태평스레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모를 일이었다 . 기분이 참으로 복잡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믿었던건 착각이었을까, “ 부분적 인지는 전체의 이해를 흐린다 “ 는 변은 정설일지 모르지만 , 도무지 상상도 못 했던 뜻밖의 장소에서 남편의 잠든 모습은 측은해 보였다. 심심했던 아이가 집 짓던 흙모래 위에서 혼자 잠든 것 같은 이 행위의 어간에서 나는처음으로 늙어가는 남자의 구체적인 외로움을 본 것 같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사뭇 조심스러운데 별안간 건넌방의 문이 열리며 큰아이가 나온다. 녀석은 나오자마자 제 아버질 발견하고선 버럭 화를 낸다. 처음 있는 일이라 놀랍기는 했을 터다 그렇더라도녀석의 언행이 맘에 걸려 아일 나무라고 싶었지만 이내 그만둔다. 어쩌면 딸아이 역시 요즘 부쩍 늙어 보이는 제 아버지의 모습에 속상했는지도 모른다. 바깥의 소요에 잠이 깬 남편이 텐트 밖으로 나와 우두커니 앉아 있다. 꼭 잘못을 저지른 아이 같은 얼굴이다.
물솥을 올려놓고 점심 준비를 한다. 얇게 민 칼국수를 삶아 찬물에 건지고 , 채 썬 표고와 애호박 꾸미를 만든후 더운 장국에 국수를 말았더니 그인 맛나게 한 그릇을 비운다. 그새 비가 멎고 비껴든 햇살이 마음의 풍경들을 일시에 바꿔놓는다. 문득 지갑을 챙겨들며 경동시장엘 가보자고 남편에게 말해 본다. 허투루 그냥 말해 봤을 뿐인데 , 얼른 옷을 입고 따라나선다. 이 또한 뜻밖이다. 예전처럼 “ 남자가 짭질찮게 시장엔 뭣 하러 줄래줄래 따라가냐 “ 며 퉁명스레 거절하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복작대는 시장 속으로 섞여들였다. 인파에 묻혀 한참을 걷다 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그인 저만치서 민물고기를 파는 곳의 수족관에 정신이 팔려 있다. 아마도 몇 주째 못 간 낚시터 생각을 하는 것이려니 짐작한다. 이번에는 다슬기 파는 노점상 앞에 그이가 다가가 앉는다. 대접에 든 것은 5,000원이고 작은 보시기에 담은 것은 3,000 원이다. 주머니에서 1, 000 원짜리 셋을 꺼내서 남편은 작은 그릇의 다슬기를 산다. 기껏 가라앉았던 심사가 다시 또 얽힌다. “ 예까지 와서 겨우 고까짓 걸 사느냐 “ 고 마구 소릴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참는다. 오늘은 종일 이상한 날이다. 거실의 텐트에서부터 계속 주파수가 맞질 않더니 왼종일 헷갈린 채 날이 저문다.
돌아와 아욱에다 들깨를 갈아 넣고 다슬기탕을 끓였다. 물론 그이가 삶은 다슬기 속을 바늘로 파내어 주었고 , 탕이 맛있다며 큰대접 하나를 거든히 비웠다. 그러고선 늦도록 주말명화를 보는가 싶더니 방마다 한 바퀴 돌아본후 천연스레 혼자 텐트 속에 들어가 눕는다. 늘 그래 왔던듯 아무렇지도 않게.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낮보다 기분이 더 어수선했다. 남편이 잠든 거실의 텐트는 내게 너무 먼 섬 같아 밤새 선잠을 잔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아득한 작은 섬 , 물길 저어 가 닿을 수 없는 가뭇한 점 하나가 쓸쓸한 추상으로 망막에 가득하다.
남편에 대해서, 아니 사람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안다고 믿었을까 행위는 물론 그의 마음은 천 길 심연이면서도 어렵사리 짚이는 게 있다. 오늘 하루 그는 의외로 행복했을지도 모르는일 , 내 눈에는 잠시 처량맞게 보였어도 어쩌면 남편의 천막잠이야말로 세상 누구도 맛보지 못한 , 아니 그 자신마저도 경험하지 못한 “ 자기해방 “ 은 아니였을까 .
사람은 때로 엉뚱한 꿈을 꾼다. 궤도를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섬에 가고 싶어진다. 잠시 은자 되기를 원했을 남편의 “ 푸른텐트 “ , 그것은 나 역시 얼마나 오래 동경해 온 하나의 섬인가. 이 밤, 내 집 마루의 푸른 텐트는 그 홀로 아득한 수평선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