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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초기교단사 제3권 신룡벌 도덕공동체 터전의 확립. (저자; 박용덕 교무)
(2003년 2월 7일 원불교출판사 발행)
제3편 불법연구회 창립과 발전 - Ⅰ無産者를 위하여
1,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가. 익산군 솝리
나. 이리 보광사 창립총회
다. 만덕산(萬德山) 수양(修養)
불법연구회 창립총회(1924. 6.1)가 끝난 며칠 뒤, 소태산 박중빈 총재는 만덕산에 들어갔다.
1년 전 겨울에 석달간 머물렀던8) 좌포 김 참봉의 산제당 만덕암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8) 소태산은 임술년 섣달그믐(1923.2.15)에 만덕산에 와 석달 남짓 머물렀다가
3월경에 다시 변산 봉래정사로 돌아갔다. ]
그러자 바로(6.7) 좌포리 김 도사9)의 부인 풍천 노씨가 열한살난 손자를 데리고 찾아왔다.
[9) 도사(都事); 조선시대의 종5품 벼슬. 지방관리의 불법을 규찰하고 科試를 맡아 봄.]
그는 김 참봉10)의 당숙모가 되며 소태산 총재의 연원으로 입문,
법명을 노덕송옥盧德頌玉이라 하였다.11)
예순다섯된 할머니가 집안의 산제당을 허위단심
종가집의 산제당 생불님을 친견하러 온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0) 김참봉; 만덕산 좌포리 김해 김씨 안경공파 종가 김승지의 아들.
김참봉이라 불렸다. 본명 宣泰. 법명 精進.
좌포를 떠나 전주 이사로 이주. 익산지부장을 지내고
두 딸 조현과 대현을 전무출신시킨다.]
[11) 노덕송옥; 풍천 盧씨 基壽의 딸. 金鍾鳴의 처.
노덕송옥은 哲宗 庾申(1860)九月二十七日生이며,
원명부(여)에 62번, 시창9년 오월초닷새날(양 6.7)로 입문하고
칠월열사흘날에 입회되어 있다.]
대포 만드는 기술 배우러
노(盧)씨는 장래 집안의 대들보인 열한살 난 맏손자를 데리고
전주 관왕묘의 이름 난 관상가에게 관상을 본 일이 있었다.
관양묘는 전주 동남방 남고산성 계곡 깊숙이 열 가구 남짓한 마을 대성리에 있는 사당으로
해마다 정월이 되면 점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풍천 노씨는 전주 관왕묘에서 손자의 관상을 본 이후로 큰 근심거리가 생겼다.
집안의 대를 이을 맏손자 榮灝(大山金大擧)가 30대에 큰 부자가 되나 명이 짧다는 것이었다.12)
[12) 이영훈 구술자료]
노씨는 늘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단명보를 면하는 비방을 딱 한 가지뿐,
큰스님의 상좌로 들어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마침 큰집 종부(宗婦 ; 이현공 李玄空)가 경성에서 생불님을 만나고13)
그를 기연으로 만덕산 산제당에 모시게 되었다는
귀에 솔깃한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진작부터 무시로 출입하는 비단장수 최씨가
거듭하여 생불님을 뵈러 가자고 권하여 손자까지 데리고 나섰다.
[13) 이현공 李玄空;
김참봉의 아내 이씨는 서울 계동에 집을 얻어
경기고에 다니는 외동아들 영규와 둘째딸 숙현의 학교 뒷바라지를 하였다.
숙현(영애)는 서울에서 국민학교와 진명여중을 다녔다.(김숙현 구술자료) ]
노덕송옥이 만덕산 산제당에서 소태산 총재의 제자된 날은 시창9년 음력 오월 초닷샛날(양 6.7),
이어서 행상을 다니는 전주 사람 정삼보화와 그의 딸 조순환,
그리고 전주 사는 정해인각이 최도화의 연원으로 입문하였다.14)
[14) 원명부에 보면,
조순환은 63번째, 정해인각은 64번째, 정삼보화는 65번째
입문 날짜가 같은 오월 스무날자로 등록되어 있다.]
좌포리 김도사댁 손자 영호의 발심 동기는 이러하다.
비단장수가 노상 드나들며 생불님을 뵈러가자고 하자 영호가 궁금해 물었다.
“아지마씨, 생불님은 어떤 분잉겨?”
“부처님은 천만 사람들이 바라는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어른이제”
이 말에 구미가 솔깃하여 영호가 다시 물었다.
“그라요? 그럼 지 소원도 들어주겠네유?”
“들어주다마다!”
“지는요. 다른 것보다도 이 세상이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유”
영호는 우리 조선이 일본한테 전쟁에 져서 이렇게 핍박받고 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만일 싸우는 나라가 있으면 싸우지 못하도록
쾅하고 쏠 대포를 만들었으면 써겠어유”
그러자 비단장수가 깜짝 반가워하면서 영호 손을 잡았다.
“아이고, 어떻게 우리 생불님께서 대포 만드시는 줄 알았다냐”
너무나 반갑게 영호 손을 잡기에 영호는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이후 영호의 이 말이 너무나 유명하여
불법연구회에서는 영호를 보면 ‘김 대포’로 통하였다.
열한 살 난 영호는 머슴의 등에 업혀 만덕산 산제당에 갔다.
산제당에 당도하니 키가 자그마하고 잘 생긴 스님이 마중을 나왔는데
영호는 어찌 할 바를 몰라 쩔쩔 맸다.
그 스님이 동네에 왔을 때 영호가 ‘중중 까까중’하고 따라다니며 놀려 준 일이 있었다
. 그 스님이 생불님의 상수 제자였던 정산이었던 것이다.
한 달 남짓 산중에 있는 동안 영호는 밤이 되면 걱정이 되었다.
한번은 영호가 뒷간에 갔다가 호랑이 우는 소리에 놀라
나오던 똥이 쑥 들어가도 오도 가도 못하고 겁에 떨었던 일이 있었다.15)
[15) 김대거 구술자료]
영호가 산제당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른들의 선 나는 모습,
그리고 생불님의 삭발치는 모습 등, 이 모두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때의 개인 체험이 영호(대산김대거)의 앞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관촌 태안 이씨와의 성혼이며 좌포교당과 관촌교당 설립의 연기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동(東)쪽에 진동한 불꽃
불법연구회 총재가 회상 창립후 종적을 감춰버리자,
각지에서 그를 찾는 회원들이 수소문하여 첩첩 산중 만덕산에 찾아왔다.
동년 7월 21일16)에는 경성에서 여자 손님 둘이
멀고 먼 험한 길을 허위단심 갖은 고생을 해가며 만덕산의 생불 선생을 찾아왔다.
그들은 지난 4월 소태산이 상경시에 당주동에서 만난 궁가(宮家)의 여인이었다.
[16) 이동진화 입회 일자. 원명부 38번을 보면 소태산 상경중인
음력 3월1일에 입문되었고, 만덕산 수양중인 六月 二十日로 입회되어 있다.
음력 六月 二十日은 양력 7월21일.]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이 둘이 있는 것이요.
하나는 바른 스승을 만나서 부처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대도를 성취한 다음에 창생을 건지는 일인 것이요”17)
[17) ①대종경 인도품 6. ②대종경선외록 사제제우장 19.]
석
두거사가 변산에서 내려와 첫번째 상경시
만난 사람들 중의 하나인 이경수李慶洙라는 여인은
전라도 생불님의 그 엄숙하고 정중한 법문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에 전라도 생불님이라는 청년을 대하고
이경수는 궁가의 지체로서 예배하지 아니하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소태산은 그를 한 번 보고 비록 궁가의 소실의 신분에 있으나
인물이 비범함을 알아보고 의미 깊은 말을 하여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녀는 전라도 생불님이라는 사람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세상에 나서 처음 들어보는 속 깊은 말이었다.
이경수는 화초 가꾸기가 유일한 낙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꽂꽂이를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내 사는 것이 꽃병에 든 꽃나무와 무어가 다른가.
언젠가 시들면 버림받고 말 꽃나무 신세”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 갈수록 건강은 악화되어 두통과 위장병에 시달렸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계룡산에 생남 불공도 다녀보았지만 모두가 허사.
어디고 낙을 붙이고 살 데가 없는 고적한 소실살이였다.
한평생을 이렇게 살 수가 없었다.
뒤늦게야 그녀는 어떤 절박감같은 충동으로 전라도 생불님을 찾았다.
계동 성성원의 집을 찾아가니 도정궁의 침모 박사시화는
이미 생불님 있는 곳으로 공부하러 떠났다고 한다.
그는 침모 김삼매화와 같이 생불님을 수소문하여 부랴부랴 뒤쫓았다.
기차를 타고 이리, 이리 역에서 다시 성성원의 시가가 있는 임실 잣나무집을 찾았다.
길 안내를 잘못 만나 진안 마이산의 이갑룡을 찾아갔다.
정신을 차려 무더위 속에도 남치마 옥색 저고리에 자주 옷고름 단정한 차림의 그녀가
섬진강 상류 오원천 물길을 따라, 좌포리 김 승지댁을 찾아갔다.
경성 계동 이현공의 본가가 좌포리 김승지댁이다.
이렇게 하여 만덕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마에서 내려 그녀는 침모를 앞세우고 산길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골짜기를 지나면 또 골짜기여서
저곳이 이곳같고 이곳이 저곳같아서
처음 가는 사람으로서는 찾아가기 곤란할 뿐 아니라,
돌자갈 좁은 길이 풀에 묻혀’18)
[ 18) 전삼삼의 만덕산 안내 감상담<남의 지도자되기에 급하지 말고
그 자격 먼저 준비하라>(회보 23호)의 한 구절 인용]
길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경험 없는 산길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어쩔 바를 모르는데
날은 어두워오고 갑자기 으슬으슬 몸이 떨려 왔다.
이때였다. 뇌성 벽력같은 큰 소리가 산 위에서 울려왔다.
“어여 정신 차려 이리 올라오소!”
소리나는 쪽을 향하여 허위허위 올라가니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생불 선생님이 아닌가.
생불 도인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그네들은 반가움과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동쪽 하늘에서 번쩍번쩍 꽃불(번개불)이 피더니
뇌성이 진동을 하고 광풍이 휘몰아치며 거세게 비가 쏟아졌다.19)
[19) 권동화 구술자료]
이경수의 만덕산 입산 일자는《원명부》의 입회 일자 기록을 미루어 본다면
음력 유월스무날, 양력으로는 7월21일, 법명은 ‘동진화로 되어 있다.20)
동쪽 하늘에 진동한 꽃, 이러한 글 뜻이 당시 상황과 묘하게 일치됨을 헤아릴 수 있다.
[ 20) 갑자년 만덕산 선을 나고 동진화東震華는 소태산을 수행하여
전주 완산동 전음광의 집에 유숙하였다.
여기서 소태산은 전음광의 처 권씨에게 ‘動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동진화東震華’와 ‘동화’는 이듬해 총부 을축하선에 함께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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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화[ 李東震華 ] <원불교대사전>
출생 - 사망 1893 ~ 1968
본명은 경수(慶洙). 법호는 육타원(六陀圓). 법훈은 종사.
1893년 5월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부친 화실(和實)과 모친 김(金)씨의
2남 3녀 중 3녀로 출생했다. 천성이 인자 고결 침착 과묵했고, 일찍 부친을 사별했다.
18세에 이왕가(李王家) 종친 댁으로 출가(出嫁)하여 상당한 부귀를 누렸으나,
세속생활의 재미보다는 종교적 수양생활을 마음 깊이 동경했다.
1924년(원기9) 봄, 서울 당주동 성성원(成聖願)의 집에서 박사시화(朴四時華)의 소개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성불제중이 가장 큰 일이라는 말씀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 해 여름 침모 김삼매화(金三昧華)를 대동하고 만덕산에서 초선(初禪)을 열고 있던
소태산을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동진화(東震華)란 법명을 받고 초선에 참석했다.
이때부터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1925년(원기10) 4월 가산을 정리하고 총부로 와서
전무출신을 시작했다. 이때 교단에 희사한 서울 창신동 가옥은
서울교당의 시초가 되었다. 1931년(원기16) 여자수위단 시보단을 조직할 때
건방(乾方) 단원으로 내정되었고, 뒤에 정식으로 수위단이 발족할 때
이방(离方) 단원이 되어 평생을 수위단원으로 봉직했다.
많은 이들이 관세음보살로 숭배했으며, 여자계의 대표적 수행자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말없는 가운데 교단 구석구석에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베풀었다.
광복이 되자 전재동포구호사업을 후원하면서 서울지방 교세 발전에 전력했다.
춘천에 출장교화를 하는 한편 당시 개성교당의 이경순과 함께
북한교화 개척의 계획도 세웠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는데
다른 동지들을 피난하도록 도와주면서 점령치하의 서울교당을 지켰다.
서울 수복 후에는 금산요양원장의 책임을 맡아 교단 요양사업의 기반수립에 노력했다.
금산요양원은 뒤에 동화병원ㆍ원광한의원 등으로 개편되었고 교단 병원사업의 시초가 되었다.
1955년(원기40)부터는 총부교감ㆍ교령으로 금강원(金剛院)에 주재하면서
인욕수행과 무시선(無時禪)의 실천에 정진했다.
이때부터 자비보살이요, 교단의 어머니로서 교역자들을 두루 보살폈다.
소태산에 대한 신성이 투철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이가 아래인 정산종사에 대해서도 신성을 다해 받들었다.
이동진화는 이완철과 함께 건강이 좋지 못했던 정산을 보필하는
교단 남녀계의 두 기둥이었다.
대산종사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나이였으나
소태산과 정산을 받들 때처럼 신성을 다해 보필하고 받들었다.
1968년(원기53) 1월 어느 날, 좌우동지 후진들에게
“진리는 무상하여 만물은 쉬지 않고 변화한다.
영원무궁한 일원(一圓)의 진리를 잘 배우고 닦아서 고락을 초월하자”는
최후 법문을 남기고, 1월 18일 75세의 세연(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1977년(원기62) 출가위의 법위와 종사의 법훈이 추서되었다.
갑자(甲子)년 만덕산 수양
갑자년 여름 만덕산에 왔던 제자는 김광선 ․ 김기천 ․ 송규 ․ 오창건 등
영광의 단원들과 전삼삼 ․ 전음광 모자, 노덕송옥 ․ 김대거 할머니와 손자,
전주 신도 이청춘, 경성 제자 박사시화 ․ 이동진화 ․ 김삼매화 등 12명이라 한다.21)
[21) 김대거 구술자료]
이들 몇몇 제자들과 소탈한 형식의 시간을 가졌던 소태산의 이 만덕암 수양을 두고
대산은 ‘만덕산 초선 萬德山 初禪’이라 명명하고22)
그 유적지로 올라가는 산자락에 석비(石碑)를 세웠다.23)
[22) 제3대 종법사 대산의 법어]
[23) 중앙문화원(원장 이공전)에서 ‘교단 중요 사적지 사업’의 세 번째 사업으로
1985년 8월19일에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상달 마을에 기념비를 세웠다.
여기에서 만덕산농원까지는 1km, 만덕암까지는 2km이다.
비형태는 우리 고유 비석 형태인 거북 좌대에 용을 새긴 갓을 씌웠으며(龜趺龍冠),
비 높이는 좌대부터 4m이다.
석비 전면에 ‘萬德山初禪地’이라 새기고 뒷면에 이렇게 새겼다.
‘여기에서 西로 약 二千步 만덕산 中腹에 새회상의 초선지 산제당터가 있다.
시창7년 임술 구월 소태산대종사 부안 봉래산에서 정산종사를 이 산에 보내시어
鎭安傳燈의 기연을 지으시고,
그해 섣달 몸소 來山하시어 석달 동안 숙연들을 결속,
새 회상 창립의 주역으로 세우시었다.
해를 넘겨 시창9년 갑자 사월 새 회상을 익산에서 공개하시고,
5월초 이 산에 다시 오시어 열두 제자 데리시고 처음으로 한달 선 나신 후
이듬해 을축 삼월 총부에서 훈련법을 제정 선포하시니,
이에 진안 만덕이 새 회상의 역대 사적지가 되었다.
萬修萬練萬德이여 제생의세의 연원이로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갑자년 만덕산 수양이 교단이 공식적으로 진행한 정기훈련으로서의 초선初禪은 아니라는 점이다.
제1회 정기훈련은 시창10년 음력 오월초엿샛날부터 팔월초엿샛날까지
석달간 난 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24) 이를 통칭 ‘을축 하선 乙丑夏禪’이라 한다.
[24) 창건사 제17장 훈련법의 실시. 시창10년항]
불법연구회에서 보통 ‘선 난다’는 표현은 넓은 의미의 ‘훈련’ ‘공부’ ‘수양’을 뜻한다.
아무튼 소태산 총재는 갑자년 회상 창립 후 바로(음력 오월초순에)
만덕산에 입산 수양한 것은 사실이며
아마도 이곳에서 장차 훈련법 시행을 구상하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만덕암 수양은 장차 정기훈련을 시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적인 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만덕산 여름 안거安倨에서 소태산과 그의 제자들은 식량 문제로 몹시 곤란을 겪었다.
최도화가 화주로 나서 식량을 구해
그의 아들 조갑종이 쌀가마니를 지고 오기도 하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때의 곤궁함을 함께 선을 났던 박사시화(서울 제자)는 두고두고 잊지 못하였다.
‘고산 험로高山險路 깊은 산중이라 모든 것이 궁색하여
항상 찬 없는 공양을 올리게 되므로 그것이 어떻게 포한이 되었든지,
만덕산에서 나오면서 그만 설움이 터져서 수십 리 길에 내쳐 울면서,
이번 길에는 우리 선생님 시봉 잘 할 훌륭한 동지를 만나게 하여 주사이다’25)하고
내내 기원하여 마지아니하였다고 한다.
[25) 이공주, <본회 3대여걸을 소개함>; 회보 27호, 30쪽]
새 회상을 창립하였다 하여 소태산은 바로 거창하게 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소태산 총재는 큰 일을 해내거나 한 매듭을 푼 뒤는 반드시 크게 멈추는 기간을 가졌다.
기미년 간척 사업(吉龍防堰組合)과 이백일 기도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결연히 변산에 들어가 만 4년간 수양한 것이라든지,
또 만 8년간의 준비 끝에 회상(佛法硏究會)을 창립한 뒤
바로 만덕산에 들어와 한 철 수양한 점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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