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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금 액 |
비 고 |
수 입 (찬조금) |
480,000원 |
참석비 : 230,000원 (찬조) 심재익고문님 : 200,000 최연홍고문님 : 50,000 |
지 출 |
449,900원 |
식사(더덕구이) 434,000 생수 등 15,900 |
잔 액 |
30,100원 |
※ 참석자(24명)
길성균 김경현 김돈회 김봉식 김용일 김한수 남영락 박재명 박종우 서종호 송춘종
심재익 이조진 양봉익 이상풍 이창주 정운채 정지현 조동회 조명근 최금식 최연홍
홍현서 황하영
歷史 遺跡 資料
- 원구단 : 1897년 10월 대한제국 및 황제즉위 선포식을한 역사적인 장소 (고종황제 즉위식) 대한제국의 상징
- 1895년,을미사변(乙未事變)(명성황후가 시해된사건) 이후 국민들의 반일감정 악화와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순종)를 앞세워 1896년(건양 1) 2월 11일에 조선의 왕궁을 떠나 俄館播遷(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하여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국사를하시던중 청일전쟁과 아관파천격고 다시 덕수궁(경운궁으로 거처를옮긴후 청나라의 연호대신 독자적으로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임금의 칭호도 제후국 임금의 칭호대신 황제로 격상하 는稱帝建元을 단행하게된다
즉 이웃나라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맺고자(청국은 천자로 일본은 천왕으로 개칭)환궁과 동시에 제후국의칭호(조선의 국왕)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시면서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역사적인 장소)
당초 원구단은 천신과 지신에게 제를지내고 국왕의 신위를 모시던 웅장한 건물이었으나 원구단의 몸체를 비롯한 건물은 일제에 의해 헐어버리고 철도호텔를 짓고 주변에는 반도호텔, 롯데호텔, 롯대백화점, 프레지던트호텔, 웨스톤조선호텔,들어서고 지금은 황궁우와 3개의 석고만 남아 구한말 격변의 애환을 대변해주고 있다
-덕수궁(德壽宮):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3,069m2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뒤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1]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태종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 장(懿敬世子 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의경세자는 20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수빈 한씨(인수대비)가 출궁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 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월산대군의 아우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성종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
월산대군이 사망한 지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의주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음력 10월 한성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지로 사용하였다.
광해군 시대 광해군은 1611년 11월 15일(광해군 3년 음력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다. 원래는 흥경궁(興慶宮)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광해군이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라고 하였으므로, 경운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광해군은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음력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 하게 된 것은 1615년 음력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음력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仁祖)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찾아뵙고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음력 7월에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인조 이후 그 후 영조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 60년이 3번, 곧 180년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월 21일(음력 2월 1일) 세손(후의 정조)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이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가 정무를 보던 법궁(法宮)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에 불이 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후 중건이 시도되었는데, 당시 국가의 정치 상황이나 재정 여건상 궁궐 권역과 건물 규모에 맞지 않은 축소가 있었다.
1907년 12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일본의 강압으로 퇴위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수”(德壽)라고 하였기 때문에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이름에 대한 논란2011년 4월 한 시민에 의해 "덕수궁의 본래 이름인 경운궁 명칭을 회복해야 한다."라는 민원이 제기돼 시작된 것으로 학계 일부에서도 덕수궁이 일제 침략의 잔재이므로 경운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주최한 공청회 등에서 "일제 잔재라는 근거가 없다."라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돼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문화재청은 2011년 12월 14일 오후 대한민국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회의에서 덕수궁 명칭 변경 문제를 심의한 결과 경운궁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은 만큼 명칭 변경 안건 심의 자체를 '보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 문화재위원회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덕수궁에 대한 광범위한 학술 연구 등을 거쳐 추후에 명칭 변경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대한제국 시대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자 이 궁은 다시 궁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해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되었다. 고종이 이곳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
는 주위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운 곳이라는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1981년 발굴조사에 의하여 러시아 공사관의 종탑 밑에는 밀실(密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것은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이날부터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1900년(광무 4)에는 담장 공사가 완성되었고 선원전에 불이 났으며, 봄에는 발전소의 설비가 끝나 궁내에 전기의 공급이 시작되었다.
또 이즈음에는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함녕전·선원전·경효전(景孝殿)·흥덕전(興德殿)·사성당·준명당(浚明堂)·경운당(景雲堂)·덕경당(德慶堂)·함유재(咸有齋)·청목재(淸穆齋)·보문각(普文閣)·문화각(文華閣)·수옥헌(漱玉軒)·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인화문(仁化門 : 正門)·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1901년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가설·개통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법전(法殿)의 공역을 시작하였다. 이 법전을 중화전이라 이름 지었다가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0월에 완공되고 중화문도 완공되었으며 관명전도 영건되었다. 이 당시의 중화전은 2층 건물로 규모가 장대하였으며 주위에 행각(行閣)이 있었다.
그러나 1904년 2월에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던 중 실수로 불이 나자 거센 바람을 타고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신주(神主)를 모셨던 경효전과 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도 불이 났으며, 화재를 면한 전각으로는 준명당·수옥헌·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 등이 있었다.
고종은 그날로 피하고 전각에 대한 중건을 명하여 우선 즉조당·석어당·경효전·흠경각(欽敬閣)을 응급 복구하였다. 이 무렵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10월 21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되었으므로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
중화전은 그해 1월부터 시작하여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이는 비서승(秘書丞)이며 풍수(風水)의 대가인 유시만(柳時滿)이 “국조연창(國祚延昌)하려면 ‘대안’을 ‘대한’으로 고쳐야 좋겠다.”라고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한문은 원래 높은 장대석의 기단이 있고 장엄한 돌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스팔트 바닥에 묻혀 있다. 1907년 7월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하고 태자인 순종(純宗)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개원(改元)하고 개원과 더불어 태황제궁(太皇帝宮)을 덕수궁이라 함으로써 경운궁은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순종은 그해 9월 17일 즉조당에 이어(移御)하였다가 11월 13일 창덕궁으로 이어 하였다. 태황제는 양위 후 일시 수옥헌으로 옮겼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다시 함녕전에 환어하여 1919년 1월 서거할 때까지 이곳에서 주로 거처하였다. 1910년(융희 4)에는 석조전(石造殿)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으나 태황제인 고종이 승하하게 되자 덕수궁도 궁궐로서의 수명이 끝나고 일제 강점기에는 빈 궁궐로 남아 있다가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되었다.
독립 이후 한국전쟁 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당시 석조전이 불타서 그 후 복구하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은 그
동안 담장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목책에서 사괴석(四塊石)담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정문인 대한문도 여러 차례 뒤쪽으로 밀려서 성기(盛期)에 즐비하던 전각들은 상당수 철거됐지만, 세종대왕의 동상 등 새로운 시설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건물 및 유적[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덕수궁은 특히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궁궐로서 이채롭다.
대한문 대한문(大漢門)의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로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다.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금천교두 갈래로 흐르다 합쳐지는 정릉동천의 한 물줄기가 정동에서 발원하여 덕수궁을 관통하는데, 자연하천이던 그것의 흐름을 약간 바꾸어 인공으로 명당수를 흐르게 한 뒤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중화문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원래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헐려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고,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다.
석조전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기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5]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
(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서 지어졌는데, 지층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1층 황제의 접견실, 2층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의 정원으로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같은 기간에 서양식 정원과 분수대가 세워졌다. [6] 석조전은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경복궁 자리로 이전하였다.
석조전 서관은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활용하다가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옮기고 2014년 복원공사가 끝나고 10월 13일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준명당 준명당(浚眀堂)은 1904년의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즉조당 즉조당(卽祚堂)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덕수궁의 침전이다.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년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 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석어당(昔御堂)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이다.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년) 창건했었다.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덕홍전 덕홍전(德弘殿)은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함녕전 서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용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 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함녕전(咸寧殿)은 광무 1년(1897년)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대형 건물로,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 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정관헌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인 건물이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고 예전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통하던 문이 있었다고 한다.
2004년 2월 6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으나, 덕수궁(사적 제124호) 사적 지정 고시(문교부 고시 제161호, 1962. 7. 25.)에 명기된 건물이 등록되어 문화재보호법 제47조제1항에 저촉됨(덕수궁 사적 지정범위와 중복)에 따라 2008년 6월 24일 문화재 등록이 말소되었다.
광명문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문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는 흥천사 범종, 자격루의 일부, 화차가 전시되어 있다.
인화문 인화문(仁化門)은 본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는데 대안문(大安門)(현재의 대한문)주변으로 도로가 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고 그 후 1905년의 화재로 타버렸다. 그 자리에 건극문(建極門)이 새로 세워졌었다. 대안문의 현판은 이왕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극문도 없는 상황이다.
양이재 정관헌 너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옆에는 예전에 황실 교육기관으로 쓰이던 양이재가 있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중명전 평성문 밖에는 이 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중명전(重明殿)이 있는데,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
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건물이 개인 소유가 되면서 사무실 등으로 이용되면서 심하게 훼손되었었는데, 2010년 복원 공사를 마쳤다.
-, 경희궁 :경희궁(慶熙宮)사적 제271호. 5대궁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인조, 효종, 철종 등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지만 기간이 짧았고 거의 빈 궁궐로 있었다. 원래 ‘경덕궁’이었는데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BR>〈경희궁지〉에 경희궁의 규모와 배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둘레는 6,600자였으며 흥화문, 흥원문, 개양문, 숭의문, 무덕문의 5개 문을 두었다. 숭정전은 신하들의 조회를 받던 곳이며 뒤쪽에는 자정전은 임금이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BR>1908년에 일제의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조선왕조의 5대 궁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88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2002년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을 복원하는 1차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Daum백과] 경희궁 – 다음백과, Daum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경희궁 :경희궁(慶熙宮)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지 7만 2천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1]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參考事項>
朝鮮의 5代 宮闕
景福宮 (경복궁)=光化門 (광화문) 昌德宮 (창덕궁)=敦化門 (돈화문)
昌慶宮 (창경궁)=弘化문 (홍화문) 德壽宮 (덕수궁)=仁化門 (인화문)
慶熙宮 (경희궁)=興化門 (흥화문)
-,옛 러시아 공사관(일본을 피해 궁궐을 나온 임금),
일본을 피해 궁궐을 나온 임금, 옛 러시아 공사관담 밖으로 비죽 솟은 하얀색의 건물은 집처럼 보이지 않아요. 이 건물은 바로 옛 러시아 공사관의 탑이랍니다. 공사관의 다른 건물은 6·25 전쟁 때 대부분 사라졌어요. 하지만 옛 러시아 공
사관은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요.궁궐을 빠져나온 가마
1896년 2월 11일 이른 아침, 고종과 왕세자는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두 대의 가마에 나누어 탔어요. 가마 앞쪽에는 상궁이 한 명씩 올라타서 뒤쪽에 앉은 임금과 왕세자를 가려 주었지요.가마는 곧 궁궐 문 앞에 다다랐어요. 경비병이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준다면 고종은 감옥 같은
궁궐을 벗어날 수 있어요. 하지만 만약 가마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탈출 계획이 탄로 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요. 가마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덜덜 떨었습니다.고종과 함께 가마에 탄 엄 상궁이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나지막하게 말했어요.“염려 놓으세요. 제 가마는 늘 군말 없이 통과시켰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을 것이옵니다.”엄 상궁의 말대로 경비병은 아무 말 없이 궐문
을 열어 주었어요. 엄 상궁이 일주일 전부터 이 문을 지나다니며 경비병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 주었기 때문이에요. 가마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궁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 군대는 가마가 궐문을 빠져나오자 재빨리 둘러싸 보호했어요. 가마는 러시아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습니다.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이 사건
을 ‘아관 파천’이라고 부릅니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가리키는 말이고, 파천은 임금이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것을 말하지요. 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피난하는 일은 전쟁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런데도 고종은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어요. 그뿐 아니라 계속 그곳에
머물며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나랏일을 보았지요. 넓은 궁궐을 두고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고종의 아관 파천은 넉 달 전, 명성 황후가 일본인 손에 목숨을 잃은 것과 관련이 있어요아관 파천을 이끈 엄 상궁
엄 상궁은 러시아와 친한 관리들과 손을 잡고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켰어요.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어머니로 뒤에 황귀비가 되었고, 진명 여학교, 명신 여학교 등을 세워 여성 교육에 힘썼어요.
왕비의 죽음과 임금의 공포심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던 명성 황후는 권력을 튼튼히 하려고 청나라와 가깝게 지냈어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청나라 군대를 불러 도움을 받았지요. 그래서 청나라는 조금씩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조선도 청나라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일본은 조선을 청나라에 빼앗길까 봐 조바심을 내다가 청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어요.
일본은 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받아 냈고 중국 땅이던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어요.믿었던 청나라가 전쟁에서 패하자 명성 황후는 화들짝 놀랐습니다.‘청나라보다 힘이 센 나라, 일본과 싸워 이길 만한 나라가 어디일까? 그래, 러시아!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야 일본을 막아 낼 수 있어.’명성 황후는 러시아 외교관을 자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던
조선 사람들을 관리에 앉혔어요.명성 황후의 마음이 러시아 쪽으로 기울자 일본은 크게 당황했지요. 전쟁까지 치르며 청나라를 물리쳤는데 또다시 강한 상대가 나타났으니까요.이즈음 일본은 ‘미우라 고로’라는 새 외교관을 조선에 보냈는데, 미우라는 부임하자마자 무서운 음모를 꾸
몄어요. 일본에 방해가 되는 명성 황후를 없애는 것이었지요.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미우라는 일본 불량배들을 궁궐에 잠입시켜 명성 황후를 참혹하게 살해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에요.명성 황후를 없앤 일본은 친일파 관리들을 내세워 조선 조정을 마음대로 다루었어요. 일본 군대를 궁궐에 보내 임금을 감시하
고 정치나 사회 제도를 일본에 편리한 쪽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특히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게 하는 ‘단발령’을 강요해 백성들의 반발을 샀어요. 그러자 일본은 고종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요구했고 결국 고종은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지요.일본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지자 고종은 공포에
떨었어요. 명성 황후처럼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지는 않을까,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지는 않을까 늘 불안했어요. 궁에서 만든 음식은 독이 들었을지 모른다며 손도 대지 않고, 삶은 달걀이나 깡통에 든 우유만 먹었지요. 밤에는 권총을 가진 서양인을 옆방에 두고도 여전히 마음을 놓
을 수가 없었습니다.고종은 위험한 궁궐을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러시아 공사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어요.“중전을 해친 무리들이 나를 위협하고 있소. 단발령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운 틈을 타 나와 내 아들을 죽일지도 모르오. 우리가 비밀리에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테
니 보호해 주기 바라오.”고종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도 선뜻 공사관을 빌려 주겠다고 나섰어요. 한 나라의 임금을 보호하는 것이 손해날 일은 아니었으니까요.러시아는 고종을 공사관에 머물게 하면서 많은 이익을 챙겼어요. 나무를 베어다 팔고, 광산을 개발하고, 고래잡이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런 혜택은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주어졌어요. 미국은 경인선 철도 사업권을 가져갔고, 러시아와 가깝던 프랑스는 경의선 철도 사업권을 얻어 갔습니다.
을미사변을 목격한 러시아 사람 사바친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친은 1883년부터 러일 전쟁 때까지 13년 동안 조선에 머물렀어요. 그동안 러시아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중명전 등 여러 서양식 건물을 설계했지요. 특히 사바친은 을미사변을 직접 목격하고 ‘사바친 보고서’를 남기기도 했어요. 사바친 보고서에는 총칼을 든 일본인이 궁궐에 침입해 궁녀들을 끌고 간 일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요.
황제의 나라를 선포하다
임금의 공사관 생활이 길어질수록 서양 강대국들은 조선에서 많은 것을 가져갔어요. 그러자 백성들은 고종에게 궁궐로 돌아오라고 요구했어요. 특히 독립 협회가 앞장서서 환궁(궁궐로 돌아옴)을 주장했어요.“임금님이 러시아 국기 밑에서 러시아 군사의 보호를 받으시면 다른 나라에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빨리 궁궐로 돌아오십시오.”고종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다가 1년 만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임금이 궁궐로 돌아오자 신하들은 황제의 나라가 되자는 상소를 올렸어요.황제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어요. 그동안 조
선은 중국을 섬기는 왕의 나라였기 때문에 황제라는 이름을 쓰지 못했어요. 그러나 바다 건너에 있던 일본은 중국의 간섭을 덜 받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왕을 ‘천황’이라고 불렀어요.신하들은 조선이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자주 독립 국가가 되었으니 왕을 황제로 높여 불러야 한다고 주장
했어요.“우리 나라는 자주적인 국가이니 마땅히 황제라고 불러야 합니다. 백성들이 모두 원하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옵소서.”고종도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였어요. 환구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황제 즉위식을 갖기로 했지요.1897년 10월 12일, 군사들이 경운궁부터 환구단까
지 길게 늘어섰어요. 백성의 집과 관아에는 전날 밤부터 환한 등불이 내걸렸고 태극기도 나부꼈습니다.고종은 황색 곤룡포를 갖춰 입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어요. 조선은 ‘대한 제국’이 되었고, 헌법인 ‘대한국 국제’가 선포되었지요.
대한 제국은 근대 국가로 가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마련했어요. 군대를 더 많이 만들어 신식 훈련을 시키고, 태극기를 사용하고, 처음으로 국가를 만들어 불렀어요. ‘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지금의 애국가와는 다른 국가였어요.또 농업, 공업, 상업과 같은 산업 발전에 관심을 갖고 유리 공장, 방직 공장 등을 지었고 학교도 세웠습니다.
궁궐에는 전기가 들어왔고 서울 거리에는 전차가 달렸어요. 서울, 평양, 인천 등 주요 도시에 전화가 놓이고 전국에 우체국이 생겨났지요. 또한 간도와 독도에 관리를 보내 백성을 보호하고 대한 제국의 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밝혔습니다.그러나 황제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화되면서
백성의 믿음을 얻지 못하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쳤어요. 게다가 주변 강대국들은 각자의 이익을 챙기기 바빴지요.러시아는 아관 파천이 끝났는데도 대한 제국의 군대와 재정(나라의 돈을 관리하는 일)을 멋대로 휘둘렀어요. 또 러시아 군대가 머물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요. 이런 움
직임 속에서 일본은 대한 제국을 확실히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어요. 일본은 청일 전쟁에 이어 러일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지요. 대한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어요.
중국은 세계의 중심?
예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어요. 이 생각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질서로 굳어졌고 주변의 나라들은 중국을 존중해야 했어요. 조선도 마찬가지여서 중국에 귀한 선물을 보내고, 해가 바뀔 때마다 달력을 받아왔어요. 새 왕이 등극(왕위에 오르는 일)하면 중국 황제에게 알리고 임명장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나 조선은 중국의 정치 간섭을 받지 않았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으로 발전시켰어요.
황제의 상징, 황색 동아시아에서 황색(노랑)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왕이라 해도 황색 옷을 입을 수 없었어요.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하면서 비로소 황색 곤룡포를 입었습니다.
러일 전쟁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받은 배상금으로 무기를 사고 군대의 힘을 키웠어요. 그러고는 서양 강대국인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지요. 고종이 재빨리 중립을 선포하며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마산, 제물포, 원산 등의 항구에 식량과 무기 창고를 세웠어요.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을 수 있었어요